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영국병을 타파한 능력 있는 총리인가 노동자를 찢는 신자유주의의 마녀인가!
1. 마거릿 대처의 어린 시절
마거릿 대처는 1925년 링컨셔 그랜섬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인형같이 예쁜 외모를 가진 소녀'였다고 평해지고 있는데, 예쁠 뿐 아니라 공부도 잘했으며 모범생으로 엄청난 독서광이기도 했습니다.
마거릿 대처는 10대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그녀의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의 영향이 컸습니다.
알프레드 로버츠는 식료품점을 운영하면서 시의원으로도 활동할 만큼 정치에 아주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참석하는 정치 행사마다 마거릿 대처를 데리고 다녔고 시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지역 선거 캠프에서 보조원 역할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마거릿 대처는 10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정치였고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녀는 정치가를 꿈꾸게 됩니다.
그녀는 정치가의 꿈을 위해 영국의 최고 명문대인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영국 정치인들에게는 옥스퍼드 대학교가 필수 코스였습니다.
마거릿 대처는 평생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때 공부하면서 생긴 습관으로 추측됩니다.
2. 마거릿 대처, OUCA( 옥스퍼드 보수당 협회) 여성으로서 두 번째 회장으로 선출되다
마거릿 대처는 옥스퍼드 대학교 서머빌 칼리지에서 입학 허가를 받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OUCA(Oxford University Conservative Association)라고 불리는 옥스퍼드 보수당 협회에 가입해서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OUCA는 옥스퍼드 대학교 내에서 보수당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정치 토론 모임으로 1924년에 설립한 이래 보수당 의원과 장관을 역임한 수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마거릿 대처를 비롯해 4명의 총리도 배출한 바 있습니다.
이 모임에서 마거릿 대처의 연설은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그 결과 그녀는 옥스퍼드 보수당 협회에서 여성으로서 두 번째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합니다.
3. 24세 마거릿 대처, 보수당 후보로 정치에 입문하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예상과는 달리 마거릿 대처는 졸업 후 플라스틱 제조 회사에 입사를 합니다.
그녀는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보수당의 당원으로 가입해서 정치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의 남동부에 위치한 다트퍼드라는 도시에서 선거가 열리게 됩니다.
다트퍼드는 노동자들이 다수 거주하는 산업 지역으로 전통적으로 노동당이 우세했던 지역이었고 보수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영국 정치는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중 보수당은 전통적으로 상류층의 지지를 받고 국가 제도와 애국심을 중시하던 정당입니다.
반면 노동당은 노동 계층이나 진보적 지식인의 지지를 받고 평등과 기회균등을 중시했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많은 다트퍼드 지역 특성상 보수당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옥스퍼드 보수당 협회 시절부터 마거릿 대처의 능력을 높이 샀던 지인이 그녀를 다트퍼드지역에 보수당 후보로 추천해 주었고 후보로 선출됩니다.
정치가의 꿈을 키워왔던 마거릿 대처가 24살에 벌어진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다트퍼드라는 지역 자체가 보수당이 이길 확률이 없던 선거였기 때문에 보수당 입장에서는 어차피 질 바에야 마거릿 대처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후보로 내세워서 주목이라도 끌어보자 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영국여성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여성들은 참정권을 얻기는 했지만 여성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여성들은 정치에서 소외되었었기 때문에 젊고 똑똑하고 유능한 마거릿 대처의 등장은 여성 유권자들의 반응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특히 이때 여성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정부는 가정주부가 돈이 모자랄 때 하는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정부도 가정주부처럼 가계부를 들여다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당시 마거릿 대처가 주장한 가정주부식 경제 이론>
마거릿 대처는 이와 같이 정치인으로서 여자가 가지는 약점을 자신만의 강점으로 내세우면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를 유리하게 활용해 나갑니다.
또한 그녀는 남성 표를 공략하기 위해서 다른 전략을 펼칩니다.
당시에는 남성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교 클럽들이 동네마다 있었고, 이곳에 여성이 출입하는 방법은 종업원인 경우에만 가능했고 그녀는 종업원으로 취직해 클럽에서 남성 유권자들에게 맥주를 따라주며 유세활동을 펼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열심히 유세 활동을 한 마거릿 대처의 선거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거릿 대처는 선거세서 13,600표 정도의 차이로 낙선하고 맙니다.
