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맞서 백성을 보살핀 광해군은 성군인가 폭군인가! 1(광해군의 세자책봉 과정부터 왕으로 즉위하기까지)
1. 광해군, 성군인가! 폭군인가!
임진왜란의 영웅 광해군은 왜 쫓겨났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광해군은 전란의 상황 속에서 누구보다 백성을 먼저 살핀 성군이었지만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친인척마저 가차 없이 죽여 나간 폭군이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은 성군일까요? 폭군일까요?
2. 선조, 북쪽(명나라)으로 파천을 결정하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기습적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수도 한양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1598년 약 7년 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일본과의 전쟁을 말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온 일본군 앞에 조선 남쪽의 성들은 차례로 무너지게 되고 불과 보름 뒤인 4월 28일 조선 조정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북쪽으로 피난하여 회복을 도모해야겠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가 신하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가기로, 즉 파천( 播遷 )을 결정한 것입니다.
3. 광해군, 임진왜란 발발로 하룻밤만에 세자에 자리에 오르다
그런데 이때 한 신하가 파천에 앞서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선조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대계를 정하시어 사직의 먼 장래를 도모하소서'
<선조실록>
조선의 큰 계획인 '대를 잇는 일'을 정해서 나라의 장래를 도모하라는 의미입니다.
선조의 파천과 세자 책봉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당시 조선의 세자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왕이 죽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기에 장래를 위해서라도 파천하기 전에 대를 이을 세자 자리를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조의 뒤를 이어 낙점된 인물이 바로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급하게 세자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세자 책봉이 결정되고 세자가 되기까지 불과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세자를 정하라고 제안이 되었던 그날 밤 조선 조정에서는 광해군으로 세자가 결정되었고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정식으로 책봉되었기 때문입니다.
1592년 4월 29일, 광해군은 18세에 다급한 상황 속에서 세자에 오릅니다.
이때 광해군은 조선의 차기 왕이 되었다는 기쁨이나 당황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책봉과 함께 바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었기 때문입니다.
4월 30일, 광해군은 선조를 따라 경복궁을 나서야 했습니다.
후궁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은 '선조의 바람과 달리' 세자가 되었습니다.
4. 선조, '분조'를 선언하다
이렇게 광해군이 세자가 된 지 한 달이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선조가 신하들이 모인 가운데 세자 광해군에게 '조정을 나누어 주겠다'라고 선언합니다.
선조가 세자 광해군에게 왕의 역할을 하라고 한 것이며 이를 '분조(分朝, 나눌 분/조정 조)'라고 부릅니다.
'분조'란 조정을 나누어 통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위급상황에서 조정을 둘로 나누자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것인데 과연 아버지 선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선조는 신하들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선조는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으니 조선을 떠나 천자의 나라로 불렸던 중국 명나라로 망명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조는 보다 안전한 명나라로 떠날 테니 아들 광해군이 조선에 남아서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책임지라는 것이었습니다.
5. 광해군, 혼란의 조선을 수습하다
혼란에 빠진 조선을 수습하기 위해 광해군은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물론 신하들까지 일본군을 피해 험한 길을 걸으며 갖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신하들은 물론이고 세자인 광해군까지 들판에서 노숙을 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광해군은 강원도와 평안도, 황해도의 여러 고을을 옮겨 다니며 도망간 관리들로 인해 공석이 된 고을의 수령들을 임명합니다.
그리고 지방 관리들이 올린 상소와 보고를 처리하며 전란을 수습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임진왜란 이후 마비되었던 조선의 행정시스템이 서서히 다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광해군의 분조활동을 백성들은 어떻세 생각했을까요?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피난행록>
어떻게든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젊은 세자 광해군을 보면서 민심이 점차 수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임진왜란의 고통 속에서 광해군을 믿고 의지했던 것입니다.
6. 선조, 한양을 수복하고 천도한 후 분조를 해체시키고 광해군에게 양위를 선언하다
그렇게 조선을 안정시키기 위한 광해군의 구군분투가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 광해군에게 한 가지 소식이 날아듭니다.
