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사치와 권력을 향한 끊임없는 집착으로 청나라 멸망을 이끌다
1. 서태후, 혼란한 시기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으로 18세에 입궁하다
중국사 3대 악녀가 바로 청나라의 '서태후', 한나라 황제 유방의 부인 '여태후' 그리고 주나라 황제였던 '측천무후'입니다.
오늘 다룰 인물은 이 중 '서태후'입니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난징조약'으로 인해 영국에게 홍콩을 넘기고 몰수한 아편과 전쟁 배상금으로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게 됩니다.
그리고 광저우뿐만 아니라 상하이, 닝보, 푸저우, 샤먼 등 5개 항구를 개항하게 됩니다.
난징조약은 청나라에 아주 굴욕적인 조약이었고 이를 통해 청나라에 외세의 침입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서태후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이처럼 청나라는 큰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편전쟁이 끝난 지 8년 후인 1850년, 중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바로 '태평천국'(1850~1864)으로 청나라 말기에 농민 출신 '홍수전'이 창시한 종교단체에서 비롯된 농민 대봉기였습니다.
당시 청나라 백성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자연재해까지 덮치면서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한 태평천국을 만들자며 농민들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전봉준
이렇게 내우외환의 위태로웠던 시기였던 1850년, '함풍제'(1831~1861)가 20살의 나이에 청나라 제9대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함풍제의 고난은 즉위하자마자 시작됩니다.
청나라 군대는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려 했지만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게다가 함풍제의 첫 아내가 후사 없이 즉위 1년 전에 사망하였습니다.
따라서 황실의 혈통을 잇고 황실의 안정을 얻기 위해 1851년 '수녀 선발 제도'로 후궁을 선발하게 됩니다.
황후의 조건으로는 만주족 상류층의 14세~18세 중 병과 장애가 없어야 했고 주요 선발 기준으로 품행과 가문을 중시했습니다.
수녀 선발 제도는 이처럼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총 10명의 후궁을 선발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황제의 눈에 띄어서 궁에 들어오게 된 후궁이 바로 당시 18세에 '서태후'입니다.
2. 서태후, 동태후에 밀려 5등급 '귀인'으로 궁생활을 시작하다
그런데 서태후의 본명이 서태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신가요?
서태후는 자금성의 서쪽에 살아서 '서태후'라고 불린 것입니다.
당연히 자금성의 쪽에 살았던 동태후도 있습니다.
사실 중국에서는 '자희태후, 자안태후'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쓰지만 우리에게는 서태후, 동태후가 익숙한 호칭이라 그렇게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후궁의 등급은 황후 아래 7등급이 존재했습니다.
이 중 5등급 귀인으로 입궁한 서태후는 당연히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후궁에 선발되어 들어왔던 동태후는 후궁 선발 때 1순위로 들어와서 불과 40일 만에 4등급 '빈'에서 '황후'의 자리를 꿰찹니다.
당시 청나라 후궁들은 등급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감 수량과 품질, 음식의 양까지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3. 서태후, 황제 '함풍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다
자존심이 상한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서태후는 황제의 환심을 어떻게 사려고 했을까요?
하루는 기르던 고양이를 일부러 함풍제가 지나다니는 길목에 풀어놓고 고양이를 잃어버렸다며 눈물지으며 찾는 척을 했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눈물연기로 청순가련함을 어필해 함풍제의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이번에도 함풍제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서태후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함풍제를 유혹을 했습니다.
이외에도 서태후가 함풍제를 유혹했던 여러 가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중 노래로 함풍제를 유혹했을 것이라는 것이 가장 신빙성이 높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함풍제는 본인이 직접 연기하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경극을 좋아했고, 서태후는 이런 함풍제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이었습니다.
4. 서태후, 함풍제의 첫아들 황자 '동치제'를 낳다
마침내 서태후는 갖은 노력 끝에 함풍제의 관심을 얻고 합방에 성공합니다.
후궁들은 황실의 번영을 위해 황제의 자손을 낳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특히나 함풍제는 첫 번째 부인 '효덕현황후' 사별 후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이 후사가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청나라의 합방 문화에는 독특한 점이 있었습니다.
황제의 암살을 막기 위해서 황제의 침소에 들어가는 후궁들은 모두 알몸으로 털옷이나 이불을 걸친 채 환관들의 안내에 따라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마 서태후도 이런 방법으로 합방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태후는 입궁한 지 4년 만인 22살의 나이로 황자를 낳게 됩니다.
