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프랑스의 영웅과 독재자 사이 두 얼굴!
1. 나폴레옹, 어린 시절 고향 코르시카 억양의 프랑스어 구사로 친구들의 놀림감이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시대 때, 대부분의 유럽 국가를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두게 되며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요?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 또한 범상치 않은 어린 시절을 지냈을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어릴 때 전혀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10살이 되었을 때, 프랑스 사관학교에 입학했는데 나폴레옹은 프랑스어가 아니라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방언을 모국어로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태어난 고향은 코르시카섬인데, 자칫하면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사람이 될 뻔했습니다.
나폴레옹이 태어나기 1년 전인 1768년까지만 해도 코르시카 섬은 현재 이탈리아에 있는 제노바 공국의 영토였습니다.
이것을 1768년에 프랑스가 코르시카를 공격해서 차지하게 됩니다.
코르시카가 만약 프랑스의 영토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인으로 알려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폴레옹은 모국어가 프랑스가 아닌 까닭에 프랑스어를 하더라도 코르시카 특유의 사투리가 있어서 어린 시절 않은 놀림을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철자도 많이 틀렸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나중에 황제가 되어서도 항상 옆에서 서기가 대신 글을 써주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는 프랑스어로 소통이 불가하다고 합니다.
언어 콤플렉스가 있었던 나폴레옹을 친구들은 촌뜨기라면서 심하게 놀렸다고 합니다.
이런 중에 나폴레옹은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어 출세를 하겠다는 야망이 상당히 컸었습니다.
그러한 꿈 때문이라도 나폴레옹은 도서관에 가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을 읽는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2. 프랑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며 '프랑스 대혁명'에 성공하다
나폴레옹은 파리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합니다.
과연 코르시카에서 온 촌놈 나폴레옹은 어떻게 프랑스의 영웅이 된 것일까요?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영웅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려면 나폴레옹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1789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났고 프랑스 국민들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드려고 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당시 부르봉 왕가 출신으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6세'가 있으면 혁명이 위태롭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프랑스혁명에 걸림돌로 보였던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합니다.
3. 나폴레옹, 유럽 무대 데뷔전 '툴롱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초고속 승진하다
프랑스혁명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에는 또 다른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을 유럽 왕정 국가들이 상당히 위험한 상황으로 예의주시하며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럽 왕정 국가들은 프랑스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며 '다음 혁명은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혁명이 커지면 안 되겠다고 느낀 오스트리아, 영국, 에스파냐(스페인) 등 프랑스 주변의 몇 개 나라가 대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프랑스 동맹국들은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유럽에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입니다.
1793년, 프랑스혁명에 저항하는 큰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 프랑스에 해성같이 등장한 것이 바로 '나폴레옹'입니다.
프랑스 남부에 '툴롱'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프랑스에게 툴롱이라는 도시는 지중해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1793년, '왕당파' 세력이 바로 이 '툴롱'을 장악해 버립니다.
왕당파는 프랑스혁명에 반대하고 왕정을 다시 프랑스에 복귀시키려는 왕권 복귀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 왕당파는 완벽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 적이었던 영국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왕당파의 요청으로 영국군이 와서 툴롱항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루이 12세 때 군사 방어 목적으로 요새화된 항구 도시 툴롱은 당시 7m 두께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프랑스 주요 해군 기지였습니다.
그래서 혁명군은 왕당파에 빼앗긴 툴롱을 탈환하기 위해 '툴롱 탈환 작전'을 시도합니다.
이때 툴롱 탈환작전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것이 바로 '나폴레옹'입니다.
코르시카 대표로 국민공회 의원이었던 살리체티가 툴롱이 있는 남부 지역에 파견된 상태였습니다.
살리체티가 그곳에 마침 포명 장교자리가 지어있는 것을 알고는 거기에 나폴레옹을 추천해서 그 자리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나폴레옹이 툴롱에 도착했을 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원래 툴롱을 탈환하는 사령관이 있었는데 사령관들이 몇 차계 계속해서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바뀌는 사령관들마다 정면 대결을 걸었고 사령관들의 무모한 정면 승부로 툴롱의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 상태로는 정면 대결은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새롭게 작전을 짭니다.
나폴레옹 작전 1
나폴레옹은 툴롱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에기예트 요새'를 차지하고 에기예트와 툴롱항 사이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에 포격을 가합니다.
나폴레옹 작전 2
그와 동시에 툴롱항 서쪽과 북동쪽에 위치한 요새를 차지하여 툴롱항에 직접 포격합니다.
