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 희대의 '악녀'였을까? '위대한 통치자' 였을까?
1. 측천무후의 탄생
측천무후(624~705)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중국 50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입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측천무후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고대 중국에서는 여성이 공직에 오르는 것 자체가 어려웠었던 대다 심지어 평민 출신으로 '황제'가 된 측천부후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측천무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중국사 3대 악녀가 바로 '서태후', 한나라 황제 유방의 부인 '여태후' 그리고 '측천무후'입니다.
이렇게 중국 내에서도 측천무후를 보는 시선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출생 배경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측천무후가 태어난 곳은 중국 '산시성'입니다.
측천무후는 624년 중국 산시성의 문수현에서 부유한 집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 집안은 당시 대격변기를 맞은 중국의 역사와 깊이 얽혀 들어가게 됩니다.
이전까지 중국대륙은 30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대분열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이연'이라는 인물이 중국을 통일한 후 새롭게 나라를 건국하고 고조라는 이름으로 황제자리에 오르는데 바로 '당나라'입니다.
고조가 나라를 세우는 데 힘을 보텐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의 아버지인 '무사확'이었습니다.
무사확은 원래 산시성에서 목재상으로 큰돈을 벌고 고조 이연을 도와서 크게 활약하게 됩니다.
황제가 된 이연은 무사확을 무척 아껴서 과거 수나라 황족 출신의 지체 높은 여성 양 씨를 부인으로 중매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무사확과 양 씨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그중 둘째 딸인 '무조(武照, 측천무후의 본명)'가 훗날 측천무후가 되는 그녀인 것입니다.
2. 측천무후, 제왕의 '관상'을 가지고 태어나다
그리고 측천무후가 갓 태어났을 때부터 관상이 아주 특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나라의 유명한 관상가가 강보에 싸인 어린 측천무후를 보고서 한 말이 있습니다.
'자제분은 용의 눈과 봉황의 목을 가진 복희의 상입니다. 용모가 비범하여 귀인 중에서도 존귀합니다. 만약 여자라면 훗날 제왕이 될 것입니다'
<궁당서 中>
3. 측천무후, 다양한 학문과 예체능을 익히며 자라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욱 남달랐던 점이 있었으니 바로 자라온 환경이었습니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여성들은 평생 남성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역사, 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히고 승마, 그림, 음악과 춤까지 폭넓은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같은 시대 살았던 소녀들이 누릴 수 없었던 아주 특별한 기회였던 것입니다.
4. 측천무후, 아버지 '무사확'의 죽음으로 인생 첫 위기에 처하다
그런데 마냥 행복할 것만 같던 12살의 측천무후에게 인생 최초의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당제국의 황제인 고조 이연이 죽었던 635년, 바로 그 해에 측천무후의 아버지 무사확도 갑자기 죽게 된 것입니다.
한순간에 측천무후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게 됩니다.
전처의 자식들이 후처인 측천무후의 어머니와 세 자매를 무척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이때 측천무후는 무시당하며 살지 않기 위해서는 바로 힘과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됩니다.
괴롭힘이 점점 심해지자 측천무후의 어머니는 어린 세 딸을 데리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있는 친척집에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
5. 측천무후, '당 태종'의 후궁이 되다
그런데 이곳 장안에서 측천무후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바로 측천무후가 14살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 제2대 황제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하라는 조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당 고조 이연의 아들인 당 태종 이세민에 대한 평가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당 태종은 안으로는 현명하게 백성들을 돌보고 밖으로는 당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면서 혼란했던 중국대륙에 번영을 되찾은 황제로 인정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측천무후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39살의 위세가 대단했던 황제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는데 과연 궁의 생활은 측천무후의 희망대로 순조롭게 풀렸을까요?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연개소문2
6. 측천무후, '미모'가 빼어났지만 잔인하고 대범한 성격 때문에 당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다
위 표는 '당나라 후궁의 품계도'입니다.
