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궁 김개시, 광해군을 쥐락펴락하며 권력을 탐하다
1. 궁녀 김개시, 선조 독살 범인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때는 선조가 조선을 다스린 지 41년째 되던 1608년 2월 오후 1시가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왕이 머물던 궁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궁 안 사람들이 어디론가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향했던 곳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침전이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조정 대신들과 국사를 논하던 선조가 점심 식사 후에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선조가 먹었던 음식은 바로 '약밥'이었습니다.
모두가 불안하고 초조하게 선조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던 그때, 침전에서 궁을 울리는 통곡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57살의 선조가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슬픔에 잠긴 궁에서는 선조의 장례가 거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황망한 상황에서 선조의 승하와 관련된 기묘한 소문이 궁 안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선조의 승하 당시 약밥에다 독약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다'
<연려실기술>
선조가 승하 직전 먹은 약밥에 누군가가 독약을 넣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조 독살의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상궁 '김개시'였습니다.
당시 김개시는 선조를 측근에서 모시면서 총애받던 대전의 궁녀였습니다.
왕을 모시 상궁 김개시가 선조 독살의 주범으로 의심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김개시가 세자 광해군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선조의 궁녀 김개시가 세자인 광해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모종의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 의심했던 것이었습니다.
2. 김개시, '김개시'라는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천민' 신분으로 추측되다
그렇다면 김개시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선조와 광해군 두 명의 왕과 얽혀 왕의 독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연루가 된 것일까요?
그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김개시와 광해군의 인연이 시작된 그때로 가봐야 합니다.
사실 궁녀 김개시가 몇 살에 어떻게 입궁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궁녀가 되기 전 김개시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김개시(金介屎)'라는 이름에 쓰인 한자가 김개시의 신분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입니다.
이름의 시(屎)는 '똥 시'자입니다.
'개시'라는 이름을 한글로 풀어쓰면 '개똥'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실록에는 김개시로 기록된 것일까요?
사실 왕실 사관들이 왕실 기록에 '개똥이'라고 쓰기가 민망하여 동물 '개'와 음이 같은 글자인 '끼일 개( 介 )에 똥 시 (屎)'를 써서 실록에는 개똥이를 한자로 바꿔 김개시라는 이름으로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개똥이라는 이름으로 유추해 볼 때 김개시는 조선에서 가장 밑바닥 계층인 '천민'의 신분으로 천한 노비의 딸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3. 천민 '김개시', 글을 알았다
천민도 궁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조선의 법전인 '속대전'에 따르면 '궁녀는 노비에서 뽑는다'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당시 궁녀들 대부분은 10대 초중반 정도의 노비의 딸들이 선발되었고 김개시도 아마 보통의 궁녀들처럼 10대 초반 정도에 입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김개시의 특이점은 천민인데도 불구하고 글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문자를 배웠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궁에 들어와 출세하고 싶었던 신분 상승 욕구가 강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개시는 그 당시 여성들이 거의 배우지 않던 글까지 배울 정도로 똑똑하고 야무졌습니다.
구중궁궐에 10대 초반 야심 차게 첫발을 내디뎠을 김개시, 그녀가 궁에 들어선 순간 궁 밖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세계가 펼쳐졌을 것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크고 아름다운 궁 내부, 꽃같이 화려하고 고고한 왕족들, 이런 궁안의 모습을 본 김개시는 자연스럽게 부러움이 커졌을 것입니다.
비록 궁녀이지만 궁에서 무사히 오래 살아남아서 좋은 건 모두 누리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남몰래 웃었을 김개시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4. 김개시, 왕자 '광해군'의 궁녀가 되다
궁녀 김개시가 가장 먼저 모시게 된 인물을 누구였을까요?
바로 당시 왕자였던 '광해군'이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광해군2
이때부터 광해군과 김개시의 길고 긴 인연이 시작된 것입니다.
김개시는 매일 광해군의 시중을 들면서 지극정성으로 모십니다.
