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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맞서 백성을 보살핀 광해군은 성군인가 폭군인가! 2(광해구 왕 즉위후 형과 동생을 죽이는 것부터 유배되어 죽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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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맞서 백성을 보살핀 광해군은 성군인가 폭군인가! 2(광해구 왕 즉위후 형과 동생을 죽이는 것부터 유배되어 죽기까지)

10. 광해군, 명나라의 승인을 받으려 친형 임해군을 제거하다

명나라는 끝까지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가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그가 장자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광해군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그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친형인 임해군을 역모사건과 엮어서 유배를 보내버립니다.

형 임해군이 유배 간지 1년이 지난 어느날, 광해군에게 충격적인 보고가 올라옵니다.

임해군이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임해군이 왜 죽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실상 파악을 위한 조사관 파견도 하지 않습니다.

이를 보건대 광해군은 임해군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애물이 될 수 있었던 친형 임해군이 죽은 지 한달 쯤 지난 1609년 6월, 광해군이 그토록 기다렸던 명나라의 책봉사가 한양에 도착합니다.

광해군은 조선의 왕이 되고나서야 비로서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게 된 것입니다.

16년간  끈질기게 괴롭혔던 약점을 지워낸 광해군은 정통성을 확보하고 명실상부한 조선의 왕이 되었습니다.

11. 정파와 상관없는 인재를 등용하고 임진왜란 전후 복구사업을 하다

조선의 왕이 된 광해군의 두번째 행보는 무엇이었을까요?

광해군은 조선 조정의 신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오직 인재만을 천거하고 어진 사람만을 기용하여 다 함께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게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정파와 상관없이 좋은 인재들이면 모두 추천하고 기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임진왜란이 끝난지 10년이 지났지만 7년이나 지속됐던 임진왜란의 흔적이 아직도 조선 전반에 진하게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백성들의 삶은 피혜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곧바로 전후복구사업에 주력합니다.

토지를 개간하고 토지 대장과 호적을 정리를 합니다.

그리고 성곽과 무기를 수리해 국방도 강화하게 됩니다.

12. 대동법을 시행하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시행한 조선 시대 납세 제도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세금으로 곡물 등 그 지역의 특산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대동법은 당시 화폐나 마찬가지였던 쌀로 납세를 통일합니다.

따라서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고 토지를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금을 적게 내게 되는 차등 납부 시스템이었던 것입니다.

방납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세 제도 개혁이었습니다.

백성 맞춤형 개혁으로 백성들을 위한 광해군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의보감 편찬
동의보감 편찬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서 의학과 약학의 수요가 높아진 이때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 최고의 의학서적인 '동의보감'이 편찬됩니다.

백성을 위한 이러한 노력으로 민심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광해군은 의심할 여지없이 충분한 권위를 지닌 조선의 진정한 왕이었습니다.

13. 광해군, 영창대군을 태워 죽이다

그런데 광해군이 즉위한 지 5년 째 되던 해, 조선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의 시작은 1613년 3월, 경상도 문경새재에서 벌어진 '은 강도 사건'입니다.

한 무리의 강도들이 문경새재 길목을 지나는 상인들을 죽이고 은 수백냥을 약탈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잡혀온 범인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깜짝 놀랄만한 말을 뱉어냅니다.

그리고 이 말로 인해 광해군은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은화를 모아 무사들과 결탁한 다음 거사하려 했다'

은 상인을 덮쳤던 범인은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거사, 즉 반역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도짓을 한 것이라고 말한것입니다.

그리고 은 강도들이 밝힌 역모의 주도자는 '김제남'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제남은 바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였습니다.

김제남은 광해군을 쫒아내고 왕위에 올리려고 했었던 인물은 바로 영창대군이었습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광해군에게 큰 위기를 줬던 영창대군은 언제라도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생각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다시금 불안해지게 됩니다.

광해군은 역모를 주도한 김제남과 아들들을 처형하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보냅니다.

다음 해 2월 강화도에서 이런 소식이 들려옵니다.

