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효종은 누구인가?
1649년, 새롭게 즉위한 조선의 왕은 조선 17대 왕 '효종'입니다.
효종의 아버지는 조선 16대 왕 인조입니다.
인조는 오랑캐라고 낮잡아 봤던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이마를 찧으며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해야 했던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던 왕입니다.
donbuller.tistory.com/entry/소현세자2
인조가 청나라에게 처참하게 항복했던 전쟁은 바로 '병자호란(1636년)'이며 이는 조선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치욕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청에 인질로 끌려간 인조의 큰 아들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던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바로 '효종'입니다.
2, 효종, 즉위 1년 만에 청나라 섭정왕 도르곤의 신붓감을 요구받다
그런데 효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650년, 조선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청나라 사신이 들고 온 비밀문서 때문입니다.
당시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13년이 지나고 효종이 즉위하고 1년도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었습니다.
효종과 조정대신들은 청나라에서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가 무슨 요구를 할지 몰라 분주해집니다.
당시는 병자호란의 여파로 청나라가 요구하면 어떤 요구든 무조건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청나라 사신을 미리 만날 신하를 보내 청나라의 요구조건을 알아보려 합니다.
요즘도 국가 간의 협의가 필요한 일에는 실무자들끼리 사전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거처럼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미리 만난 청나라 사신은 이상한 것을 물어봤다고 합니다.
바로 효종의 자녀가 몇 명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신하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또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외교적인 요구 사항을 적은 문서를 '칙서(勅書)'라고 하는데 이때 청나라 사신이 가지고 온 칙서가 2개였습니다.
하나는 그 내용을 사전에 알려줬는데 다른 하나는 꽁꽁 감추고 어떤 내용인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은 것입니다.
수상할 만큼 청나라 사신들은 나머지 하나의 칙서의 내용을 숨겼습니다.
효종은 이 비공개 칙서가 어떤 내용이 담겼을지 몰라 걱정하며 속절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그로부터 4일 후 청나라 사신을 만나고 온 신하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서둘러 신하를 궁으로 불러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묻습니다.
'10인으로 하여금 칙서를 지키도록 하면서 "만일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사죄로 논하겠다"라고 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 있어도 역시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청나라는 무려 10명이나 그 칙서를 지키게 하고 만일 비밀을 발설하면 사형으로 다스리겠다고 이야기하며 칙서의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런데 효종은 정말 아무런 정보가 없었을까요?
사실 다른 신하가 몰래 가져온 고급 정보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칙서를 쓴 사람이 누군지 알아온 것입니다.
문제의 칙서를 쓴 사람은 청나라의 황제가 아닌 당시 청나라 최고 실세였던 '도르곤'이었습니다.
도르곤은 청나라의 섭정왕으로 불리고 있었습니다.
섭정왕은 군주가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군주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청나라 황제 순치제의 나이는 겨우 6살이었습니다.
순치제의 삼촌인 도르곤은 어린 조카인 순치제를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황제와 다름없는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르곤의 비밀 칙서를 가지고 청나라 사신이 드디어 조선 궁궐에 도착합니다.
효종과 모든 신하의 이목은 바로 그 칙서에 쏠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칙서의 내용이 공개됩니다.
'대신을 조선으로 보내서 숙녀를 비(妃)로 삼아 조선과 인친(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을 맺도록 하기를 바란다'
<효종실록>
도르곤이 조선의 여인을 뽑아서 결혼을 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가 죽어 현재 공석으로 비어있는 도르곤의 다섯 번째 아내가 될 조선의 신붓감을 보내라는 요구였습니다.
즉 효종이 청나라와 사돈을 맺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효종은 청나라의 섭정왕인 도르곤이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자칫 청나라를 화나게 했다가는 다시 병자호란과 같은 후환이 벌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효종의 딸 중에서 청나라로 가는 공주는 없었습니다.
사실 칙서에는 공주를 보내라는 것 이외에도 다른 내용이 또 있었습니다.