비록 선거에서 지기는 했지만 지난 선거에 비해 보수당은 6천 표나 더 지지를 받는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둡니다.
그 결과 보수당이 마거릿 대처의 열정, 추진력, 뛰어난 전략에 주목하는 계기가 됩니다.
4. 마거릿 대처, 조용한 외조의 왕 남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다
마거릿 대처는 선거에서 떨어진 후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데니스 대처'라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데니스 대처는 농수산업과 관련된 화학약품, 페인트 등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의 총지배인으로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그는 마가릿 대처가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필했던 존재로 항상 마가릿 대처와 함께 하며 뒷받침하면서도 절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 '조용한 바보'라고 불리기도 한 그야말로 조용한 외조의 왕이었습니다.
야심이 컸던 마거릿 대처에게는 최고의 남편이자 큰 도움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미국 워싱턴에서 '잘 나가는 아내를 둔 남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이 모임 회원들이 데니스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5. 마거릿 대처, 임신과 출산에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다
결혼 후 마거릿 대처는 그저 그런 커리어로는 정치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독학으로 법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결혼 1년 만에 임신을 하게 됐고 심지어 쌍둥이를 출산합니다.
그녀는 임신과 출산 후에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출산한 지 3개월 만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어냅니다.
6. 34세 마거릿 대처, 정치인의 꿈을 이루다
드디어 그녀에게 정치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옵니다.
1959년 그녀가 34세가 되던 해에 열린 총선에서 런던 교외에 위치한 핀칠리 지역의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게 됩니다.
핀칠리지역은 1924년부터 1959년까지 35년 동안 보수당이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민영 방송국들이 개국을 하면서 영국 전역으로 방송 지역이 확장되면서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시기로, 마거릿 대처는 선거에서 텔레비전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방송에서 자신이 아이와 가정을 잘 돌보는 여성임을 자연스럽게 어필했고, 이런 모습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자연스럽게 노출되면서 마거릿 대처를 향한 대중의 관심도 점차 높아지게 됩니다.
당시 영국의 일간지에서 선데이 텔레크라프(sunday Telegraph)에서 마거릿 대처를 표현한 말이 있습니다.
마거릿 대처 여사는 부드러운 부르주아 스타일의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다. 보기 좋은 입술과 치아와 인형 같은 커다란 눈, 마치 커다란 파란 리본으로 묶은 캔디 상자와 같다. 게다가 머리도 좋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거릿 대처는 대승리를 거두며 34세에 정치인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이후 정치에 입문한 마거릿 대처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으며, 그 덕분에 다양한 직무를 맡으면서 승진 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처음 의원에 선출되고 2년 후인 1961년, 36살이 된 마거릿 대처는 '연금 및 국민 보험부의 정치차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교통부, 환경부 등 보수당 안에서 다양한 직책을 거치게 되었고, 마침내 1970년 45세의 나이로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게 됩니다.
7. 영국, 영국병과 과도한 복지 정책으로 무기력이 팽배해지다
그런데 마거릿 대처가 교육부장관에 임명될 무렵 영국의 경제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최강대국이라고 불리던 자부심과 명성을 미국에 빼앗긴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후폭풍을 어머어마했습니다.
군수물자를 판매하며 제조읍의 강자로 떠오른 미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 등이 제조업 생산력을 키워 나간 동안 영국은 다양한 산업과 제조업 분야에서 이렇다 할 발전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영국사람들 조차 영국에서 제조된 물건을 피할 정도로 제조업은 엉망진창인 상황이었고, 그중에서도 세계 1위였던 조선업을 일본에게 빼앗기기까지 합니다.
또한 영국 자동차 생산량의 약 40%를 차지했던 BMC(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 British Motor Corporation)라는 영국 회사가 1966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물가는 상승해서 인플레이션률은 2 자릿수에 달했고, 노동생산성은 오히려 저하되고 있었습니다.
영국 사회 전반에 경제적 침체와 무기력한 분위기가 퍼지면서 1970년대 영국을 강타했던 이른바 '영국병'이 만연해집니다.
영국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파악이 되는데 그중에서도 중요한 원인은 고질적인 노동자들의 파업이었습니다.