'영창대군이 죽을 때의 나이가 9세였다'

겨우 9살의 나이로 영창대군이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영창대군이 죽은 이유입니다.

'영창대군이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광해군 일기(중초본)>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온돌방에 가둬놓고 온돌에 불을 때서 결국 태워죽였다는 것입니다.

영창대군이 죽은 후 임해군때처럼 영창대군의 죽음을 파헤치는 사건조사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14. 광해군, '폐모살제' 명령으로오히려 조선 조정에서 고립당하다

광해군은 '은 강도 사건'이후 또다른 목표를 선택합니다.

광해군의 계모 '인목대비'였습니다.

역모 혐의로 처형된 김제남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설계한 역모사건의 마지막 남은 관련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역모사건에 얽혀있다고 하더라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처벌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효가  중요한 덕목이었던 유교사회 조선에서는 특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인목대비 처벌을 밀어붙히며 이런 명령을 합니다.

'지금 이후로는 대비의 호칭은 없애도록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인목대비에게 대비의 호칭을 쓰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지금의 덕수궁에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그곳을 '서궁'으로 낮춰부르라는 명령을 합니다.

즉 인목대비에게서 대비의 호칭을 뺏고 오늘날로 본다면 가택연금을 시킨것입니다.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패륜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버지와 형제, 아들마저 잃은 인목대비는 이제 왕실의 큰 어른으로써 누려야할 자유마저 빼앗겨버린 채 강제로 궁궐에 갖혀 죽은 듯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로서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이면서 훗날 패륜을 저지른 폭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폐모살제(廢母殺弟/ 버릴 폐, 어머니 모, 죽일 살,아우 제 )'라고 말합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역모에 연루되었다고 하더라도 효도로써 덮고 넘어가야 하는데 광해군은 이것을 더 들춰내서 어머니를 유폐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 문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패륜이고 이것을 계기로 해서 그동안 광해군의 측근세력이었던 '북인'이라는 붕당 내에서도 상당수가 등을 돌리게 됩니다.

광해군이 자신의 왕위를 안정시키려는 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왕이지만 조정내에서 고립당하는 역설적인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평생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위협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폭주기관차처럼 멈출줄을 몰랐던 광해군은 장자인 친형과 적자인 이복동생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마저 유폐시키면서 유교 사회 조선에서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행동들을 이어갑니다.

15. 명나라,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의 군사를 요구하다

이 와중에 명나라에서 광해군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해옵니다.

바로 명나라와 후금과의 전쟁에 조선의 군사를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광해군 시대 중국 상황
광해군 시대 중국 상황

당시 만주를 중심으로 흩어져있었던 여진족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후금'이 됩니다.

이 후금이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명나라 황제가 광해군에게 후금과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조선에서 파견해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조선은 전쟁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수만 명의 군대를 동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조선군인들은 실전 경험이 없는 농부들이기 때문에 차라리 압록강변에서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처럼 온갖 핑계를 대면서 파병을 거부합니다.

이때 광해군의 조정에서는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목소리가 올라옵니다.

'명나라는 조선의 부모국이자 임진왜란 때 은혜를 베푼 은인인데, 부모와 은인이 도와달라고 했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와야 합니다'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어린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효를 저버린 광해군이 이번에는 명나라 마저 배신해서 충마저 저버리는 것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유교로 무장한 조선의 신료들로써는 왕의 자질마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결국 신하들의 독촉과 명나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이듬해 2월 명에 한 차례의 지원군을 보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때 명나라는 후금에게 패배해서 요동지동지역을 빼앗기게 됩니다.

다급해진 명나라 황제는 그의 대리인 자격을 가진 어사에게 황제의 공식 문서인 칙서를 쥐어주고 또다시 조선에 칙사를 파견해 추가 지원군을 요구합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에 이번에는 단호히 거절합니다.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은 조선의 왕이 공식적으로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면전에서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광해군의 두번째 파병 거절이후 신하들은 근무를 거부하면서 조정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광해군은 신하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니다.