'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의 근족이나 대신의 딸 중에 참하고 덕행이 있는 자가 있으면, 선택하여서 짐이 보낸 대신들이 보고 와서 답하게 하라'
<효종실록>
공주를 포함하여 왕실 및 대신의 딸 중에서도 도르곤의 신붓감 후보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왕뿐 아니라 조정 대신이나 종친들도 자신의 딸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이르자 조정 대신들과 종친들까지 모두 두려움에 떱니다.
이 신붓감의 후보군은 이제 왕실 종친부터 대신들의 딸까지 늘어난 상황입니다.
도르곤의 신붓감 후보는 몇 명이나 모였을까요?
왕, 조정 대신, 종친 총 300여 명 중에 자신의 딸을 내놓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종친과 대신들 역시 효종처럼 청나라 오랑캐 와의 혼인을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도 딸을 내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틀 만에 청나라 사신은 신붓감을 얼른 내놓으라며 효종을 몰아붙입니다.
분노한 청나라 사신 때문에 효종과 조정 대신들이 쩔쩔매는 상황이 벌어진 가운데, 이때 효종이 기뻐할 소식이 들립니다.
'금림군이 스스로 말하기를 "딸이 있는데 자색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선택에 적절할 듯합니다'
<효종실록>
금림군의 딸이 신붓감이 뽑혔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청나라 실권자의 신붓감을 뽑는데 단 1명의 후보를 데려간다면 청나라 입장에서 조선이 그들을 무시한다고 여길지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딸은 보내기 싫었던 효종은 대신들에게 딸을 숨긴 자는 처벌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으며 신붓감 후보를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신하들을 압박합니다.
결국 겨우 겨우 우선 관리들의 딸 중에서 4명을 선발합니다.
그리고 이개윤을 포함한 종친들의 딸 16명을 또 모아 총 20명의 신붓감 후보를 모읍니다.
그런데 이때 청나라 사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붓감 후보를 30명에서 40명은 모아 오시오. 적합한 자가 있으면 선택하겠고 없으면 돌아가겠소!'
효종은 화를 내는 사신의 반응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게 됩니다.
이에 신하들은 모아 온 신붓감을 먼저 본 후에 맘에 들지 않으면 추후 좀 더 모아보겠다고 청나라 사신들에게 통사정을 합니다.
그러자 청나라 사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늦었고 내일까지 반드시 60명을 구해오시오!'
모아야 하는 신붓감 후보가 40명에서 순식간에 60명으로 불어난 것입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은 청나라 사신들에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심정으로 호소합니다.
'우리나라의 사정을 양해하시고 각별히 선처해 주십시오'
그렇게 청나라 사신의 억지스러운 요구에 신하들은 비위를 맞춰야 했습니다.
'한 사람도 볼 만한 자가 없었소. 한결같이 못생긴 사람을 선발하여 시험하려는 것이오?'
청나라 사신들은 힘들게 모은 여인들이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더 큰일은 이번에는 진짜 청나라사신이 청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간 청나라 사신이 이 소식을 도르곤에게 전하기라도 한다면 조선은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조선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날 오후 조정에 떠들썩하게 새로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갑자기 내일 새로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어깃장 놓으면서 조선의 왕과 신하들에게 혼란을 줘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청나라 사신들은 도착하여 다짜고짜 이렇게 말합니다.
'곧바로 대궐로 갈 것이니 처녀들을 곱게 단장하여 대기시키시오!'
이전에 봤던 여인들을 다시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신은 여인들을 본 후 한 여인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16세 여성은 짐을 꾸리시오!'
드디어 도르곤의 신부가 될 여성이 뽑힌 것입니다.
효종은 이때 뽑힌 여성을 청나라 사신에게 '조선의 공주'라고 소개합니다.
조선시대의 공주들은 일곱 살이 넘으면 '작호'라고 하는 새로운 이름을 받습니다.
작호란 관작을 받을 사람들이 이름 대신에 사용한 칭호입니다.
'이애숙' 또한 효종에게 작호를 받았습니다.
