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권력에 눈이 멀어 추심을 잃어 내쳐진 '홍국영'
1. 홍국영,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풍산 홍 씨 집안에서 태어나다
혜경궁 홍 씨는 영조의 며느리이자 사도세자의 부인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로 '풍산 홍 씨' 집안 출신입니다.
혜경궁 홍 씨가 세자빈으로 간택되면서 외척으로서 풍산 홍 씨 집안 역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홍국영은 혜경궁 홍 씨와 같은 '풍산 홍 씨' 집안출신인데 풍산 홍 씨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을 무렵인 1748년에 태어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홍국영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홍국영은 사람됨이 약삭빠르고 민첩했으며 생김새는 자못 준수했고 말은 수다스러워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시와 문장 짓는 민첩함은 동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났다'
<당역열전>
홍국영은 한마디로 팔방미인에 감각까지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홍국영은 남다른 야망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하 모든 일이 내 손안에 있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2. 홍국영,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업무를 하다
그러던 1772년 가을, 스물다섯 살의 홍국영은 드디어 과거에 합격합니다.
하지만 홍국영은 과거 합격 후 승승장구는 하지 못합니다.
홍국영은 전체 과거 급제자 33명 중 21등으로 통과하여 한동안 제대로 된 보직을 받지 못한 채 임시적으로 일해야만 했고 급제 후 약 1년 뒤에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홍국영이 맡은 첫 업무는 '사관'이었습니다.
사관은 '조선왕조실록의 초고를 쓰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보통 정 6품에서 정 9품의 그리 높은 품계의 직책은 아니었습니다.
3. 사관 홍국영, 영조 가까이서 내 '손자'라 불리며 일하다
그런데 사관 홍국영에게는 좀 더 특별한 업무 환경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홍국영이 왕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아주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홍국영은 사관으로 영조를 만나 영조의 가까이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영조는 사관 홍국영을 아주 특별한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바로 '손자'입니다.
그만큼 홍국영은 영조에게도 친근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4. 정조, 홍국영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다
시강원 사서가 된 홍국영은 정조가 찾는 책이 있으면 언제라도 수시로 가져다주는 역할을 합니다.
27살의 홍국영과 23살의 정조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서 정조는 본격적으로 홍국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동궁이 무미하고 답답해하시다가 국영이를 만나니, 국영이가 아니 여쭙는 말이 없고 아니 아뢰는 일이 없으니, 국영이를 신통하고 기이히 여기셨다'
당시 정조가 만나는 대부분의 신하들은 정조와 학문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홍국영은 그동안의 신하들과는 달리 정조가 신기해할 만한 궁밖의 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말해주면서 정조를 살갑게 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손 정조는 답답한 궁 생활을 하는 중에 홍국영을 통해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을 것입니다.
5. 홍국영, 영조의 시험에 정조가 위기에 처하자 기지를 발휘해 구하다
홍국영과 세손 정조가 점차 가까워지던 그때 정조에게 뜻밖의 위기가 발생합니다.
이 이야기는 풍산 홍 씨 가문의 후손이 쓴 <홍국영사장>이라는 기록을 통 전해지는 내용입니다.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 정조를 여느 때처럼 불러 학습 진도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조가 역사책 '자치통감강목'을 읽고 있다고 하니 영조는 굳은 표정으로 정조에게 묻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수 양재기'부분을 읽고 느낌이 어떻던고?'
영조의 질문을 받고 정조 또한 굳은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차마 읽을 생각이 들지 않아 그 부분을 찢어버리고 읽지 않았습니다'
'수 양재기'에서 말하는 '수 양제'는 과거 수나라의 2대 황제를 말합니다.
문제는 이 '수 양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영조는 가족의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조는 먼저 왕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친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영조에게 수 양제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정조에게 '수양제기'편을 읽은 소감을 물으면서 정조를 시험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 영조의 심기가 불편할 것을 염려한 손자 정조가 '수양제기'부분을 찢어버려 읽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정조는 위기를 무사히 넘기나 했는데 영조가 정조를 화들짝 놀라게 하는 한마디 또다시 던집니다.
'세손이 읽던 '자치통감강목'을 가져오너라'
명을 받은 신하가 시강원으로 달려가 문제의 책을 가져와 영조에게 건넵니다.
