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바다를 지킨 이순신(한산대첩, 명량대첩)
1. 임진왜란의 시작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맹활약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 온 일분군에 의해 임진왜란(任辰倭亂)이 시작됩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1598년까지 조선에 침입한 일본과 2차에 걸쳐 싸운 전쟁입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온 일본 군 앞에서 조선의 지방성들은 차례로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시작 불과 20일 만에 조선의 수도 한성까지 함락됩니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땅은 일본군의 발아래 짓밟히고 조선의 백성들은 잔혹하게 약탈당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바다만큼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조선의 바다를 든든하게 지키는 전라좌도의 수군 지휘관 바로 이순신 때문이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연전연패인 조선군이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과 지휘로 바다에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길목을 꽉 막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에 가장 기뻤을 사람은 당시 조선의 14대 왕 선조(재위 1567년~1608년)였습니다.
이순신의 활약덕에 수세에 몰렸던 조선의 숨통이 트이고 선조 역시 한숨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승리로 일본군의 조선침략 계획에 엄청난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정예부대를 남해로 급하게 파견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였던 이순신부대를 물리치고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해상전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2. 이순신, 학익진으로 일본함대를 대파하다(한산대첩(閑山大捷))
한산대첩은 1592년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벌인 전투입니다.
한산대첩 하루 전인 1592년 7월 7일,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는 견내량이라는 곳에 왜선 70여 척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이 견내량이라는 곳이 굉장히 좁은 곳으로 장소가 협소하고 암초도 많다 보니 배들끼리 부딪칠 가능성이 굉장히 큰 곳입니다.
그래서 이순신은 견내량으로 들어가서 싸우기는 부담스럽다고 판단하고 대여섯 척으로 구성된 미끼조를 견내량에 투입해서 일단 함대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치는 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결국 일본함대는 한산도 들어섭니다.
그리고 일본함선 앞에 펼쳐진 한산도 앞바다의 모습을 어땠을까요?
한산도 좌우 섬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선 수군의 배들이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서 진형을 만들어 일반함대를 에워쌉니다.
이를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학익진(鶴翼陳)'입니다.
조선 수군은 일본 함대를 완전히 포위한 채로 무차별 포격을 시작합니다.
결국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하지 못하고 일본 수군의 배 73척 중 59척은 순식간에 격파당했습니다.
그리고 고작 3일 만에 100여 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모두 격파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군에게 내련 명령은 무엇일까요?
해상전투에서 이순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 금지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한산대첩 이후 왜군들에게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거대한 두려움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위기에 몰렸던 조선에 희망을 주었던 이순신은 한산대첩 등 해전에서의 수많은 전공을 인정받아서 승진하게 됩니다.
선조가 이순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전라 좌도의 수군을 이끌었던 이순신은 승진하여 전라, 충청, 경상 이렇게 삼도수군을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됩니다.
한마디로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임진왜란의 승기가 조선으로 넘어오고 전쟁 시작 1년 만에 빼앗겼던 한성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5-vUiO53kM
3. 이순신, 게으름 때문에 의금부에 잡혀가다
해전 금지령으로 일본군과 휴전이 길어지던 어느 날, 선조가 이런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그 뒤에는 작은 적일지라도 잡는데 성실하지 않았고 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일이 없으므로 내가 늘 의심하였다'
<선조실록>
이때 이순신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일본 수군에게 내린 해전 금지령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회피하고 있었고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선조는 눈과 귀를 닫고 이순신을 향한 의심과 불신을 키워갔던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이순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1597년에 접어든 어느 날, 조선 조정에 아주 솔깃한 첩보가 하나 들어옵니다.
당시 일본군을 이끄는 두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서로 앙숙 관계였습니다.
이 중 고니시가 조선 조정에 정보를 흘린 것입니다.
'가토가 군대를 끌고 바다에 나갈 예정이니 그때 공격하시오!'
조선 조정은 이 첩보의 진위여부에 대해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가토와 고니시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조는 고니시의 정보가 사실이라고 판단합니다.
선조는 바로 이순신에게 출전 명령을 내립니다.
'조선 바다로 오는 가토를 물리쳐라'
그런데 이순신은 선조의 왕명을 무시한 채 출전하지 않습니다.