황후인 동태후도 갖지 못한 함풍제의 첫아들이었고 이 아들이 훗날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1856~1875)입니다.
이로서 서태후는 황후 다음 가는 지위와 황자의 모후라는 영향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5. 서태후, 텐진 조약에 불만을 가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수도 베이징 침략으로 황제, 아들과 함께 별궁으로 피난 가다
그러 던 중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1857~1860)하면서 청나라로 영국과 프랑스 , 미국, 러시아까지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1858년 6월, 이들에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청나라는 전쟁을 멈추고 텐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불평등 조약이었던 텐진주약의 주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첫째, 청나라에 10개 항구를 추가 개항 하라.
둘째, 영국에 400만 냥, 프랑스에 200만 냥을 배상하라.
그러나 청나라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 미국, 러시아 까지 모든 나라가 텐진 조약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수도 베이징으로 대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침략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함풍제는 서태후와 황자, 그 외 후궁들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어서 '열하'에 있는 별궁 ' 피서산장'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6. 함풍제의 이복형제 '공친왕', 베이징에 남아 자금성을 지키며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다
이때 도망간 황제 함풍제를 대신해서 수도 베이징을 지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함풍제의 이복동생이었던 공친왕(1833~1898)이었습니다.
함풍제와 공친왕은 어린 시절부터 황위를 두고 계속해서 경쟁했던 사이였습니다.
공친왕은 활발한 성격으로 외교적 자질이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친왕은 함풍제의 명을 받아 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함풍제를 대신해서 자금성에 남아 있었고 1860년 10월, 청나라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제국 3개국과 개별적으로 '베이징 조약'을 맺게 됩니다.
베이징 조약 주요 내용은 이러합니다.
1. 청나라는 톈진 조약의 내용을 이행한다.
2. 영국과 프랑스에 지급할 배상금을 2배로 늘린다.
3. 영국에 구룡반도, 러시아에 연해주를 할양한다.
7. '함풍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5세에 황제에 즉위하다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의 강자였던 청나라를 제패하며 청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무너 저 버립니다.
이렇게 서구 열강들이 침략해 오는 상황에서 서태후는 권력을 잡기 쉽지 않았습니다.
서태후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계기는 예기치 못하게 찾아옵니다.
열하에서 피신 생활을 하고 있던 함풍제가 1861년,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사망 당시 함풍제의 나이는 불과 31세였습니다.
그리고 서태후는 겨우 27살이었습니다.
함풍제가 죽은 이후 당시 5살인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가 황위에 오르게 되며 서태후는 황제의 어머니로서 황태후가 됩니다.
이로서 동태후와 서태후, 두 태후의 시대가 열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의 친어머니인 서태후가 권력을 잡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과정은 함풍제가 남긴 유언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었습니다.
함풍제는 서태후를 견제하기 위해서 어린 아들이 황위에 올라도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할 것을 예측해, 동치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동태후에게는 '어상'이라는 도장을 황제인 동치제에게는 '동도당'이라는 도장을 하사합니다.
대신들이 황제의 명을 발표할 때 첫 시작에는 '어상', 끝에는 '동도당'이 찍혀야 황제가 내린 정식 문서라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의사 결정에는 두 직인이 모두 필요했고 쉽게 말하자면 황제와 동태후에게 8 대신의 의견을 거절할 거부권을 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살이었던 황제 동치제의 도장인 '동도당'은 누구의 손에 들어갔을까요?
동도당은 바로 황제의 어머니 서태후의 차지였습니다.
8. 서태후, 동태후와 공친왕을 포섭해 신유정변을 일으켜 8 대신을 몰아내다
함풍제의 의중이라며 8 대신들이 어린 황제인 동치제를 앞세워 세력을 키워갔습니다.
서태후가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리 없었고 8 대신을 몰아내기 위해 두 인물을 포섭하기로 합니다.
바로 '동태후'와 자금성에 남아 있던 '공친왕'이었습니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공친왕의 속내를 미리 파악하고 손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861년, 이들과 함께 극비리에 궁중정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유정변'입니다.