맨 위쪽에 단 한 명의 '황후'가 있고 그 아래로 정1품 '귀비, 숙비, 덕비, 현비' 이렇게 총 4명의 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 2품 총 9명의 후궁, 정 3품~정 8품까지 수많은 후궁들이 자리를 하고 있는데 당나라 황제는 공식적으로 121명의 후궁을 둘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후궁의 수가 많다 보니 측천무후는 시작부터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측천무후는 '정 5품 재인'으로 후궁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측천무후는 당 태종의 사랑을 받았을까요?
측천무후에게는 다른 후궁들을 제치고 위로 올라갈 자신만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매우 빼어난 미모를 소유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궁에 들어가자마다 당 태종은 측천무후에게 '꽃 같이 예쁘다'라는 뜻을 담아서 '무미(武媚)'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무미'는 '무씨 성의 귀엽고 애교스러운 아가씨'라는 애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빼어난 미모의 측천무후는 그녀의 바람대로 당 태종에게 총애를 받았을까요?
안타깝게도 당 태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두고서 측천무후의 성격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부분이 많은데 측천무후의 성격을 드러내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당 태종이 여러 후궁과 말 한 마리를 보러 갔습니다.
그 말은 워낙 성질이 사납고 난폭해서 도저히 길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당 태종과 측천무후가 어떤 대화를 내눴는지 자치통감(기언 전 403년~기원후 959년을 다룬 중국의 역사서)의 내용을 각색한 내용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당태종: 이 사나운 말을 어찌 길들여야 할지 그대들에게 묘안이 있는가?'
'측천무후: 제게 방법이 있사옵니다'
'당태종: 능숙한 말 전문가들도 하지 못한 일을 어린 소녀인 그대가 할 수 있다고?'
' 측천무후: 네. 먼저 말에게 쇠로 만든 채찍을 휘둘러 다스리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쇠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칩니다. 그래도 안되면 직접 비수로 말의 목을 따면 됩니다'
당 태종은 이때 측천무후의 잔인하고 대범한 기질에 좀 놀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사건이 원인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측천무후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었던 12년 동안 한 번도 품계가 올라간 적이 없었고 단 한 명의 그의 자녀도 낳지 못합니다.
7. 측천무후, 당 태종을 스승 삼아 학문과 통치술을 익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자신을 성장시키면서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특히 측천무후는 시와 서예 등 학문을 열심히 익혔습니다.
게다가 마침 이 시기는 당 태종이 당 제국을 태평성대를 이끌며 빼어난 통치를 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측천무후는 당 태종의 통치술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그를 스승 삼아 식견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8. 측천무후, '당 태종'의 병간호를 하며 그의 아들 '당 고종 이치' 만나게 되다
그런데 측천무후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당 태종이 4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병에 들어 자리에 앓아눕자 다른 후궁들과 돌아가면서 병간호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측천무후에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게 됩니다.
당시 아버지 당 태종의 병간호를 하러 아버지의 침소에 자주 드나들었던 18살의 태자 '이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황태자 이치의 성격은 좋게 말하면 온화하고 온순하다고 평가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어 황태자의 자질은 부족했던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이치를 태자로 만들어 훗날 황제로 세우고 이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조정 대신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9. 황태자 이치, 아버지 당태종의 후궁 측천무후에게 반하다
아버지 당 태종의 침소에서 한창 미모가 피어나던 막 22살의 측천무후와 18살의 젊은 황태자 이치가 자주 마주치는 일이 일어나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혈기 왕성한 황태자가 결국 측천무후에게 완전히 반해버리고 맙니다.
측천무후 역시 황태자를 보고 표현을 숨기지 않고 그들은 궁안에서 몰래 사랑을 키워나갑니다.
