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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요갱(楚腰䡖), 조선왕조실록에 16번이나 언급된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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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요갱(楚腰䡖), 조선왕조실록에 16번이나 언급된 기생

1. 초요갱, '기명'이 가진 의미 

조선에서 '황진이와 논개', 이 두 명의 기생보다 훨씬 더 유명한 기생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16번이나 기록을 남긴 화제의 기생 '초요갱'입니다.

초요갱은 조선 전기에 출중한 예능감과 미모, 뛰어난 재능까지 갖췄던 그야말로 전설적인 기생입니다.

그녀는 과연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평범하지 않은 특이한 그녀의 이름에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초(楚)'는 '초나라 초'입니다.

'요(腰)'는 바로 '허리 요'입니다.

'갱(䡖)'은 '움직이지 않을 갱'입니다.

'초요갱'이라는 이름의 핵심글자는 바로 '요'입니다.

앞 두 글자 '초요'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왕이 한 궁녀를 무척 총애했는데 그 궁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보고 반했다고 합니다.

이 일화로 '초요'가 미인을 뜻하는 단어로 전해졌고 기생 초요갱이 이를 예명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보면 기생들의 기명 및 향명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향명은 기생이 되기 전 이름이고 기명은 기생이 된 이후의 이름입니다.

예를 들어, 황진이의 향명은 황진, 기명은 명월(밝은 달)입니다.

외모적 특징에서 따오거나 혹은 의미를 담아서 '기명'을 짓곤 했습니다.

초요갱은 그 옛날 초나라 왕이 푹 빠졌다는 절세미인과 같이 잘록한 허리를 가진 아름답고 매력적인 기생이었던 것 것입니다.

2. 초요갱,  남편을 잃고 하루아침에 '관비'가 되다

전설의 기생 초요갱은 어떻게 기생이 되었을까요?

한양에서 양민의 딸로 살던 초요갱은 누군가의 첩으로 들어가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양민의 딸이어도 집안이 어려우면 돈 많은 양반가의 첩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초요갱은 첩이기는 했지만 남편과 함께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요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일이 일어납니다.

'역당(逆黨)의 첩(妾)이었기 때문에 본군(本郡)의 관비(官婢)로 정하였다'

<단종실록>

초요갱의 남편이 역모를 일으킨 '역당'이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역모를 일으킨 당사자와 남성들은 목숨을 잃었고, 여성은 노비로 전락했습니다.

초요갱은 남편을 잃고 살던 고을 관청의 노비가 된 것입니다. 

초요갱은 남편을 잃고 하루아침에 천민인 관청의 노비 즉 '관비'가 되고 맙니다.

양민이었던 초요갱의 신분이 한순간에 천민으로 추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초요갱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갑잡스레 모든 것을 잃어버린 초요갱은 현실감도 없고 그저 멍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노비로 천대받으면서 살 생각에 무섭고 막막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3. 초요갱, 특출 난 외모와 가무실력으로 기생으로 뽑히다

그런데 초요갱의 운명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관비가 된 초요갱에게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초요갱이 기생으로 뽑히게 된 것입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기생은 관비에서 뽑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노비들 사이에서 초요갱의 남다른 외모와 가무 실력이 돋보였을 것이었고 기생을 선발하는 관리의 눈에 초요갱이 눈에 띄어 기생으로 발탁된 것입니다.

그렇게 기생으로 초요갱의 운명은 바뀌게 됩니다.

기생은 기본적으로 각 고을 관청에 소속된 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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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의 술자리에 동원되었고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것이 기생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생은 백성들 사이에서 손가락질받고 천대받곤 했습니다.

기생은 '웃음을 판다, 술을 판다, 심지어 일부는 몸을 판다'라고 까지 수군대며 세간의 부정적인 인식으로 손가락질받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생으로 살아야 했던 초요갱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서글펐던 것은 기생으로서의 삶을 초요갱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초요갱은 기생이라는 새로운 운명에 수긍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4. 초요갱, 궁에서 '여악(女樂)'으로 무대에 서다

기생으로 살 게 된 초요갱은 인생이 뒤바뀔 수 있는 무대에 서게 됩니다.