당시 노동조합이 물가 상승을 빌미로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임금인상이 물가상승을 견인하며 다시 인플레이션이 심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또다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이 발생하고 인플레이션이 반복되면서 취약한 영국 경제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 위기 속에서도 영국은 막강한 복지 정책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가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준다'라고 하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많은 복지 제도의 영향으로 영국사람들 사이에서는 노동에 대한 건강한 의욕이 사라지고 무기력한 분위기가 매우 팽배해져만 갑니다.
그로 인해 가뜩이나 경쟁력을 잃어가던 영국 산업은 영국병을 겪으며 더욱 빠르게 몰락해가고 있었습니다.
8. 마거릿 대처, 피도 눈물도 없는 '우유 도둑'으로 낙인찍히다
이렇게 영국이 영국병을 심하게 앓고 있던 상황 속에서 교육부장관을 맡고 있었던 마거릿 대처의 정치인생에 큰 위기가 닥칩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교육부의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주무 장관이었던 마거릿 대처는 예산 절감 방안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고민 끝에 7세에서 11세의 아동들에게 우유를 무상으로 공급했던 제도를 폐지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각 가정에서는 우유 급식비의 일부를 부담하게 됩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아이들이 좀 더 성장해야 한다면서 우유 급식 제도를 시행했는데, 어머니라는 이미지의 마거릿 대처가 우유 급식을 폐지하면서 국민들로부터 맹비난을 받게 되었고 결국 영국 전역에서 그녀를 향한 폭발적인 비난이 쏟아지게 됩니다.
마거릿 대처에게 '우유 강도'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생기기까지 하며 그녀는 정치 인생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녀는 우유 급식을 폐지한 후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우유 급식을 폐지한 대신 그렇게 절감한 비용으로 교육 시설물 증대와 수리를 하고 교원을 충원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로 마거릿 대처는 유능한 미모의 정치인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우유 도둑'으로 전 국민에게 낙인찍히게 됩니다.
9. 마거릿 대처, 여성 최초로 당대표에 선출되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정치인 마거릿 대처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고, 그녀는 당시 보수당 당대표에 도전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다양한 정치적 행보를 보여왔던 마거릿 대처라도 이 일만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당시 영국 정치는 여전히 상류층 출신의 남성들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절대적인 마거릿 대처의 지지자인 남편조차도 당대표에 출마하는 일은 정신 나간 짓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거릿 대처는 전혀 굴하지 않았으며 때마침 이때 그녀에게 행운이 따라줍니다.
'키스 조지프'라는 사람이 당시 보수당 당대표에 출마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당대표 출마를 앞두고 엄청난 말실수를 해버립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가장 적합하지 않은 하층 노동 계급 젊은 여성들의 출산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한 미혼 여성들은 국가의 도움 없이는 아이를 키울 수 없으니 차라리 피임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키스 조지프가 '산아 제한 정책 옹호자 혹은 인종 및 계급 차별주의자'라면서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섭니다.
그렇게 키스 조지프는 이런 비난 여론에 밀려서 보수당 당대표 후보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마거릿 대처의 강력한 라이벌이 사라지게 되며 기회를 맞게 됩니다.
이후 마거릿 대처는 보수당 당대표 선거에서 총 276표 중에 146표를 얻으면서 당대표에 선출됩니다.
이때 그녀의 나이 50세였고 모든 당을 통틀어서 영국 최초의 여성 당대표가 된 것입니다.
영국의 정치인에게 당대표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국정부의 최고 수장은 총리인데 영국은 총리 투표를 따로 하지 않고 총선을 통해서 당이 승리를 하게 되면 승리한 정당의 당대표가 자동으로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10. 마거릿 대처, '철의 여인' 이미지 메이킹 대성공으로 총선에서 승리하며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다
그리고 마거릿 대처가 보수당의 당대표가 되고 4년 후인 1979년 5월에 영국에서 드디어 총선이 열리게 됩니다.
그녀는 이 선거가 그녀 인생에 일생일대의 기회임을 직감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특별한 전략을 내놓습니다.
사진의 왼쪽에는 1974년, 오른쪽에는 1979년을 적혀 있는 장바구니를 양손에 들고 나타났고, 다시 한번 마거릿 대처가 내세운 물가를 잘 아는 주부라는 이미지를 내세웁니다.
이렇게 마거릿 대처는 선거에서 이미지 메이킹을 아주 잘했는데 그녀의 이미지 메이킹 실력이 빛을 발한 경우가 또 있었습니다.
바로 마거릿 대처의 상징인 '철의 여인'입니다.