영조는 해당 부분을 펼쳐보는데 문제의 수양제기 부분이 정말 찢겨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홍국영은 세손의 책을 관리하는 시강원의 사서였고 때마침 시강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홍국영은 정조가 곤란에 빠진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지를 발휘해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찢어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정조는 이를 계기로 홍국영을 더 아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조는 홍국영 덕분에 영조에게 거짓말을 들킬뻔한 위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6. 세손 정조, 목숨을 위협하는 일상에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한 사람이 바로 홍국영이었다
정조를 위협하는 것은 할아버지의 의심과 시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조 곁에는 세손 정조를 노리는 정적들이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정후겸과 홍인한 두 역적은 나를 원수로 여기는 마음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 한 가지만으로 함께 귀일 되는 근본을 삼았다'
<손혁각일기>
정후겸과 홍인한 두 사람이 정조를 원수로 여기며 손을 잡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후겸과 홍인한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관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대체 왜 정조를 괴롭힌 것일까요?
홍인한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뒤주를 발로 차 작은 구멍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홍인한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 바로 영조에게 달려가 이를 고자질합니다.
홍인한의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구멍 난 부분에 두꺼운 판을 덧대서 구멍을 막으라고 명령합니다.
너무나 답답했을 뒤주 안에서 사도세자의 숨통을 트여준 그 구멍을 틀어막아 버린 것이 바로 홍인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홍인한은 세손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자신에게 앙갚음할까 두려워 이를 방해했던 것입니다.
정후겸은 사실 사도세자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 즉 정조의 고모였던 화완옹주의 양자였습니다.
정조와 정후겸은 피가 섞이지 않은 사촌관계였습니다.
문제는 영조가 나이가 들면서 예뻐할 자식과 손주들이 그리운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때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자 정후겸이 이런 영조의 외로움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영조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립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외손자 정후겸은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때문에 왕이 바뀌고 세손 정조가 즉위한다면 정후겸은 자신이 누리던 권력을 모두 빼앗 길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홍인한과 정후겸은 이유는 서로 달라도 둘의 목적은 세손 정조의 왕위계승은 방해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정조를 섬뜩하게 만드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집니다.
'존현각은 내가 강독하는 곳으로 바깥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갑자기 이렇게 익명서를 던져 넣는 변고가 일어나니 너무 염려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존현각일기>
세손 정조가 생활하고 공부하던 공간인 존현각에 누군가 정조를 협박하는 편지를 던져 놓고 간 것입니다.
이 핍박 편지 사건은 언제든 거처에 정조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며 거처 또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라 정조는 극도의 불안감으로 마음 편히 옷을 벗고 잠도 들지 못했습니다.
정조는 이 무렵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걱정되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세손 정조는 곁을 지키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이 바로 홍국영이었습니다.
홍국영은 불안에 떨던 정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꺼리고 비난하는데도 전하께서는 뽑아주셨고, 재주가 형편없고 식견이 짧은데도 전하께서는 임용해 주셨으니 신의 한 몸은 터럭 하나까지도 모두 신의 것이 아닙니다'
<명의록>
홍국영은 자신을 믿고 아껴주는 정조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충성하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7. 정조, 홍국영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자신 곁을 떠나라고 하다
그런데 얼마 후 정조가 홍국영에게 의외의 말을 던집니다.
불현듯 정조가 홍국영에게 말합니다.
'나의 곁을 떠나라'
대체 정조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 홍국영이 조정에 있으면 필시 큰 해가 될 것이니 2만 냥을 써서라도 죽일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마땅히 도모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누군가가 거금을 들여서라도 홍국영을 죽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한 장본인은 바로 정후겸의 심복이었습니다.
정조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홍국영의 목숨까지 위험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정조는 홍국영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의 곁에서 떠나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홍국영은 정조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운명에 따르고자 할 따름입니다. 피하고자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홍국영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정조의 곁을 끝까지 지키겠다 말합니다.
정조는 이에 자신과 홍국영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한다는 말을 오늘날의 궁료(홍국영)에게 하지 않고 어디에다 하겠는가'
<존현각일기>
정조와 홍국영은 위기 속에서 마치 전우와도 같은 끈끈한 신뢰와 애정을 쌓았던 것입니다.
8. 세손 정조,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서 가로막히다
1775년 겨울, 영조가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한 신하가 이렇게 말합니다.
'동궁(정조)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영조실록>
신하들이 세손 정조가 국왕이 될 수 없다는 공개선언을 해버린 것입니다.
첫 번째 대리청정 시도를 실패한 지 열흘 후 영조는 다시 한번 대리청정을 논합니다.
