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슨, 위인전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발명왕의 이면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은 전화기와 녹음기, 전구뿐 아니라 영화 그리고 전기 자동차에 사용하는 2차 전기까지 발명한 세계적인 발명가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 어릴 적 위인전을 통해서 수없이 이름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고 있는 대부분의 제품과 시스템에 영양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재 발명가인 에디슨이 도대체 왜 사형집행에 사용되는 '전기의자'처럼 끔찍한 발명품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것일까요?
그 이유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직류 대 교류의 전류 전쟁 때문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위인전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발명왕 에디슨의 실체'입니다.
1. 호기심이 많았던 에디슨의 탄생과 꼬마 과학자로서의 어린 시절
에디슨은 태어날 때부터 유별났는데, 부모님께 기쁨보다는 걱정을 더 많이 끼치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1847년 2월 11일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갓 태어난 에디슨을 보고 담당의사는 뇌척수막염에 감염됐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들을 만큼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습니다.
다행히 의사의 걱정은 우려에 그쳤지만 호흡기 질환과 귀앓이 등 잦은 병치레를 앓을 만큼 허약한 아이였습니다.
또한 장난도 심했는데 선생님이 1+1은 2라고 가르치면,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을 더하면 물 한 방울이라면서 수업분위기를 망치기 일쑤였고 친구가 새처럼 날고 싶다고 말하자 가벼워지면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체불명의 약품을 친구에서 줘서 죽을 뻔한 적도 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호기심과 상상력이 풍부했던 에디슨은 학교의 암기위주의 교육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불과 3달 만에 자퇴를 하게 됩니다.
이때 에디슨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전직 교사였던 어머니는 홈스쿨링을 통해서 에디슨을 직접 교육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녀가 특히 열성을 쏟은 교육은 독서였고, 바로 이 시기 에디슨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놓은 책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리처드 그린 파커가 쓴 '자연 과학과 실험 과학 입문'이라는 책입니다.
3개월밖에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에디슨은 과학 원리에 대한 설명과 실험 방법이 적혀 있는 이 책을 보았고, 책을 읽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독학으로 실험을 따라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이렇게 실험에 몰두한 아들을 위해 집 지하실에 실험실을 만들어줬고, 에디슨은 9살 무렵부터 밤낮없이 이 지하 실험실에 머물며 실험에 몰두했다고 전해집니다.
2. 에디슨, 12살에 가세가 기울며 기차 판매원이 되다
하지만 꼬마 과학자 에디슨에게 불운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목수였던 아버지의 사업부진으로 빚이 늘어나면서 가정 형편이 나빠졌고 에디슨은 12살이 되던 해, 기차에서 사탕과 신문등을 파는 판매원이 됩니다.
당시 에디슨은 시골 동네였던 포트 휴런에서 대도시인 디트로이트까지 왕복 8시간이나 걸리는 노선에서 근무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성인이 된 에디슨은 고단했을 것만 같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기
당시의 기차는 첨단 문명의 상징이었고 꼬마 과학자 에디슨은 기차를 타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것입니다.
19세기 초 많은 양의 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증기기관차의 발명은 이동수단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과학에 흥미가 많았던 에디슨에게 기차는 '호기심을 채워줄 탁월한 근무지'였던 것입니다.
3. 한쪽 청력을 잃은 에디슨, 15살에 신문을 직접 발행하는 첫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다
그런데 이 시기 어린 에디슨에게 또다시 불운이 닥치게 됩니다.
바로 한쪽 청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세가 기운 것도 모자라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난청까지 앓게 된 에디슨은 굴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결심합니다.
합니다.
15살 에디슨이 시작한 첫 번째 사업은 직접 신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에디슨은 기차에서 지루해하는 승객을 보고 1862년 2월, '위클리 헤럴드'라는 신문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제작한 신문에는 자신이 근무하는 '그랜드 트렁크 철도'의 열차시간표, 열차 안에서 분실된 물건뿐만 아니라 버터나 달걀 같은 식료품의 가격, 출생 사망 통지와 같은 일상적인 소식 등 다양한 정보가 담겼습니다.
