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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영화 보기 전 미리 예습하기(12. 12 신군부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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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영화 보기 전 미리 예습하기(12. 12 신군부 쿠데타)

1. 10. 26 사태로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 시해

1979년 이 땅 대한민국에서 신군부가 주도한 '12.12  사태'가 있었습니다.

'신군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박정희의 군부와 비교하기 편하게 '새로운 군'부라고 표현을 붙인 것입니다.

1979년 8월에 YH 무역회사 사건으로 인해서 '김경숙'이라는 여공이 신민당 당사 농성 중에 죽게 되고 당시 신민당의 총재였던 김영이 외신 기자들을 불러 모아서 박정희를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일개 국회의원이 감히 국가 원수를 모독한다고 하면서 1979년 9월,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합니다.

그렇다 보니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1979년 10월에 있었던 '부마항쟁'입니다.

이 부마항쟁이 한창 일 때 박정희가 1979년 10월 26일에 10.26 사건으로 죽게 됩니다.

2. 전두환, 하나회를 중심으로 12.12 군사 쿠데타를 벌이다 

전두환은 여러모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었습니다.

박정희가 시해당한 1979년에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었습니다.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

당시 나라 정보망을 관장하는 기구가 '중앙정보부'였는데 국가 이인자였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 시해 당사자로 체포돼 있는 상태였고 일인자 박정희 대통령도 죽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경호실장 '차지철'도 죽어버립니다..

박정희 정부에서 이인자는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

박정희 정부에서 중앙정보부장을 거쳐간 사람으로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김재규'등이 있습니다.

대신 박정희 정부에서 '총리'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박정희 시해 당시 총리는 '최규하'였고 박정희가 죽은 후 그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됩니다.

그리고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생전에 박정희가 72년 7차 개헌으로 유신헌법 만들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2,500명 정도가 선거인단들이 모여서 선출하는 방식 바뀌었고 그 유신체제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것입니다.

 

남분 분단국가에서 대통령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에 대통령이 총을 맞고 서거했기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로 계엄이 선포돼 있는 상태였습니다.

'계엄'이란 전쟁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발생되는 긴급 조치를 말하며 나라의 행정, 사법을 군대가 맡아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승화
정승화

이때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었습니다.

전두환
전두환

대통령 최규하도 마찬가지였지만 정승화 계엄사령관 역시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10.26 관련 모든 수사를 총괄 지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 있었던 전두환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두환은 육사 11기 생도출발해서 엄청난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리더였습니다.

하나회는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꾸려진 군대 내 사조직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 중심의 군인들이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이런 생각을 했을 때 최규하나 정승화 둘 다 끔찍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승화가 전두환을 견제해 그를 동해안 경비대로 전출을 시켜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미 모든 정보망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전두환에게도 그 소식이 전달되고 맙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정승화 계엄사령관 체포

그리고 계엄상태의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보안사령관이 체포해 버리는 사건이 터집니다.

쉽게 말해 별 2개짜리가 별 4개짜리를 체포해 버린 사건이 바로 12.12  사태입니다.

이때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10.26 시해 현장에서 김재규의 초청으로 박정희가 시해된 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있는 방에 가서 술을 한잔 마시고 난 후 박정희가 있는 방으로 와서 술을 마시다가 박정희를 시해했습니다.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에 정승화가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해 버린 것입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체포는 쿠데타인데 쿠데타 소리를 듣기 싫으니 당시 대통령인 최규하에게 허가를 받고 싶었던 전두환은 이를 이유를 들어 최규화에게 허가 도장을 찍어달라 요청합니다.

하지만 최규하가 이에 대해 도장을 찍어주지 않습니다.

즉 이 사건은 국군통수권자의 허가를 받지 않은 빼도 박도 못한 '쿠데타' 였던 것입니다.

3. 12. 12 사태 당시 도망갔던 노재현 국방부장관에 대한 아쉬움

노재현
노재현

당시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방부장관이 뛰어났어야 되는데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총소리를 듣고 가족들하고 도망쳐 숨어버립니다.

현대사의 비극인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장면 총리가 수녀원으로 숨어버렸던 것과 비슷하게 12.12  사태가 일어났을 때 국방부장관 노재현이 숨어버렸기 때문에 지휘체계가 일사불란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하나회를 막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4. 그럼에도 쿠데타를 막으려는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과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그리고 '김오령 중령'이 있었다 

서울 근방에는 2개 부대, 수도경비사령대와 보안사령대가 있었습니다.