사실 당시 궁녀는 입궁하면 처음 모신 상전을 평생 모시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김개시 역시 평생 모실 광해군에게 온 마음을 다하기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 한편 김개시는 입궁하면서 품었을 야망을 조금씩 키워왔을 것입니다.
5. 김개시,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에서 선조의 파천길을 수행할 인원을 꾸리면서 김개시가 선조이 궁녀로 발탁되다
그렇게 궁녀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궁궐생활에 점점 익숙해졌을 김개시, 그러던 중 1592년에 조선을 뿌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터집니다.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 터진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이순신
1592년 4월 13일, 부산을 통해 침공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했고, 단 보름 만에 한양 도성 코앞까지 쳐들어옵니다.
이때 조선의 왕인 선조가 경복궁을 버리고 수도 한양을 떠나 도망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선조를 수행하기 위해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개시'입니다.
그동안 광해군의 궁녀로 살아온 김개시가 선조의 궁녀가 되어 파천길에 선조와 동행을 한 것입니다.
왜 갑자기 김개시가 선조의 궁녀가 된 것일까요?
당시 상황에 미루어 추측해 보건대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에서 선조의 파천길을 수행할 인원을 꾸리면서 김개시가 발탁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전 궁녀는 지척에서 왕을 모시는 만큼 당시 대부분 궁녀의 꿈이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라는 특수 상황이 김개시에게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파천길에 임금의 눈에 띄면 이후 탄탄대로가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야망 있는 김개시에게 선조를 모시는 대전은 그야말로 기회의 공간이었습니다.
6. 김개시와 광해군, 임진왜란으로 인해 각각 정 5품 특별 상궁과 세자로 책봉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게다가 눈치와 판단이 빨랐던 김개시였기 때문에 선조를 포함해서 윗사람의 눈에 들게 먼저 나서서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일을 똑 부러지게 잘했을 것입니다.
또한 가뜩이나 파천길에 수행인원이 적은 열악한 상황에서 글을 읽을 줄 알았던 김개시의 영특함이 더욱 빛을 발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선조의 눈에 든 김개시는 전쟁 중에 일반 궁녀에서 '정 5품 특별 상궁'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됩니다.
김개시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문에 지위가 한층 달라진 인물이 또 있었습니다.
사실 선조는 즉위한 지 25년이 되도록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비워두었었습니다.
선조는 어떻게든 중전에게서 얻은 '적자'를 후계자로 세우려고 기다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적자가 없는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쟁에 마지못해 후궁의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한때 김개시가 모신 광해군이 선조 다음으로 왕이 될 세자로 우뚝 올라 선 것입니다.
임진왜란 중 선조가 명나라로 가겠다면서 의주에서 지내는 동안 광해군은 분조(임시로 세운 조정)를 이끌고 함경도, 강원도 등을 다니면서 민심을 수습했습니다.
아버지 선조가 피난을 떠나면서 추락한 왕실의 이미지를 아들 광해군이 다시 회복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자가 된 광해군은 두각을 나타내면서 백성들에게 '영웅'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됩니다.
7. 선조, 임진왜란 후 백성들의 인기를 얻는 광해군을 질투하다
1598년 11월이 되어서야 길고 긴 임진왜란의 마침표가 찍어집니다.
김개시가 전무후무한 전란을 겪은 뒤 돌아온 궁안의 분위기는 어딘가 험악했고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자신이 모신 선조가 세자 광해군에게 한껏 날이 선 행동을 하면서 궁 안을 얼어붙게 만든 것입니다.
하루는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러 갔는데 선조가 대뜸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 세자 문안이라 하는가?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오지 말거라!'
이 말을 들은 광해군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광해군은 비수가 꽂힌 듯 비통했을 것입니다.
선조는 자신은 전쟁 중에 도망친 왕이라 위신이 땅으로 떨어질 대로 떨어졌는데 아들 광해군이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으니 자신의 추락한 왕으로서의 권위를 광해군의 탓이라 여기고 질투를 한 것이었습니다.
8. 선조, 계비 '인목왕후'와 혼인하고 선조의 첫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다
그러던 1602년, 김개시의 촉각을 곤두세운 일이 벌어집니다.