사실 그녀에게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보수당 당대표를 하던 시절에 군사력을 증강하려는 소련 정부를 맹비난한 적이 있는데 이를 보고 소련의 한 군사 잡지에서 그녀를 비난하는 기사를 냈고 그 기사의 타이틀이 바로
철의 여인, 위협을 휘두르다!
였습니다.
이 기사가 우연히 영국까지 전해졌는데 마거릿 대처는 이 기사를 보고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매우 맘에 들어하면서 총선 연설을 하는 때마다 이렇게 외칩니다.
영국은 이제 철의 여인을 원한다!
마거릿 대처는 자신이 위기에 빠진 영국을 구해낼 위대한 지도자임을 어필했던 것입니다.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사용한 다음 달 마거릿 대처의 지지율이 약 7%나 상승하게 됐고, 그녀는 소련이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을 만큼 철의 여인 이미지 메이킹은 총선에서 주요하게 작용합니다.
정치인에게 이미지 메이킹은 매우 중요했고 마거릿 대처의 활약으로 여론 조사에서 확실히 보수당이 앞서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5월 3일, 운명의 총선 당일 모든 투표가 종료된 후 635석 중 339석을 획득하며 보수당의 승리소식을 듣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버킹엄 궁전에서 통보전화를 받기만 하면 마거릿 대처가 영국의 총리로 정식 확정되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이어지던 선거 다음 날인 1979년 5월 4일 오후 3시에 마거릿 대처는 버킹엄궁에서 온 전화를 받고 여왕을 알현하고 난 후에 총리관저가 있는 다우닝가 10번지로 향해 이곳에서 총리 당선 소감을 전합니다.
' 불화가 있는 곳에 조화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실을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가지게 하소서' 누구를 선택하셨든 간에 모든 영국 국민에게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우리가 국민임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합시다
1979년 5월, 영국에서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1. 영국병 타파를 위한 마거릿 대처의 전략 (1) 불법 파업 근절
마거릿 대처는 총리가 된 후 영국병을 타파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게 됩니다.
마거릿 대처가 영국병 타파를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파업을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강성 노조들의 오랜 파업으로 인해 산업발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특히 그녀가 총리에 당선되기 불과 4, 5개월 전인 1978년 연말부터 1979년 초 겨울까지 역대급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를 '불만의 겨울'이라고 부르는데 영국병이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영국은 14년 만에 역대급 한파가 찾아왔고 매서운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란에서 석유 파동이 일어나자 물가는 미친 듯이 치솟았고 1979년 1월에는 유조차 기사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시작합니다.
더해 철도까지 파업에 동참하며 물자 운송이 어려워진 상황이었습니다.
이 파업으로 석유 운송이 중단되자 공장과 발전소는 물론 병원, 학교와 같은 공공기관들까지 난방을 하지 못했고, 결국 많은 공공기관들이 문을 닫게 되면서 영국전역이 마비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1월 22일, 영국에서 하루에 약 15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파업이 2~3주 지속되자 전국적으로 무정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런던의 환경미화원들도 파업에 동참하며 런던 길바닥에 쓰레기를 치워줄 사람이 없자 곳곳에 쓰레기더미가 쌓여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리버풀 지역에서 묘지에서 무덤을 파는 사람들 그리고 화장터 관리인들과 같이 장례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하며 시체가 든 관들도 묻히지 못하고 방치되었고 시민들은 두려움과 불쾌감이 극에 달했고, 이때 파업을 진행한 장례업 종사 노동자들이 술집에서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광부들이 근무했던 석탄 광산이 파업의 여파가 가장 심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에너지 발전의 대부분을 석탄 연료로 사용했고 1950년대까지는 무려 90% 이상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석탄 노조가 파업을 선언하고 파업을 시작하면 거의 온 나라가 마비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석탄을 뗼 수 없게 되면 공장의 기계들도 작동을 멈추게 되었고, 학교에서도 난방을 쓰지 못해 휴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당시 영국의 광산들이 오랫동안 적자로 운영되고 있었고 영국정부에서 광산의 운영 자금을 계속해서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잦은 파업이 발생해 시민들의 불만이 더욱더 커졌습니다.