장태완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장태완 소장이었습니다.

장태완 소장은 육사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장군까지 된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장태완은 하나회 출신들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병주
정병주

그리고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은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9 공수여단이 서울로 진격해서 전두환이 이끄는 하나회 일당의 군인, 노태우, 김복동, 정호용, 허화평, 허삼수, 장세동, 황영시, 유학성, 박희도 등을 모두 체포하려고 합니다.

그때라도 9 공수여단이 서울로 치고 들어왔으면 하나회 일당들은 모두 체포되고 쿠데타는 종결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하나회 중 한 명인 노태우는 훗날 이때를 자신의 회고전에서 '자살까지 생각했을 정도였다'라고 표현하는 쿠데타 세력들에게는 일촉즉발의  위기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회 일당들은 여기저기 전화해서 인맥을 동원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9 공수여단이 서울로 진입해 서울 내에서 우리 군인들 끼지 내전이 일어나서야 되겠냐'며 '그럼 북한의 침략은 어떻게 막으려고 하느냐'며 육군본부 쪽에 9 공수가 여단이 돌아가도록 회유를 합니다.

대신 전두환은 전방에 있는 군대를 부르지 않을 테니 9 공수도 돌아가게 하자는 '신사협정'을 맺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이렇게 전두환을 믿고 그야말로 무능력했던 육군본부는 9 공수를 철수시킵니다.

그때 9 공수만 서울로 들어왔으면 전두환은 당시 쿠데타 주도자로 체포되어 응징의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9 공수가 부천에서 군대를 돌려 버립니다.

이후 육군본부와의 약속을 어기고 전두환의 하나회 명령을 받은  1 공수, 3 공수, 5 공수여단이 서울로 들어옵니다.

이때 전차부대까지 보유하고 있었던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은 전두환에 맞서게 됩니다.

김오랑
김오랑

그러나 정병주 특전사령관 역시 체포당하고 그 과정에서 정병주 소장의 경호실장 김오랑 소령은 정병주 소장을 지키기 위해 총격전 중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태완 소장은 끝까지 전두환을 막으려고 분투합니다.

하지만 당시 최정방을 지키고 있는 9사단의 사단장이 노태우였고  최전방의 9사단까지 빼서 장태완을 포위해 버립니다.

대통령이 서거한 상황이고 북한의 침략이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의 군사력과 북한의 군사력 차이가 말도 안 되게 차이 나게 우리나라가 압도적으로 좋지만 당시에는 그렇다고 말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남북 분단의 나라에서 자신의 사적인 권력을 잡기 위해서 북한에 대치 중인 최전방의 부대까지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이나 체포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우리끼리 피 흘리지 말자'라고 묵인하게 되고 장태완 소장 역시 체포당하게 되면서 12.12 군부 쿠데타가 성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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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두환, 쿠데타 성공 후 8차 개헌을 통해 7년짜리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꼭두각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는 1979년 12월 21일 대통령에 취임하지만 권력 없는 허울뿐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1980년 5월, 광주에 학살을 기획하고 같은 해 9월 최규하를 밀어내고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역시 유신체제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됩니다.

박정희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전두환은 스스로 1980년 10월에  '8차 개헌'을 단행합니다.

8차 개헌은 7년 단임제, 간선제 개헌입니다.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2500명 정도의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체제였다면 전두환은 박정희의 두 배 되는 약 5,000명 정도의 선거인단을 장충동 체육관에 몰아넣어놓고 선거를 치러 당선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을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7년짜리 대통령으로 1981년 2월에 다시 한번 취임하게 됩니다.

6. 친일파 척결을 하지 못한 아쉬움 

12.12 군사 쿠데타가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 사건입니다.

5.16 때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총리였던 장면이 수녀원으로 숨어버렸고 12.12 군사 쿠데타 때도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숨어버리면서 군부의 쿠데타가 성공해 버립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해야 할 최고 지휘관들이 줄행랑을 치는 상황에서 일어났어서는 안 될 쿠데타는 모두 성공하고 만 거입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바로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4.19 의거로 민주화를 일궈냅니다.