궁궐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인목왕후'입니다.
2년 전인 1600년 선조의 첫 번째 왕비였던 의인왕후가 사망한 이후, 2년이 지나 간택을 통해서 계비 '인목왕후김 씨'를 들입니다.
그리고 선조는 인목대비와이 혼인 후에 여전히 적자를 기대하며 틈만 나면 인목왕후의 처소를 찾았습니다.
이때 김개시는 선조의 곁에서 이 모든 상황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인목왕후에게서 아들이라도 태어난다면 궁안 분위기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인목왕후가 출산할 때마다 두 손에 땀을 쥐면서 결과를 예의주시합니다.
그렇게 인목왕후의 두 번의 출산이 있었는데 한 번은 딸을 출산하고 한 번은 사산이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606년 3월, 인목왕후의 3번째 출산이 있었고 드디어 바라던 아들을 낳게 됩니다.
선조가 39년 만에 얻은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입니다.
9. 광해군,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세자 자리를 위협받다
그런데 영창대군의 탄생이 기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광해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가 혹시 세자를 바꾸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조선이라도 이미 책봉된 세자를 바꾼다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창대군은 광해군이 갖지 못한 '적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조가 반드시 세자를 바꾸려 한다면 그 일이 결코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눈치 빠른 대신들이 세자 광해군과 적자 영창대군을 두고 누구 편에 설 것인가 편 가르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들은 영창대군이 태어나던 바로 그날부터 시작됩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니 조정 대신 중 한 명이 왕자 탄생을 '진하'라는 예를 올리자고 선조에 청을 올립니다.
문제는 세자가 없는 상황에서 예비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진하'라는 예를 올리는 것인데 현재 광해군이라는 세자가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나서서 대군에게 예를 올리자고 하는 것은 세자 광해군을 대놓고 무시하는 처사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세자만큼 영창대군을 치켜세우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영창대군에게 예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조정권력의 최고봉인 영의정 '유영경'(1550~1608)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의정을 필두로 한 영창대군파가 조정 내에서 점점 늘어납니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배척과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0. 김개시, 아픈 선조 대신 세자 광해군의 편에 서기로 결심하다
그런데 그때 불안한 광해군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었기 때문에 광해가 스스로 불안한 것을 추측하여 알고는 은밀히 광해와 접촉하여 뒷날의 계획을 세웠다'
김개시는 선조가 세자를 바꿀 뜻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불안해하는 광해군에게 접근해서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돕기로 결심합니다.
김개시는 당시 선조의 상궁임에도 불구하고 세자 광해군에 편에 서서 무사히 왕이 되도록 돕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김개시는 영창대군이 아닌 광해군을 돕고자 한 것이었을까요?
당시 선조가 1년 넘게 병을 앓고 있어 건강이 위중한 상태였기 때문에 선조의 궁녀였던 김개시는 불안하게 됩니다.
보통 궁녀는 자신이 모시던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상례를 치르고 출궁 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궁에 계속 남고 싶었던 김개시는 차기 권력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김개시는 선조의 병세가 오래가는 것으로 미루어 건강이 심상치 않았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만약 이대로 선조가 승하한다면 2살인 영창대군이 세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픈 선조가 혹시 잘못되더라도 세자 광해군을 왕위에 올리고 그 곁에 남아서 더 큰 권력을 누리기 위해 수를 썼던 것입니다.
11. 김개시, 광해군의 환심을 사려 궁안 정보를 수집해 광해군에게 은밀히 전달하다
그렇다면 김개시기 접근했을 때 광해군은 과연 그녀를 믿었을까요?
당시 김개시는 엄연히 선조의 상궁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김개시는 자신이 확실히 광해군의 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김개시는 광해군의 환심을 사기 위해 궁안의 각종 정보들을 수집해서 전달했습니다.
궁녀로서 연차가 제법 오래됐을 김개시는 친한 궁녀들을 동원해서 궁 안에 갖은 정보들을 수집하는 방법을 동원합니다.