함풍제의 조문을 온 공친왕은 며칠간 열하에 머무르며 두 태후와 함께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은 8 대신이 함풍제의 관을 들고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두 태후가 먼저 자금성에 도착하여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궁의 대신들을 설득해서 8 대신을 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공친왕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베이징 조약 때 친분을 맺은 영국 공사에게 미리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서태후는 자금성으로 돌아오자마자 동치제가 열하에서 두 태후의 수렴청정을 승인하라고 명을 내렸는데 8 대신이 마음대로 황명을 거부했다고 전달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즉각 처결해야 한다는 황명이 담긴 교지를 전달합니다.
당연히 다섯 살의 어린 동치제는 글을 쓸 줄 모르니 황명의 초고는 서태후가 작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계획대로 8 대신은 사형시키거나 유배지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리고 1861년 10월 9일(음력), 드디어 동치제의 황제 즉위식이 열렸습니다.
8 대신을 몰아내고 정변에 성공한 서태후, 동태후, 공친왕 시대가 개막한 것입니다.
어린 황제의 배후에는 실권을 차지한 세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9. 서태후, 공친왕의 목숨줄을 틀어쥐며 청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다
과연 서태후의 수렴청정 모습은 어땠을까요?
서태후는 이때 글을 모르는 동태후를 대신해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권력을 키워가던 서태후는 의정왕이라는 큰 권력을 가진 공친왕이 거슬렸습니다.
서태후와 공친왕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서태후는 권력을 나눠 갖는 것이 불안한 나머지 공친왕을 내칠 한 가지 묘수를 떠올립니다.
바로 황제의 이름으로 공친왕을 의정왕에서 파면한다는 황제의 교지를 내립니다.
그렇다면 서태후는 공친왕을 어떤 죄목으로 내쳤을까요?
'공친왕이 국가의 대사를 논의한 이래, 거리낌 없이 거만하게 행동하고 매우 교만하며 군주는 안중에도 없었다. 짐을 어리게 보고, 수없이 억누르며 암암리에 자주 이간질하여 자세히 정사를 물을 수가 없었다'
<공친왕 파면 상유문 초고>
당연히 이 교지는 서태후가 작성한 것이었는데 서태후는 대체 왜 이런 죄목을 적은 것일까요?
야사에 따르면 공친왕이 두 태후와 정무를 논하는 자리에서 태후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 들었을 때, 불경스럽게 다시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논쟁을 벌이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상하관계를 확실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공친왕은 서태후에게 엎드리며 죄를 뉘우쳤고 관료들 또한 공친왕 구제에 힘을 합칩니다.
실질적인 정무를 담당했던 공친왕이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우게 되면 정사가 잘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친왕은 서양사람들과도 교류가 두터워 신식문물을 받아들이거나 그들과 소통하는데 쓸모가 여러모로 많았던 것입니다.
서태후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에 공친왕의 의정왕 직위는 박탈하되 그가 자신의 손 안에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관직만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공친왕의 목숨줄을 서태후가 틀어쥐게 되며 서태후는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청나라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됩니다.
10. 서태후, 외모 치장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다
스물일곱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서태후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서태후의 시중을 들었던 궁녀의 말에 따르면 서태후는 외모 치장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옥용산'이라는 화장품으로 세수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옥용산의 원료는 바로 미백효과가 있다는 속설이 있었던 '새똥'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주가 피부를 윤택하게 만든다고 믿은 서태후는 진주를 갈아먹기도 했으며 정기적으로 진주 가루를 복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백국화, 인진, 곡정초 등 꽃과 약재로 목욕하기를 즐겼는데 때때로 달걀흰자와 돼지기름을 섞어만든 한방기름으로 전신 마사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젊음을 위해 갓 출산한 산모 2명을 불러서 서태후가 직접 모유를 마시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산모들은 젊고 건강하고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골랐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측천무후2
이렇게 선택된 산모들은 서태후에게 수치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 얼굴을 가린 채 가슴만 내놓고 무릎을 꿇은 채였고 서태후가 직접 모유를 빨아 마셨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이런 식으로 늙을 때까지도 계속 모유를 마시면서 청춘을 유지했다는 설이 존재합니다.
서태후가 피부만큼이나 관심이 많았던 것이 바로 머리치장이었습니다.
환관은 종종 서태후의 명으로 베이징 거리에 나가 여인들의 머리스타일을 관찰한 후 그중 예쁜 스타일을 골라 서태후에게 선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서태후는 3~5일에 한 번씩 새로운 머리스타일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미용 때문에 '탈모'라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탈모에 예민해진 서태후는 혹여라도 궁녀들이 빗질을 하다 빠진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하면 매질을 할 정도로 탈모에 민감했다고 합니다.