당시 장면 내각은 민주당 정권이었습니다.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이라고 한다면 한민당이 친일지주자본가 정당이었기 때문에 당시 장면 내각에서 친일파 처벌에 대한 의지가 있었을지 없었을지는 확실치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국민의 힘으로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내고 민주화의 열망을 이뤄냈던 그 성취감, 자신감으로 인해서 친일파 처벌을 그때라도 했다면 우리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었을 것이지만 이에 실패합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파였고 민족반역 자였으면서 대한민국 수립 이후 기득권 세력이 됐던 사람들 중에 일부는 한평생 호화롭게 살다가 죽어버린 사람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친일세력을 그때라도 척결했더라면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었을 텐데 4.19의 기회를 5.16으로 박정희가 날려버립니다.

그리고 박정희 서거로 새롭게 찾아온 민주화 열망을 12.12 쿠데타로 전투환이 날려버림으로써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박정희와 전두환, 2명의 군인에 의해서 놓쳐버린 것이 대한민국 역사적인 큰 줄기로 볼 때 굉장히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12.12 신군부 투테타 가담자
12.12 신군부 투테타 가담자
12.12 신군부 투테타 가담자
12.12 신군부 투테타 가담자

12.12사태의 주역들 중 전두화, 노태우는 대통령까지 하게 되고 황영시, 정호영, 박희도는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그 외 장관,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까지 권력 나눠먹기를 하며 대한민국의 권력을 손아귀에 쥡니다.

그리고 씁쓸하게도 이들 중 대부분이 현재도 생존해 있습니다.

7. 그래도 꿈꿨던 '서울의 봄'

10.26으로 독재자 박정희가 죽음으로써 '이제야 대한민국에 민주화 시대가 오겠구나'라고 사람들의 기대가 커진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979년 12월 12일 12.12  사태가 벌어지며 신군부 전두환의 또 다른 독재 시대가 시작됩니다.

서울역에 집결한 대학생들
서울역에 집결한 대학생들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서 계엄을 해제하고 정상적인 선거를 치러서 민주주의를 복구하자는 열망들이 있었습니다.

국민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계엄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외쳤습니다.

이때를 우리가 흔히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시기입니다.

국민들은 신군부의 시대가 잠깐 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국민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었는데 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해서 권력을 쥐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잡은 계엄 확대 D-Day가 1980년 5월 17일이었습니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는 권력을 얻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하게 됩니다.

8. 계엄을 확대하기 위한 전두환의 두 가지 계획

K-공작 계획

신군부는 주요 신문사, 방송사 등 주요 언론사에 근무하는 100여 명을 1:1로 만나서 회유하고 협박합니다.

바로 언론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충정훈련

 5월 17일 전국단위 계엄을 확대하게 되면 일어날 국민들의 반란 내지는 저항을 막기 위해서  충격적 이게도 특수 부대에게 '시민 진압 훈련'을 시켰습니다.

 5월 17일 당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한 국무 회의가 소집됩니다.

회의장은 군인들로 가득한 강압적 인분위기였고 안건은 10분 만에 급하게 통과됩니다.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모든 정치 활동 중지, 전국 대학 휴교령,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보도는 모두 사전에 검열이 이루어집니다.

행정부의 기능은 중지되고  계엄군이 모든 것을 집행합니다.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다시 쿠데타가 왔다면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단 한 도시만이 이에 저항합니다.

바로 '광주'입니다.

끝까지 저항해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는 것이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9. 다시 한번 기려볼 희생, 영화 '서울의 봄' 정해인 배우의 모티브가 된 '김오령 소령'

영화 <서울의 봄>이 집중한 것은 12.12 신군부 쿠데타 당시 '가장 긴박했던 9시간'입니다.

감독 김성수는 그 9시간을 '어이없는 그날 밤 이야기'라고 표현합니다.

쿠데타 세력이 총과 탱크를 앞세운 막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지만 그들의 행동과 판단은 '하찮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독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영화 상에는 '전두광'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신군부의 반란을 막을 기회가 10번 정도나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그만큼 신군부의 반란 계획도 허술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막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12.12사태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12.12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름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도 많았지만 대부분 묻히거나 잊혔습니다.

이 가운데 영화 '서울의 봄'에서 짧게 나오지만 강렬하게 다룬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1979년 10월 13일 새벽 0시를 조금 넘긴 시각, 반란 세력에 넘어간 3 공수여단 10여 명이 서울 송파구에 있는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실에 급습합니다.