하지만 취재부터 인쇄까지 혼자 해야 했기 때문에 정보력의 한계 때문에 결국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업을 접게 됩니다.
4. 15살 에디슨, 역장의 아들을 구하며 전신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을 잡다
에디슨이 신문 제작 사업에 실패를 맛본 15살에 그의 눈앞에서 운명처럼 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기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몸을 던져 구해주면서 엄청난 기회를 잡게 됩니다.
에디슨이 구한 아이가 역장의 아들이었고, 에디슨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에 에디슨은 당시 신문 제작을 하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었던 전신 기술을 전신 기술을 알려달라고 했고, 이것을 배울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사람이 직접 마차를 타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빛의 속도로 정보를 전달해 주는 전신기를 발명하면서 인류가 최초로 모스 부호를 통해서 실시간 통신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5. 16살 에디슨, '전신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동네 보석 가게에서 일하다
1863년, 16살이 된 에디슨은 철도회사를 그만둔 후 전신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전신 기술을 배운 후 동네에 있는 한 보석 가게에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에디슨이 취직한 보석 가게는 보석과 책을 파는 가게였지만 밤새 뉴스를 전신으로 받아서 아침에 지역언론에 제공하는 서비스도 했던 곳이었고, 에디슨은 보석 가게에서 신입 전신 기사로 근무했습니다.
에디슨은 한쪽 청력을 잃었기 때문에 모스부호를 듣는 것에 한계가 있었지만 그가 나중에 회고하기를
한쪽 청력을 잃은 것은 오히려 나의 장점이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외부 소음에 신경을 쓰지 않고 전신기의 딸깍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시대적인 배경도 한몫했습니다.
1861~1865년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숙달된 전신 기사들이 모두 전쟁에 참전해 전신 기사가 귀해져서 16살밖에 안된 어린 에디슨도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고 전신 기사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6. 에디슨, 반복되는 꼼수와 실수, 장난으로 떠돌이 전신 기사 신세가 되다
독서와 발명에 빠져있던 자유분방한 에디슨은 윗사람들에게 통제를 받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그래서 번번이 꾀를 부리는 바람에 해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에디슨은 캐나다 기차역에서 전신 기사로 야간근무를 했는데 졸음을 방지하기 위해 매시간 의무적으로 전보를 보내도록 했고, 특이하게도 에디슨만 1초의 오차도 없이 매시간 신호를 꼬박꼬박 신호를 잘 보냈습니다.
어느 날, 상사가 급한 일로 에디슨을 호출했는데 응답이 없자 화가 난 상사가 역으로 찾아갔는데, 에디슨이 의자를 두 개 붙여 놓고 자고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는 시계에 전신기를 연결해서 매시간 자동으로 신호가 가도록 해놓았던 것입니다.
또한 근무 시간에 개인 실험을 하다가 화학용품을 쏟아 카펫과 가구를 못쓰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꼼수와 실수가 상사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한 회사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이 전신 기사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심지어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코일을 감아놓은 후 전기장치를 설치해 직장동료들이 물에 손을 넣으면 찌릿하게 전기 쇼크를 오게끔 해놓는 등 직장 동료들을 향한 장난도 심해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에디슨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7. 에디슨, 발명가로서의 삶을 선택하다
이런 에디슨의 왕성한 호기심과 실험에 대한 열정은 그가 '발명'을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빛을 발하게 됩니다.
에디슨이 전문 발명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그는 이렇게 각오를 다짐합니다.
나는 할 일이 너무 많고 인생은 너무 짧아서 서둘러야 한다
8. 에디슨의 첫 발명 특허 '자동 투표기', 상용화에 실패
1869년 6월 22살의 에디슨은 인생 최초의 특허를 등록합니다.