그러자 홍인한이 더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도끼에 베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받들어 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홍인한은 왕명을 받드는 승지를 몸으로 가로막고 명령서를 쓰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 모든 광경은 세손 정조 앞에서 벌어졌으며 이를 다 지켜보게 됩니다.
정조의 입장에서는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왕의 후계자로 지내온 14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홍인한을 필두로 한 조정 신료들의 반대로 이 날도 영조는 끝내 대리청정 명령서를 내리지 못합니다.
9. 홍국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손 정조를 도울 '서명선의 상소'를 기획하다
그런데 그렇게 사흘 뒤인 12월 3일, 정조의 대리청정이 물거품 되기 직전에 '서명선'이라는 신하가 상소를 하나 올립니다.
'"동궁이 이를 알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한 것이 과연 말이나 되며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영조실록>
서명선이 홍인한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서명선은 종 2품의 전직 참판으로 영조가 대리청정을 명했을 당시 회의현장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전해 들은 서명선이 어떻게 신하 된 자로서 왕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분노하며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대리청정 반대를 '불충'이라고 못 박은 상소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조는 홍인한과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의 벼슬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렇게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의 힘을 꺾고 입을 틀어막은 영조는 사흘 후 마침내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을 확정 짓습니다.
정조의 대리청정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명선의 상소에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홍국영이 정민시에게 부탁하여 상소할 사람을 찾도록 했고 정민시는 은밀히 서명선에게 급히 상소하도록 했다'
홍국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손 정조의 대리청정이 성사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것입니다.
정조는 우여곡절 끝에 대리청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10. 정조, 왕으로 즉위하고 홍인한과 정후겸에게 사약을 내리다
그런데 약 3달 뒤 병석에 누운 영조가 세상을 떠나며 유언을 남깁니다.
'옥새를 왕세손에게 전하라'
정조는 11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살얼음판과도 같았던 세손시절을 겪어나가야만 했었는데 드디어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정조가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홍국영이었습니다.
'이 사람(홍국영)을 장해하려는 흉계를 하는 사람은 곧 우익(右翼)을 제거해 버리려는 흉심이 있는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는 홍국영을 해치려는 행위는 왕인 자신의 오른 날개를 꺾는 것과 같은 흉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날 정조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홍인한이 아직도 좋은 지경에 있기 때문에 감히 이런 짓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정조에게 있어서 홍국영이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지를 온 천하에 알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신하들은 정조의 절대적이 신임 아래에 있었던 홍국영에게 앞으로 감히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1. 정조의 오른팔 '홍국영' 권력에 날개를 달다
홍인한과 정후겸을 사사한 바로 다음 날인 1776년 7월 6일, 정조는 홍국영에게 '승정원 도승지' 직책을 맡깁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의 비서실장으로 홍국영은 수석비서관 동부승지에서 비서실장급인 도승지로 승진하게 된 것입니다.
정조가 홍국영에게 맡긴 직책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조가 인재양성을 위해 세운 규장각의 직제학을 맡기는 데 이는 정 3품 이상이 임명된 규장각의 이인자 격 직책이었습니다.
정조는 규장각 설립 이후 최초의 직제학 자리를 홍국영에게 맡긴 것입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조선의 중앙군영이라고 할 수 있는 오군영 중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의 대장'인 '수어청 수어사'에 직책을 주어 군권까지 넘겨줍니다.
이뿐 아니라 정조는 수도인 도성 내부와 궁궐을 경비하는 금위영의 대장인 금위영 금위대장직 마저 홍국영에게 맡깁니다.
세손 때부터 여러 위협에 시달리던 정조는 홍국영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곁에서 자신을 지킬 주요 관직을 홍국영에게 모두 맡기게 됩니다..
12. 정조, 즉위 후에도 위협이 계속되자 24시간 왕을 지키는 '숙위소'를 설치하고 '숙위대장'으로 홍국영을 임명하다
1777년 7월 28일 늦은 밤, 여느 때처럼 촛불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던 정조는 지붕 위를 오가는 수상한 발소리를 듣게 됩니다.
괴한의 인기척에 깜짝 놀란 정조는 큰 소리로 호위군을 부릅니다.
이때 궁궐의 경비 책임자인 금위대장이었던 홍국영은 병사들을 이끌고 궁궐안팎을 샅샅이 뒤집니다.
그런데 범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습니다.
이렇듯 정조는 즉위 후에도 끊이지 않는 위협을 받습니다.
이때 정조가 찾아낸 방법은 무엇일까요?
홍국영에게 또 하나의 직책을 맡기는데 바로 숙위대장(宿衛大將)입니다.