한양 기생들은 일반적인 기생 일 외에 특별히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여악
여악

이처럼 왕실에서 잔치가 열릴 때 노래와 춤을 담당했던 것이 기생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궁에서 공연활동을 하는 기생을 여자 악인이라 하여  '여악'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바로 기생 초요갱이 여악으로 궁에서 열린 무대에 섰던 것입니다.

왕실 연회는 왕족은 물론 고관대작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만약 이곳에서 지체 높은 양반들의 눈에 띄는 경우 그 양반의 첩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양반이 돈을 내주거나 양반의 아이를 낳게 되는 경우, 천민에서 벗어날 수 도 있는 신분 상승의 기회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왕실 연회에 자주 설 수 있을 만큼의 수준 높은 춤과 노래실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생들은 힘들어도 악착같이 버티면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초요갱 역시 열심히 악무를 연습했을 것이고 왕실연회 무대에 섰을 것입니다.

이때 초요갱과 같은 왕실 연회에 서는 기생들을 전담해서 관리하고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관습도감(慣習都監)'입니다.

관습도감은 조선 전기에 궁중 행사를 주관하며 연회 및 인력을 관리하는 관청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수도 한양에서 선발된 기생들은 모두 관습도감에 소속돼 있었습니다.

거기에 3년에 한 번씩 지방에서 실력이 뛰어난 기생들이 발탁되어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관습도감은 한양을 포함한 전국의 실력 있는 기생들의 집합소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세종대의 관습도감에는 총 100~150명 사이에 기생들이 있었습니다.

관습도감은 그 기생들을 잘 교육해서 왕실연회에 세우는 업무를 했습니다.

그러니 초요갱 역시 기생이 된 이후에 관습도감에 소속이 되었고, 그녀 또한 왕실 연회를 할 때 필요한 음악 연회 기술을 각 과목 선생님에게 철저히 배웠습니다.

100명이 넘는 기생이 교육을 같이 받기는 했지만 궁중 연회에는 능력이 출중한 상위권의 기생들만 오를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관습도감 기생들은 이왕이면 궁중 연회에 오르는 기생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습니다.

그런 기생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이를 악물었을 초요갱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지 춤솜씨가 일취월장해서 궁중 연회 무대에 자주 서게 됩니다.

5. 초요갱,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의 첩이 되다

관습도감에서 실력을 뽐내며 소문난 기생이 된 초요갱은 어느덧 10대 후반의 나이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초요갱의 운명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날 궁중에서는 신하들과 왕자들이 함께 하는 연회가 펼쳐졌고 초요갱을 포함한 기생들은 춤을 추며 한껏 흥을 돋우었습니다.

초요갱은 아름다운 색동한복을 입고 사뿐사뿐 걸으며 아름다운 몸짓으로 나비처럼 춤을 춥니다.

그때 춤추는 초요갱에게 누가 봐도 반한듯한 누군가의 시선이 꽂힙니다.

그리고 얼마 후, 연회를 마친 초요갱에게 누군가가 찾아옵니다.

연회에서 초요갱에게 반한 그 남자로,  초요갱이 놀랄 만큼 지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풍도가 헌걸차고 천성이 슬기로왔다... 일찍이 존귀와 권세로 교만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세종실록>

'풍도가 헌걸차다'는 것은 외모가 당당했다는 뜻이고 게다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분이 낮은 사람 앞에서도 거들먹거리지 않았습니다.

초요갱에게 반한 인성, 평판, 외모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았던 남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세종의 18명의 아들
세종의 18명의 아들

세종의 18명의 왕자 중 소헌왕후에게서 낳은 7번째 왕자, '평원대군 이임'이었습니다.

평원대군이 왕실 연회에서 기생 초요갱을 보고 완전히 반해버립니다.

초요갱의 매력에 사로잡혀 첩으로 삼으려 직접 찾아간 것입니다.