11. 서태후의 행보에 동태후가 제동을 걸다
그런데 평화롭게 자금성을 차지하고 앉아 권세를 누리던 서태후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동태후'였습니다.
서태후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동태후는 왜 서태후와 갈등을 일으킨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서태후의 스캔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함풍제가 죽고 난 후에 젊은 나이에 관세를 쥔 서태후를 두고 모종의 소문이 돌았습니다.
'서태후가 젊고 잘생긴 경극 배우를 몰래 궁 안에 들였다'
바로 서태후가 남자를 밝힌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게 된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황제인 동치제의 황후를 간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성년이 된 동치제의 황후 간택 방식은 바로 서태후가 입궁했던 '수녀 선발 제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서태후에게 황후 간택은 단순히 자신의 며느리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동치제가 성인이 되어 직접 정치에 나서게 될 때, 자신의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족이 되어 줄 자신의 편인 며느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동치제가 생모인 서태후의 뜻을 감히 무시하고 동태후가 추천하는 인물을 황후로 선택합니다.
바로 '효철의황후'(1854~1875)입니다.
서태후는 동치제의 선택에 분노했고 이 일로 단단히 마음이 상한 서태후는 동치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으니 학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황후의 침실에 드나들지 말라'
서태후가 동치제와 황후의 합궁을 막았던 것입니다.
12. 동치제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서태후는 며느리 '효철의황후'마저 자결로 생을 마감하도록 종용하다
꼭두각시 황제였던 동치제는 동침에서까지 가르침을 주려했던 서태후의 괴롭힘 때문에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환관들은 이런 동치제를 위로하겠다면서 그를 기생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런데 동치제의 방황은 예기치 못한 결말로 이어집니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20살의 나이로 동치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것입니다.
황제 동치제의 사망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그의 행적 탓에 사인이 매독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청궁유문>
'발열과 현기증, 가슴 답답함, 병든 다리, 피부에 발진, 때로는 숨이 막힌다'
<옹동파일기 10월 21일>
<청궁유문>이라는 책에 보면 동치제가 매독에 걸렸다는 내용이 있고 동치제 스승이 쓴 <옹동화의 일기>에는 매독이 의심되는 동치제의 증상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황실 공식자료나 어의의 처방전에 나오는 동치제의 공식적인 사인은 '천연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태후에게는 동치제의 죽음 이후 며느리인 황후가 눈엣가시가 됩니다.
아들 동치제가 병으로 앓아눕자 서태후는 며느리인 황후의 탓으로 돌리며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황후가 병문안을 하러 동치제를 찾아갔는데 서태후는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무자비하게 끌어낸 다음, 종아리를 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국 효철의황후는 동치제가 사망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결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효철의황후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서태후가 황후에게 황제를 따라가라며 자살을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서태후가 황후에게 자살을 강요한 이유가 야사에 적혀있기도 합니다.
바로 황후가 동치제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그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이 더 이상 섭정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후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여인들은 당시 귀족집안의 여자였고 황후 또한 그러했습니다.
죽음에 내몰린 황후는 친정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서태후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던 황후의 친정아버지는 '답은 황후께서 알고 계실 겁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왔고 이 말은 서태후의 뜻에 따라 자결하라는 내용과 같았습니다.
13. 서태후, 자신이 수렴청정하기 위해 어린 조카 '광서제'를 황제에 올리다
동치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청나라 황실이 큰 혼란에 빠졌을 때 서태후는 발 빠르게 다음 황제를 물색합니다.
바로 서태후의 조카로 당시 4살이었던 '광서제'였습니다.
사실 서태후의 조카 광서제는 황제가 되기에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광서제의 황제 즉위를 두고 논란이 많았지만 서태후에게는 황제가 어릴수록 수렴청정을 통해서 자신이 더욱 오랫동안 권력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뜻을 꺽지 않았습니다.
결국 서태후의 위세에 눌린 관료들은 이 결정 반대하지 못합니다.
서태후는 이처럼 어린 광서제를 앞세워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해나갑니다.