이렇게 광산은 영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고 결국 탄광 노조의 파업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요구가 정치권과 시민들 사이에서 빗발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의 석탄 광부들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어둡고 환기도 되지 않는 광산 속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수행해야만 해 근무 환경이 매우 열악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wM6l5FDoNg
당시 탄광 노조의 파업을 잘 묘사한 영화가 바로 '빌리 엘리어트'입니다.
이때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 광부를 만날 경우 비파업 광부들에게 배신자라 부르며 적대심을 드러내기까지 했습니다.
문제는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이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심각한 폭력 사태를 유발하는 일이 더러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파업하는 노조원들은 파업하지 않고 출근하는 노조원들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출근하는 광부들이 탄 차량에 3피트(약 91cm) 짜리 콘크리트 더미를 던진 테러 사건까지 발생했으며 이때 운전기사가 사망하고 광부 여러 명이 크게 다치게 됩니다.
이때 마거릿 대처는 파업을 막기 위해 상당히 과감하고 치밀한 대책을 씁니다.
전국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탄광 20군데를 과감하게 폐쇄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결과 대략 2만 명의 광부가 해고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광부들은 반발하며 탄광 노조는 전국적인 규모로 시위를 확장합니다.
그런데 마거릿 대처는 파업이 길어질 것을 미리 예측하고 철저히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파업과 상관없는 비노조원인 운수 노동자를 확보해 석탄을 대신 나르게끔 했고, 파업 기간 동안 사용할 석탄을 미리 전국의 발전소에 충분히 실어놓기도 했으며, 또한 석탄 대신 석유를 사용하도록 발전소의 발전 방식을 개편해 놓았고, 유사시에는 석탄을 해외로부터 긴급 수입할 방안까지 이미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습니다.
또한 마거릿 대처는 파업에 참여하는 시위대들에게 강경하게 대응하기 위해 경찰 기마대를 투입하기까지 하며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서 강력한 충돌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결국 기마대를 투입한 마거릿 대처에게도 굉장히 많은 비난 여론이 발생했지만 이에 그녀는 이렇게 대응합니다.
죄송하군요. 다음에는 그런 일이 있으면 기마대가 아니라 탱크를 보내겠습니다.
그러면서 마거릿 대처는 파업하는 노조를 향해 탄광 노조가 영국 성장과 경제 발전에 있어서 걸림돌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폭도 혹은 내부의 적'이라고 표현하면서 파업에 대한 국민적인 반감을 더 크게 부추깁니다.
시위가 벌어진 기간에 체포한 시위자는 1만 명이상이었고, 그중 약 8천 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고 이 중 최고 형량은 징역 9개월이었으며 심지어 시위자 중에 사망자까지 발생합니다.
이후 마거릿 대처와 경찰 사이의 대립은 무려 1년 동안 이어졌으나 결국 마거릿 대처가 승리를 거둡니다.
영국 역사상 마거릿 대처 이전에는 그 어떤 정치인도 탄광 노조의 파업에서 승리한 적이 없었고 그녀가 유일하게 승리한 것입니다.
이때 탄광 노조가 마거릿 대처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석탄 수요가 급감되는 '여름'이 온 것입니다.
탄광 노조는 이때 시위로 별로 얻은 것 없이 오히려 노조원의 절반을 잃어버린 채 파업을 종료해야만 했습니다.
12. 영국병 타파를 위한 마거릿 대처의 전략 (2) 공기업의 민영화
쉽게 말해서 국가의 돈으로 운영하던 산업체들을 민간기업에 판 것입니다.
마거릿 대처가 민영화를 추진한 이유는 당시 영국의 산업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회복을 위해서 정부가 경제전반에 개입을 했었고, 다양한 산업들을 국유화해서 국가가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수도, 전기, 통신사, 방송국, 버스, 철도를 포함해 시민들이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하루 종일 사용하는 대부분의 산업이 나라의 소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British'가 붙어 있으면 영국 정부에서 운영했다고 봐도 될 정도였고, 공기업의 경우 산업체가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가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산업체가 파산할 일은 없으므로 전쟁 후에 빠르게 국가 경제를 회복해야만 했던 영국 정부는 이 방식을 택했던 것입니다.
대신 국유화했을 때의 단점은 영국 정부의 국고에서 엄청난 돈이 빠져나갈 수밖에 없어 많은 세금이 투입되었고, 산업체들도 어려우면 국가에 의존하면 되니 효율성과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거릿 대처는 이에 국유화된 공기업을 유지하느라 재정 지출이 너무 심해지고 적자가 쌓인다고 생각했고 경제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도입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기반한 경제적 자유주의로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할 때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논리입니다.