'HAVEN YES, HAVEN NO'라고 쓰인 이 기계는 투표 결과가 자동으로 집계되는 '자동 투표기'입니다.
에디슨은 자동으로 투표 결과를 집계해 주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발명품이라고 발명을 했지만 오판이었고, 대중적으로 적용하기도 힘들다 보니 상용화에는 실패합니다.
9. 에디슨, 실패를 딛고 새로운 발명을 하다
이후에도 에디슨의 발명 실패가 계속되었고 길거니 노숙을 해야 할 만큼 재정 상태 또한 바닥이 났습니다.
잇따른 실패로 에디슨은 한까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희망을 찾아 기회의 땅 뉴욕을 향했고, 이곳에서 에디슨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당시 뉴욕에서는 금융에 전신이 이용되면서 정확한 정보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멀리 전달하느냐가 돈을 벌기 위해 관건인 시대였습니다.
이에 에디슨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인 전신 기술로 발명품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주식 시세를 문자로 프린트해 주는 '스톡 티커'라는 기계인데 이 기계의 특별한 점은 전선으로 연결된 여러 곳의 프린터에서 동시에 동일한 내용이 출력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 기계는 뉴욕 전 지역에 주식 시세를 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전신 회사였던 웨스턴 유니언 전신회사에 1200대를 판매하기도 하며, 7만 8천 달러의 수익을 올렸는데 이 돈은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23억 원의 가치입니다.
이후 에디슨은 1875년 유선전신을 활용한 또 다른 발명품인 동시에 두 개의 메시지를 보내고 또 동시에 두 개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4중 전신기'를 발명하며 85만 달러, 현재 가치로 약 250억 원의 수익을 거두며 대박을 터트립니다.
기존에는 오직 한 개의 전선만 사용해 한 개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4중 전신기를 발명함으로써 동시에 메시지를 2개씩 주고받게 된 것입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그에 비례해서 전선값이 올라가는데, 전선 하나로 4개의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이므로 전선 추가 없이 메시지 전달 속도를 4배 늘렸다고 볼 수 있어 당시로서의 혁신적인 기술이었던 것입니다.
이때 에디슨은 불과 28살이었습니다.
일생을 발명으로 보내던 에디슨은 총 1,093개의 특허를 등록했는데 거의 15일에 한 개씩 특허를 등록한 것입니다.
이처럼 에디슨의 삶은 발명에 의한 발명을 위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10. 에디슨, 발명 공장을 세우다
에디슨은 특허권을 판 돈을 모두 투자해서 뉴저지주의 멘로파크라는 작은 마을에 자신의 발명 공장을 세웠는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발명품을 만들기 위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실제 에디슨의 멘로파크공장은 실리콘밸리의 기원으로 불립니다.
에디슨의 발명 공장은 2층 건물이었고, 1층은 발명품을 팔던 상점이었고, 2층은 다양한 발명이 이루어졌던 실험실이었습니다.
11. 멘로파크 발명 공장 최초의 발명 '전화기'
에디슨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료를 최대한 모았으며, 간단한 발명품은 열흘마다 큰 발명품은 6개월마다 제작했습니다.
멘로파크 발명 공장 첫 발명품은 '전화기'였습니다.
사실 세계 최초로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은 '안토니오 무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발명 당시에는 특허 낼 돈이 없었고 25년 후에 영국의 발명가인 '그레이엄 벨'이 먼저 특허등록을 하게 되면서 그 명성을 차지하게 됩니다.
에디슨은 최초로 개발한 발명에 새로운 구성이나 기능을 부가한 기술로 좀 더 실용시키는 일명 '개량 발명'을 잘했습니다.
벨의 전화기는 송신기와 수신기가 일체형이라 음성 품질이 떨어지만, 에디슨의 전화기는 송신기와 수신기를 분리해 음성 전달이 명확해지게 됩니다.
