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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인'에 나오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1(인조의 삼전도 굴욕부터 소현세자부부의 심양에서의 인질생활 그리고 속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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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인'에 나오는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 씨 1(인조의 삼전도 굴욕부터 소현세자부부의 심양에서의 인질생활 그리고 속환시장)

1. 삼배구고두례, 삼전도의 굴욕

조선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왜 '자금성'에서 인질로 살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이 다시없을 치욕을 겪은 그날의 이야기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1637년 1월 30일 한겨울 칼바람이 매서운 날이었습니다.

모래벌판에 황금색 천막을 두른 높은 단이  세워집니다.

그 단 아래에는 남색 옷을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숙인 당시 조선의 왕 '인조'가 서 있습니다.

인조는 모래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이렇게 외칩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인조는 연이어 양손을 땅에 대고 큰절을 합니다.

그냥 절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할 때마다 이마가 땅에 닿게 세 번씩 고개를 조아립니다.

'삼배구고두례'라고 하는 것으로 세 번 무릎을 꿇어앉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입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큰 절을 할 때마다 인조의 얼굴은 흙투성이가 됩니다.

인조의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들은 참담함에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조선의 왕으로서 너무나도 굴욕적이고 수치심이 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인조가 이렇게 처절하게 잘못을 빌었던 날이 조선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욕을 겪었던 '삼전도 굴욕'의 날이었습니다.

2.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패배한 조선

과연 누가 인조에게 굴욕을 안겼을까요?

중국 청나라의 2대 황제 '홍타이지'였습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철저하게 굴복하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내다려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왕이 창나라의 황제에게 왜 이런 굴욕적인 행동을 해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와의 전쟁인 병자호란에서 완벽하게 패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병자호란이란 병자년(1636년)에 청나라가 조선에 일으킨 전쟁입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수세에 몰렸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약 한 달 반 동안 버티다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한 채 굴욕적으로 청에 패배의식을 하게 됩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은 전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왜 조선을 침략했을까요?

당시 조선은 철저한 '친명배금' 외교를 합니다.

친명배금(親明排金)은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여진족이 나라를 세울 때 첫 이름이 '후금'이었고 이후 '청'으로 나라명을 바꿉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외교를 펼칩니다.

'사대'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일입니다.

반면 여진족은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며 '후금'을 배척했습니다.

명나라 땅을 빼앗으며 세력을 키우는 청나라
명나라 땅을 빼앗으며 세력을 키우는 청나라

당시 중국대륙인 명나라 땅을 청나라가 야금야금 차지하면서 청나라는 명나라만큼 큰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청나라는 명나라를 완벽히 견제하기 위해서 명나라 편이었던 조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오랑캐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청나라는 뜻대로 되지 않자 조선을 굴복시키고 신하로 만들려고 조선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결국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침략한 청나라에 패배해 인조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만 것입니다.

삼전나루
삼전나루

인조가 항복하러 나온 '삼전나루'는 현재 서울 잠실 부근 나루터였습니다.

삼전도비
삼전도비

현재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삼전도비'에는 병자호란의 치욕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삼전도비 항복의 글
삼전도비 항복의 글

인조 17년 청나라의 요구로 굴욕적인 항복을 비석에 새기게 됩니다.

3. 소현세자, 아버지 인조를 대신해 청나라 황제 앞에 서겠다고 하다

그런데 인조가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기 이전에 인조를 대신해 목숨을 걸고 청나라 황제 앞에 서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였습니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을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인조실록>

사실 소현세자는 목숨을 걸고 청 황제 앞에 나서기에는 당시 조선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왕의 적장자로 인조의 뒤를 이어 조선을 이끌어야 될 차기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소현세자는 16세에 이미 차기 왕의 면모를 선보입니다.

16세 소현세자가 겪었던 전쟁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정묘년(1627년)에 후금이 조선에 일으킨 전쟁 '정묘호란'입니다.