명나라로 망명하려던 선조의 계획이 취소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명나라까지 쳐들어올 것을 걱정한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의 도움을 받게 된 조선은 수도 한양을 빼앗긴 지 꼬박 1년 만에 가까스로 한양을 되찾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일본을 피해 압록강 근처 의주로 피난해 있던 선조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선조는 한양을 수복하고 나서야 다시 환도한 것입니다.
그동안 목숨 걸고 전란을 수습했던 광해군은 내심 다시 돌아온 선조가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면서 인정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를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는 달리 선조는 돌아와서 바로 분조를 해체합니다.
. 그리고는 아들 광해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세자인 광해군이 뛰어나고, 광해군을 모시는 신하 중에는 현명한 사람이 많으니 나라가 번창하게 될 것이다. 이에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자 한다(양위)'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조의 깜짝 놀란만 한 속내가 있었습니다.
선조가 양위선언을 할 때면 조선의 조정은 한바탕 뒤집어 지곤 했습니다.
신하들은 선조 앞에 엎드려서 아니 된다며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만약 선조가 양위하지 않으면 신하들에게는 불충이 되고 광해군에게는 불효가 되기 때문입니다.
광해군도 매일같이 땅에 엎드려서 식사도 거른 채 양위명령을 거두어 달라며 간절히 호소하고 또 호소합니다.
선조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 양위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선조의 양위 소동은 자신을 향한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었습니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선조가 양위하겠다고 소동을 일으킨 것이 무려 18번이나 됩니다.
선조입장에서는 광해군에게 쏠리는 민심을 다시 자신에게 가져오고자 하는 정치적인 시험이자 테스트였던 것입니다.
사실 선조는 아들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들 광해군을 질투하며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고 충심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7. 광해군, 아버지 선조의 견제로 압박을 받다
그리고 1598년 , 드디어 임진왜란이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선조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이르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
<연려실기술>
광해군은 선조의 이런 말을 듣고 너무 속상해서 피까지 토했다고 합니다.
선조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 관계였기 때문에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만 조선의 세자로서 완전한 정통성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명나라가 광해군을 조선의 세자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광해군이 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무려 5번이나 세자책봉을 거절당합니다.
선조는 가뜩이나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에 명나라를 핑계로 광해군을 계속 압박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런 계속된 압박으로 불안하게 세자 지위를 유지해 갑니다.
8. 선조, 제위 39년 만에 얻은 첫 적장자 '영창대군'을 얻다
세자 광해군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1606년, 결국 세자 광해군의 지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랜 세월 아이들 낳지 못했던 선조의 정실부인 '의인왕후'는 1600년 여름에 고열로 급사합니다.
이후 1602년, 선조는 19세의 새 왕비를 맞이합니다.
광해군입장에서는 자신보다 9살 어린 계모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 계모의 이름은 '인목왕후'입니다.
계모 인목왕후는 선조와 혼인한 지 4년 만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영창대군은 선조가 제위 39년 만에 얻은 첫 적장자였던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적자가 태어나면 광해군의 계승 서열이 밀린다는 것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당시 16세기 후반에 나라에게 이미 후계자라고 승인한 사람이라면 나중에 적자가 태어나도 번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 선조가 광해군을 미워했었다는 것입니다.
즉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의 탄생은 서열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격랑에 휩싸일 수 있었던 엄청난 위기였던 것입니다.
9. 광해군, 마침내 조선 제15대 왕으로 즉위하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지 1년 반 정도가 흐른 1607년 10월, 아버지 선조의 건강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자신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선조는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교서'를 드디어 내리게 됩니다.
선조가 지목한 다음 왕은 '광해군'이었습니다.
당시 영창대군은 2세로 광해군에 대항할 만큼 힘과 세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선조는 마지못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줍니다.
선조는 교서를 내리고 약 4개월 뒤 결국 57세에 눈을 감습니다.
험난한 세자시절을 거쳐 벼랑 끝까지 몰렸던 광해군이 마침내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donbuller.tistory.com/entry/연산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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