바로 '옳을 의'에 '순응할 할 순'을 써서 '의순공주 (義順公主 ) '입니다.
'나라를 위하는 의로운 일에 순순히 따랐다'라는 의미입니다.
3. 의순공주, 도르곤의 신붓감으로 뽑혀 청나라로 향하다
의순공주가 조선을 떠나 청나라로 가는 날, 의순공주의 마음은 어땠으며 오랑캐의 신붓감으로 떠나는 공주를 보는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를 본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비참해하였다'
백성들 또한 같은 마음으로 슬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효종은 의순공주의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아버지 이개윤의 품계를 종1품으로 올려주고 비단과 쌀을 내렸고 의순공주의 두 오빠는 벼슬을 받습니다.
또 포상으로 비단과 은 천냥도 보냅니다.
결국 왕의 종친이었지만 별 볼 일 없던 이개윤의 집안은 의순공주와 도르곤의 결혼으로 관직과 재산을 얻게 됩니다.
청나라에 바친 희생양 의순공주, 이제 최종 목적지는 도르곤이 사는 북경의 자금성이었습니다.
한양에서 북경까지는 약 757km로 무려 2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의순공주에게 이 험하고 낯선 길보다 더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순공주를 청나라로 데려가고 있는 청나라 사신단의 '통역관'이었습니다.
이 통역관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려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사정은 일체 그가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는 대로 되었다'
<연려실기술>
청나라와 조선사이에서 마음대로 힘을 휘두르고 조종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통역관의 정체가 더 충격적입니다.
바로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인이었던 것이며 그의 이름은 '정명수'였습니다.
정명수는 청나라 통역관으로 병자호란 때 매국에 앞장선 인물 중 하나입니다.
정명수는 청나라 사신을 부추겨서 조선에 곤란한 요구들을 강요했던 인물입니다.
정명수에게는 예전에도 이미 악명 높은 전력이 있었습니다.
정명수는 의주에서 한양까지 청나라 사신이 통과하는 고을마다 하룻밤을 함께 보낼 기생을 바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조선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청나라 사신과 정명수가 연로의 각 고을에서 방기(기녀) 바치기를 요구하였는데 기녀들이 죽음으로 항거하였다'
<인조실록>
이 악명 높은 정명수가 의순공주와 함께 청나라로 가고 있던 도중에도 조선인의 은화를 뺏고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조선인이면서 더욱더 악랄하게 조선인을 괴롭히는 정명수를 지켜봐야 했던 의순공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가 들어가서 접정왕에 여쭈면 네 목숨이 끊어질 것이니 네가 감히 마음속으로나마 내 나라에서 그런 악행을 하겠느냐?'
<무오연행록>
의순공주는 이 악랄한 정명수를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4. 의순공주, '백송골'로서의 삶이 시작되다
도르곤은 의순공주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서 직접 마중까지 합니다.
의순공주는 드디어 섭정왕 도르곤 앞에 서게 되고 도르곤은 그녀에게 청나라식 이름을 지어줍니다.
바로 '백송골(白松鶻)'입니다.
이는 '하얀 매'라는 뜻이며 의순공주가 하얀 매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효종이 지어준 이름 의순공주가 아닌 이제는 청나라 도르곤의 백송골로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이때 의순공주의 나이는 16살이었고 그의 남편 도르곤의 나이는 39살로 무려 23살의 나이차이가 났습니다.
의순공주는 원치 않는 결혼으로 가족도 없고 말도 문화도 다른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에서 도르곤의 다섯 번째 아내가 됩니다.
5. 도르곤, 또 다른 여인을 조선 조정에 요구하다
그런데 의순공주가 떠나고 네 달 뒤 8월, 갑자기 청나라로부터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공주가 아름답지 않고 시녀도 못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방법으로 힐책하였습니다'
<효종실록>
도르곤은 의순공주를 보고는 '백송골'이라고 이름 붙여줄 만큼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그가 갑자기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연이어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고 이 사신을 통해 도르곤의 속내가 밝혀집니다.