16. 광해군, 무리한 궁궐공사로 백성들의 민심을 잃다

그런데 광해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밤낮으로 일삼는 것이라고는 오직 궁궐을 짓는 한 가지 일밖에 없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대신하고도 남을 규모로 큰 두개의 궁궐을 동시에 짓게 합니다.

이 궁궐 공사를 하는 3개월간 들어간 철근만 무려 10만근이었습니다.

이 양은 당시 조선의 10년치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정도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광해군의 이런 국고낭비는 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남한산성이나 강화도에 있는 군량미를 가져다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군사 요충지에 비축된 곡식들까지 가져다 썼을 정도였습니다.

조정내에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광해군은 무리하게 궁궐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국고로는 도저히 궁궐 공사 규모를 감당할 수 없어지자 광해군은 다른 방법을 마련합니다.

공사의재료가 되는 것을 제공하면 '당상관'이라는 고위관직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행당상( 五行堂上 )'이라고 하며 이는 불, 물, 나무, 쇠, 흙 다섯 가지 종류의 재료를 바쳐 따낸 당상관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온갖 재물을 받고 벼슬을 파는 것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쓰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은 광해군때 오행당상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런 불만이 터져나올 정도로 궁궐공사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광해군은 대동법이라는 파격적인 제도까지 시행하면서 민생안정을 위해 힘을 썼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변해서 궁궐공사 집착하게 되며 민심을 잃어간 것입니다.

광해군이 이러한 행동을 한 해답을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올린 상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현혹할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풍수의 설은 경전에 나타나지 않은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광해군일기(초본)>

광해군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풍수지리'였습니다.

당시 광해군이 맹신한 풍수설이 있었습니다.

'인왕산에 왕기가 서려 있으니 인왕산에 터를 잡은 사람은 앞으로 왕이 된다'

인왕산 터에서 앞으로 왕이 난다는 것이고  그 존재는 광해군에게는 곧 위협이 된다는 말이 된다고 판단한것입니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부터 출발해서 끊임없이 자기 자리에 대한 위협을 받으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인왕산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풍수설을 들으니 광해군에게는 큰 위협이 된 것입니다.

광해군때 인왕산 자락에 지은 &#39;경덕궁&#39;과 &#39;인경궁&#39;
광해군때 인왕산 자락에  지은 '경덕궁'과 '인경궁'

이런상황에서 광해군이 지은 궁궐은 오늘날 경희궁으로 불리는 '경덕궁'과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인경궁'입니다.

경덕궁과 인경궁이 위치한 곳의 뒷산이 풍수설에 나온 '인왕산'입니다.

당시 수도 한양에 돌고 있단 '인왕살 풍수설'을 듣게 된 광해군은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위협을 예초에 제거하기 위해서 인왕산 자락에 궁궐을지어 본인이 먼저 인왕산을 차지하기로 한 것입니다.

광해군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할 정도로 피해망상 같은 증세를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광해군 말년에는 모든 신하들을 믿지못하고 왕위 보전에만 집착하게 되니 풍수, 도참, 미신에만 빠지게됩니다.

17. 폭군이 된 광해군, 왕위에서 쫒겨나다

광해군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하여 조정 신하들의 파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1623년 3월 13일, 누군가 이런말을 합니다.

'유폐되어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인조실록>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가 오랫만에 모습을 드러내고 선언한 것입니다.

인목대비가 말한 그 날은 바로 '광해군을 몰아낸 쿠데타가 일어난 그날'이었습니다.

인목대비가 다시 나타나기 하루 전이었던 1623년 3월 12일 밤, 광해군을 끌어내리기 위해 천여 명의 군사들이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으로 향합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궁궐을 점령한 이들의 쿠데타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왕실의 최고 어른 인목대비로 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인목대비가 그들의 쿠데타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쿠데타는 '역모, 반역'이 아닌 본래의 바른 상태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반정으로 완성될 수가 있었습니다.

드디어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 다시 광해군 앞에 서게 된 인목대비앞에 광해군은 무릎 꿇고 비참하게 폐위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목대비의 인정을 받아 당당히 조선의 왕위를 차지한 인물은 바로 '인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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