이렇게 두 작전을 동시에 펼쳐 성공하면 툴롱을 탈환할 수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 작전대로 에기예트를 점령하고 포격을 가하여 결국 영국군은 툴롱항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대활약으로 툴롱 탈환 작전은 성공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군인으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성공으로 이끈 나폴레옹은 대위에서 준장으로 고속 승진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Ol3dZE5rk4
4. 나폴레옹, 두 번째 임무인 파리 시내에서 왕당파 진압까지 성공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첫 임무 이후에는 정치적 변동 때문에 임무가 특별히 없었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1795년 10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프랑스혁명에 반대하는 왕당파의 대규모 반란이 발생합니다.
이 왕당파 진압작전에 다시 한번 나폴레옹이 투입됩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툴롱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었던 '폴 바라스'라는 사람이 두문분출하고 있는 나폴레옹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성공한다면 한자리 줄 테니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해 달라고 부탁했고 나폴레옹이 이를 수락한 것입니다.
이미 툴롱 전투에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증명했었던 나폴레옹은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때 과감하고 저돌적인 작전을 제안합니다.
잘못하면 건물이 붕괴가 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파리 시내에서 대포를 쏘면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파리 생로슈 성당 앞에 총포진을 친 나폴레옹은 왕당파 반란 세력을 향해 거침없이 발포합니다.
엄청난 포격을 퍼부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왕당파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다시금 나폴레옹은 이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준장에서 사단장으로 승진하고 지휘권까지 얻게 됩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나이는 불과 26살 이어습니다.
5. 나폴레옹,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프랑스의 국민영웅으로 첫걸음을 떼다
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하고 혁명 이후 승승장구를 하던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국민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탈리아 원정'입니다.
사실 당시 이탈리아 북부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엄청 강했습니다.
프랑스로서는 이것이 굉장히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이탈리아 북부를 먼저 공격해서 그것을 탈환 한 다음 오스트리아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툴롱 전투 이후 군인으로서 인정받은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원정군의 총 사령관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 이탈리아 원정군은 보급이나 병력도 부족했고 나폴레옹이 부임하기 전 아무런 성과 없이 원정 4년 동안 사기가 저하될 대로 저하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대에 부임한 후 승리를 하기 위한 방법을 잘 찾아내기도 했고 전력을 잘 집중시켜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등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를 넘어서 로디 전투, 카스틸리오네 전투, 아르콜 다리 전투, 리볼리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며 거침없이 오스트리아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합니다.
나폴레옹은 마침내 프랑스와 오랜 기간 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던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고 프랑스 라인강까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국민 영웅으로 첫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6. 나폴레옹, 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야망으로 '이집트행'에 나서게 되다
그런데 대승을 거둔 이탈리아 원정의 기쁨도 잠시, 나폴레옹은 또 다른 전쟁에 출정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 승리 후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공을 세울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이때 프랑스는 영국을 직접 공격하려 했었으나 프랑스군대는 육지 전에 강했지만 바다에서의 해상전에는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해상을 통한 영국 공격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상부 기관에 이집트 원정을 제안합니다.
영국과 이집트는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요?
영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교역로의 중간 지역에 이집트가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만약 이집트를 점령하고 인도까지 진출하게 되면 영국의 교역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 대한 승인을 받게 됩니다.
이집트 원정에는 프랑스 총재정부의 검은 속내가 있기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이름은 500인 위원회가 만든 명단에서 원로원이 지명하는 5인 총재로 구성된 총재정부였습니다.
이 5명의 총재들이 권력을 잡고 통치를 하는 체제였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정치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군인들을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인기가 많아지니 자기들의 권력을 군인들이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흡사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을 경계했던 선조 임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독주를 막으려 했던 총재정부는 가능성이 낮은 전투에 나폴레옹을 보내서 고생시킬 속셈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나폴레옹 또한 정치적인 계산이 상당히 빨라서 총재정부의 견제를 역이용하자고 계획합니다.
나폴레옹은 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야망으로 이집트행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집트에 도착해서 보니 나폴레옹의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피라미드 근처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고 이집트 수도인 카이로를 점령하며 시리아 쪽까지 점령하기 위해 원정을 계속해서 승리하는 듯 보였으나 그 사이 영국 해군의 영웅 넬슨 제독의 등장으로 영국군이 이집트 나일강에 정박 중이던 프랑 함대를 괴멸시키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영국 해군에 의해서 나폴레옹 군대는 보급과 퇴로가 끊긴 상황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집트 내에서는 프랑스 군대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이 이곳저곳에서 발생했습니다.
더군다나 이집트에 보이지 않는 적, 전염병까지 확산되면서 프랑스군대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마침 같은 시기 프랑스 국내에서 정치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습니다.
프랑스에서 정치인들이 여러 파벌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면서 불안정하게 되고 혼란스러워지고 있었습니다.