첫 번째 남편이 역적으로 죽은 후 자신은 천민이 되어 기생으로 살고 있었던 초요갱은 서러운 나날이었지만 왕자 평원대군이 손을 내밀어주자 안정적이고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초요갱은 두 번째 남편으로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을 맞이해 그의 첩이 됩니다.

6. 초요갱, 음악가 '박연'의 눈에 띄다 

그렇게 꽃길을 걸을 줄만 알았던 초요갱은 평원대군의 첩이 되고 몇 년 후인 1445년 1월,  넋을 잃는 일이 벌어집니다.

'(평원대군이) 두창을 앓다가 화위당에서 돌아가니 나이 19세였다'

<세종실록>

초요갱을 누구보다도 사랑해 줬던 평원대군이 두창 즉 천연두 감염으로 사망해 버린 것입니다.

초요갱이 또 한 번 남편을 잃고 만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남편을 잃은 초요갱의 절망은 땅을 뚫고 들어갔을 정도로 깊었을 것입니다.

초요갱은 하늘을 원망하면서 막막하게 몇 달을 보냈습니다.

또다시 홀로 남게 된 초요갱은 마냥 좌절하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살길을 찾기 위해 다시 몸을 일으킵니다.

이때 초요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초요갱에게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춤재주가 뛰어났던 초요갱은 슬픔을 삼키고 더 열심히 재능을 갈고닦았고 뽐냅니다.

슬픔을 잊기 위해 매진하여 더욱더 아름다워진 초요갱의 춤사위는 우아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이때 초요갱의 나이는 20대 초반으로 이제는 성숙함까지 더해지며 연회에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무렵 궁에서는 재능이 뛰어난 초요갱을 주목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연

바로 '박연'입니다.

음악가 박연은 왜 관습도감의 초요갱을 주목해서 보고 있었을까요?

막연히 활동한 세종대에는 음악과 춤이 대거 창작됩니다.

때문에 창작한 음악과 안무를 누군가 시연해 볼 사람 또한 필요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음악과 춤을 빠르게 습득해서 잘 구현해야 하니 관습도감 내에서도 초요갱을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초요갱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궁중안무를 잘 흡수하고는 연회에서 완벽하게 펼쳐 보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덧 초요갱은 한양에서 손꼽히는 기생이자 독보적인 궁중안무 전수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7. 초요갱, 소과 시험에 합격한 '최세원'의 으름장을 대놓고 무시하다 

그러던 어느 날, 초요갱의 집 앞에 시끌벅적해집니다.

어떤 남자가 폴짝폴짝 참새처럼 춤을 추면서 초요갱  집 앞에서 '어허랑~ 어허랑!' 하는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어허랑'은 과거 급제한 인물이 행진을 할 때, 그 행렬을 따르는 소리꾼이 외치는 소리를 말합니다.

그 소리꾼의 뒤로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오는 사내가 있었으니 바로 소과에 합격한 유생 '최세원'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네가 항상 교만해서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오늘은 어찌 나왔으냐! 내가 예조좌랑이 되면 회초리를 칠 것인데 감당하 수 있겠느냐?'

합격 전 최세원이 유생일 때는 계속마음에만 담아두다가 소과에 합격하자 교만하고 도도한 초요갱의 버릇을 잡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었습니다.

초요갱의 입장에서는 최세원이 자신의 직장 상사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초요갱은 더 볼일 없다는 듯 휙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볼기 위에 먼지를 털게 되었구나'

최세원이 그동안 억지로 공부하느라 엉덩이에 먼지가 수북이 쌓였을 텐데, 고작 이제야 합격해서 먼지를 털어놓고 자신에게 종아리를 칠 것이냐며 큰소리를 치냐며 비꼰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덧붙여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일반 기생이 아닌 초요갱이었기에 전해진 이야기라 보입니다.