전화기는 이렇듯 에디슨의 개량 발명으로 세상에 널리 사용됩니다.
12. 에디슨이 '나의 아이'라고 불렀던 발명품, 축음기
이후 에디슨은 전화기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발명품을 개발했는데, 그가 '나의 아이'라고 한 발명품은 바로 '축음기'였습니다.
에디슨을 축음기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실패를 거쳤는데, 이때 그는 이런 명언을 남깁니다.
인생의 많은 실패자들은 포기했을 때 얼마나 성공에 가까웠는지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에디슨은 이처럼 실패에 최종 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의 녹음기술인 축음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실패할수록 성공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축음기가 개발된 후 미국 전역에 일파만파 소식이 퍼지며 한마디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고, 때로는 낯선 녹음 기술에 공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에디슨은 이런 우려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당시 러더포드 헤이스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앞에서 오히려 당당히 죽음기 시연을 합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세계 최초의 녹음 기술이 미국에서 탄생했다는 것에 열광했고 축음기야말로 에디슨의 가장 독보적인 발명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1890년 에디슨은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말하는 인형을 발명했는데, 공포스럽고 괴기스러워서였는지 당시에는 잘 팔리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녹음 기술이 더 발전하고 나온 말하는 인형은 히트 상품이 됩니다.
13. 에디슨, 멘로파크의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다
에디슨은 창의적인 발명품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사람들은 그를 '멘로파크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붙여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마법을 부린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발명품들이 신기했던 것입니다.
14. 백열전구, 밤을 밝힐 새로운 빛의 탄생
전화기와 축음기를 통해 발명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에디슨은 그다음으로 전깃불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1800년대 후반 당시에도 전깃불이 있었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아크등을 풍자한 그림으로 아크등은 너무 밝아서 광장 같은 넓은 곳에서만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가로등으로 아크등을 사용했고 집 안에서는 가스로 불을 밝혔지만, 검은 연기가 온 집안을 덮어서 장시간 사용하는 것을 불가했으며 밝기도 좋지 않았습니다.
1879년 12월 28일, 너무 밝은 아크등과 어두운 가스등 사이의 적절한 밝기를 가진 밤을 밝힐 새로운 조명인 '백열등'이 탄생합니다.
에디슨은 멘로파크에서 백열등 시연을 한 후 뉴욕시에서 최초로 800여 개의 전등을 보급하게 되면서, 뉴욕은 밤이 없는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백열전구로 도시를 밝혔을 때 에디슨의 나이는 불과 32세였습니다.
그런데 에디슨의 역작으로 알려진 백열전구 역시 일종의 개량발명이었습니다.
왼쪽에 있는 것이 영국의 화학자이자 전기공학자인 조지프 스완이 만든 백열등이고, 오른쪽이 에디슨이 만든 초기 백열등입니다.
영국의 조지프 스완이 에디슨보다 먼저 백열등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지만, 그의 백열전구는 몇 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꺼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전구 안을 진공 상태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술이 불안정해 성능이 좋지 않아 전구의 수명을 늘리는 데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이때 전구 속 진공상태를 구현해 낸 인물이 바로 에디슨이었고, 그는 진공 펌프를 개선하고 몇 분을 채 버티지 못했던 기존의 전구가 1,200시간 이상을 작동하게 하는 데 성공하게 되며 스완의 전구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에디슨은 백열전구를 발명하면서 하나의 명언을 남깁니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다만 작동하지 않는 1만 가지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이 말처럼 에디슨은 1만 번이 넘는 연구 끝에 백열전구를 완성할 수 있었고, 훗발 백열전구의 성능을 더욱더 개선하고 상용화, 대중화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이때 설립한 에디슨이 만든 전기 회사는 훗날 세계적인 대기업 '제너럴 일렉트릭'의 모체가 됩니다.
15. 에디슨, 파리 국제전기박람회에서 발전기를 선보이다
이렇듯 세계 최초로 실용적인 백열등 제작에 성공한 에디슨은 곧 세계 무대에 도전장을 내게 되었고 파리에서 큰 성과를 냅니다.