국내외 위기 속에서 프랑스는 인플레이션, 부정부패, 파벌싸움으로 몸살을 앓았지만 총재정부는 무능력하기만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내의 정치 상황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고 이집트에 군대를 남겨놓고 소수의 부하와 함께 이집트를 떠나 프랑스로 오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프랑스 국민들은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나폴레옹은 혼란을 잠재울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7. 나폴레옹,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제1 통령이 되다
이때 나폴레옹에게 접근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삶에 전환점이 된 인물로 <제3 신분이란 무엇인가>를 집필한 저자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였습니다.
시에예스는 당시 혁명의 흐름에 대해서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에예스는 나폴레옹에게 쿠데타를 함께 하자고 제안합니다.
시에예스는 왜 나폴레옹을 선택했을까요?
시에예스는 당시 30세의 젊은 나폴레옹 정도라면 충분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시에예스의 제안에 나폴레옹은 바로 수락합니다.
1799년 11월 18일, 바로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의 결행일이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서울의봄
이때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에 쳐들어갑니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는 나폴레옹, 시에예스 등이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건으로 총재정부가 몰락하고 통령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됩니다.
의회를 제압하고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한 3인의 통령 체제를 수립하게 되는데 이때 프랑스에서 제일 큰 권력을 가진 제1 통령으로 나폴레옹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유리한 새로운 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나이는 30세였습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과 쿠데타를 주도했던 시에예스는 어떻게 됐을까요?
시에예스는 죽음은 면했지만 자신의 뜻과는 달리 정권에서 퇴출됩니다.
드디어 나폴레옹은 제1 통령에 되어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가 됩니다.
8. 나폴레옹, 오스트리아를 치기 위해 직접 '마렝고 전투'에 참전해 승리를 하다
과연 나폴레옹의 다음 행보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대프랑스동맹의 일원이었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안정을 계속해서 위협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때 프랑스 군대가 주둔해 있는 이탈리아 북부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기습공격을 합니다.
이에 나폴레옹은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을 하게 됩니다.
알프스 산맥은 이탈리아와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에 걸쳐 7개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습니다.
이때 이탈리아 제노바 근처의 마렝고 평야(현재 체코)에는 나폴레옹의 오른팔 마세나 장군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쳐들어와 왔고 나폴레옹은 마세나 장군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해야만 하는 촌각을 다투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과연 나폴레옹은 어떤 전략을 써서 그곳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을까요?
나폴레옹 군대는 알프스산을 넘어 직진 코스로 진격합니다.
원래 나폴레옹 군대는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는 알프스 산자락 끝으로 돌아서 진격했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이번에도 당연히 알프스를 돌아서 올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알프스를 직접 넘어 진격한 기록은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 바르카'만이 유일했을 만큼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산 베르나르도 협곡을 가로질러서 알프스를 넘어서 진격한 것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 전략으로 오스트리아의 허를 찌르게 됩니다.
대포사랑이 남달랐던 나폴레옹 군대는 기상천외하게 완전히 분리된 대포를 사람이 끌고 당겨서 알프스 산을 넘었던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기존 한니발 부대가 15일 걸렸던 알프스 진격 시간을 나폴레옹 부대는 단 이틀 만에 해냅니다.
그리고 이때 병사들에게 호평을 받았던 나폴레옹의 전술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속전속결로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략이었습니다.
심지어 병사들의 경우는 텐트도 없이 노숙을 했고 기동성을 우선으로 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특성상 프랑스 군인들은 최소한의 물품만 소지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군사에게는 담요 한 장이 전부여서 담요를 돌돌 말고 바닥에서 노숙을 했습니다.
요즘 캠핑을 할 때 '비박'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이것이 바로 프랑스어 'bivouac'에서 유래된 것으로 나폴레옹의 군사들은 비박을 했던 것입니다.
피해도 많이 컸겠지만 나폴레옹은 무모하고 저돌적인 전략을 그대로 감행했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데 성공하며 마고렝 전투를 승리로 이끕니다.
9. 나폴레옹, 자신을 영웅화시키는 이미지 메이킹의 달인이었다
참고로 이 '마고렝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썼던 모자가 2014년에 경매에 나왔는데 우리나라의 닭고기 회사로 유명한 '하림'이 예상가의 3배가 넘는 26억 원에 구매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렝고 전투에는 또 다른 숨겨진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위 그림은 현재 나폴레옹 하면 떠오르는 가장 유명한 초상화인데 이 초상화의 배경이 된 전투가 바로 마고렝 전투입니다.
위 그림은 첫 번째 그림에서 보이는 영웅 그 자체인 모습과 달리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백마가 아닌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던 다소 초라한 실제 행색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림 속에서 보듯 나폴레옹이 상의 속에 손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폴레옹이 배가 아팠었다, 손이 못생겼다' 등 무궁무진한 속설을 낳은 나폴레옹의 손동작은 당시 프랑스 바지에 주머니가 없어 손을 상위 안에 넣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왜 사실과 다른 그림을 그렸을까요?