초요갱이 왕실 연회 외에도 잔칫집에 다니며 사적으로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주로 고위직 양반들 집에만 갔었기 때문에 1차 시험인 소과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인 대과에 급제 전인 사람인 최세원은 초요갱에게는 풋내기로 보이는, 한마디로 상대할 만한 급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왕실연회에서 춤을 추는 기생이었던 초요갱이 왕실 연회 스타로서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또한 그녀의 자존심이 얼마나 세고 도도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8. 수양대군이 정적 제거를 위해 초요갱과 배다른 형 '화의군'과 간통을 밝히다

조선의 왕은 세종에서 문종, 그리고 또 단종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단종 즉위 1년 만에 조선의 권력은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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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금지옥엽 경혜공주의 파란만장한 삶 2(동생 단종과, 남편 정종의 죽음부터 비구니가 되어 죽기까지) 13. 단종복위운동 1456년, 세조에 반기를 든 세력이 본격적으로 저항을 나섭니다. 단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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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단종은 허수아비였고 수양대군이 실권을 가진 시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이 흘러 단종이 재위하던 1455년, 초요갱으로 인해 왕실과 조정대신들이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이영(李瑛)과 초요갱은 상피(相避)하여야 마땅한데도 서로 간통하였다'

<단종실록>

당시 영의정이었던 수양대군과 조정대신들이 우르르 단종 앞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피'란 친족 사이의 남녀가 관계를 맺었다는 뜻을 지닌 것으로 절대 피해야 할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초요갱과 관통한 '이영'은 세종의 18명의 아들 중 영빈 강 씨에게서 낳은 '화의군'이었습니다.

즉 화의군은 초요갱의 두 번째 남편 평원대군의 배 다른 형제였던 것이었습니다.

초요갱을 조용히 지켜만 보던 화의군이 평원대군이 죽은 이후 본격적으로 초요갱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초요갱과 화의군 사이의 간통 사건이 왜 이 시점에 이슈가 되었을까요?

금성대군과 함께 화의군이 역모에 휘말리면서 초요갱과의 희대의 간통사건이 밝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시기였는데 화의군은 수양대군의 반대파에 서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이 반대파인 화의군을 내칠 기회를 엿보던 중 공교롭게도 '활쏘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수양대군이 그 대회를 군사 양성하려는 목적이라며 역모로 화의군을 엮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화의군을 내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던 지 화의군을 확실히 내치기 위해서 기존에 이미 알고 있었던 초요갱과의 간통 사건을 들고 나와 화의군을 유배 보내는데 활용하게 됩니다.

9. 초요갱, '수속법'을 활용해 돈을 내고 풀려나다 

그렇다면 간통을 저질렀던 초요갱은 무사했을까요?

대신들의 끈질긴 청에 간통을 저지른 초요갱에게도 어마어마한 벌이 내려집니다.

' 초요갱에게 장 80대를 때리도록 하라!'

이번 판결로 초요갱이 꼼짝없이 곤장 80대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 형이 집행되면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기생생활은 거기서 끝난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초요갱은 당시 법대로 장형 80대 대신 돈을 내고 풀려나게 됩니다.

당시 조선에는 '수속법(收贖法)'이라는 것이 있어서 형벌의 중요도에 따라서 정해진 돈을 납부하면 형을 면제받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의 보석금 제도와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초요갱은 수속법을 이용해서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기생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0. 초요갱, 세종대에 창작된 악무의 유일한 '전승자'라 내칠 수 없다는 신하의 상소에 단종도 벌하지 않기로 결정하다

그렇다면 돈을 내고 풀려난 초요갱을 보고 조정 대신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초요갱이 풀려난 이후 그녀를 비난하며 이런 말까지 나오게 됩니다.

'요사스러운 요물(妖物)로 하여금 경성(京城)에 머물게 하여서 풍속(風俗)을 더럽히고 허물어뜨리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단종실록>

사실 법대로 한 것으로 곤장을 맞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응하는 돈을 냈기 때문에 이미 곤장을 맞은 것으로 처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요갱은 신하들로부터의 괘씸죄로부터는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한 신하의 상소를 본 단종이 초요갱을 벌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단종이 초요갱을 벌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초요갱이 궁중 악무 전수자여서 내칠 수 없다고 상소한 것을 보고 단종은 벌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세종조에 새로 제정한 악무를 홀로 능히 전습하였고 다른 사람은 이를 아는 자가 드무니 고향의 고을에 내칠 수가 없습니다'

<단종실록>

세종대에 새롭게 만든 음악과 무용들 중 초요갱만이 전수받은 악무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악무를 연회에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초요갱뿐이었습니다.