그렇게 연인이 된 측천무후와 황태자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당 태종의 사망이 임박해져 가는 상황에서 금단의 사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측천무후의 단호하고 강인하고 잔인한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온화한 황태자에게는 오히려 총명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다음 황제가 될 황태자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당 태종이 죽으면서 두 사람의 뜨거웠던 밀회는 싱겁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10. 측천무후, 당 태종이 죽고 당나라 예법에 따라 비구니가 되다
황태자 이치는 당나라의 세 번째 황제인 당 고종으로 등극하면서 측천무후를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아버지의 후궁을 자신의 후궁으로 올릴 명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태종의 죽음과 함께 측천무후의 인생은 완전히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후궁들은 당나라 예법에 따라 모두 절에 보내져서 비구니가 돼야 했습니다.
후궁들이 들어간 절은 장안 인근의 '감업사'라는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고인이 된 남편을 위해서 축도나 올리게 될 팔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화려한 궁중생활을 하던 후궁들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채 살아야 만 하는 그곳의 생활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이때 유일한 희망은 자신의 옛 연인인, 당 고종뿐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측천무후가 고종을 생각하며 쓴 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움에 눈물이 앞을 가려 오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물가물한다네. 비구니로 몰골은 초라한데 시간이 갈수록 그리움은 쌓이네. 상자를 열어 석류처럼 붉은 치마를 보시면 눈물 얼룩이 보이련만'
< 여의낭, 전당시 5권 中>
이토록 절실하게 고종과의 재회를 기다리던 측천무후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을까요?
11. 측천무후, 당 고종의 아들을 낳다
당 고종은 아버지 당 태종을 애도하는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당 태종이 죽은 지 1년이 되던 날, 당 고종이 태종의 서거 1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측천무후가 있었던 감업사에 가게 됩니다.
1년 만에 극적인 재회를 한 측천무후와 당 고종의 사랑은 또다시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당 고종은 틈만 나면 감업사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열렬하게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이때 이 두 사람의 사랑은 훗날 당나라에 큰 폭풍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비구니 신분이었던 측천무후가 황제의 아들인 '황자'를 낳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낳은 측천무후를 궁으로 데려가기에는 아직도 당 고종에게는 명분이 부족했습니다.
아무리 황제라도 한때 아버지의 후궁이었고 지금은 비구니인 여성을 궁으로 데려오기에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입니다.
12. 왕 황후, 당 고종에게 총애받으면서 자신을 험담하는 '소 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측천무후 입궐을 제안하다
그런데 이때 측천무후에게 궁으로 들어올 수 있게 손을 내밀어준 귀인이 등장합니다.
당시 당 고종에게는 베필이자 당 황제의 후손인 왕 황후가 있었습니다.
이때는 개국공신들의 힘이 여전히 강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강력한 개국공신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당 고종에게 짝지어준 인물이 바로 왕 황후였습니다.
이때 당 고종은 왕 황후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당 고종과 사이가 나쁘다 보니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왕 황후에게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던 경쟁자가 있었는데 바로 '소 숙비'라는 후궁이었습니다.
소 숙비는 비록 황후는 아니지만 미모가 아주 뛰어난 데다 말도 잘해 당 고종은 수많은 후궁들 가운데서도 소 숙비를 특별히 총애하며 둘 사이에 아들 한 명, 딸 2명을 낳기까지 합니다.
때문에 왕 황후로서는 소 숙비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당 고종과 총애를 받던 소 숙비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때마다 왕 황후가 관련된 험담을 했다고 합니다.
소 숙비가 당 고종과 왕 황후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이간질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왕 황후는 어떻게든 당 고종과 소 숙비를 떼어놓고 싶어 온갖 방법을 궁리하다가 궁궐 밖에 당 고종이 사랑하는 여인 측천무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왕 황후의 계획은 이랬습니다.
만약 당 고종이 총애하는 여성이 들어온다면 소 숙비와 측천무후가 당 고종을 놓고 치열하게 싸울 것이고 그 사이에 자신은 당 고종에게 다가가서 애정을 독차지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아래 왕 황후는 당 고종에게 측천무후를 황궁으로 데리고 오자고 직접 건의했습니다.