14. 서태후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동태후' 갑작스럽게 사망하다
그리고 서태후에게 마지막 걸림돌은 동태후였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동태후에게는 무기가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함풍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에게 교지를 남겼는데 그 내용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만약 서태후가 아들을 믿고 권력을 휘두르면 그녀를 죽여라'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함풍제의 교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눈치를 보면서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동태후가 아파서 앓아누웠을 때 서태후가 자신의 피로 감기약을 지어주자 이에 감동한 동태후가 눈물을 흘리며 함풍제의 교지를 불태워줬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광서제가 10살이 되었을 때, 동태후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동태후의 죽음을 두고 서태후가 동태후를 독살하고는 서태후 혼자 권력을 독점하려 했다는 의문이 쏟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정황에도 동태후의 공식적인 사인은 뇌출혈이었습니다.
15. 서태후, 정사에서 물러난다고 했지만 주요 결정은 자신을 거치도록 하다
광서제에게 서태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광서제는 서태후의 엄격한 통제하에 늘 비판과 질책을 받으며 훈육되었기 때문에 서태후를 두려워했습니다.
서태후는 그런 광서제의 모습을 보고 늘 언짢아했습니다.
이렇게 서태후 아래에서 숨죽여야 했던 꼭두각시 황제로 지내온 광서제가 결혼할 나이인 열여섯 살이 되며 점점 서태후의 간섭을 참을 수 없게 되어 갑니다.
청나라 황법에 의하면 황제는 16살에 황후를 정하고 친정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혼인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후 책봉을 계속 미룹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광서제가 궁궐의 유리를 깨트릴 정도로 난동을 부립니다.
이후 서태후는 광서제가 난동을 피운 2일 후에 바로 광서제의 대혼식의 날짜를 정하고 자신도 섭정을 끝내고 권력을 모두 내려놓겠다고 선언합니다.
하지만 서태후가 이렇게 쉽게 권력을 내어줄 리 없었습니다.
서태후는 주요 인사를 임명하거나 국가의 중요 사안을 결정할 때는 황제가 명을 내리더라도 반드시 자신을 거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광서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태후는 자신의 조카인 '융유황후'와 혼인을 강행합니다.
서태후는 자신의 권위에 절대복종할 황후를 원했기 때문에 조카를 황후에 앉혔고 이는 서태후의 권력을 위해 벌어진 원치 않은 사촌 간의 혼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융유항후는 결혼 당시 광서제보다 3살이 더 많은 21살이었다고 합니다.
관례상 황제의 정비가 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던 것입니다.
16. 청의 몰락을 앞당긴 원인 1. 서태후의 사치
서태후 때문에 원치 않은 황후를 맞이한 18세의 광서제는 친정을 앞두고 서태후와 멀어질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 위해 서태후의 오랜 꿈을 이루어주기로 하는데, 바로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서 파괴됐던 황실정원 '청의원'을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서태후는 이화원 복원을 위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치를 이어갔고 그 돈을 충당하느라 청나라의 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배상금을 갚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화원 복원에만 약 은 800만 냥이 넘게 들었다고 합니다.
이 돈은 당시 청나라 한 해 예산의 약 10%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이었습니다.
서태후의 사치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태후는 옷과 장신구, 손톱까지 철저히 관리했습니다.
만주족 여자들은 손톱을 1cm 이상 기르는 풍습이 있었고 긴 손톱을 손톱을 보호하기 위해 썼던 장신구인 '호갑투'를 활용했습니다.
특히 후궁들의 호갑투는 금, 은, 동, 바다거북 껍데기 등 값비싼 보석으로 만들어서 굉장히 화려했습니다.
호갑투도 모든 여자가 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태후와 같은 최상류 층 여성들 특히 황실 여성들이 주로 애용했습니다.
또한 서태후는 최고급 순백 비단에 장인이 한 땀 한 땀 7~8일 동안 화려한 자수가 놓은 버선을 신었는데 서태후는 한 번 신은 버선은 다시는 신지 않아 당시 약 3천 명이 시녀가 투입돼 서태후의 버선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버선을 만드는 데에만 당시 황족이 받는 1년 연봉에 가까운 일 년에 약 은 1만 냥 정도가 쓰였습니다.
서태후가 옷 위에 걸친 것은 바로 300여 개의 진주로 만든 '진주 망토'입니다.
이를 포함해 서태후 사후에 그녀의 옷이 700박스가 넘게 발견되었다고 이야기가 있을 만큼 서태후는 치장이나 의상에 굉장히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게다가 목욕 후에 사용하는 수건에까지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것을 이용했다고 하며 이 수건 또한 몸에 헌 번 댄 것 다시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태후는 과일의 향을 좋아해서 항아리에 신선한 사과를 넣어 디퓨저처럼 사용했는데 환관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사과로 바꿔야 해서 이러한 용도로 사용했던 사과만 1년에 약 15만 개였습니다.