세종대부터 활동한 초요갱이 궁중 안무를 익혔고 그 궁중안무를 구현할 수 있는 기생이 거의 없어 죄를 면하고 기생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 양반 '신자형'의 첩이 되어 정실부인의 권한을 쥔 초요갱, 여종 2명 살인사건의 도화선이 되다 

시간을 흘러 계유정난 이후 실질적 권한을 손에 쥐고 있었던 수양대군이 드디어 왕위에 오릅니다.

단종에 이어 조선 제7대 왕 세조시대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세종, 문종, 단종을 거쳐 세조 시대를 살게 된 기생 초요갱의 나이는 어느덧 30대 초반에 접어듭니다.

조선의 기생이 20대 후반에서 30대로 접어들면 '노기(老妓)' 즉 늙은 기생으로 취급받고 은퇴 수순을 밟곤 했습니다.

 하지만 초요갱은 나이가 듦에도 뛰어난 춤 실력으로 명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1457년 6월, 초요갱의 인생에 거친 파도가 덮칩니다.

초요갱이 치정으로 촉발된 살인 살건에 연루가 된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살인사건이 일어났었는지 그날의 일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자형이) 오직 그녀( 초요갱)의 말만을 듣고서 가비(家婢. 집안의 여성 노비) 두 사람을 때려서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조실록>

'신자형'이라는 인물이 여종 2명을 때려죽인 이유가 '초요갱'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시간을 거슬러 초요갱과 신자형이 처음 만났던 날로 가보겠습니다.

신자형은 세조 즉위 때 공을 세운 계유정난 공신이자 당시 예장도감판관이라는 직책을 지내던 관리였습니다.

예장도감판관은 왕실의 장례와 관련된 실무를 보는 종 5품의 관직입니다.

신자형이 어느 날, 기생 초요갱을 보고 반하고 맙니다.

초요갱을 곁에 두고 싶었던 신자형은 초요갱에게 바로 첩으로 들어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신자형이 기생 초요갱을 첩으로 들이면서 대형 사고를 칩니다.

바로 신자형이 첩 초요갱에게 상상도 못 할 권한을 준 것입니다.

정실부인 대신 집안일을 관리하는 권한을 첩인 초요갱에게 넘긴 것입니다.

조선 시대 집안일에 대한 권한은 정실부인이 곳간 열쇠를 쥐고 집안의 경제 전반을 관리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자형이 곳간열쇠를 정실부인에게서 빼앗아서 첩인 초요갱에게 주고는 집안의 경제권 전체를 관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초요갱은 정실부인과 같은 집안 내 위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자형이 초요갱에게 빠져서 정실부인을 푸대접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집안 정실부인을 밀어낸 초요갱을 집안 노비들은 곱게 봤을까요?

같은 노비 출신인데 권세를 누리는 본인을 아니꼽게 대하는 종들을 본 초요갱이 신자형에게 여종들이 자신을 무시했다며 일러바쳤고 초요갱의 말이라면 꺼뻑 죽는 신자형은 자신의 첩에게 함부로 대한다면서 여종들을 폭행하다 죽인 것입니다.

명성 자자한 기생 초요갱과 공신 출신관리가 분란을 일으키니 세조의 귀에 이 사실이 바로 들어가게 됩니다.

' 초요갱은 한양 밖으로 유배 보내고 신자형은 삭탈관직하겠다'

공신들에게 관대했던 세조는 노비이지만 사람을 2명이나 죽인 신자형의 관직을 빼앗고 초요갱이 유배 가는 정도의 벌로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12. 재능이 인정되어 유배 3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온 초요갱, 다시 한번 스캔들메이커가 되다 

그런데 초요갱이 유배를 떠나고 3개월도 되지 않아 또 초요갱을 둘러싼 문제적 이야기가 한양에서 터저나 옵니다.