그동안 명분이 없어서 데리고 오지 못했던, 사랑하는 연인 측천무후를 데리고 올 수 있었기 때문에 당 고종은 왕 황후의 제안을 냉큼 수락합니다.
마침내 측천무후는 궁에서 내쳐진 지 4년 만인 그녀의 나이 서른 즈음에 그토록 원하던 당 고종의 후궁으로 재입궁을 하게 됩니다.
왕 황후는 측천무후의 야망 있는 모습과 관련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고 측천무후가 원래 선대 황제의 후궁 출신인 데다 고종보다 4살이나 연상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경계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왕 황후는 측천무후가 재입궁할 수 있도록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왕 황후의 편이 되어 소 숙비를 몰아내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13. 측천무후, 정치적인 지식과 뛰어난 판단력을 발휘하며 당 고종의 정치적인 조언자가 되다
이에 측천무후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왕 황후의 바람대로 행동합니다.
' 측천무후는 겸손한 말투에 신분까지 낮춰가며 황후의 시중을 들었다. 왕 황후는 매우 기뻐하며 황제 앞에서 여러 차례 그녀를 칭찬했다'
<자치통감 中>
그리고 왕 황후의 계획대로 궁궐 내의 판도는 완전히 뒤집힙니다.
예상대로 당 고종의 관심은 측천무후에게로 향했고 소 숙비는 완전히 냉대하게 됩니다.
이에 왕 황후는 자신의 계획이 맞아떨어졌다고 쾌재를 불렀습니다.
이렇게 황제와 황후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측천무후는 단번에 3등급이나 올라가서 '정 3품 소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측천무후는 다른 후궁과 견줄 수 업었던 강력한 무기가 큰 힘이 됩니다.
당 태종의 후궁 시절에 10년 넘게 배우고 익힌 정치적인 지식과 뛰어난 판단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당 고종의 정치적인 조언자로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결국 당 고종은 점점 측천무후에게 의지하게 되고 남녀사이에서도 정치적인 관점에서도 그녀에게 흠뻑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14. 측천무후, 딸의 죽음을 '왕 황후와 소 숙비' 숙청에 이용하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당나라에서 여인으로 태어나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황후의 자리를 노립니다.
왕 황후는 몰랐겠지만 소 숙비를 내치려고 측천무후를 데려온 것이 '여우를 쫒으려다 호랑이를 데려온 셈'이 된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왕 황후 앞에서는 바짝 엎드려 있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찾아옵니다.
측천무후가 입궁한 바로 그 해 겨울, 당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서 아주 예쁜 공주를 낳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왕 황후를 끌어내 기기 위한 방법으로 딸의 죽음을 이용합니다.
역사서 자치통감에서는 측천무후의 딸을 죽인 사람을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습니다.
'무 소의가 딸을 낳자 황후가 찾아와 영아를 보고 갔다. 황후가 나간 직후 무 소의는 어린 영아를 질식시켜 죽였다. 마침 고종 황제가 영아를 보러 오자 무 소의는 웃으며 황제를 맞이하고는 덮어놓았던 아기의 이불을 들추었다. 딸이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경악했다. 무 소의는 통곡하며 황후의 죄를 읍소하였다. '
<자치통감 中>
자치통감 기록에 따르면 측천무후의 딸을 죽인 범인은 바로 '측천무후'였습니다.
그리고는 왕 황후에게 뒤집어 씌웠고 이에 화가 난 당 고종은 시기심 강한 왕 황후가 공주를 죽인 살인범이라고 확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측천무후에게는 궁궐 내 인심을 사로잡았다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측천무후는 궁녀와 환관들에게 각종 선물을 주며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이 측천무후의 편을 들도록 해놓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딸의 죽음까지 이용한 측천무후는 그녀의 바람대로 황후가 되는 데 성공할까요?
