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터디 위드 돈벌러

드라마 '연인'에 나오는 소현세자 2(소현세자 부부 조선인 포로 구하기부터 죽음까지)

반응형

드라마 '연인'에 나오는 소현세자 2(소현세자 부부 조선인 포로 구하기부터 죽음까지)

8. 조선인 포로 구출을 위해 소현세자가 짜낸 방법은?

소현세자는 조선인포로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포로를 구할 비장의 카드를 제시합니다.

바로 소현세자가 직접 조선인 포로들을 한 명씩 속환하기로 한 것입니다.

즉 돈을 내고 조선인 포로를 사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심양관 생활 내내 조선인 포로들을 한 명이라도 더 속환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속환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지만 심양관자체도 넉넉한 살림을 할 수 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초반에 비해 속환비용이 갈수록 비싸집니다.

소현세자는 없는 돈을 긁어모아서 속환비를 마련했지만 아무리 돈을 모아도 구할 수 있는 포로들의 수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9.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포로 문제를 몰랐을까요?

포로문제는 전쟁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속환의 방식이나 시기 문제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에 전달합니다.

처음에는 조선에서 돈을 내고 포로를 데려오려고 합니다.

하지만 속환비용이 20냥에서 시작해서 1500냥까지 계속해서 높아지면서  결국 조선 조정에서도 포로 속환에 손을 놓게 됩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심양관에서 속환비 마련을 위해 사채까지 썼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이때 속환되지 못한 포로들은 청에서 비참한 삶을 산 것으로 추정됩니다.

10. 소현세자 부부, 장사를 시작하다

더 이상 헤쳐나갈 방법이 없던 그 순간 소현세자부부에게 은밀한 요청이 들어옵니다.

믿을 만한 측근을 시켜 몰래 은 5백 냥을 보내서 2백 냥으로는 호피, 수달피, 청서피, 꿀, 잣 등의 물품을 사고 3백 냥으로는 무명을 사달라고 했습니다.

<심양장계>

한 청나라 사람이 자신이 구하고 싶었던 조선의 물건을 소현세자에게 구해달라고 은밀히 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탁했던 사람은 바로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동생 '팔왕'이었습니다.

팔왕이 큰돈을 보내면서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원하는 물건을 구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세자빈 강 씨는 소현세자의 고민을 해결할 아이디어를 내게 됩니다.

청나라 지배층이 돈은 있는데 살 물건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입니다.

당시 청나라에는 물자가 부족해서 물건이 귀했습니다.

때문에 질 좋은 조선의 물건을 청나라로 들여와서 청나라의 돈이 있는 사람에게 되판다면 돈이 되겠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소현세자 부부는 청나라에서의 지긋지긋한 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선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을 벌입니다.

바로 '밀무역'입니다.

왕세자 부부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사는 평민들이나 하는 일이었고 높은 신분의 양반, 그것도 왕세자 부부가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청나라에서 먹고살아야만 했던 소현세자 부부는 신분이나 체면을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돈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청나라의 왕족, 관리들과 거래를 시작합니다.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의 곡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현세자 부부가 시작한 장사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당시 청나라 사람들에게 조선의 모피, 표범 가죽, 담배 등 아주 다양한 물건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중 특히 인기 있었던 물품은 바로 달달한 조선의 과일들이었습니다.

특히 홍시와 배의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소현세자 부부는 조선의 물품들이 인기를 끌자 점점 더 거래량을 늘리며 많은 돈을 벌게 되면서 소현세자 부부는 물론 심양관 일행의 생활도 안정을 찾아갑니다.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던 심양 생활 3년 차에 접어들던 차에 조선에서 아버지 인조가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11. 소현세자, 3년 만에 조선을 찾다

인조가 아프다는 소식에 효자였던 소현세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즉시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소현세자의 요청에 예상과는 달리 청나라 황제는 흔쾌히 허락합니다. 

대신 소현세자를 조선에 보내놓은 동안 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라고 합니다.

소현세자는 아픈 인조를 외면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조선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나라로 끌려온 지 3년 만에 조선에 임시귀국한 것이었습니다. 

3년 만에 그리운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바로 인조가 있는 궁궐로 향합니다.

소현세자는 아픈 인조를 보고 엎드려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합니다.

인조 역시 아들 소현세자를 어루만지며 눈물 흘립니다.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애틋했을 두 사람의 만남이었습니다.

끌려갔던 시간에 비해 조선에 머무는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습니다.

채 한 달이 안 돼 소현세자는 다시 청나라 심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2. 청나라, 심양관에 직접 생계를 책임지라 요청하다

그렇게 조선에 다녀온 후 소현세자는 다시 심양생활을 이어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나라로부터 기막힌 통보가 날아옵니다.

심양관 생활 5년째 1641년, 청나라 관리가 심양관을 찾아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부터 심양관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십시오'

소현세자에게는 직접 생계를 책임지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습니다.

이제는 진짜 생존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로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농사를 지으라고 준 땅을 보고 경악을 하게 됩니다.

땅 전부가 농사짓기 힘든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땅은 척박하고 농사지을 농부는 부족하고 기후마저 조선과는 다른 상황에 직면합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소현세자가 당황하고 있었던 그때 그의 아내 세자빈 강 씨가 이번에도 해결책을 찾아냅니다.