이순신은 적인 고니시에게서 나온 첩보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섣부르게 출전했다가 오히려 조선 수군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이런 전략적 판단 아래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자신의 명령을 받고도 망설이고 있는 이순신을 본 선조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선조는 이에 분노합니다.
'지금 와서 가토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선조의 분노가 느껴지는 발언입니다.
이순신도 당시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본인이 파직을 당할 것이라는 조정의 분위기는 파악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파직당하면 조선 수군과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른다는 것을 걱정은 했습니다.
그래서 신중히 사태를 파악하고 비로소 출전을 결정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었습니다.
이미 선조의 이순신 체포 명령이 내려진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선조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죄목으로 1597년 2월 26일, 죄인이 된 이순신은 한성에 있는 의금부로 압송됩니다.
당시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던 이순신의 당시 나이는 53세였습니다.
이순신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죄인이 되었고 28일 만에 겨우 감옥에서 풀려납니다.
4. 이순신, 백의종군의 벌을 받고 합천 초계로 가던 중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다
인간 이순신으로서는 가장 괴롭게 느껴졌을 1597년 그 해의 첫 일기는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 난 4월 1일부터 시작됩니다.
'1597년 4월 1일, 맑음,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난중일기 中>
이날의 일기 첫머리는 '맑을 청(淸)'으로 시작하였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구사일생으로 사형만은 면하고 의금부에서 풀려 나오면서 맑은 하늘을 봤던 것입니다.
의금부에서 풀려 이순신이 간 곳은 어디였을까요?
이순신은 결국 바다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사실 이순신에게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처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처벌을 보류한 것이지 죄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여전히 중죄인이었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백의종군(白衣從軍/흰 백, 옷 의, 쫒을 종, 군사 군)'을 명합니다.
백의종군은 직역하자면 흰옷을 입고 군사를 따라간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보직 해임됩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위해 어디로 떠났을까요?
이순신이 가야 했던 곳은 한성에서 멀리 떨어진 경삼남도의 합천 초계였습니다.
당시 조선군의 육군과 수군을 아우르는 전군 총사령관이었던 권율(1537~1599)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권율 밑에서 작전권도 지휘권도 없이 복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의종군의 벌을 받고 합천 초계로 가던 길에 이순신은 한 가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듣기 전에 이순신은 예지몽을 꿉니다.
'1597년 4월 11일, 새벽꿈이 매우 번거로워 마음이 불안하다'
'1597년,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난중일기 中>
이순신의 어머니가 아들이 옥에 갇힌 것으로 알고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들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83세의 노모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아들을 보기 위해 전남 여수에서 한성으로 가는 배편에 몸을 맡깁니다.
그런데 전남 법성포에 이르러서 배를 대고 밤잠을 청하던 그때 닻줄이 풀리면서 어머니가 탄 배가 떠내려가 버린 것입니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혹여 의금부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귀한 아들의 무사한 모습을 보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슴이 메어지는 그런 일이었지만 이순신과 그의 어머니는 남달리 애틋했던 모자관계였기 때문에 그 슬픔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5. 이순신, 어머니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다
이순신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마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이순신은 어머니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이면서 평생의 자랑이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이순신이 전쟁 중 썼던 난중일기는 2539일 동안 써내려 갔는데 첫 번째 기록부터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1592년 1월 1일, 어머님 곁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그리움을 이길 수 없다'
이뿐 아니라 난중일기에는 어머니 이야기가 무려 100여 번이나 등장합니다.
'1592년 3월 4일,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 하니 다행이다'
'1593년 5월 4일, 어머니 생신이건만 왜적 토벌 때문에 추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의 한이 되겠다'
'1594년 1월 11일, 어머니께서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여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1594년 5월 21일, 어머니의 안부를 몰라 답답하다'
어머니에 대한 이순신의 지극한 효심은 난중일기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찢어놓은 사건이 그 뒤에 또 생깁니다.
백의종군 중인 죄인이었던 이순신은 장례를 치른다고 아산에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597년 4월 19일,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고'
<난중일기 中>
그 순간 인간 이순신은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괴로웠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 차고 돌아가신 어머니 영정을 뒤로 한채 떠난 이순신은 합천의 권율 밑에서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백의종군을 시작합니다.