17. 청의 몰락을 앞당긴 원인 2. 청일전쟁
광서제는 호시탐탐 서태후의 간섭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1894년 바로 그때,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서구 열강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던 청나라지만 동양의 작은 나라였던 일본과의 전쟁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9세기 후반 청나라는 북양대신이라는 '이홍장'등 양무파의 주도하에 청나라의 부국강병을 목표로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진행하면서 가장 신경 쓴 목표는 해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1871년 북양함대, 남양함대, 복건함대, 광동함대 이렇게 네 개의 서양식 함대가 만들어졌습니다.
네 개의 함대 중에서도 최고의 함대로 불린 북양함대를 필두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해군 함대를 구축합니다.
이렇게 청나라가 양무운동으로 아시아 최대 함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도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광무제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기를 원했습니다.
게다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 광무제 스스로가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꼭두각시 황제였던 광무제에게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라는 타이틀이 무엇보다 필요했습니다.
결국 1894년 9월 17일, 압록강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의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해전이 벌어집니다.
압록강 앞바다 황해에서 펼쳐진 청나라와 일본의 '황해해전'이 시작되었고 청나라는 세계 최대급 전함인 '정원호, 진원호'등을 포함한 12대를 내세운 북양함대가 출격합니다.
이에 맞서는 일본 연합함대는 주력 함대 '나니와호, 요시노호' 등 10척의 함대를 출격시킵니다.
일본군은 청나라에 비해 크기가 작고 속도가 빠른 쾌속함을 동원합니다.
청나라는 전함을 횡으로 줄을 세워서 함대 대포로 공격하는 전술을 썼습니다.
이 전술은 꽤 유용한 전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어땠을까요?
일본군은 상황에 따른 유연한 전술을 펼치면서 스피드와 속사포를 이용합니다.
일본군은 쾌속선을 이용한 기동전술로 청나라 함대를 격퇴시켰습니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청나라가 자랑하던 주력 함대 12척 중 군함 5대가 침몰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주력 함대 10척 중 단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최강이라던 북양함대의 대 참패였습니다.
18. 서태후, 사치와 생일잔치에 투입된 비용이 청일전쟁 패배의 한 원인이 되다
바로 이때 북양함대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은 당시 답답한 심경을 글로 남겼습니다.
'아래(일본)에서는 신식 쾌속선을 주문하는데 우리 군은 창건 이후 단 한 척도 증강하지 못했다. 모두 신의 책임이다'
<이홍장>
이홍장은 신식 군함을 더 늘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자책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왜 군함을 살 군비가 부족했던 것일까요?
당시 서태후의 환갑연에 궁전치장, 물품구비등에 소요된 경비가 약 은 3,600만 냥이 었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1년 예산이 약 은 8,000~9,000만 냥이었고 서태후의 환갑연에 투입된 경비가 청나라 1년 예산의 약 3분의 1 이 넘었던 것입니다.
이 돈은 또한 약 20년 가까이 청나라가 해양 방어에 들인 비용의 5분의 4에 해당하는 엄청난 비용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서태후의 생일잔치가 없었더라면 이를 위해 소요된 돈으로 국가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력 강화에 더 힘을 쏟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서태후의 사치와 생일잔치 때문에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말하는데 이런 이유를 봤을 때 전혀 틀린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심지어 이렇게 치러진 환갑잔치가 축소되어 치러진 것이었습니다.
서태후는 자금성에서 2300여 km 떨어진 열하에 있던 '피서산장'에서 원래는 더욱더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으나 전쟁이 터지니 그나마 축소해서 자금성에서 20여 km에 위치한 이화원 근교에 있는 곳에서 하는 것으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19. 청나라, 청일전쟁의 패배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다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결과 1895년 4월, 청나라와 일본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됩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는 일본에 전쟁 배상금으로 이자를 제외하고도 약 2억 3,150만 냥을 지불해야 했으며 이는 청나라 1년 예산의 3배 가까이 되는 돈이었습니다.
아편전쟁 배생금에 비해 무려 15배가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결국 청나라 재정은 파산 직전에 몰리게 됩니다.