일단 특전사령관을 회유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주변 간부들은 이미 포섭된 상태였고 결국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려 했는데 이때 유일하게 사령관을 지킨 인물이 극 중 '오진호 소령'입니다.

넷플릭스 D.P의 안준호 일병으로 열연한 배우 '정해인'이 맡은 인물입니다.

오진호 소령은 M16소총으로 무장한 반란군 세력에 홀로 맞섰습니다.

그가 손에 쥔 것은 권총 한 자루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현장에서 총을 맞고 전사합니다.

실제로는 반란군이 쏜 실탄이 가슴과 배에 6발 정도를 맞았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김오랑 소령
김오랑 소령

그는 위에서 다룬 실존인물인 '김오랑 소령'이 모티브가 된 인물입니다.

당시 체포작전을 지휘한 박종규 중령은 김오랑 소령과 같은 아파트에 살며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낸 사이였습니다.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 두 가정사의 비극이었습니다.

박종규 중령은 이듬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3 공수여단 15 대대장 신분으로 광주 현지에 급파돼 광주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는 데 참여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김충립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은 1979년 10월 13일 새벽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 김오랑 소령이 앉아가지고 권총을, 탄창을 꺼내가지고 실탄을 장전하고 있는 거야. 왜 그래 지금 무슨 상황이야 어떻게 됐어 그랬더니 "지금 보안사에서 우리 잡으로 옵니다" 그래서 내가 총을 안 가지면 살아, 근데 총을 갖고 있으면 죽어... 내가 이렇게 말린 거지. 권총이 여기 (옆에) 있고, 피를 입구에 다 흘리고 여기에서 김오랑이 죽은 거야 '

하지만 김 소령은 권총을 끝내 내려놓지 않고 특전사령관을 지키기 위해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결국 거기서 총상을 입고 전사했습니다.

그때 김오랑 소령의 나이는 36살이었습니다.

김오랑 소령은 눈을 감은 후에도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반란군은 김오랑 소령을 특전사 뒷산에 그냥 묻었다고 합니다.

김오랑 중령의 묘
김오랑 중령의 묘

이후 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 유골 안치소에 보관되다가 1980년 2월 되어서야 국립모지에 정식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중령'으로 추서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오랑 소령이 죽은 이후 가족들의 불행이 이어졌습니다.

사건 이후 아내 '백영옥' 씨는 충격으로 시신경 마비가 되어 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남편 사망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내 백영옥 씨는 노태우 정권 때인 1990년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 등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다가 1991년 부산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당시 경찰은 난간에서 떨어져 숨진 실족사로 결론지었습니다.

형 김태랑 씨는 김오랑 소령 사망 이후 상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조용히 있었죠. 가만히 있었죠. 겁이 나 가지고 혼자서 막 울고 그랬죠'

동생 김오랑의 행동과 죽음에 대해 한동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김오랑 중령은 육사 25기로 소위 임관 이후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특전사 3 공수여단 중대장, 특전사 작전장교, 특전사 정보장교 그리고 특전사 5 공수여단 중대장에 보임됐습니다.

그리고 12.12 쿠데타가 발생한 1979년에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을 발탁됐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3년 '김오랑 소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결의안'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군을 버틸 때까지 버텼습니다.

당시 김관진 국방장관은 결의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2.12 사건 관련 대법원 판결은 존중하지만, 전투에 참가하거나 직접 지역에서 공격에 대응하는 등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인지는 전문가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

사실상 김관진 국방장관은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 것입니다.

김오랑 중령이 졸업한 육사 또한 검토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2014년 1월이 되어서야 국무회의에서 훈장을 추서 하는 내용의 수여 안이 의결됐습니다.

그리고 2014년 4월, 특전사는 김오랑 중령에 대한 훈장 전수식을 거행했습니다.

당시 국방의원은 특전사는 고 김오랑 중령의 가족에게 예를 갖춘 부대행사로 훈장을 전수했다고 홍보했습니다.

김오랑 중령 흉상
김오랑 중령 흉상

2014년 6월, 김오랑 중령 흉상은 그가 졸업한 김해 삼성초등학교 인근에 세워졌습니다.