당시 나폴레옹은 자신의 이미지를 잘 만드는 이미지 메이킹의 달인이었습니다.
본인을 최대한 멋지게 그려서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에 열을 올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끊임없이 미화하면서 절저 하게 계산된 전쟁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직접 작성한 기사의 내용을 보면 더욱더 극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번개처럼 날아올랐고, 벼락처럼 내리쳤고, 나폴레옹은 모든 곳에 있었고, 모든 것을 다 보았다'
나폴레옹이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고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이 또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폴레옹 법전'입니다.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통해 '제1 통령'인 자신을 '종신통령'으로 정하고 더욱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나폴레옹은 자신이 다스릴 프랑스의 기틀을 마련하는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헌법은 있었지만 일반 국민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민법의 경우 지역마다 달라서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일한 사법 체계가 필요했던 나폴레옹은 1804년 3월 21일, 36개 법과 2,281개 조항으로 구성된 '나폴레옹 법전'을 공표하게 됩니다.
'나의 진정한 영광은 마흔 번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민법전을 말살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나폴레옹 회고록 中>
나폴레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나폴레옹 법전'은 오늘날 '함무라비 법전, 로마법대전'과 함께 세계 3대 법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법전은 프랑스혁명이 추진했었던 특권의 폐지, 관습법의 폐지 및 사유 재산 인정을 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일부 계승했다고 평가받으며 당시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됩니다.
또한 나폴레옹은 지금도 프랑스에 유지가 되고 있는 여러 가지 각종 행정 제도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말로 '프레페'라고 불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도지사'와 비슷한 '지방 행정관 제도'로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시행한 것이었습니다.
7월 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행진을 하는데 이때 다양한 유니폼을 입은 다양한 분야의 사관생도들의 퍼레이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나폴레옹이 만든 세분화된 군사 교육 과정의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10. 나폴레옹, 권력에 눈이 멀어 '앙기앵 공작 처형사건'을 기획하고 성공하다
이렇게 국가 시스템부터 법전까지 통합한 나폴레옹의 야망은 프랑스의 종신 통령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의 다음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프랑스 최초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율배반적 이게도 민중들이 봉기해서 권력을 왕에게서 시민에게 주자는 것이 프랑스혁명의 취지였는데 그 프랑스 핵명의 종착지가 결국 '황제 나폴레옹'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과연 왕권으로의 회귀를 인정했을까요?
당연히 국민들은 이를 인정하기 않았고 이에 나폴레옹이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한 특단의 방법 있었습니다.
바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루이 16세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국민들이 그 많은 피를 흘리며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부르봉 왕가를 쫓아냈는데 그 부르봉 왕가가 다시 돌아와서 왕정을 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거짓 소문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심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납니다.
왕정 복귀를 외치면서 영국에 망명해 있던 왕당파 세력이 나폴레옹을 납치해서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왕당파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돼서 실행조차 해보지 못합니다.
나폴레옹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서 이 사건의 배후로 루이 16세의 친척이었던 '앙기앵 공작'을 지목합니다.
사실 앙기앵 공작은 프랑스혁명을 피해 '바덴 공국(현재 독일)'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왕당파의 역모와는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혐의를 앙기앵 공작에게 덮어 씌우고는 그를 찾아 처형합니다.
나폴레옹은 권력에 눈이 멀어 다양한 불법을 자행하며 앙기앵 공작 처형사건을 기획하고 성공시킵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가 재기를 노리고 있었구나' 하고 왕정을 두려워했던 불안감에 휩싸인 민중을 이용하며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11. 나폴레옹, 찬반 국민투표 결과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다
이렇게 국민여론까지 잘 조성하고는 나폴레옹은 이 기세를 몰아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바로 프랑스 최초로 황제를 뽑는 찬반국민투표를 실시하게 됩니다.
프랑스 황제 찬반 투표의 찬성률은 얼마였을까요?
찬성이 3,521,675표, 반대가 2579표로 찬성률이 무려 99.93%로 몰표 수준의 찬성과 형식적인 반대수가 나옵니다.
추후 역사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전체 투표수보다 많았던 찬성표 수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투표 조작이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작 없이도 충분히 투표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나폴레옹이었지만 그보다 더 압도적인 찬성이 필요했었던 것입니다.
이런 투표 조작이 가장 심했던 곳은 바로 군대였습니다.
실제 투표 결과, 육군에서는 120,032명, 해군에서는 16,224명이 찬성했는데 조작 투표 결과에서는 육군 40만 명, 해군 5만 명이 찬성했다고 부풀렸다고 합니다.