1881년 8월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전기 분야 박람회가 열렸고 새로운 전기의 시대가 도래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시험대와 같은 무대였습니다.
바로 '파리 국제전기박람회'에서 에디슨은 놀라운 신제품을 선보이게 됩니다.
공장 기계 같은 거대한 이 발명품은 바로 전기를 만드는 '발전기'입니다.
에디슨의 발전기는 당시 유럽에서 만든 발전기보다 무려 4배나 큰 크기였기 때문에 '거대한 코끼리(점보)'라 불렸습니다.
무려 30톤에 달하는 이 거대한 발전기는 1,200개 이상의 램프를 밝힐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혁신적인 제품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이러한 전기 시스켐으로 명예 훈장까지 수상했으며, 이 발전기로 유럽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을 알리게 됩니다.
파리 국제전기박람회보다 그다음 런던의 전시회에서 더 큰 효과를 누렸는데 최초로 전기를 써서 전광판을 만들어 자기의 이름을 써놓으며 에디슨이라는 이름자체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16. 에디슨, 백열전구 사용화를 위해 새로운 전기 시스템을 구축하다
이때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백열전구가 가정과 상점에서도 누구나 간편하게 사용하려면 새로운 전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뉴욕 5번가에 뉴욕 전기사업본부를 설립합니다.
그다음으로 생산 공장을 건설했고, 마지막 단계로 도시 인프라를 구축했습니다.
마침내 1882년 9월 4일,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커다란 도시 뉴욕을 환하게 밝히는 데 성공합니다.
1883년 뉴욕에는 조선의 보빙사들이 파견되어 있었고 환하게 밝혀진 뉴욕을 보고 귀국한 보빙사들은 조선에 백열전구 설치를 추진하게 됩니다.
그렇게 조선은 아시아 최초로 경복궁에 백열전구를 설치하게 됩니다.
17. 발명의 제왕 에디슨, 투자의 제왕 J.P. 모건을 만나다
당시 금융계의 큰손이자 사업가였던 J.P. 모건은 에디슨이 백열전구 발명을 성공했을 때 뉴욕을 뒤바꿀 대형 산업이 탄생했음을 알아봤고, 그때 마침 에디슨도 뉴욕에서 자금을 지원해 줄 투자자의 든든한 후원이 필요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모건
발명의 제왕과 투자의 제왕, 전기 붐을 일으킬 두 제왕이 이렇게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이 일으키는 시너지는 엄청났습니다.
빠르게 뉴욕의 전기 시스템을 독점하다시피 한 두 사람은 이제 미국 전역으로 전기 사업을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18. 에디슨, 라이벌 조지 웨이팅하우스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끼다
그런데 이때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발생합니다.
바로 에디슨에게 도전장을 내민 라이벌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는 발명가이자 사업가로 명성을 떨치던 '조지 웨스팅하우스'였으며, 그는 세계적인 원자력 회사 웨스팅하우스의 창립자이기도 합니다.
웨스팅하우스는 전기 사업이 큰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보고 1886년 11월, 뉴욕 버펄로에 자신의 저먕 시스템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기 사업에 뛰어듭니다.
이를 시작으로 웨스팅하우스가 에디슨이 장악하고 있던 뉴욕의 전기 시스템을 하나씩 빼앗으며 서서히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웨스팅하우스가 이미 뉴욕을 장악했던 에디슨의 전기 시스템을 빼앗을 수 있었던 데에는 두 사람이 선택한 전기시스템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에디슨이 전기 시장을 선점한 방식은 '직류(DC)'였고, 웨이스팅하우스가 새 판로를 뚫기 위해서 선택한 방식은 '교류(AC)'였습니다.
직류는 건전지와 같이 한 방향으로만 쭉 흐르는 전류이고,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이 방향에 맞춰 장착되어야만 작동이 가능합니다.