'미녀를 뽑아 보내면 도르곤이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도르곤은 조선의 또 다른 미모가 뛰어난 여성을 자신에게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 사신은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렇게 하면 의심했던 것도 모두 풀 수 있을 것입니다'
6. 효종, 청나라 몰래 '북벌정책'을 준비하다
도르곤은 대체 조선에 어떤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효종은 청나라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청나라 몰래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북벌정책(北伐定策)입니다.
북벌정책은 무력으로 조선의 북쪽을 정벌한다는 것으로 군사력을 길러 조선에서 북쪽인 청을 정벌하려는 정책을 말합니다.
'정예 포병 10만을 양성하여 틈이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곧장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을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
<독대설화 中>
효종은 병자호란 때부터 이어진 청나라에게서 받은 치욕과 수치를 갚아주고자 했기에 청나라 몰래 청나라를 정벌할 북벌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7. 의순공주, 남편 도르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위기에 처하다
하지만 아직은 힘이 없었던 조선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청나라로 보낼 여인을 모집합니다.
효종은 조선팔도에 아름다운 여성을 뽑아오라고 명령하고 조선은 다시 한번 난리가 나게 됩니다.
'딸을 둔 집에서는 마치 병화를 피하듯이 달아나 숨고 심지어는 머리를 자르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까지 있어 원망과 탄식이 길에 가득합니다'
<효종실록>
마치 전쟁터에서 목숨을 구하듯 달아나 숨고, 긴 머리를 스스로 삭발하는 가 하면 청나라에 가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인들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없는 조선의 여성들이 다시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억지로 붙잡혀 청나라로 향했던 조선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도르곤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다시 조선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르곤의 죽음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의순공주'입니다.
그녀는 갑자기 겨우 결 7개월 만에 남편을 잃게 된 것입니다.
8. 의순공주, 역적의 아내가 되어 새로운 남편 '보로'에게 보내지다
의순공주는 또 하나의 시련이 닥칩니다.
의순공주가 시집갈 때 도르곤의 지위는 섭정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르곤이 죽은 이후 도르곤이 섭정이 아니라 황제의 자리를 넘본 역적임이 밝혀져 청나라에서는 죽은 도르곤의 시체를 꺼내서 토막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의순공주가 한순간 남편을 잃고 심지어 역적의 아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당시 청나라법에 의하면 역적은 재산이 몰수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줬는데 의순공주 역시 그의 재산으로 취급되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의순공주를 보낸 곳은 도르곤의 부하였지만 청나라의 새로운 실세가 된 인물인 '보로'였습니다.
의순공주는 오랑캐에게 시집간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남편인 보로에게 보내지게 됩니다.
심지어 당시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임신부의 몸으로 이런 모진일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조선 사대부 여인이었던 의순공주에게는 너무나도 참혹한 일들이었습니다.
9. 의순공주, 새 남편 보로도 사망하다
보로가 의순공주의 새 나면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의 대신들이 청나라로 의순공주를 만나러 가려고 합니다.
의순공주를 도와주려고 간 것일까요?
' 의순공주가 또 보로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사람이 동국의 일을 주관한다 하니 마땅히 안부를 물어야 할 듯합니다'
<효종실록>
의순공주의 새로운 남편 보로가 청나라의 새로운 실권자이니 인사를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순공주의 안위에 대한 위로, 그녀의 사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던 중 의순공주에게 또 사건이 벌어집니다.
새 남편 보로 또한 1년 만에 사망한 것입니다.
의순공주는 오랑캐이자 역적인 도르곤의 아이를 낳고 연달아 두 남편을 잃습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도 의순공주는 돌봐줄 이 하나 없는 타국에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외로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10.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라고 손가락질하고 외면하다
조선에는 의순공주보다 먼저 청나라에 끌려갔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혼란스러운 그때 청나라 군사들은 평범한 백성은 물론이고 사대부 여성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갑니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 여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는 다행히 조선으로 돌아와 가족의 품에 다시 안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여성들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환향녀(還鄕女)'는 돌아올 환, 고향 향, 계집녀 라고 해서 환향녀라고 불렸는데 이는 좋지 않은 의미의 욕으로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 여인들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반갑게 반겨주리라 믿었던 가족들이 오히려 그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습니다.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을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었다면서 가족들은 품어주기는커녕 집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떠나보낼 때는 울며 가슴 아파했던 가족들이 정작 이들이 돌아오자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며 외면했던 것입니다.