또한 김개시가 모시는 선조의 동태나 말들을 시시각각 광해군에게 은밀하게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김개시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인 광해군에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든든한 아군이 되었을 것입니다.
12. 선조, 건강 이상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지만 건강이 회복되어 무마되다
김개시가 광해군에 편에 서서 은밀하게 움직이던 1607년 10월 어느 날, 방 밖으로 나오던 선조가 갑자시 쓰러집니다.
결국 선조는 자신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영의정 및 좌의정, 우의정을 불러들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양위'뜻을 담은 어명을 내립니다.
선조의 어명을 듣고 영창대군 편에 서 있던 영의정 유영경은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원래 어명을 받으면 승정원에 전달해서 조정에 배포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영의정 유영경은 승정원에 어명을 알리지 않고 선조에게 제발 어명을 거두어 달라고 청합니다.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영의정 유영경의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이대로 만약 왕위에 오른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집니다.
병세가 심상치 않았던 선조가 기력을 서서히 회복한 것입니다.
그렇게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전위 어명 또한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영의정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파들은 한숨을 돌렸을 것입니다.
13. 선조, 어명을 숨긴 유영경을 벌하라고 상소문을 올린 대신을 반역혐의로 귀양 보내다
그런데 두 달 후인 1608년 1월, 선조에게 올라온 상소문 하나가 조정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작년에 영의정 유영경이 사사로이 어명을 숨겼습니다. 종사를 위태롭게 한 유영경을 벌하소서'
<선조실록>
영의정 유영경이 어명을 숨겨서 광해군의 즉위가 무산되었고 그것이 자칫 종사를 위태롭게 할 수 있었으니 그를 벌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조는 영의정 유영경을 벌하라는 상소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때 세자가 왕위를 받아여야 했다는 것인가!!'
라며 선조는 상소문을 올린 대신을 향해 분노합니다.
선조는 어명을 숨긴 유영경은 문제 삼지 않고 조선 왕실이 위태로울뻔했다고 걱정해 상소를 올린 대신에 대해서는 비난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상소를 올린 대신을 반역 혐의로 귀양을 보냅니다.
14. 김개시와 광해군,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혹의 대상이 되다
이때 광해군과 김개시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선조가 이 기회에 세자를 바꿀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선조의 성격상 이러한 일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었기 때문에 광해군과 김개시는 피가 타들어 갈 만큼 불안하고 불길한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극대노한 선조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였던 궁궐, 그런데 불과 며칠 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던 선조가 돌연 사망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때 처음 다루었던 약밥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이 약밥 사건은 <연려실기술>에 적혀 있는 야사입니다.
기력을 찾은 선조가 점심 수라와 약밥을 먹고 난 뒤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때문에 선조의 죽음에 대해 무수한 뒷말이 흘러나왔던 것이고 김개시는 이런 이유들로 선조의 죽음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됩니다.
김개시가 올린 약밥의 출처를 두고도 의혹이 많았습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선조가 먹은 약밥은 동궁에서 올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선조 독살 의혹에 광해군이 얽혀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김개시와 광해군이 선조를 독살한 것이 맞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다만 이를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후에도 선조 독살 의혹은 조정 대신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입에 오르내립니다.
이를 통해 김개시기 얼마나 당대의 평판이 좋지 않았는지, 얼마나 광해군 편에 서서 모략을 잘했는지를 알 수 수 있습니다.
15. 왕실 최고어른이었던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 광해군의 즉위를 서두르라 명하다
그렇다면 선조의 독살 의혹에 대해 조정 대신들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요?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광해군의 즉위를 서두르라고 명한 왕실 어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왕후'였습니다.
인목왕후가 광해군의 즉위를 도운 것은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선조가 죽은 상황에서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이 세자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자신과 아들 영창대군이 살기 위해서는 광해군의 환심을 사야만 했던 것입니다.
16. 김개시, '미모'가 아닌 자신만의 '비방'으로 광해군을 사로잡다
광해군은 세자 생활 만 16년을 마치고 고단한 세월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이때 광해군을 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상궁 김개시는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김개시는 왕이 된 광해군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상궁이 됩니다.