교류는 시간에 따라 크기와 방향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류이며, 플러스극과 마이너스극을 구분하지 않아 방향 구분하지 않고 꽂아서 쓸 수 있는 현대시대의 플러그 방식입니다.
1886년 교류 변압기가 발명되면서 발전소를 크게 지어놓고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양의 전기를 원하는 세기로 보내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직류는 변압기를 쓸 수 없어 발전소를 여러 개 건설해야만 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 역시 경제적인 교류를 선택했습니다.
에디슨이 맨해튼에 전기 발전소를 짓던 1882년에는 교류가 경쟁력이 없어서 직류로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었고, 이후 100여 개가 넘는 발전소를 지으면서 직류발전에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에 끝까지 직류밖에 고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 에디슨, 직류의 위험성은 빼고 교류의 위험성만 강조하다
그런데 직류가 교류보다 기술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직류가 코너에 몰리자 에디슨은 한 가지 대책을 생각해 냅니다.
1887년 10월 '에디슨 전기조명회사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83페이지짜리 교류의 위험성을 다루는 책을 발행한 것입니다.
나의 직류는 안전하지만 교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직류건 교류건 전기가 세게 흐르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이며, 당시 많은 곳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상당히 센 전류를 흘려보내야 했기 때문에 에디슨은 직류로도 이런 상황에서는 감전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디슨은 자신의 직류 전선을 땅에 묻어 감전 사고를 사전에 차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에디슨은 이런 직류의 위험성은 쏙 빼고 길게 늘어진 교류의 전선은 위험하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20. 에디슨, 교류만 위험하다는 것을 선동하기 위해 동물을 감전사시키다
이때 교류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을 더욱 극대화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웨스팅하우스는 제대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더 큰 위기로 몰리게 됩니다.
1888년 3월, 대폭설이 미국 동부해안을 강타했는데 이때 폭설에 내려앉은 교류 전선 때문에 감전 사망자들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교류와 관련된 감전 사고들이 발생하면서 대중에게 '전기는 위험한 것'이라고 낙인찍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웨스팅하우스뿐만 아니라 에디슨에게도 달갑지는 않았습니다.
자칫하면 에디슨의 전기 사업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디슨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에디슨의 오른팔인 사람을 시켜 전기 회사 대표, 기자 등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교류를 이용해 개나 말과 같은 동물들을 감전시켜 죽이는 실험을 감행합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에디슨은 교류만 위험하다고 주장했습니다.
21. 에디슨, 교류 전기를 이용한 사형 집행 의자 제작에 자문을 맡기로 하다
그리고 때마침 교류의 위험성을 적극 홍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뉴욕주의 한 치과의사 '알프레드 사우스윅'은 교수형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고 교수형보다 신속하고 고통 없는 사형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입법 로비를 시작했습니다.
사우스윅은 우연히 취객이 감전되어 즉사하는 것을 보게 되고 전기를 이용한 사형 방식이 자신의 생각에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에디슨을 찾아갑니다.
사우스윅의 제안을 가만히 듣던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전기 사형 의자에 교류를 사용하게 해 교류 전기의 위험성을 강조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웨스팅하우스는 전기 사형 의자 자문을 거절합니다.
1888년을 시작으로 미국의 26개 주에서 전기를 사형에 사용하는 법이 통과됩니다.
결국 에디슨은 직접 전기의자 제작에 자문을 맡기로 했고, 이때 사용하는 전원은 물론 교류여야만 했고 1000 볼트의 교류가 사람을 확실히 사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에디슨의 자문을 받은 전기의자로 1890년 8월 뉴욕 버번 교도소에서 세계 최초로 사형 집행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형 방식에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 당하다'라고 직접 이름을 붙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웨스팅하우스의 교류 시스템이 위험하다고 각인시키려는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우스윅의 생각과는 달리 전기를 통한 사형 집행은 전혀 인도주의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엄청난 실패였습니다.