추모비 뒤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12월 12일 사태 때 상관을 지키고 군과 국가의 체제 수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맹렬히 대항. 정의를 수호하다 장렬히 순직'

https://www.youtube.com/watch?v=dX1zNAOu6aQ

 

10. 그리고 또 한 명, 반란군에 끝까지 맞섰던 장태완 소장

영화 <서울의 봄>은 큰 줄기로 봤을 때 12. 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광'과 이를 막는 '이태신'의 긴박했던 9시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입니다.

극 중 '정우성' 배우가 열연한 이태신은 실제 역사 속에는 어땠을까요?

영화 &lt;서울의 봄&gt; 이태신
영화 <서울의 봄>  이태신

영화 <서울의 봄>에서 이태신은 마지막까지 신군부세력에 저항하는 군인입니다.

이태신의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은 위에서도 잠깐 다뤘던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입니다.

장태완은 12,12 쿠데타 3주 전 비육사 출신 최초로 수도경비사령관에 부임했는데 당시 육사 출신들은 이에 강하게 반대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2.12 쿠데타가 터집니다.

쿠데타 초반, 전두환 측은 장태완을 회유하려고 합니다.

당시 장태완은 누가 뭐라고 회유했는지 전화로 모두 보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 녹취가 남아있습니다.

장태완은 강한 회유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림없다.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나는 딴 건 없다 나는 쳐들어간다. 30(경비) 단이고 다 쏴 죽인다 '

장태완의 불같은 성격이 느껴지는 음성입니다.

여기서 이후 드라마에 여러 번 등장한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야 이 반란군 놈들아. 너희들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전차를 몰고 가서 니 놈들 목숨을 다 날려버릴 거야 '

하지만 행주대교가 뚫리고 부하들이 배신하면서 쿠데타를 막는데 실패합니다.

장태완은 추후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습니다.

'이 당시 수령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장교의 총수는 45백50여 명이었는데 그중 3백90여 명 정도가 합수본부 측(반란군)으로 가담하고 사령부 기밀실에 모인 장교는 60여 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장태완은 마지막 반격을 시도합니다.

'이젠 좋을 대로 하십시오. 나는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30 경비단과 보안사를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 놓고 최초의 돌격을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남은 병력은 전차 4대, 병사 1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남은 전차 4대마저 신군부로부터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12.12쿠데타 가담 인물 사진
12.12쿠데타 가담 인물 사진

그렇게 쿠데타는 성공으로 막을 내리고 장태완은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됩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이후 장태완의 삶은 훨씬 불행했습니다.

장태완의 체포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식사를 끊고 술만 마시다 1980년 사망하고 맙니다.

장태완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라의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이 살아남을 수는 없는 일이다'

서울대에 다니던 장태완의 아들은 여행을 갔다가 이유도 모른 채 사망합니다.

장태완은 이런 슬픔 속에서도 12.12에 대한 문제 제기를 계속했습니다.

이후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합니다.

2010년 지병으로 사망하는데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울증을 앓던 장태완의 아내는 2012년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1979년 12월 12일은 장태완 개인의 비극이자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쿠데타에 성공한 신군부는 1980 서울의 봄과 이어진 광주 민주화 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하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RGf01-zkqA

11. 서울의 봄 감독 김성수, '제 영화 속의 인물한테는 그때 부끄러움을 주고 싶었다'라고 전하다

이보다 훨씬 앞선 1997년 4월, 이미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 반란과 5.18 내란 주도 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형을 확정받았습니다.

영화 속 전두광은 외칩니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하지만 실제에서는 검찰의 첫 판단과 달리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받는다'는 선례를 남기며 유죄를 확정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물론 사법적 판단까지 이미 끝난 사안인 것입니다.

이런데도 12.12반란 주동자인 전두환은 사망 전까지 단 한 번도 유가족 및 국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김성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요?

'이겼지만 내가 결코 기뻐할 수, 좋아할 수도 없는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 실존 인물은 부끄러운 마음을 느끼는 사람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데 제 영화 속의 인물한테는 그때 부끄러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역사 흐름을 뒤로 돌린 쿠데타에 가담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안고 있던 사람도 있겠지만, 끝까지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말한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 '서울의 봄'의 엔딩곡이 군가 <전선을 간다>인 것처럼  반란 이후 정권을 잡고 최고 권력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랬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은 역사를 되돌려버린 쿠데타의 성공을 다시 되돌아봅니다.

이를 통해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은 아닐까요?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잊지 않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소현세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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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현필 한국사, YTN 뉴스, 알쓸범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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