그래서 김개시는 선조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선조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출궁 하지 않고 새로운 왕을 모신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개시는 자신을 향한 의혹과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광해군이 왕이 된 이후 김개시는 광해군과 더욱 가까워지게 되면서 광해군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게 됩니다.
보통 역사적으로 볼 때 궁녀들이 임금을 사로잡았던 비결의 대부분 '미모'였습니다.
선조와 광해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은 김개시 또한 미모가 뛰어났을까요?
김개시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김개시는 당시 기준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성숙하거나 예쁜 외모가 아니었다고 사관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개시는 어떻게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왕비를 통하여 나아가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인하여 비방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김개시가 왕비의 허락하에 광해군의 잠자리를 모셨는데 그때 비방(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사랑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광해군의 마음을 휘어잡은 김개시만의 유혹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보통 상궁이 왕과 이렇게까지 은밀한 관계를 갖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상궁 김개시는 중전이나 후궁보다 광해군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부터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이해해 주는 김개시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고 싶었을 것이며 후궁 제안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김개시는 상궁으로 광해군의 최측근으로 곁에 머물기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러한 것은 김개시의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위한 계산이었다고 보입니다.
후궁이 되면 궁 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통해 더 큰 권력을 쥘 수 있는 기회가 후궁보다는 상궁으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개시는 상궁의 신분에 머무르면서 광해군을 도와 광해군이 갈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을 해주면서 신임과 권력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욕심 없고 겸손한 김개시를 보면서 날이 갈수록 김개시에 대한 믿음이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7. 광해군, 영창대군의 편에 섰던 유영경을 처형하다
그런데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한 지 보름도 되지 않은 1608년 2월 12일, 궁안 분위기가 사뭇 살벌해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신하들이 앞다퉈서 누군가를 탄핵해야 한다고 고한 것입니다.
탄핵 상소의 대상은 바로 영창대군의 편에 서서 광해군과 척을 졌던 선조대의 영의정 유영경이었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유영경이 어명을 숨긴 것 등 그간의 행동들이 아주 흉악했다면서 벌해야 한다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신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광해군은 과연 신하들의 요청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광해군은 유영경을 함경도 경흥으로 유배 보냅니다.
그리고 또 6개월이 흘렀을 무렵 광해군은 이런 어명을 내립니다.
'유영경을 자결케 하라'
그렇게 광해군은 즉위 직후,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유영경을 단숨에 제거합니다.
18. 김개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처소 궁녀들을 포섭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광해군에게 전하다
광해군의 정적 유영경이 제거된 후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궁안은 잠잠해졌을까요?
이번에는 영창대군의 거처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영창대군을 모시고 있는 궁녀들이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궁녀들이 말하길 영창대군 거처의 음식을 준비하는 곳인 소주방 마루아래에서 귀신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런 일이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던 것입니다.
귀신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밤이 되면 너무 무서워서 궁녀들이 영창대군 처소 근처에는 가지도 못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지엄한 궁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가히( 김개시)는 기회를 틈타서 영창대군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방정(저주물)만 걸고 갔다'
<계축일기>
이 글은 궁녀가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계축일기의 한 대목입니다.
김개시가 영창대군 처소에 몰래 접근해서 기회를 틈 타 영창대군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저주물을 걸어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은 정말 김개시의 저주물 때문에 나타난 것일까요?
귀신의 정체 역시 김개시의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미리 포섭한 궁녀들을 동원해서 귀신소리를 내게 한 것입니다.
사실 김개시는 일찍부터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전의 궁녀들을 포섭했었습니다.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싫어했거나 출궁 하고 싶어 하는 궁녀들에게 접근해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고 유혹하고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일거수일투족을 포섭한 궁녀에게 감시하도록 합니다.
김개시는 인목대비와 영창대군 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호시탐탐 그들을 해칠 기회를 노린 것입니다.
19. 김개시, 자신의 권세가 달린 광해군의 권세를 지키기 위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하려 기회를 노리다
어느 날 갑자기, 궁 한편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불이야!'