소현세자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2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청과의 전쟁을 끝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런 소현세자의 요구를 청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즉 청나라는 조선의 세자가 아닌 왕이 직접 나와서 항복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결국 오랑캐 나라에 조선의 왕이 항복하겠다고 선언한 그때 인조와 소현세자에게 홍타이지는 또 다른 난제를 던집니다.

다음은 당시 청이 조선에 요구한 내용입니다.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의 연호를 쓸 것

청의 출병 요청에 원군을 파견할 것

.

.

세자 및 다른 왕자와 대신들의 아들이나 아우를 인질로 보낼 

<청나라 황제의 칙서 中>

인조 본인에게 충격적이고 괴로웠을 요구가 또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차기 왕인 소현세자가 오랑캐 나라의 인질로  보낸다는 것은 조선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요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패전국의 왕은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치욕을 겪은 인조는 결국 소현세자를 청나라에 보내야만 했습니다.

더 나아가 청 황제는 인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인질로 잡고 있는 세자를 왕위를 잇게 하겠다고 하며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고 조선에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도를 보입니다.

4. 소현세자, 청나라로의 험난한 여정을 떠나다

조선의 차기왕이 치가 떨리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로 가야 하는 심정은 어땠을까요?

소현세자는 조선의 세자로서 치욕을 감당해야 하기도 했지만 떠나기 전 소현세자의 눈에 밟힌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에 놓고 가야만 하는 두 살배기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조선의 세자이면서 두 살배기 아이의 아버지 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소현세자가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나는 심정이 어때했을지 짐작 가지도 않지만 패전국의 세자였던 그는 그저 묵묵히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야만 했습니다.

 

이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간 이들이 총 몇 명이었을까요?

소현세자와 그의 아내 세자빈 강 씨를 중심으로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인질이 된 조선의 대신들과 그 가족, 수행원 등을 합쳐 무려 5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1637년 2월, 소현세자와 500여 명의 인질들은 청나라로 출발합니다.

그날 인조는 청나라로 떠나는 소현세자 일행을 배웅하면서 인솔하는 청나라 장수에게 한 마디 합니다.

'자식들이 깊은 궁궐에서만 자랐는데 지금 듣건대 피난길에 여러 날동안 노숙을 하느라 벌써 여러 질병이 생겼다 합니다. 가는 동안에 온돌방에서 잘 수 있게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으면서 이미 몸이 상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걱정하는 아버지 인조의 마음이 단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마지막으로 마주합니다.

인조는 울면서 언제 다시 볼 지 모를 아들에게 말합니다.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

<인조실록>

비록 인질로 가지만 세자로서의 역할과 지위에 맞는 행동들을 청나라에서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소현세자 또한 마음 무겁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인조의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옷을 붙잡으며 통곡을 합니다.

신하들을 향해 소현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상이 여기 계시는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그리고는 의연하게 말에 올라타 청나라로 출발합니다.

5. 소현세자, 심양 생활이 시작되다

소현세자일행이 심양에서 지냈던 곳은 어디일까요?

성경여지전도
성경여지전도

'성경여지전도'는 북경 천도 이전의 청나라 수도 심양 내 주요 관청을 그려놓은 지도입니다.

심양 내 홍타이지의 황궁
심양 내 홍타이지의 황궁

바깥으로 크게 둘러진 외성이 있고 중앙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의 황궁이 있습니다.

심양관
심양관

황궁 우측 아래를 보면 덕성문이 있습니다.

기록으로 보면 덕성문 안 근처에 소현세자 일행이 살던 곳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의 정식명칭은 '심양관'이고 '심관', '고려관'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황궁 가까운 곳에 심양관을 지은 걸까요?

바로 소현세자 일행을 감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위치입니다.

심양관의 또 다른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소현세자 일행이 지내기에는 너무 협소했던 것입니다.