6.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궤멸시킨 조선 수군
1597년 7월, 이순신에게 또 하나의 엄청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순신이 열과 성을 다해 지켜냈던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조선 수군이 모두 궤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 우수사였던 원균(1540년~1597년)은 이순신보다 5살이 많고 무과급제는 무려 10년이나 빠른 이순신의 대 선배였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터지고 까마득한 후배인 이순신은 조선의 영웅이 되었고 게다가 1593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하며 원균의 상관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원균은 이를 못마땅해하며 이순신을 시기, 질투하며 이런 이야기까지 합니다.
'이순신은 머뭇거리면서 전투에 나가지 않아!'
원균은 이런 식으로 이순신을 모함했습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노릇을 한다'
<우산집 中>
라는 말까지 만들어서 여러 사람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바다에서 왕 노릇을 한다는 기분 나쁜 소리가 왕인 선조에게까지 전해졌을 테고 이 말을 들은 선조는 당연히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이순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선조의 불신은 한층 깊어졌습니다.
이런 선조가 원균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했을까요?
'나랏일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1597년, 삼군수군통제사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이순신을 대신해 원균의 차지가 됩니다.
이렇게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에게 선조는 명을 내립니다.
'부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라'
원균은 선조의 명을 받고 조선수군의 전체 함대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 160여 척을 모두 동원하여 부산 앞바다로 출정합니다.
결과는 참혹한 패배로 이때 조선 수군 자체가 완전히 박살 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조선 수군 역사상 최악의 패배인 칠천량 해전입니다.
칠천량 전투 참패로 인해 60여 척의 판옥선은 물론이고 그동안 훈련시켰던 수군들까지 대부분 잃게 됩니다.
이순신이 사활을 걸고 지키던 조선의 바닷길은 결국 일본 수군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7. 이순신, 선조의 명으로 칠천량 해전 대패 한 달 여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다
선조는 칠천량 해전 한 달 여후에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게다가 선조는 이순신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귀까지 두 번씩이나 남깁니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을 받고 아무런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묵묵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맡습니다.
이순신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고 해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이후에 군사, 판옥선 등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통제사에 복직하자마자 직접 피난길에 오르는 백성들을 설득하면서 다시 수군을 모집하기 위해 곧바로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수군을 모집한다 해도 진짜 필요한 배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4diXcz0h2Q
8. 이순신,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를 전하며 목숨 걸고 조선 바다를 지키다
이때 이순신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궤멸된 줄 알았던 조선 수군의 배 중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2척의 배는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쳐 살아남은 배로 아이러니하게도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친 배들이 이순신의 조선 수군 재건에 희망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천량 전투에서 도망쳤던 장수들도 소수 병력과 함께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 선조가 이렇게 편지를 또 보냅니다.
'수군의 전력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싸우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선조의 명령에 이순신이 남긴 명언이 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사실 이순신이라고 해서 당시 조선 수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대로 바다를 내준다면 해상을 통한 일본군의 보급이 원활해질 테 조선 전체가 일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위기감은 계속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의 해상보급로를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자신만만했던 것이 아니라 바다를 내어주면 조선은 끝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바다에 남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9. 이순신, '울돌목'에서 133대 13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다(명량대첩)
1597년 9월 14일,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전라남도 진도의 벽파진에 자리 잡고 있을 무렵 마을을 보던 조선의 군사는 일본수군이 전라남도 해남군 어란포에 들어와 있다고 보고합니다.
당시 외선의 규모는 총 300여 척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배는 뒤늦게 합류한 한 척의 배를 더 해서 총 13척이었습니다.
이런 불리한 전세 속에서 병사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순신은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뇌에 찬 고민 속에서 전략을 세웁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꾸렸던 진영을 갑자기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깁니다.
이순신이 선택한 곳은 바로 울며 돌아가는 길목이라 하여 '울돌목'이라 불리었던 곳이었습니다.
울돌목을 한자로 표현하면 '명량(鳴梁)'이며 그래서 붙여진 해전의 명칭이 '명량 대첩'입니다.
이순신이 명량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을 불러 모읍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필사즉생 필생즉사/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즉 이 명령은 '나도 죽을 것이니 우리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라는 의미의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이순신 자신의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적선이 곧장 오고 있습니다'
1597년 9월 16일, 마침내 대규모의 왜선이 명량해역으로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133대 13의 싸움, 이순신은 즉각 명령을 내립니다.