전류 세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고 사형수가 즉사하지 않았으며, 몸에서 연기가 나고 불에 타면서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실패를 하고 세 번, 네 번 다시 전기를 흘려보낸 후에 겨우 사형수는 사망하며 전기사형 의자는 오히려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1887년 에디슨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1차 전류 전쟁은 에디슨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22. 웨스팅하우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교류 전동기를 발명한 테슬라와 손을 잡다
이후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에 맞서 이 난관을 헤쳐나갈 돌파구를 물색했고, 이때 눈에 띈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니콜라 테슬라(1856~1943)'입니다.
니콜라 테슬라는 크로아티아 출신 과학자로 현대 전기문명의 근간인 교류 전기 시스템을 발전시켜 '교류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으며, 일론 머스크의 전기차 브랜드명 '테슬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론 머스크의 전기차에는 테슬라의 기술이 들어가 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테슬라
내연 기관차의 심장은 '엔진'이고 전기차의 심장은 '전동기(모터)'입니다.
현대 전기차에 들어 있는 전동기들의 시초가 모두 테슬라가 발명한 전동기이며, 그래서 일론 머스크는 전기차의 핵심 기술인 전동기를 발명한 테슬라의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테슬라는 전기차 시장 1위의 브랜드명이 되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특허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만한 발명특허를 찾았는데 그때 그의 눈에 띈 것이 테슬라의 교류 전동기였습니다.
그런데 테슬라의 특허는 이뿐만이 아니었으며 교류 발전, 교류 송전, 교류 변압에 관련된 교류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특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웨스팅하우스가 쓰던 교류 시스템은 개선할 점이 많았고, 테슬라는 이를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만 있으면 에디슨과의 전류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23. 교류전류팀,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의 2차 전류전쟁에서 승리하다
그리고 에디슨과 2차 전류전쟁을 선포합니다.
2차 전류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무대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였습니다.
시카고 만국박람회는 600 에이커(약 250만㎡) 대지 위에 조성되며 엄청난 규모로 기획이 되었으며, 세계인 약 2천8백만 명이 모은 역대급 규모였습니다.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들로 화이트 시티를 조성해 그곳에 약 20만 개의 전구를 설치했으며 전시관과 거리 곳곳에 엘리베이터와 기차를 운행했으며 지금의 무빙워크와 같은 움직이는 통로까지 선보이는 자리였습니다.
바로 이 전기 공사를 맡을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이슈가 되었고, 이 전기 공사를 따내기 위한 전쟁이 시작됩니다.
'미국의 첨단 산업을 밝힐 전류 시스템이 무엇인가'가 최대의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2차 전류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두 팀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바로 '입찰 가격'이었습니다.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큰 효과를 얻고 싶은 주최자들의 요구에 맞춰 두 팀은 각각 입찰 금액을 제시합니다.
이때 에디슨과 J.P. 모건 쪽은 20만 개의 전구에 빛을 내기 위해서는 100만 달러 이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날까 걱정한 나머지 절반 수준인 55만 4천 달러를 최종적으로 제시합니다.
반면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는 당시 환율로 약 1억 2천만 원 상당의 39만 9천 달러를 제시합니다.
이로서 2차 전류 전쟁의 승자는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가 됩니다.
그리고 박람회가 개막하는 날, 당시 미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브랜드가 레버를 당기자 20만 개의 전등에 불이 들어옵니다.
깜깜한 박람회장에 빛이 가득 차는 것을 보면서 전 세계인들이 감동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로서 교류가 위험하다는 생각보다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는 인식이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이 대용량으로 전기를 만들고 보내는 데 상당히 효율적이었기도 하지만 테슬라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저렴한 입찰 가격 제시가 가능했습니다.
박람회 직전에 웨스팅하우스의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했고, 이때 테슬라가 자신의 교류 특허권을 포기했고 회사의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줍니다.