'안계담이 칠촌숙 신자형의 기첩 초요갱을 간음하려고 신자형의 집으로 가서 바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조실록>

당시 신자형의 칠촌 조카 안계담이라는 인물이 신자형 집의 담까지 넘어서 초요갱의 방에 침입해 간음하려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초요갱을 덮치려고 몰래 초요갱의 방에 들이닥친 안계담은 그 방의 문을 연 순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 방에는 초요갱이 아니라 신자형의 정실부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방으로 유배를 간 초요갱이 어떻게 한양에서 또다시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일까요?

사실 연회를 누구보다 즐겼던 세조가 초요갱을 유배간지 3개월도 되지 않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세조 역시 초요갱의 실력이 이렇게 묻히기에는 아깝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뛰어난 재능 덕에 초요갱은 3개월 만에 다시 신자형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안계담이 초요갱을 간음하려고 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안계담이 들이닥친 방에는 신자형의 정실부인이 있었고 초요갱은 다행히 다른 곳에 있어서 위험을 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간음하려던 안계담이 초요갱은 보이지 않고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옆에 있던 애꿎은 신자형의 하인을 때리면서 분풀이를 합니다.

집안 한쪽에서는 맞고 있는 하인의 곡소리가 들리고 다른 쪽에서는 신자형의 정실부인이 비명을 지르는 등 집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됩니다.

급기 에 안계담이 때리던 하인이 죽고 맙니다.

그 결과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안계담은 세조에게 장 80대라는 엄벌에 처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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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2(갑자사화부터 죽음까지)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2(갑자사화부터 이병정 사건까지) 5. 갑자사화의 계기,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죽음 장녹수가 입궁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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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초요갱, 세조가 주최한 연회에 네 명의 기생 중 한 명으로 재능을 뽐내다 

이렇게 한양을 들썩이는 스캔들메이커였던 초요갱, 안계담 사건 이후 6년 동안은 다행히도 큰 소동 없이 일상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1463년 윤 7월, 기생 초요갱의 위상을 알아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조의 명으로 경복궁 경회루에서 큰 잔치가 열립니다.

세조는 이때 국가 통치를 위한 기본 법전을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그 법전을 만드는 신하들을 격려하는 잔치였습니다.

먹음직스러운 술상이 들어오고 풍악이 경회루 곳곳에 울려 퍼집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세조와 대신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립니다.

세조가 특별히 부른 음악과 춤에 재능이 있는 4명의 기생들, '사기(四妓)'였습니다.

먼저 '옥부향(玉膚香)'은 '피부에서 향기가 난다'는 나주 출신의 기생으로 뛰어난 재능 덕분에 왕실 연회에 서게 됩니다.

두 번째 '자동선(紫洞仙)'은 선녀 같은 외모를 가진 개성 송도 출신 기생이었습니다.

세 번째 '양대(陽臺)' , 떠다니는 구름도 멈추게 한다는 뛰어난 악무의 재능을 가진 기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느니 잘록한 허리로 뛰어난 춤사위를 펼치는 '초요갱(楚腰䡖)'이었습니다.

그렇게 네 명의 기녀는 세조와 신하들 앞에서 갈고닦은 춤을 펼쳐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초요갱의 춤은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연륜이 쌓인 우아함과 기교가 완벽히 어우러진 아우라가 한껏 뿜어져 나오는 환상적인 몸짓이었습니다.

세조가 유배를 보내놓고도 초요갱의 춤을 못 잊고 다시 불러들일 정도의 실력이었으니 그 춤은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세조는 초요갱과 기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연회를 즐겼습니다.

14. 초요갱, 또 다른 세종의 아들  '계양군'과 또다시 스캔들을 일으키다

그렇게 명성을 떨치고 실력을 보여주면서  조용히 살 줄 만 알았던 초요갱은 또다시 왕실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과 또 사통 하였다'

<세조실록>

이번 왕실 스캔들의 주인공은 세종의 18명의 왕자 중 한 명인 신빈 김 씨에게 낳은 '계양군'이었습니다.