'전군, 출정하라'
엄청난 규모의 왜선을 마주한 채 선두로 이순신이 탄 배는 치고 나갑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본 이순신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합니다.
이순신을 따라서 앞으로 나와야 하는 아군의 배들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과 그 뒤를 따르는 12척의 배들은 어느새 약 400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는 칠천량해전에서 엄청난 참패를 겪은 지 이제 겨우 2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습니다.
전력에서도 기세에서도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순신은 진퇴양난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홀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약 한 시간가량을 이순신의 대장선 단 한 척이 133척의 왜선과 싸우게 됩니다.
이순신은 전장에서 외치고 또 외칩니다.
'동요하지 마라. 적선이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 배에 올라타지 못한다. 내 명령에 따라 움직이되 절대 도망치지 말라'
이순신은 대장선 가까이 붙은 일본함선을 떼어내기 위해 화포를 아래로 내리고 조준사격을 명령합니다.
부서져 가라앉는 일본 함선 뒤로 새로운 배들이 몰려들었고 이순신이 타고 있는 대장선위에 병사들은 왜선을 조준해 끝도 없이 화살을 쏘아댔습니다.
그런데도 기어코 대장선에 기어오르는 일본 병사들이 있으면 그들을 향해 긴 낫으로 내려찍었습니다.
이렇게 홀로 고군분투하는 이순신의 대장선을 보면서도 후방의 조선배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이순신은 외칩니다.
'너희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당장 처형할 일이지만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
이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2대의 배가 대장선으로 접근해 옵니다.
그것을 본 다른 배들이 드디어 합세를 시작합니다.
이제야 조선 수군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구름 떼처럼 몰려온 일본 함선에 맞서는 것은 13척의 배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1597년 명량해전 당일 오후 1시, 전투의 흐름이 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명량해협의 물살은 하루에 4번, 약 6시간마다 흐름이 바뀝니다.
물살이 워낙 세서 한번 바뀌어 흐르기 시작하면 이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본군 배가 드디어 역류를 타기 시작합니다.
조선 수군의 반대방향으로 밀려난 일본 함대들은 조선의 판옥선으로 접근하지 못합니다.
반면 조선 수군에게는 일본 함선에 접근하기 좋은 물살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황하는 일본수군을 향해 한층 더 공격을 퍼붓습니다.
거센 물살과 몰아치는 포화에 일본 함선들은 하나둘 침몰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이순신의 군대는 기적적인 승리를 이뤄내면서 끝내 왜군을 막아냅니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명량해전'입니다.
10. 이순신, 명량해전 후 일본군의 복수에 막내아들이 죽임 당한 사실을 알고 통곡하다
이 명량해전을 마치고 약 한 달 여 뒤 1597년 10월, 이순신은 '통곡'이라고 적힌 편지를 받게 됩니다.
'통곡(慟哭/서러울 통, 울 곡)이란 '소리 높여 슬피 운다'는 뜻입니다.
이 순신은 편지 표지의 이 두 글자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웁니다.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을까요?
아산 본가에 있던 셋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순신의 셋째 아들이 죽은 이유는 명량에서의 패배를 복수하기 위한 일본군의 습격 때문이었습니다.
명량에서 지고 분풀이를 하려 이순신의 본가가 있었던 아산을 습격한 것입니다.
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을 아버지 이순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597년 10월 14일,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殃禍)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난중일기 中>
이순신은 이쯤 되면 자신은 이미 죽은 몸이고 어쩔 수 없이 살아있을 뿐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의 영웅 이순신은 장수로서 나라와 백성을 지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막내아들은 지켜주지 못한 것입니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아들의 죽음에도 이순신은 죽은 아들의 시신을 보러 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인간 이순신은 또 한 번 죽음을 언급할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1597년 10월 16일,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訃音)을 들은 지 꼭 4일째 되는 날인데,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다'
<난중일기 中>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이 이순신뿐이었을까요?
때문에 이순신은 부하들 앞에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아직 전시상황인 데다가 조선 수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KBS 역사스페셜/KBS 역사저널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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