추후 역사가들이 조작표라고 확인한 수치가 총 투표 수의 8% 이상이었던 약 25만 5000표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압도적인 지지로 되돌아온 군주제가 과연 괜찮았을까요?
당시 프랑스 국민의 삶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 한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계속되는 내전과 외세의 공격으로 고통스러운 삶에 지칠 대로 지쳤던 프랑스 국민들은 차라리 누군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한 명의 구원자로서의 지도자가 나타나 사태를 수습해서 평화를 가져다 주기를 바랐던 측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람을 담아 당시 프랑스 국민들이 길거리에서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나폴레옹 만세~ 만세~ 우리에게 주네~ 닭고기와 빵과 포도주를 ~이렇게 많이~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네!'
황제가 되기 전에는 나폴레옹을 모든 문서를 포함해서 그의 성인 '보나파르트'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된 이후 나폴레옹이라 불리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존 프랑스왕들이 루이, 필립, 프랑수아, 앙리 등 이름을 썼기 때문에 나폴레옹 자신도 이제 '성'인 '보나파르트'가 아닌 '이름'인 '나폴레옹'으로 불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12. 베토벤, '황제'가 된 나폴레옹에게 분노해 그를 위한 헌사곡 악보를 찢어버리다
국민 찬반 투표로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을 하고 프랑스혁명으로 만들었던 첫 번째 프랑스 공화국은 1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를 지켜보던 많은 유럽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분노심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분노한 사람들 중에 음악가 '베토벤'도 있었습니다.
청력을 잃어 가던 베토벤에게 나폴레옹은 큰 영감을 주는 인물이었습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을 부패한 권력을 종식시키고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헌사하는 '에로이카(영웅)-보나파르트'라는 음악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이 곡을 다 완성하고 이 곡을 나폴레옹에게 보여주면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감에 차있을 때 덜컥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입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도 다를 바 없는 야심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폴레옹에게 주려 했던 나폴레옹 헌사곡 악보를 찢어버리는데 다행히 필사본이었고 또 다른 사본이 남아 있었습니다.
악보에 베토벤이 직접 쓴 헌사가 있었는데 너무 화가 나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악보까지 찢고 헌시를 다 지워버릴 정도 황제 나폴레옹에게 엄청난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영웅 교향곡의 '영웅'이 원래 '나폴레옹'이었던 것입니다.
13.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다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그토록 기다렸던 '황제 대관식'이 거행됩니다.
위 그림은 나폴레옹이 150명 이상의 참석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내인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세계를 보호하고, 그 역할을 했던 로마 제국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교황의 인정을 받아야 진정한 황제가 되는 상황이었고 나폴레옹은 교황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대관식날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관을 씁니다.
나폴레옹의 이런 행동 자체는 사실 교황과 사전 협의가 되었던 돌발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위를 만천하에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나폴레옹 대관식 그림에는 당시에는 살아있지 않았던 죽은 사람이 한 명 그려져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바로 로마 공화정 시대 정치인이자 장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저'입니다.
카이사르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황제'라는 칭호는 로마 제국에서 처음 사용된 개념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본인의 대관식 그림에 카이사르를 그려 넣어 로마 제국 황제의 전통을 자신이 물려받았다는 정통성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코르시카 섬 촌뜨기 출신으로 황제가 되기에는 출신 성분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나폴레옹의 자격지심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나폴레옹 뒤편에 시저를 넣어서 나폴레옹이 황제 정통성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4. 나폴레옹, 가장 빛나는 승리 '아우스터리츠 전투'
드디어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 기세를 몰아 나폴레옹은 전쟁으로 점령한 이탈리아 왕국의 왕 자리까지 본인이 차지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독주를 지켜보고 있던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주변국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오랜 기간 적국이었던 유럽국가들이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 '대프랑스 동맹'을 맺게 됩니다.
프랑스는 다시금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쟁으로 혼란에 휩싸입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군에 무참히 패하게 됩니다.
심지어 파리에서는 나폴레옹을 무너뜨릴 쿠데타가 준비 중이라는 소문까지 들리게 되고 나폴레옹은 정치적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위기를 느끼고 있는 와중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아우스터리츠(현재 체코)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동맹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둡니다.
트라팔가르 해전의 실패로 위기를 느낀 나폴레옹은 대륙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우스터리츠 전쟁에서의 승리는 나폴레옹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가 유럽 패권 장악을 위한 관문과도 같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넘어서 유럽 대륙을 제대로 장악하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병사들 앞에서 연설을 합니다.
'나는 너희들 때문에 정말 기쁘다'
나폴레옹에게 엄청 중요했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 소식을 프랑스에 알리기도 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발언도 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나폴레옹은 위기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 인생 가장 빛나는 승리로 기록되었고 그 결과 나폴레옹의 위세가 전 유럽에 퍼지게 됩니다.