당 고종은 조정의 대신들을 소집해서 왕 황후를 폐위하고 측천무후를 새로운 황후로 올리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때 대신들은 찬성, 반대파로 정말 나뉘어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양측에서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지던 이때, 찬성파인 한 대신이 상황을 정리해 주는 완벽한 명분을 만들어줍니다.
이 문제는 '황실의 집안일'이니 조정 대신들이 왈가왈부할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명분으로 당 고종은 왕 황후를 폐위시켜 버립니다.
심지어 당 고종은 왕 황후가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거짓 누명까지 뒤집어 씌우게 됩니다.
이때 소 숙비도 왕 황후와 같은 죄로 몰아서 함께 폐위하고 결국 왕 황후와 소 숙비는 별궁에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15. 측천무후, 왕 황후가 되어 '왕 황후와 소 숙비'를 참혹하게 죽이다
이렇게 라이벌을 제거한 측천무후는 드디어 655년, 황후에 책봉되었습니다.
목재상 출신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측천무후는 후궁과 비구니를 거쳐 마침내 대 제국 당나라의 황후가 된 것입니다.
당시 측천무후의 나이는 32살로 재입궁한 지 고작 2년 만에 황후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황후가 된 후 당나라 왕실에는 피바람이 몰아치게 됩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대숙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측천무후가 가장 먼저 제거한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왕 황후와 소 숙비'였습니다.
어느 날 당 고종은 왕 황후와 소 숙비가 생각이 나서 유폐되어 있던 별궁에 갔는데 사방이 막혀서 통제되어 있었고 두 사람은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서 아주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당고종과 왕 황후 그리고 소 숙비 사이의 대화 내용을 역사서를 각색한 내용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별궁에 있는 왕 황후와 소 숙비를 당 고종이 밖에 부릅니다.
당 고종: 왕 황후와 소 숙비는 어디 있소!
왕 황후: (흐느끼며) 폐하, 지난날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저희를 밖으로 내보내 주세요! 저희에게 다시 밝은 세상을 보게 해 주세요!
당 고종: 너무 불쌍하구려. 내 기필코 나갈 방법을 마련하리다. 약속하오! 빨리 다녀오겠소!
당 고종은 침소로 다급하게 돌아갑니다.
이 사실을 안 측천무후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측천무후: (싸늘하게) 폐하, 두 죄수들을 찾아가셨다지요? 폐하의 그 경솔한 태도를 세상 사람들과 조정 대신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당 고종: 내가 잘못했소. 그 둘은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그런데 측천무후는 어떻게 당 고종이 별궁에 간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이미 궁궐 곳곳에는 측천무후가 장악한 환관과 시녀들이 측천무후의 명을 받고 당 고종을 감시하며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측천무후는 왕 황후와 소 숙비 두 사람에게 즉각 보복을 합니다.
<구당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왕 황후와 소 숙비에게 먼저 곤장 100대를 때립니다.
피부가 다 터져서 피 범범이 되었고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두 사람의 손과 발을 잘라냈고 겨우 숨만 붙어 있는 몸통을 술독에 담그는 잔혹 행위까지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왕 황후와 소 숙비는 그 상태로 며칠간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측천무후의 눈 밖에 난 왕 황후와 소 숙비는 이렇게 자신이 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참혹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죽음을 앞두고 있었을 때 왕 황후는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체념을 했었던 것과 달리 소 숙비는 그 반대로 측천무후에게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내가 고양이로 태어나고 무씨가 쥐로 태어나면 영원토록 그 목을 물어버릴 것이다!'
이 저주 때문인지 이후 측천무후는 궁궐에서는 절대 고양이를 키우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16. 측천무후,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에 올리다
왕 황후와 소 숙비를 처참하게 죽인 측천무후는 곧장 두 번째 숙청 계획을 실행하게 됩니다.
바로 기존의 황태자를 폐위하고 측천무후의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당 고종과 다른 후궁 사이의 아들이 이미 황태자 자리에 있었는데 측천무후는 자신을 황후로 세우는데 도움을 준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서 당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합니다.