김개시가 대전 궁녀를 꾀어서 인목대비의 처소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김개시는 그렇게 궁녀들을 조정하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은밀하게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왕실의 큰 어른인 인목대비가 일개 상궁인 김개시의 행태에 대해 왜 벌하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인목대비가 명확한 물증도 없이 광해군이 총애하는 상궁을 건드리는 것은 곧 광해군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개 상궁인 김개시의 계략에 왕실 큰 어른인 인목대비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김개시는 광해군의 비호 아래에서 더욱 대담하게 활개를 치게 됩니다.
사실 자신이 모시는 광해군의 권세가 오래가야 김개시도 권세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김개시는 언제든 광해군을 위협할 수 있는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제거하기로 나선 것인데 그 행동은 점점 대담해져 갔습니다.
20. '은상 강도 살인 사건'이 발단이 된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 계획은 거짓이었다
그러던 1613년 4월 어느 날, 김개시와 광해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건의 발단은 문경새재에서 벌어진 은을 싣고 가던 상인을 덮치는 강도 사건이었습니다.
이른바 문경새재 '은상 강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붙잡힌 박응서가 갑자기 광해군에게 이런 상소를 올립니다.
'은화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반역하려 하였습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반역을 통해 왕위에 올리려 한 인물의 정체였습니다.
바로 '영창대군'이었습니다.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고자 했습니다'
게다가 박응서는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인목대비에게 수렴청정을 맡기려고 했다고까지 말합니다.
박응서의 충격적인 상소를 본 광해군은 어떻게 했을까요?
광해군은 이를 좌시하지 않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광해군은 역모의 뿌리를 뽑겠다면서 역모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고 직접 추국에 나섭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질게 심문받아 피투성이가 된 한 인물이 뜻밖의 인물을 말합니다.
역모의 수장이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잡혀온 김제남은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역모 혐의를 부인해 봤지만 광해군은 이를 무시했고 결코 옥사를 멈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사실 영창대군을 왕에 올리려고 했다는 박응서의 역모 자백은 거짓이었습니다.
박응서가 감옥에서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서 거짓 자백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사주를 한 인물은 바로 이이첨(1560~1623)입니다.
이이첨은 광해군 즉위 후 예조판서에 올라 정국의 중심에 서 있던 권력가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영창대군 세력을 옥모의 배후로 둔갑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바로 '은상 강도 살인 사건'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궁 안에서 이런 이이첨을 보면서 미소 짓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김개시입니다.
김개시와 이이첨은 궁 안에서 서로 뜻이 통하는 최고의 파트너였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처리해야 할 공공의 적이 같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정말 역모 사건을 믿은 걸까요?
광해군이 이이첨이 역모를 꾸민 것을 알았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광해군 역시 역모를 적절하게 이용한 것은 사실입니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 정적을 제거하는 용도로 옥사(반역 등에 중대한 사건)를 활용했습니다.
그런 광해군의 의중을 읽었던 이이첨 등이 시의적절하게 옥사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해 갔던 것입니다.
21. 역모에 얽힌 인목대비 일가 숙청되다
그렇다면 옥사로 벼랑 끝에 몰리게 된 인목대비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집안은 언제 몰락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고 심지어 아들 영창대군의 목숨마저 위험해진 상태였습니다.
역모 옥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광해군은 작심한 듯 관련자 처벌에 박차를 가합니다.
먼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렸고 어머니는 유배를 보냅니다.
인목대비의 남자 형제들은 고문받다가 끝내 사망하고 맙니다.
22. 광해군, 영창대군을 '증살'시키다
그다음 처벌 대상은 8살 된 '영창대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배다른 어린 동생의 처벌을 망설였지만 대신들의 상소에 못 이겨서 영창대군을 폐서인 시키고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 보내 '위리안치'시킵니다.
그렇게 옥사가 마무리되려던 순간 김개시가 광해군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넵니다.
그 편지를 읽은 광해군은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떱니다.