15. 나폴레옹, 스페인군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전쟁의 신이라는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하다
이렇게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머쥐고 전쟁의 신이라고 불리며 많은 신화를 만들었던 황제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혼란에 빠진 프랑스를 구한 구원자로 보였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쟁의 신이라는 이미지에 금이 가기 시작하게 하고 프랑스의 만행이 드러난 그곳은 바로 '스페인'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황제에 오르면서 국민들은 나폴레옹이 구체제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스페인에서 '독재자' 나폴레옹의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1808년 3월 18일, 스페인 왕국 내부는 후계자 문제로 혼란이 심해졌습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맏아들 페르난도 7세를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마욘드라는 도시로 부릅니다.
그리고 왕 자리를 내놓으라고 그들에게 윽박을 지릅니다.
나폴레옹은 그 왕자리를 형인 '조제프'에게 줍니다.
스페인의 왕과 왕자까지 프랑스로 불러들여 윽박지를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에서 그만큼 셌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나폴레옹의 형이 즉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는 반대 시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스페인 시민들의 반대시위가 엄청나게 거세지니 프랑스군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끔찍한 학살 사건을 벌이게 됩니다.
위 그림은 프란시스코 고야가 그린 < 1808년 5월 2일>과 <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들은 총을 겨누고 있는 프랑스군인들과 무기가 없는 상태로 처형 직전 절망에 빠지고 피를 흘리고 죽어간 스페인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잔인한 학살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학살 장면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친 작품입니다.
프랑스군의 학살에 분노한 스페인 국민들의 봉기가 스페인 전역으로 번지고 거세어지니 결국 스페인의 왕이었던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스페인 군대와의 전쟁까지 하게 되는데 결국 패배하게 됩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다른 국가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무적이 아니었구나! 우리도 싸우면 이길 수 있겠는데!'
이때부터 나폴레옹이 전쟁의 신이라는 이미지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16. 프랑스군대, 노예제도를 부활시키기 위해 '아이티'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하다
사실 나폴레옹이 보낸 군대가 저지른 학살은 스페인 학살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지금은 '아이티'라고 불리는 그 당시는 '생도맹그' 지역에서 아프리카 노예들의 노동력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던 그때 아이티에서도 혁명이 발발합니다.
그 결과 1794년 2월,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프랑스로부터 아이티의 노예들이 해방됩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제1 통령이 되고 나서 아이티에서 노예 제도를 부활시킵니다.
이에 아이티 노예들의 저항이 거세어집니다.
나폴레옹은 아이티에서 식민지 제국을 제대로 건설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폴레옹은 끔찍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12세 미만의 아이들만 제외하고 여자든 남자든 산속에 있는 모든 흑인을 죽여야 한다'
그때 자유를 갈구하는 아이티 독립군의 거센 저항에 진압을 하던 나폴레옹이나 장군들은 흑인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흑인 노예들의 목에 무거운 자루를 매달아서 바다로 밀어서 수장시키는 대량 학살을 자행하기도 합니다.
프랑스군대는 흑인뿐 아니라 유색인종들까지 차별하고 학살하면서까지 노예 제도를 부활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대는 독립군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고 황열병이라는 풍토전염병 때문에 결국 1년여 만에 아이티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17.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해 싫어하던 나폴레옹과 혼인하다
이렇게 독재체제를 유지해 가면서 나폴레옹이 정치를 계속 이어나갔는데 나폴레옹에게는 사실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국민 투표를 통해서 황제에 즉위할 때, 그 투표 안에는 황제의 자리는 세습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은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나폴레옹을 불안에 떨게 한 괴소문이 떠돕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조제핀과 결혼한 후에 10년 동안 후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제핀이 나폴레옹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기르고 있었던 '아들 한 명, 딸 한 명' 이렇게 두 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미 출산을 했던 조제핀에게는 임신에 문제가 없다는 증거가 되었고 나폴레옹 본인이 불임이 아닐까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불륜을 저질렀던 상대가 임신을 하면서 본인이 불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불임이 아님을 확신한 나폴레옹은 결국 조제핀과 이혼을 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가난한 귀족 출신이었고 출신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황제권위가 다른 나라의 황제나 왕권과 비교했을 때, 전혀 꿇리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위해 강력한 나라의 여인과 결혼하고 싶어 했습니다.
첫 번째 황비 후보는 러시아의 공주였습니다.
당시 러시아 공주의 나이가 14세였고 나폴레옹은 이미 40세였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1세가 자신의 14살밖에 안된 여동생을 나이 많은 나폴레옹한테 보내고 싶지 않았고 러시아 황제가 나폴레옹의 제안에 대답을 계속 미루면서 시간을 흘러갔습니다.