세자빈 강 씨는 실제적으로 조선의 농법을 아는 일꾼으로 청나라에 잡혀온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시장에서 데리고 와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농부들의 사기를 북돋을 방법으로 일종의 '성과급 제도'를 이용합니다.

농장별로 수확량을 책정해서 그 양에 따라 차등 보상을 하는 것으로 노동의 효율성을 높입니다.

그렇게 체계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첫해 농사 결과 3,300석이 넘는 양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 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무려 첫해 보다 2배의 수확을 얻어낸 것입니다.

덕분에 심양관 생활은 나날이 풍족해져 심양관 사람들 500여 명이 배불리 먹고도 곡식이 남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는 곡식을 보고 세자빈 강 씨는 또 다른 아이디어를 냅니다.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

<인조실록>

심양관 앞에 장터가 생겨 심양관에서 먹고 남은 곡식들을 청나라인에게 비싸게 판매한 것입니다.

청나라사람들이 조선의 맛있는 곡식과 과일을 구입하기 위해서 온갖 진귀한 물건을 가지고 옵니다.

이 물건들과 물물교환도 하고 때로는 돈을 받고 조선의 물품들을 팔기 시작합니다.

심양관앞은 조선 물건을 구하러 온 청나라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됩니다.

소현세자 부부는 이렇게 번 돈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하는 데 씁니다.

소현세자 부부가 구한 조선인 포로만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청나라에서 소현세자 일행의 삶은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13. 소현세자,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다

점차 자리 잡아가던 소현세자에게 갑작스레 시련이 닥칩니다.

청나라가 소현세자에게 다시 전쟁에 참여하라고 통보한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터로 나선 소현세자는 1644년 5월, 운명의 날을 맞이합니다.

어쩌면 세계사의 흐름이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

바로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한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조선이 전쟁을 하면서까지 충성했던 명나라가 몰락하는 것을 전쟁터를 누비며 온몸으로 목격합니다.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눈앞에서 지켜보게 된 것입니다.

이 결과 소현세자에게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금성
자금성

명나라의 황궁이었던 자금성을 차지한 청나라 황제가 자금성으로 자리를 옮기자 소현세자 일행 또한 심양관을 떠나 자금성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여전히 인질로서 자금성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14. 소현세자, 청나라 황제로부터 조선에 영구 귀국을 명령받다

그런데 이때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로부터 갑작스러운 명령을 받습니다.

'조선에 영구 귀국하라'

청나라는 명나라와 조선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소현세자를 볼모로 삼은 것이었는데 명나라가 없어지자 조선의 볼모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소현세자 일행은 짐을 싸서 귀국길에 오릅니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지 9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부푼 가슴을 안고 자신이 살던 창덕궁으로 돌아옵니다.

15. 소현세자, 왜 환영받지 못했나

그런데 궁궐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합니다.

청나라에 잡혀간 세자가 9년 만에 인질에서 풀려나 돌아왔는데도 어떤 환영식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궁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드디어 아버지 인조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 소현세자를 보는 인조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아들의 영구귀국 했음에도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냉대한 것일까요?

이후 인조는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을 뿐 직접 불러 어떤 축하의 말, 위로의 말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기 인조는 소현세자를 상당히 경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나라에서는 인조를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왕에 앉히려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결국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기에 인조는 자신을 위협할 대상이 되어버린 아들 소현세자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느꼈던 것입니다.

16. 소현세자, 죽음의 미스터리

소현세자는 이제 다시 조선의 세자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국한 지 2달쯤 지났을 무렵 소현세자는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합니다.

소현세자를 진맥 했던 의원은 '학질' , 즉 '말라리아'라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진단받은 지 3일째 소현세자가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런데 소현세자가 죽은 후 인조가 아들의 무덤을 찾았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 사망 5개월 만에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앉힙니다.

분명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0살이었던 세손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핑계로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세자빈 강 씨가 심문을 당한 뒤 별채에 갇히게 됩니다.

세자빈 강 씨가 시아버지인 인조의 전복구이에 독약을 탔다는 혐의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세자빈 강 씨를 역적으로 몰아 폐위시켜 버립니다.

세자빈 강 씨가 모의했다는 독살사건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폐위시킨 그날 바로 사약까지 내려 죽여버립니다.

인조는 증거와는 상관없이 며느리를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인조는 세자빈 강 씨가 죽은 후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들을 멀리 귀양 보내 버립니다.

그렇게 힘든 볼모생활을 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지 3년 만에 이런 모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오랑캐인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갖은 고생을 하고 돌아온 소현세자와 가족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하고 허무한 결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RDHwaE1kkc

드라마 '연인'에 나오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1(인조의 삼전도 굴욕부터 소현세자부부의 심양에서의 인질생활 그리고 속환시장) (tistory.com)

 

드라마 '연인'에 나오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1(인조의 삼전도 굴욕부터 소현세자부부의 심

드라마 '연인'에 나오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1(인조의 삼전도 굴욕부터 소현세자부부의 심양에서의 인질생활 그리고 속환시장) 1. 삼배구고두례, 삼전도의 굴욕 조선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donbuller.tistory.com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MBC drama/엠뚜루마뚜루>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