'영창대군을 잘 길러뒀다가 명나라 장수가 와서 문을 열면 고이 모셔오라'
<계축일기>
놀랍게도 편지의 정체는 인목대비의 상궁이 유배지의 영창대군에게 몰래 보내려던 밀서였던 것입니다.
밀서를 어떻게 광해군이 보게 된 것일까요?
김개시는 영창대군이 유배를 간 뒤에 인목대비의 궁녀에게 접근했고 영창대군에게 안부 편지를 보낼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이 말은 들은 대비전의 궁녀는 인목대비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대비전의 상궁이 영창대군에게 안부편지를 씁니다.
김개시의 손에 들어온 안부편지는 곱게 그대로 잘 전달이 되었을까요?
김개시에 의해 안부편지 사이사이에 대비 전 상궁이 쓰지 않은 역모가 의심되는 새로운 내용들이 교묘하게 추가가 됩니다.
그렇게 안부 편지는 감쪽같이 역모 모의 밀서로 탈바꿈합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편지 사건이 있은 지 약 열흘 후, 너무나도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바로 영창대군이 뜨거운 방에서 쪄 죽는 '증살(蒸殺')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광해군의 눈엣가시였던 영창대군이 죽으면서 길고 잔인했던 옥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인목대비는 뒤늦게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파했다고 합니다.
23. 광해군,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로 '폐모살제'한 왕이 되다
광해군은 왜 인목대비는 처벌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인목대비는 계모이긴 하지만 광해군의 어머니입니다.
효를 목숨 걸고 지켜야 했던 조선의 왕인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친어머니는 아니라 해도 어머니 인목대비의 처벌은 광해군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개시는 영창대군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만족했을까요?
김개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참에 인목대비의 힘을 완전히 빼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개시와 마음이 통했던 지 이때 인목대비를 '폐모' 즉 왕의 어머니 지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개시의 파트너 '이이첨'입니다.
이이첨은 인목대비를 폐모해야 한다고 신하들을 동원해서 청을 합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위시킨다는 정치적 부담감에 인목대비를 쉽게 폐위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지난 1618년, 다시 제기된 폐모론에 이제야 광해군은 이런 명을 내립니다.
'지금 이후로는 서궁으로만 칭하고 대비라 칭하지 말라'
<광해군일기(중초본)>
인목대비를 공식적으로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지금의 덕수궁)에 가두라는 '서궁 유폐' 명을 내립니다.
광해군은 이로서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저지른 왕이 됩니다.
24. 김개시, '매관매직'을 일삼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폐모살제를 하기까지 막후에서 패를 짜고 실행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때 김개시가 일개 궁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까지 서슴없이 한다는 이야기가 궁 안에 퍼집니다.
'정사를 열 때마다 김상궁이 붓을 들어 마음대로 결정하고 임금도 마음대로 못 하였다 '
<연려실기술>
상궁이기는 했지만 일개 궁녀인 김개시가 정사에 관여한 다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본분에 어긋나는 완벽한 월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선 넘는 김개시의 행동에 화내기는커녕 지켜만 봤던 것입니다.
사실 김개시는 뇌물을 받으면서 벼슬을 파는 매관매직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김개시가 광해군의 최측근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줄을 대려고 돈이며 금은보화를 싸들고 그녀를 찾아왔고 김개시는 뇌물을 받은 대가로 광해군을 구슬려 뇌물을 준 이들에게 관직을 줬던 것입니다.
25. 김개시, 후궁들의 잠자리까지 결정하며 후궁 위에 권력을 누리다
매관매직뿐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김개시에게 접근했던 인물도 있었습니다.
바로 광해군의 후궁들이었습니다.
왕의 후궁들이 일개 상궁에게 뇌물을 바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상궁보다 훨씬 지체 높은 후궁들은 대체 왜 김개시에게 뇌물을 바친 것일까요?
김개시가 광해군의 동침 상대까지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김개시에게 재물을 많이 바칠수록 광해군과의 합방 가능성이 높아졌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이런 방식으로 한낱 궁녀면서도 중전에 버금가는 위세를 누렸던 것입니다.