궁궐 내에서 숙직하면서 24시간 궁궐을 지키는 경호부대인 숙위소를 새로 설치하고 이 '숙위소'를 지휘하는 '숙위대장'으로 홍국영을 임명한 것입니다.
이로서 홍국영은 정조의 비서실장이자 경호실장까지 맡게 된 셈입니다.
숙위대장이 된 홍국영은 궁궐 경비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정조의 안전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숙위소가 생긴 이후에 궁궐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홍국영의 검문을 거쳐야만 정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홍국영이 문고리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홍국영은 30살의 나이로 조선 조정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쥐게 됩니다.
13. 홍국영, 문고리 권력을 쥐고 교만해지다
'병위를 부르고 대답하는 것이 마치 사삿집과 같았고 방 안에는 늘 다리가 높은 평상을 두고 맨발로 다리를 뻗고 앉았다'
<정조실록>
궁궐 안에 있는 숙위소는 정조의 처소와 고작 담장 하나거리에 불과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홍국영은 지척에 왕을 두고도 숙위소 방에서 교만하게 맨발로 다리를 쭉 뻗어 평상 위에 둔 채 교만한 행동을 하면서 고관대작들을 맞이합니다.
숙위소 문 앞에는 홍국영에게 아부하기 위한 벼슬아치들로 늘 문정성시를 이뤘습니다.
기고만장한 홍국영의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여자들이었던 궁녀들을 데려다가 온갖 어지럽고 더러운 짓을 일삼았습니다.
홍국영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이런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이 상황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을까요?
정조는 홍국영의 모든 행동에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정조의 침묵은 홍국영과 조정신료 모두에게 홍국영에 대한 여전한 정조의 총애와 신뢰로 해석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14. 홍국영, 정조의 사돈이 되어 외척으로서의 권세를 누리다
그런데 홍국영은 정조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아래 또 다른 자리까지 욕심을 냅니다.
바로 정조의 '사돈'자리입니다.
홍국영은 자신의 여동생과 정조를 결혼시켜서 왕실의 외척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정조와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혹시 아들이 태어난다면 자신의 핏줄을 가진 조카가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황은 홍국영에게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당시 정조는 정실부인이었던 효의왕후와 혼인한 지 15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때 정조의 나이가 27살이 되었고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해 이제라도 후궁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때 간택된 후궁은 홍국영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었습니다.
과연 홍국영의 여동생 간택 이후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간택된 홍국영의 여동생이 유례없는 대우를 받게 됩니다.
입궁하자마자 후궁 최고 품계인 정1품 '빈(嬪)'에 오른 것입니다.
정1품 '빈'은 보통 왕자를 낳은 후궁들에게 내려지는 품계였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숙종의 사랑을 받았던 장희빈 조차도 빈 품계를 받기까지 입궁 후 수년이 걸렸을 만큼 올라가기 쉽지 않은 품계였습니다.
하지만 단지 홍국영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입궁하자마자 빈 품계를 받은 홍국영의 여동생 사례를 통해 당시 홍국영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홍국영의 여동생에 대한 파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홍국영의 여동생의 후궁간택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녀에게 붙여진 이름이 '원빈(元嬪)'이었다는 것입니다.
으뜸 원(元) 자는 조선 왕실 내에서 왕과 왕비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홍국영의 여동생에게 '원빈'이라는 이름이 내려진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홍국영이 직접 원빈이라는 이름을 짓고 정조에게 올렸던 것이고 정조는 이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실세 홍국영의 입김과 홍국영을 향한 정조의 지지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왕의 사돈이 된 후 홍국영의 행동은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몰고 옵니다.
'그 누이가 빈이 되고서는 더욱 방자하고 무도하여 곤전(중전을 높여 부르는 말)의 허물을 지적하여 함부로 몰고 협박하는 것이 그지없었으나 '
<정조실록>
당시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이 중전이었던 효의왕후에게 함부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참고 말하지 않았다'
<정조실록>
심지어 이런 원빈의 행동에도 정조는 참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정조가 지금까지의 '묵인'과는 조금 다르게 '참았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는 정조도 이제는 홍국영의 행동이 점점 거슬리기 시작한 것으로 읽힙니다.
15. 홍국영 여동생 '원빈', 후사 없이 갑작스럽게 죽자 홍국영은 중전 '효의왕후'를 의심하다
조카를 통해 왕위를 잇게 하겠다는 홍국영의 꿈은 불과 1년 만에 물거품 되고 맙니다.