이때 두 나라의 관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맺게 되면 가운데에 끼여서 큰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가 먼저 나폴레옹에게 접근을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황녀였던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의 재혼 상대로 제안합니다.
그런데 당사자였던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과 결혼해야 한다는 사실을 엄청 싫어했습니다.
마리 루이즈의 할아버지 레오폴드 2세가 마리앙투아네트와 남매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리 루이즈에게 마리앙투아네트는 고모할머니였던 것인데 고모할머니인 마리앙투아네트를 프랑스에서 처형시켰으므로 어릴 때부터 마리 루이즈는 프랑스를 증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을 향해 '코르시카의 괴물'이라고까지도 표현할 정도로 그를 싫어했었습니다.
마리 루이즈는 가족이 처형당한 나라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해 마리 루이즈는 할 수 없이 나폴레옹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1년 후, 나폴레옹이 그토록 원하던 아들 '나폴레옹 2세'가 태어납니다.
18. 나폴레옹, 러시아의 화재와 추위 작전으로 참패하다
이제 후계자까지 태어났으니 나폴레옹의 야심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을 다 아우르려고 마음을 먹게 되는데 결국 이 야망 때문에 나폴레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러시아행'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전쟁스타일은 앞서 살펴봤듯 '속전속결' 전략입니다.
나폴레옹은 최대한 빨리 러시아와 싸움을 해서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고 승리 후 돌아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는 조금씩 후퇴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며 프랑스 군대를 유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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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1812년 9월 14일, 나폴레옹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입성합니다.
기세등등하게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에 입성했는데 도시가 고요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크렘린 궁전으로 갔고 주인 없는 크렘린 궁전에서 러시아군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에 입성한 당일, 쿵 하는 폭발음이 어디선가 들려오고 모스크바의 많은 부분을 태워버리는 엄청난 대화재가 발생합니다.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모스크바 전체에 불을 질러 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4일 간 계속된 화염은 모스크바의 대부분을 소실시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보급품을 최소화하고 현지에서 보급품을 조달하던 스타일이었는데 대화재로 모든 것이 소실된 모스크바에서는 그 전략이 재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러시아에게도 위험이 큰 '방화전략'이 프랑스 군대에 제대로 통했습니다.
여기에 더한 러시아의 또 다른 전략은 러시아의 살인적인 '추위'였습니다.
6월에 전투가 시작됐어야 했는데 9월까지 넘어간 탓에 러시아에 추위가 불어닥칩니다.
9월 중순인데도 불구하고 영하 20도의 강추위가 불어닥친 러시아에서 나폴레옹 군대는 한 달 정도 버티고 있었는데 추위와 배고픔으로 결국 퇴각을 결정하게 됩니다.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에서 돌아오는 길은 정말 처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그림을 보면 나폴레옹의 초라해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길바닥에는 죽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극심한 추위와 계속되는 러시아의 공격으로 61만 명의 군사 중 무려 40만 명이 사망하는 참혹한 원정 결과를 가지고 귀국합니다.
19. 나폴레옹, 반불동맹 압박으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다
이렇게 러시아 원정 참패로 나폴레옹의 불패신화가 깨지니 프랑스에 짓눌려있던 여러 나라들이 서둘러 100만 대군 규모의 '반불동맹'을 결성합니다.
1814년 3월 31일, 반불동맹은 파리에 입성하게 됩니다.
결국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반불동맹의 압박아래 나폴레옹은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가 프랑스에서 황제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조약에 조명하게 됩니다.
황제자리에서 물러난 나폴레옹은 엘바섬에 유배됩니다.
20. 나폴레옹, 군대와 민심을 장악하고 재집권에 성공하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힘겨운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부르봉 왕실의 복귀에 프랑스 시민들이 많은 반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자신의 복귀를 바라는 민심을 읽고는 9개월 동안의 유배 생활을 뒤로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엘바섬을 탈출합니다.
그렇게 나폴레옹은 군대와 민심을 장악하고 재집권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민중들이 원하는 입헌주의를 약속하게 되고 프랑스에 적대적인 나라들과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하지만 나폴레옹의 기세를 두려워하던 여러 유럽 국가가 나폴레옹의 평화 조약을 거부했고 프랑스는 다시 전쟁을 하게 됩니다.
21. 나폴레옹 최후의 전투,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다시 유배길에 오르다
나폴레옹의 재집권 소식을 들은 유럽 각국은 반프랑스동맹군을 결집합니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이 함께 침공하기 전에 각개 격파를 하면 이해관계가 다른 이들의 동맹 관계가 와해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런 판단하에 프랑스 군대는 벨기에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 연합군과 프로이센 군을 향해 진격합니다.