계양군은 언젠가부터 초요갱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평원대군, 화의군에 이어 이번에는 계양군까지 세종의 왕자들과 얽힌 초요갱의 스캔들은 결국 세조의 귀에까지 들리게 됩니다.

세조는 계양군을 불러 호통치며 초요갱과의 사통 소문이 정말인지 묻습니다.

세조로서는 앞서 두 명의 동생과 시끌벅적하게 소문이 났는데도 형제들이 자꾸 초요갱과 간통 스캔들을 벌이자 골치가 아팠던 것입니다.

그런 세조의 호통을 듣던 계양군이 울부짖으면서 말합니다.

'하늘에 맹세컨대 초요갱과 사통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며 계양군이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라고 합니다.

계양군이 극구 부인이자 세조는 결국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그렇다면 계양군은 세조에게 혼난 바로 그날,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이날도 초요갱의 집에서 묵었다'

<세조실록>

계양군은 세조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계양군이 세조에게 한 거짓말이 들통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초요갱의 집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궁궐이나 관청의 건축을 담당하는 정 3품 선공판사 '변대해' 역시 초요갱에게 흑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계양군의 눈을 피해서 초요갱이 지내는 집으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때 초요갱의 방에서 변대해가 나오는 것을 계양군에게 들키고 만 것입니다.

감히 왕실 사람인 자신이 마음에 품은 여인을 탐했다며 계양군은 하인을 시켜 변대해를 무자비하게 때렸다가 그만 그가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계양군과 초요갱에게 어떤 벌도 내리지 않습니다.

세조는 묵묵부답으로 사건을 그냥 묻어버립니다.

계양군은 화의군과는 다르게 왜 벌을 주지 않은 것일까요?

계양군은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 '좌익공신'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세조 편에 섰었던 사람이었던 것이고 세조는 자기 편인 계양군을 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계양군은 그렇다고 쳐도 이 정도면 세조는 초요갱에게는 벌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조가 차마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초요갱은 세조도 내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미모와 재주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5. 초요갱, 평안도 

세조의 배려와 총애 아래 기생의 삶을 유지한 초요갱은 어느덧 시간이 흘러 40대를 넘어섭니다.

초요갱은 또 새로운 왕의 즉위를 보게 됩니다.

1468년 9월 세조의 뒤를 이어 조선 3대 왕, 예종이 즉위한 것입니다.

예종이 즉위하고 10개월이 흐른 1469년 7월, 또다시 초요갱은  성 스캔들에 연루됩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었을까요?

'도사(都事) 임맹지는 초요갱과 간통하였습니다'

<예종실록>

'임맹지'는  평안도 도사였습니다.

지방장관 격인 관찰사를 보좌하는 종 5품 고위 관직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평안도 도사와 초요갱은 스캔들이 났던 것일까요?

초요갱의 남자였던 계양군이 1464년에 죽고 그리고 4년 뒤에는 세조도 사망합니다.

초요갱을 비호해 줬던 왕실남자들이 떠나자 예종은 왕실스캔들의 중심에 있었던 초요갱을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종은 초요갱을 큰 도시인 평양 관청으로 보냅니다.

그런 이유로 평양에 간 초요갱은 또다시 간통으로 고발당한 것입니다.

고발 내용을 들여다보던 예종은 초요갱의 처벌을 고심하던 중 현명하다는 예조판서 신숙주에게 물었고 이렇게 답합니다.

'초요갱이 아무 뜻 없이 관리를 보러 온 거라면 그 죄는 다르옵니다'

신숙주는 간통현장이 발각된 것이 아닌데 간통죄로 처벌하면 되겠느냐고 합니다.

신숙주의 말대로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어 초요갱이 자칫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무게감 있는 대신의 말에 예종도 처벌하지 않기 했고, 초요갱은 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깊은 수렁에 빠져도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초요갱은 이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실록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초요갱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록에 무려 16번이나 이름을 올린 조선시대 보기 드문 화제의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으로 최고의 재능과 미모를 뽐내며 희대의 스캔들 메이커였던 초요갱은 조선시대에 신분제 내에서도 보기 드물게 본인의 재능으로 수차례 역경을 극복해 낸 여성이었습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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