측천무후를 지지하는 대신들은 측천무후가 새롭게 황후가 되었으니 측천무후의 아들이 태자에 오르는 것이 법도에 맞다는 주장을 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측천무후의 계획대로 4살밖에 안된 측천무후의 첫째 아들 '이홍'이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쫓겨난 원래 태자는 몇 년 후 측천무후에 의해서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17. 측천무후,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개국공신들을 숙청하다
측천무후가 황후로서 자신의 위치를 탄탄히 해가던 657년, 아들을 태자로 세운 후 당나라의 국정에도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유약한 성격의 당 고종이 측천무후를 정치적인 파트너로 점차 의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당 나라의 국정은 측천무후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은 측천무후는 곧바로 세 번째 숙청을 계획합니다.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개국공신들에 대한 숙청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실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살벌한 인사 개혁을 단행합니다.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는 것을 반대했던 개국공신들을 멀리 지방으로 좌천시키거나 역모를 일으켰다고 몰아세워 그 가족들까지 처참하게 죽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측천무후에게 충성을 다하는 대신들로 조정을 채워갑니다.
이렇게 측천무후는 황후가 된 지 약 4년 만에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거의 대부분 제거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18. 측천무후, 아픈 남편 당 고종을 대신해 정치를 장악해 가다
측천무후는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을 없앤 후에도 권력을 향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660년부터 당 고종의 건강이 크게 악화가 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시력이 나빠져서 앞을 잘 보지 못하고 중풍으로 팔다리가 마비되어서 정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당 고종은 겨우 33살의 젊은 나이에 중병에 들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측천무후가 남편 당 고종을 대신해서 정치에 전면으로 나서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어전에 나갈 때마다 함께 입장을 하는 것은 물론, 황제가 몸져누워서 어전에 나오지 못할 때에는 아예 측천무후 가 혼자 어전에 나와 정무를 봤기 때문에 측천무후의 입김은 황제보다도 더 세지기 시작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뜻을 이루자 상벌 대권을 빼앗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꺼리는 것이 없었고 나약하고 우매한 황제를 핍박하고 속박하여 독자적으로 할 수 없도록 했다'
<신당서 76권 中>
심지어 '나라에는 이성(二聖)이 있다' 즉 '나라에는 성스러운 두 명의 황제가 있다'라고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19. 측천무후, 당 고종의 건강을 이유로 후궁의 수를 6명으로 줄이다
측천무후는 이때 당 고종의 병까지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합니다.
당 고종의 건강을 이유로 후궁의 수를 대폭 줄여버립니다.
원래 당 제국의 황제들은 공식적으로는 121명의 후궁까지 두었는데 측천무후는 후궁제도를 뜯어고쳐 단 6명의 후궁만 남겨버립니다.
황제의 애정을 잃게 되면 얼마나 처참한 결말을 맞는지 측천무후는 누구보다 더 잘 알았기 때문에 위험의 싹을 미리 잘라버리려 한 것입니다.
20. 측천무후 집권기, 기득권 관리들의 대숙청으로 왕권이 강화되어 당제국의 황금기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37살의 측천무후가 당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 당나라제국은 황금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측천무후가 일으킨 피의 숙청으로 확실한 황권강화를 이루어내면서 당나라 정치가 크게 안정되었던 것입니다.
당 고종 당시는 당 제국이 건국된 지 약 40여 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여전히 기득권 관리들의 힘이 너무나도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기득권 관리들의 숙청은 오히려 나라가 발전하고 황권을 굳건히 하는 데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21. 측천무후 집권기, 당나라는 영토까지 크게 넓히다
이를 바탕으로 측천무후 시대에 당나라는 영토를 두 배까지 크게 넓히게 됩니다.
측천무후가 집권하던 시기에 당제국은 주변에 말갈, 돌궐, 거란등과 싸워서 이기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국경까지 영토가 확장되면서 당나라 영토가 건국 이후 최대로 확대된 것입니다.