12만여 명의 프랑스 군대는 21만여 명의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 비해 병력이 부족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양군이 합류하기 전에 공격을 게시합니다.
프랑스 군대는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을 격파했고 프로이센 군의 패전소식을 들은 영국 연합군은 워털루로 후퇴합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워털루 전투가 열리기 바로 전날 워털루에 내린 폭우로 땅이 질퍽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주력병이었던 포병이나 기병들의 이동이 질퍽해진 땅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상태로는 바로 대전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공격 시간을 미룹니다.
늦은 출격으로 인해서 퇴각하던 프로이센 군이 영국 연합군에 합류하게 되었고 나폴레옹 군대는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무능력한 지휘관들이 나폴레옹을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프랑스 군대의 기병대가 거의 전멸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악재들이 우연처럼 겹치게 되면서 결국 나폴레옹의 군대는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나폴레옹의 황제로의 귀환은 물거품 됩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다시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22. 나폴레옹,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작성하다
나폴레옹은 이미 유배를 갔다가 탈출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서양 남쪽,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떨어져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 보내집니다.
세인트 헬레나 섬은 가장 가까운 육지가 대략 1,200km 나 되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탈출을 위해서 배를 탈 경우 한 달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오갈 데 없는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과거의 영광을 담은 회고록을 작성합니다.
프랑스혁명 격동기에 나타난 프랑스 국민의 영웅 나폴레옹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프랑스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킨 지도자의 모습이 담긴 회고록을 씁니다.
나폴레옹 회고록이 쓰인 후 이와 관련된 나폴레옹에 관련된 많은 신화가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토록 사랑하던 고국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내 유해는 사랑하는 프랑스 국민이 보는 앞에 센 강가에 뿌려지길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초라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죽은 후 20년이 지나서야 고국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23. 나폴레옹, 독재자 '히틀러'의 롤모델이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독재자 나폴레옹의 어두운 행보를 벗겨 보려고 합니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또 무슨 일을 했을까요?
사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될 때 프랑스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이전 부르봉 왕조와는 다를 것이다'
나폴레옹은 최고의 자리에 오른 후 점점 권력에 집착하게 되고 국민들과 했던 약속을 잊은 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기사까지 쓰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고 했는데 이뿐 아니라 언론도 통제하고 검열도 강화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실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다음에 신문의 수가 급감합니다.
1799년 나폴레옹 쿠데타 이전에는 프랑스 파리에 73개의 신문이 발행되었는데, 쿠데타 직후에는 13개로 줄었고 재정 말기인 1814년에는 4개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언론과 함께 프랑스 시민들의 입까지도 막아버립니다.
시민들이 20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카페들의 문을 모두 닫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경찰을 보내서 감시하게 합니다.
그렇게 언론의 자유를 탄압했던 나폴레옹은 과연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나폴레옹이 직접 고백한 회고록을 보면 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글에서 볼 수 있듯 나폴레옹은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합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혼란한 시국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속박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은 독재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이러한 당시 나폴레옹의 자기 합리화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떠오릅니다.
과거 히틀러의 사령관이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틀러는 또 다른 나폴레옹이 되기를 원했다'
1940년, 히틀러는 자신이 이끄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함락하자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였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나폴레옹 무덤 앞에서 모자를 벗고 존경을 표합니다.
당시 히틀러는 프랑스 방문에 대한 선물로 오스트리아에 있던 나폴레옹 아들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옮기도록 지시해 나폴레옹과 그의 아들이 함께 묻히도록 했다고 합니다.
24. 독재자 나폴레옹의 또 다른 모습, 현재에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가치를 계승하겠다고 했지만 프랑스에 제정을 세우고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독재자의 모습을 보이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최근 나폴레옹 사망 2백 주년을 맞아 '인종주의자'논란이 가시화되었습니다.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최근 노예제도 덕분에 부유해진 지방이나 인종차별을 했던 인물을 영웅으로 삼고 있는 지역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21년 5월 6일, '나폴레옹 서거 200주년 기념' 연설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1802년, 나폴레옹은 국민공회가 폐지한 바 있는 노예 제도를 부활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정복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사상자들을 사실상 전혀 우려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오랜 역사를 가진 사회이며, 우리 프랑스는 지워버리지 않고 부정 혹은 부인하지도 않고 끊임없이 재해석하면서, 인정하고 이해하려 애쓰며 나아가는 역사가 깊은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공과 재평가를 통해 인종 차별을 자행했던 나폴레옹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였고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처음 군인이었을 때 나폴레옹과 황제가 된 이후 나폴레옹은 전혀 다른 삶을 살며 잔혹한 학살자로 변질된 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메디치가문2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소니픽쳐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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