기록으로 보면 당시 심양관에는 18칸의 방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업무공간과 세자부부의 방을 제외하고 실제 생활공간은 10~13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500여 명의 사람이 10~13개의 방에서 살기에는 턱없이 좁았습니다.

'관소가 좁고 낮아 습하며 더러운 냄새가 나고 무더워서 숨이 막힙니다. 대소인원들이 병나지 않은 이가 없으며 요사이 더욱 심합니다'

여름철에는 습하고 악취가 나고 더위에 숨이 막혔던 상황이다 보니 심양관 사람들은 이런저런 병에 걸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속에서 함께 지냈던 소현세자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들을 돌봐야 했습니다.

 

조선의 세자로 청나라에서 최소한의 생활비 정도는 지원받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다만 청나라도 계속해서 전쟁 중인 상황이었고 흉년도 오래 들어 청나라로부터의 충분한 지원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또한 전쟁 뒤끝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피해를 복구해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지원도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6. 소현세자, 홍타이지의 전리품 노릇을 하다

설상가상으로 소현세자가 챙겨야 했던 것은 심양관 안에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청나라 황실 사람들까지 챙겨야 했습니다.

소현세자가 심양관에 들어간 지 2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이른 아침에 청나라 황제가 다급하게 소현세자를 부릅니다.

소현세자는 헐레벌떡 황궁으로 들어갑니다.

황제는 왕들이 모인 앞에서 도착한 소현세자에게 일단 차를 한잔 따라줍니다.

청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차를 마신 소현세자는 황제의 그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긴장감 속에 황제가 내뱉은 말은 이러했습니다.

'다들 돌아가시오'

차를 마셨으나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일국의 왕세자에게 차마 싫어 오라 가라는 수모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청나라 사람들이 선양관에 들이닥칩니다.

'며칠 후에 황제가 사냥을 가시니, 세자도 동참하시오'

라고 말합니다.

한번 가면 길게는 20일씩 걸리는 황제의 사냥에 소현세자가 함께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소현세자는 황제의 사냥에 동행해서 황제의 비위를 맞춥니다.

이뿐 아니라 활쏘기, 공차기, 씨름등의 놀이는 물론이고 황실의 각종 연회, 결혼식, 생일, 제사, 장례까지 온갖 행사에 불려 다니기까지 합니다.

거기에다 매달 5일, 15일, 20일에는 정기적으로 황제에게 문안 인사도 올려야 했습니다.

소현세자는 가뜩이나 말도 안 통해서 괴로운 와중에 조선에 굴욕을 안긴 원수 같던 청나라 황제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습니다.

청나라 황제 입장에서는 소현세자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청나라 세력을 과시하려 소현세자를 동원하여 대외적으로 과시하려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현세자가 황제에게 끌려다니던 와중에 목숨까지 걸어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현세자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게 됩니다.

'서행에 동행하십시오'

서행은 청나라 기준으로 황제가 서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즉 명나라와의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현세자가 인질로 잡혀있을 때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소현세자에게 명나라와의 전쟁터에 동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효종)까지 끌고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소현세자는 전쟁터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 한 전투에서 소현세자가 포탄에 맞을 뻔하며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 것입니다.

7. 소현세자, 속환 시장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다

'어머니와 아들이 상봉하고 혹은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 기록은 청나라사람들이 조선인 남녀 포로들을 성문 밖 한 곳에 모아놓은 모습을 보고 적은 것입니다.

난리통에 끌려온 조선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천지를 진동할 정도의 소리를 내며 끌어안고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로들이 모인 곳은 어디였을까요?

바로 '속환시장'이었습니다.

'속환 시장'이란 조선인들이 송환금 즉 돈을 내고 청나라의 포로가 된 가족들을 데려갈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속환시장은 당시 심양의 남쪽 문에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심양관이 청나라 궁궐의 동남쪽에 있었으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소현세자의 거처인 심양관과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조선인들의 곡소리가 오롯이 소현세자에게 들렸을 것이고 세장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prtX9uWBp0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MBC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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