이렇게 영토가 확장되자 주요 실크로드까지 장악하게 되면서 이 시기에 동서 문화 교류도 활발히 일어납니다.
22. 측천무후 집권기, 백성과 당나라 발전을 위해 정책을 펴다
게다가 당시 측천무후는 백성들과 당나라 발전을 위해서 직접 '건언십이사 (조) (建言十二事)'라고 하는 이름의 열두 가지 국가방침을 내놨습니다.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가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세금과 노역을 줄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서도 발간해서 전국에 배포하며 민생을 돌봅니다.
그 결과 당나라의 곳간은 채워졌고 물가도 잡히면서 경제가 나날이 발전되어 가며 백성들의 삶이 더없이 살기 좋아졌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측천무후가 권력에 집착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는 과정은 아주 냉정하고 비정했으나 탁월한 정치감각과 결단력으로 당나라의 번영기를 이끌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23. 측천무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첫째, 둘째 아들을 제거하다
이런 상황에서 40대 후반이 된 측천무후에게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됐는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자신의 큰아들 '이홍'이었던 것입니다.
당 고종과 측천무후 사이에 4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큰아들 '이홍'은 4살 나이에 측천무후가 직접 태자의 자리에 앉혔던 인물입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황태자는 뛰어난 능력으로 조정 대신들의 지지를 받으며 서서히 조정의 실권자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아들이 강력한 황제로 등극하게 된다면 이제 제아무리 측천무후라도 권력을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황위를 이어받게 될 태자 이홍이 24살이 되던 해 갑자기 죽어버리게 됩니다.
미심쩍은 태자 죽음의 전말은 무엇일까요?
'소 숙비의 두 공주가 유폐되어 거의 마흔 살이 되도록 출가를 못 하고 있자 태자는 이를 측은히 여겨 고종 황제에게 혼사를 건의했다가 황후가 노하여 태자 이홍을 독살했다'
<신당서 中>
태자 이홍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기록 중에 <신당서>에 따르면 일찍이 측천무후가 죽인 소 숙비의 딸들을 태자 이홍이 불쌍히 여겼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인 측천무후가 그에게 독을 먹여 죽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자를 즉위시키기 위해서 정적들을 제거했던 측천무후가 더 큰 야망 때문에 아들까지 독살한 것입니다.
이후 둘째 아들 '이현'이 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첫째 아들보다 더 성품도 뛰어나고 현명한 모습을 보이며 조정 내에서 강한 지지를 받게 됩니다.
또다시 둘째 아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측천무후가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 뻔해진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측천무후는 태자가 된 지 5년 만에 반역죄로 몰아서 둘째 아들을 폐위시켜 버립니다.
몇 년 뒤 둘째 아들 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다음으로 셋째 아들 '이철'을 태자로 책봉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천추태후2
24. 측천무후, 당 고종이 죽고 왕위에 오른 셋째 아들 당 중종을 폐위시키다
그런데 683년, 또다시 측천무후의 운명을 뒤흔드는 대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 고종이 5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결국 측천무후의 셋째 아들 이철이 당나라의 네 번째 황제인 '당 중종'에 즉위하게 됩니다.
당 중종은 황제 자리에 오르자 어머니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한 판도를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즉각 측천무후의 귀에 들어갔고 측천무후는 당 중종이 즉위한 지 단 2개월 만에 폐위시키고 멀리 유배까지 보내버립니다.
25. 측천무후, 넷째 아들 '당 예종 이단'을 외부와 차단한 채 감금시키다
측천무후는 넷째 아들 '이단'을 왕으로 즉위시켰고 그는 당나라 5번째 황제 '당 예종'입니다.
그렇다면 측천무후는 넷째 아들이자 마지막 아들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측천무후는 당 예종을 아예 궁궐에 가둬놓고는 외부와는 소식조차 주고받지 못하게 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측천무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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