1779년 5월,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 씨'가 후사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홍국영은 하나뿐인 여동생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합니다.
그런데 이때 슬픔에 잠긴 홍국영은 누군가를 향해 폭주합니다.
'제 누이가 죽은 것을 감히 곤전에게 의심해... 내전 나인 여럿을 잡아다 칼을 빼들고 무수히 치며 혹독한 고문을 하였다'
<한중록>
홍국영은 효의왕후가 여동생을 독살했다고 의심하며 효의왕후의 궁녀들을 잡아다가 잔혹하게 고문까지 한 것입니다.
한낱 신하인 홍국영이 조선 왕실을 능멸하는 것으로 정조와 왕실의 입장에서는 이는 선을 제대로 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이번에도 홍국영 피붙이의 죽음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실수라고 생각하고 참습니다.
정조는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홍국영을 이해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16. 홍국영, 정조와 죽은 '원빈 홍 씨' 사이에 양자 '완풍군'을 들이다
홍국영은 또 한 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입니다.
왕의 외척이 되겠다는 홍국영의 야망이 아직 꺾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조와 죽은 '원빈 홍 씨' 사이에 양자를 들이려고 한 것입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자식 없이 죽은 경우에는 제사를 지내줄 양자를 사후에 입양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왕실에 양자를 들일 때에는 왕실의 가장인 왕 정조뿐 아니라 정실부인인 중전 효의왕후, 그리고 왕실의 큰 어른인 대비 정순왕후의 동의가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왕실의 입양 문제를 왕실의 일원이 아닌 홍국영이 개입해서 막무가내로 진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홍국영이 택한 정조의 양자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이담'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무꾼에서 조선의 왕이 된 철종 (tistory.com)
왕실 혈통에서 항렬상 정조의 아들 항렬인 조카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은언군의 아들 이담을 정조의 양자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담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홍국영은 이담을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정조가 더 이상 아들을 만들 수 없도록 새로운 후궁이 들어오는 것까지 막습니다.
홍국영은 본인 의지대로 정조의 양자를 들인 후 야심을 담아 은언군의 아들 이담에게 '완풍군(完豊君)'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줍니다.
'완풍군(完豊君)'이라는 이름에는 홍국영의 무시무시한 야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완'은 왕의 본관인 전주의 이름 '완산'에서, '풍'은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풍산'에서 따온 말이었습니다.
즉 전주 이 씨 왕가의 핏줄에 은근슬쩍 자신의 집안인 풍산 홍 씨를 끼워 넣은 것입니다.
즉 임금의 가문과 홍국영 가문의 결합을 의미하는 이름이 바로 '완풍군'이었던 것입니다.
홍국영이 정조의 양자를 통해 꿈꾼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홍국영이 은밀이 나라의 근본을 옮기려는 계책이었다'
결국 홍국영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자인 완풍군을 앞세워 '세도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17. 홍국영, 유배지 강릉에서 병사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z_0i_sO6QyE
홍국영이 어느 날 정조에게 먼저 사직하겠다고 말하고 정조는 이를 허락합니다.
하지만 홍국영 성품 상 절대 스스로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조가 사전에 홍국영을 불러 사직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조는 홍국영에게 대한 마지막 배려로 사직을 권했을 것입니다.
홍국영은 권력을 잡은 지 불과 4년여 만에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궁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홍국영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다시는 도성에 들어올 수 없다'
홍국영은 한양에서 추방되어 강원도 횡성을 거쳐 강릉까지 쫓겨납니다.
결국 홍국영은 1781년 34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유배지 강릉에서 병사하고 맙니다.
18. 홍국영, 죽은 후 '역적'이 되다
홍국영 사후 5년 뒤인 1786년, 죽은 홍국영에게 또 한 번 충격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홍국영을 '역적'으로 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786년 5월, 정조의 첫아들 문효세자가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그런데 왕실의 큰 어른이자 정조의 새 할머니였던 '정순왕후'가 정조의 큰아들 문효세자의 죽음에 홍국영과 관련된 이가 개입돼 있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궁궐에 남아있는 궁녀나 내시와 같은 홍국영의 끄나풀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예전부터 왕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조정을 쥐고 흔든 홍국영이 언짢았었던 것입니다.
그 오만방자했던 행동을 잊지 않고 있다가 문효세자의 죽음을 빌미로 죽은 홍국영을 역적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홍국영은 감당하지 못할 권력에 눈이 멀어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 스스로 몰락하고 맙니다.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tistory.com)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MBC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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