중전급 위세를 누리며 세상을 다 가진 듯 최고 실세로 자리 잡은 김개시는 광해군의 불안을 다독이면서 광해군을 완전히 장악해 나갔습니다.
26. 김개시, '이귀와 김자점'에 대한 역모 고변을 무시하도록 광해군을 조종하다
그러던 1622년 12월,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이귀와 김자점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대비하소서'
이귀와 김자점은 한때 광해군과 일은 했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정계에서는 소외당하고 있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신하들은 이 두 사람이 인목대비 편에 서서 역모를 준비한다는 첩보를 듣고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청을 올린 것입니다.
이때 광해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떠도는 소문으로 옥사를 일으킬 수 없다'
즉위 이래 많은 역모 고변을 들을 때마다 직접 나서서 추국하고 민감하게 반응했던 광해군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한 것입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광해군이 이런 역모 고변을 들었을 때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속삭였다고 전합니다.
'가소롭습니다...(김자점은) 충성스럽고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다른 모의를 할 것입니까'
<연려실기술>
바로 상궁 김개시가 광해군 옆에서 '김자점이 역모를 저지를 리가 없다'라고 조언을 한 것이었고 광해군은 이 조언을 듣고 신하들의 역모고변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김개시는 김자점은 충성심이 강한 인물인 데다가 역모를 일으킬 만한 힘도 없다며 콧방귀를 뀐 것입니다.
27. 김개시, 광해군의 눈과 귀를 막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
그런데 1623년 3월 10일 밤, 후궁들을 옆에 끼고 잔치를 즐기던 광해군이 갑자기 내시의 등에 업혀 궁 밖으로 도망을 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왕의 체면 따위는 버리고 궁에서 멀리 도망친 광해군은 결국 군사들에게 붙잡혀 끌려오게 됩니다.
바로 서인 일파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것입니다.
반정세력은 새벽에 천여 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단숨에 창덕궁을 장악합니다.
그렇게 조선 역사상 두 번째 반정을 통해 인조가 조선 제16대 왕으로 즉위합니다.
그렇다면 인조반정의 주동자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김개시가 충신이라고 말한 김자점 그리고 이귀였습니다.
광해군은 김자점과 이귀가 충신이라 반란을 모의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김개시의 말만 믿다가 왕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28. 김개시, 인조반정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다
그런데 정보에 밝은 김개시가 반정이 일어날 것이란 사실을 과연 몰랐을까요?
여러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김개시는 이미 반정군과 내통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김개시는 자신의 살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개시는 반란이 일어나더라도 광해군의 눈과 귀를 가려줬으니까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김개시가 반정 낌새를 아예 몰랐다, 반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등 반정과 관련된 다른 의견 또한 있습니다.
사실 김개시기 어떤 의도를 가졌든 김개시의 말이 결정적으로 광해군의 눈과 귀를 가렸고 결국 광해군이 폐위를 당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29. 김개시, 반정 세력의 첫 번째 척결대상으로 반정 당일 '즉결처형되다
광해군의 눈과 귀를 막았던 김개시는 인조반정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면서 화려한 궁궐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까요?
반정당일 김개시는 반정군에 붙잡혀 즉결 처형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정 세력의 첫 번째 척결 대상이 바로 김개시였습니다.
반정세력은 김개시를 살려줄 마음이 아예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반정세력 뒤에 김개시에게 이를 갈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정 세력이 쳐들어와서 궁을 차지할 때 '반란'이 아닌 정당한 '거사'라고 공식 승인을 해준 왕실 큰 어른, '인목대비'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정 후 유폐에서 벗어난 인목대비에게 김개시는 그야말로 집안을 송두리째 앗아간 철천지원수였습니다.
반정 세력은 인목대비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 김개시를 발견 즉시 즉결 처형해 버립니다.
그렇게 광해군의 최측근이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졌던 김개시는 비참한 몰락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일개 상궁으로 광해군을 쥐락펴락하며 비선실세로 권력을 누린 김개시, 그녀의 끝없는 비뚤어진 욕망은 광해군의 몰락을 앞당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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