게다가 영국, 러시아, 독일은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이후 더 적극적으로 청나라에서 이권을 챙겨갔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북양함대의 사령부가 있었던 '위해'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독일은 청도, 러시아는 여순을 차지하고 대규모의 군함과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칭따오 맥주는 이때 손에 넣은 독일 회사가 만든 맥주입니다.
20. 서태후, 광서제가 '원세개'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을 원세개의 폭로로 알게 되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가 서서히 몰락해 가던 이때, 청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서태후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때 청나라의 지식인들은 청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대대적인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무술변법(변법자강운동)'입니다.
낡은 법을 고쳐서 국력을 강화시키자는 것이었고 광서제는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때 고치겠다는 청나라의 낡은 법에는 서태후가 정치간섭을 하는 수렴청정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광서제 입장에서는 대환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태후는 어땠을까요?
당연히 서태후는 반발하였고 반발에 부딪친 광서제는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리게 됩니다.
바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서제에게는 그만한 군사력이 없었습니다.
이때 광서제와 그의 측근들이 떠올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청일 전쟁 이후 청나라 신식 군대의 수장이었던 '원세개'였습니다.
과연 광서재는 원세개와 함께 서태후를 몰아낼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광서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고 맙니다.
정치가이기도 했던 원세개가 서태후와 광서제를 저울질하다 결국 서태후 편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서태후에게 광서제의 쿠데타 계획을 전부 폭로해 버립니다.
21. 서태후, 서구열강과 관료들의 반대로 광서제를 폐위시키지 못하고 자금서에 감금시키다
이에 분노에 찬 서태후는 황제로 앉힐 어린아이를 물색하기 시작합니다.
광서제를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고 나섭니다.
광서제의 의도대로 청나라가 서구식으로 정치가 바뀌면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는 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청나라의 많은 관료와 지식인들도 반대합니다.
'천자는 황제인데 황제를 태후가 마음대로 바꾼다는 것은 나라를 뒤흔드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약해질 대로 약해졌기 때문에 서태후는 서구 열강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시키는 대신에 자금성에 감금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광서제와 함께 개혁을 주도하던 세력도 처형당하고 피신하게 되면서 무술변법은 허무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22. 청의 몰락을 앞당긴 원인 3. 의화단
광서제의 유폐 사건을 계기로 서태후는 엄청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청나라의 일인자인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 서구 세력을 청나라에서 몰아낼 결심을 한 것이었습니다.
서태후는 서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18세기부터 활동하던 비밀 종교 결사 조직을 끌어들이기로 합니다
바로 '의화단(義和團)'입니다.
의화단은 유교와 도교, 불교 등이 뒤섞여 있는 일종의 민간 종교 집단 또는 비밀 결사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청조를 지키자'는 기치를 걸고 외세에 맞선 다는 명목으로 주로 무술을 익히는 무술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의 훈련 방법은 아주 독특했습니다.
서양의 무기였던 총은 사용하지 않고 재래식 칼과 창으로만 무장 한채, 훈련을 했습니다.
'백일 동안 권법을 익히고 주문을 달달 외우면 창과 칼에 찔려도 피가 나지 않으며 400일 동안 수련을 계속하면 하늘을 나는 마법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의화단은 유교와 도교, 불교 등이 뒤섞여 있어 여러 신을 숭배했습니다.
여러 신 중 하나가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과 저팔계였습니다.
그 외에도 토속신앙이나 소설 속 주인공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서태후는 왜 이렇게 수상해 보이는 의화단을 이용했을까요?
서태후와 의화단 모두 서양인을 싫어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화단에 들어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은 농빈들이었습니다.
청일전쟁 패배 이후 막대한 배상금은 결국 청나라 백성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으로 충당했으므로 백성들 입장에서 서구 세력이 달갑게 보일리가 없었습니다.
서구 열강에 대한 분노가 점점 커졌던 희화단은 청나라의 부흥을 가져오고 서양을 멸하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베이징으로 진격합니다.
이때 의화단의 수가 약 2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베이징에 들어온 의화단은 서양인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살육하기 시작합니다.
의화단은 교회와 외국인 거처를 불태우고 기독교를 믿는다면 청나라 사람들까지 예외 없이 죽이거나 생매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인 여성들은 의화단에 의해 겁탈, 약탈, 능욕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의화단의 세력이 점점 커져 서양인들의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서태후마저 의화단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1900년 6월 서구 열강들은 연합군을 조직하게 됩니다.
서구 열강의 연합군들은 자국민 보호와 의화단을 진압하다는 명목으로 청나라에 입성합니다.