돌아온 여인들 때문에 가문의 명예가 떨어질까 봐 두려워했던 당시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JMKChWV8fE&t=180s
11. 의순공주, 청나라에서 돌아오다
의순공주에게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의순공주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효종실록>
1655년 추운 겨울, 어떤 인물이 청나라에 있었던 의순공주를 찾아옵니다.
의순공주의 아버지 이개윤이었습니다.
이개윤이 조선의 사절단으로 청나라에 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글을 황제에게 올린 것입니다.
'제 딸을 돌려주십시오'
이개윤은 타국에서 혼자된 딸을 걱정하며 황제에게 간청하는 글을 올린 것입니다.
청나라황제는 이를 받고 기꺼이 허락합니다.
부친이 와서 과부가 된 딸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면 거절할 수 있겠지만 청나라 입장에서 이미 의순공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부의 존재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청나라 황제가 인간적인 마음으로 허락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2. 환영받지 못한 의순공주, 고국에 돌아온 지 7년 만인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다
의순공주가 돌아온다는 소식은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그래도 공주였으니 사람들은 기쁘게 맞이해 줬을까요?
당시 분위기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글로 아뢰어 그 딸을 데리고 돌아오니 당시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였다'
<연려실기술>
그리고 조정대신들은 사사로이 딸을 데려온 이개윤을 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개윤은 일의 체제를 생각하지 않고 조정을 업신여기며 사사로운 뜻에 끌려 (딸을) 멋대로 돌려달라고 청하였으니, 국법에 있어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삭탈 관작하여 성문 밖으로 쫓아내소'
<효종실록>
의순공주를 보내고 또 돌아오는 것은 조선 조정에서 정하는 일인데 이개윤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멋대로 딸을 데려왔으니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벼슬아치 명부에서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개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 도성밖으로 쫓겨납니다.
의순공주는 조선의 치욕을 끌어안고 청나라로 떠났고 그녀의 존재는 조선으로서는 잊어버리고 싶은 안 좋은 기억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조정 대신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의순공주를 청나라에서 데려온 이개윤에 대해서 엄청나게 공격을 가한 것이며 이로 인해 백성들 또한 이개윤을 욕하게 합니다.
사실 이런 비극이 발생하게 만든 핵심 책임자는 효종과 조정 대신들임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신하들은 모든 책임을 회피한 채 이를 모두 이개윤의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결국 의순공주는 조선에 온 지 7년이 된 1662년 8월 6일, 28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의순공주는 오명으로 손가락질만 받다가 결국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순공주가 죽고 난 후 만들어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족두리 무덤'입니다.
이것이 왜 족두리 무덤인지 그 이유를 알면 충격을 받을 이름에 담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신부가 될 처지가 되자 오랑캐와 사느니 죽는 편이 낫다며 강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강에서 족두리가 떠올랐다면서 그 족두리를 건져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청나라에 끌려가 돌아온 여성의 정체를 숨기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는 이야기로 바꿔서 만들어낸 것일까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모습에 맞춰서 의순공주를 기억하기 위해 거짓 무덤을 만들고 이야기를 만들어 전설로 남게 한 것입니다.
결국 그 죽음을 포장하고 미화시키면서 의순공주가 살아 돌아온 것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죄라는 논리였습니다.
족두리가 묻혀 있다는 의순공주의 무덤과 이야기는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이라는 나라의 권력자와 남성의 무능함과 치욕의 증거를 지우고 싶었던 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엠뚜루마뚜루>
donbuller.tistory.com/entry/조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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