이 때문에 웨스팅하우스도 회사의 경영권을 지킬 수 있었고 교류 시스템을 판매해 박람회에도 무사히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테슬라는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술을 누리기 바랐던 순수한 마음으로 교류 시스템 특허권을 포기했던 것이고, 그는 바람회에서 자신의 몸에 교류를 흘려보내 교류가 얼마나 안전했는지에 대해 직접 교류 실험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이때 에디슨과 J.P. 모건 측에서 백열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품질이 안 좋은 유사품을 써야만 했고 그 결과 웨스팅하우스는 박람회장의 20만 개의 전구를 수시로 갈아줘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했고 시카고 만국 박람회 이후 교류는 믿을만한 안전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후 나이아가라 수력 발전소의 전기 시스템으로도 채택되었고 전 세계에 송전탑이 세워지고 교류가 표준이 되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24. 에디슨,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지만 내연 기관차에 밀려 상용화되지 못하다
에디슨은 굴하지 않고 발명을 계속했고 1891년 35mm 영화 카메라를 발명하면서 영화 산업을 이끌었으며 필름에 구멍을 뚫는 아이디어로 특허를 출원하기도 합니다.
그는 영화 스튜디오까지 세우며 위세를 떨쳤고 동부에 있던 영세한 영화 제작자들이 에디슨을 피해 서부로 몰려가기까지 만들었고, 그렇게 할리우드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정성을 쏟았던 발명품은 따로 있었습니다.
1881년 파리에서 삼륜 전기 자동차가 이미 선보인 바 있었고 1894년에는 사류 전기 자동차가 개발에도 성공합니다.
189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전기로 구동하는 택시까지 등장했으며, 심지어 시속 30km를 내며 차 성능도 좋았습니다.
1900년도 미국 자동차의 3분의 1인 약 3만 4천대 가량이 전기 자동차였습니다.
100년 전 뉴욕시의 택시가 전기 택시였고 곳곳에 전기차충전기도 제네럴일렉트릭사가 만들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무렵 에디슨도 드디어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었고, 시제품보다 더 효율적인 2차 전지를 개발한 것입니다.
에디슨은 기존의 전기차에서 사용하던 배터리보다 더 성능이 좋은 배터리를 발명했고 '100마일을 한 번에 달리는 에디슨의 새로운 배터리'라는 광고판을 달고 시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10년 전기차 출시계획도 세웠으며, 현재 에디슨의 전기 자동차는 전 세계를 통틀어 단 세 대만 전시 중입니다.
한 대는 미국 헨리 포드 박물관에 또 한 대는 우리나라 강릉에 에디슨 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그런데 전기차를 위협하는 새로운 자동차가 등장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헨리 포드가 1908년에 저가의 가솔린 자동차를 출시하면서 가격 경쟁력에서 밀린 에디슨의 전기 자동차 출시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에디슨 회사에서도 일했었고, 에디슨의 열렬한 팬이었던 헨리 포드는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고 싶은데 조언을 부탁했고 에디슨 또한 이를 무시하지 않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주었고, 가솔린 자동차 성공 이후 헨리 포드는 에디슨에게 용기를 얻어 가솔린 자동차를 출시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이 모습에 감동을 받은 헨리 포드는 자동차로 아주 큰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에디슨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1914년에는 에디슨의 평생의 꿈이었던 전기차 합작을 약속했지만 그 해 에디슨의 배터리 공장이 화재로 전소가 되어버리고 말았고 뒤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약속을 깨지고 맙니다.
신속함이 요구되는 전쟁터에서는 내연 기관차가 유리해 인기가 높아졌으며 1920년대 텍사스에서 대규모의 유전까지 개발되면서 유가가 폭락했고 결국 내연 기관차가 전기차를 완전히 몰아내고 자동차의 주류가 됩니다.
최근 전기자동차가 부상하는 모습을 보면 에디슨의 선구안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마리퀴리
<출처: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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