당시 연합군에는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이탈리아가 있었습니다.
서구 열강의 이런 행보에 서태후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서태후는 겁을 먹거나 기가 죽기는커녕 서구 열강 연합군에 강경하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하지만 톈진에 배치된 청나라 해군은 서양 연합군의 모습에 압도되어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바로 백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잔혹하기는 했지만 특별한 전술이 없는 오합지졸이었던 의화단은 겁에 질려 그 세력이 순식간에 와해되며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서구 열강 연합군은 톈진을 함락하고 곧바로 수도 베이징까지 빠르게 진출합니다.
결국 1900년 8월 13일, 서태후는 연합군의 손에 넘어간 베이징을 버리고 광서제를 데리고 '시안'으로 도주합니다.
23. 서태후, '신축조약'도 교묘하게 빠져나가다
서태후가 버리고 간 수도 베이징에는 끊임없이 서구 연합군의 군대가 밀고 들어왔고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이 당했던 것처럼 청나라 사람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연합군은 청나라 백성들을 참수형으로 목을 사정없이 벤 후 인증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의화단 못지않게 서구 연합군들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잔인한 행보를 보인 것인데 사실 청나라에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1901년 9월 7일, '신축 조약'을 맺으면서 서구 세력을 간신히 베이징에서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신축조약 주요 내용은 이랬습니다.
1. 의화단 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한다.
2. 청나라는 연합군 8개국에 4억 5천만 냥을 40년에 나눠 갚는다.
3. 외국군의 수도 주둔을 허용한다.
우선 연합군은 고위관료 12명의 처벌을 요구했고 그 외에도 119명의 지방 관료들이 사형 또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건의 책임자인 서태후의 처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의화단 운동의 책임자였던 서태후는 신축조약에서 사형하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서태후는 본인의 책임은 빼고 다른 조건들을 수용합니다.
결국 서태후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베이징으로 복귀합니다.
그리고 각국 대사의 아내들을 궁으로 초대해 파티를 통해서 친분을 쌓고 자신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4억 5천만 냥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 돈은 당시 청나라의 약 5년 예산에 달하는 만큼의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24. 광서제, 독살당하다
서태후는 청나라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사치스러웠고 권력에 대한 욕심 또한 한시도 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정한 시기에 광서제는 서태후에게 힘없이 밀려난 상태로 목숨만 겨우 연명하다가 끝내 1908년 사망하고 맙니다.
광서제 사망 당시 서태후의 독살에 의한 사망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실제로 2008년 광서제의 시신을 확인한 결과, 머리카락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면서 독살로 인한 사망이 사실로 밝혀집니다.
물론 서태후가 독살을 명했는지는 밝혀진 사실이 없기는 하지만 정황상 광서제의 사망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은 서태후가 유력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25. 서태후,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황제로 결정한 후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다
서태후는 광서제 사망 직전 3살 배기 어린아이 한 명을 데려와서 황제로 임명할 계획을 끝마쳤습니다.
바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입니다.
선통제 푸이를 황제로 결정한 후 서태후 역시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합니다.
서태후는 죽어서까지도 사치를 이어가는데 황제인 광서제보다 서태후의 장례비용이 3배가 더 들었다고 합니다.
이만큼 죽어서도 서태후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항간에는 장례 비용 대부분이 서태후와 함께 묻힌 비단과 보석에 사용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도굴꾼들은 서태후의 무덤을 파헤쳐 보석을 모두 훔쳐갔기도 했습니다.
26. 서태후의 사망과 함께 청나라도 멸망하다
청나라의 썩은 기둥이었던 서태후의 죽음 이후 청나라는 급격히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무능한 청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혁명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청나라는 끝내 멸망하고 맙니다.
약 300년간 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던 청나라는 끝내 멸망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맙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기황후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스터디 위드 돈벌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에스단석, 친환경 자원순환 사업 국내 수출 점유율 1위기업 (0) | 2023.12.14 |
---|---|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 죽어서까지도 손가락질받다 (0) | 2023.12.13 |
중국 역사 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측천무후, 희대의 악녀였을까? 위대한 통치자 였을까?(1) (2) | 2023.12.07 |
상궁 김개시, 광해군을 쥐락펴락하며 권력을 탐하다 (1) | 2023.12.06 |
나폴레옹, 프랑스의 영웅과 독재자 사이 두 얼굴! (3) | 2023.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