경쟁을 극대화하게 되면 기업이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최대치로 높일 것이라고 기대하는 신조입니다.
마거릿 대처는 국고의 낭비를 줄이고 시장에서의 경쟁 활성화를 위해서 국유화했던 산업 대부분을 다시 민영화하게 됩니다.
국가가 소유하고 있었던 규모가 큰 국유기업들을 매각해서 얻은 총수익은 약 334억 9,700만 파운드로 현재 한화의 가치로 약 141조 4,000억 원입니다.
이렇게 민영화를 통해서 영국 정부가 엄청난 수익을 얻어 그동안 시달려왔던 부채를 어느 정도 갚을 수 있었습니다.
13. 마거릿 대처에 대한 극명한 평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에 처하다
민영화를 하게 된 후 기업들은 이윤 추구를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운영하게 되면서 제공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가격이 높아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유화 기업들은 적자를 기록해도 저렴한 금액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들이 민영화가 이루어지며 가격이 상승하게 된 것이며, 이 가격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공재의 민영화 논쟁은 사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민영화 정책에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한쪽으로 지나치게 극대화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영화의 단점 중 하나가 민간 기업으로 산업으로 넘 거 가며 해고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실직자가 증가하게 되는데, 당시 영국의 실직자 수가 3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하며 이 수치는 대공황 시기 이래 가장 높은 실업률이 마거릿 대처 정부시기에 나온 것이니만큼 사람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 민영화 정책을 추진한 마거릿 대처는 철의 여인이 실업자들을 다리미질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며 실업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잔인한 모습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거의 전 국유산업을 민영화해 버린 추진력이 마거릿 대처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 셈입니다.
그녀가 펼친 정책들은 모두 장단점이 명확했고, 그래서 마거릿 대처에 대한 평가 또한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망해가는 파산 직전의 영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영국병을 타파한 능력 있는 총리라고 지켜 세우는 쪽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쪽에서는 노동자들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신자유주의의 마녀라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마거릿 대처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지지율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14. 마거릿 대처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포틀랜드 전쟁에서의 승리
총리로 취임한 후 2년째인 1981년 실시된 지지도 조사에서 마거릿 대처의 지지율은 25%까지 떨어지며 영국에서 여론 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저조한 총리 지지도를 기록합니다.
따라서 마거릿 대처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시 한번 다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대로 손을 놓고 있었다가는 다음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상황을 반전시킬 거대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약 13,000km 떨어진 포틀랜드 제도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19세기부터 영국령으로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던 포틀랜드제도는 남극 근처의 아르헨티나와 인접한 곳입니다.
그런데 영국이 경제 위기 속에서 국방비를 삭감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포틀랜드 주변을 순찰하고 있던 영국 배가 철수를 하게 되면서 아르헨티나에서는 영국이 포틀랜드를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사건을 아르헨티나의 어지러운 국내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삼게 됩니다.
당시 '레오폴트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후 언론 통제와 인권 탄압은 물론 반대파 정치 인사들을 암살하기까지 하며 공포정치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국내적으로 심각했고 분노한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정부는 약 2만 8천 명의 병력을 포틀랜드 제도로 보내 영국과 전쟁을 일으켰으며, 아르헨티나의 명백한 선제공격이었습니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사람이 거의 살고 있지 않은 지역으로 이 땅을 가져봤자 경비비용만 더 들어가는 측면이 있었고 그 때문에 영국 내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정부의 예상과 달리 마거릿 대처는 항공모함 2척과 7척의 구축함을 주력으로 하는 해군 기동부대를 포틀랜드 제도로 보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에서 최대 규모의 함대가 출동한 것이었습니다.
마거릿 대처는 여전히 건재한 영국의 국방력을 보여줘야 한다면서 영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킵니다.
실제로 애국심에 고취된 영국 국민들이 하나로 단결되어 갔고 이에 그치지 않고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했던 지하 벙커까지 방문하며 국민들에게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듯 포틀랜드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렇게 해전과 공중전이 이어진 지 약 두 달 후인 1982년 6월 14일, 포틀랜드 전쟁에서 영국군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경제 침체로 영국병을 앓던 영국인들은 오랜만에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마거릿 대처는 한순간에 영국 국민이 가장 미워하는 마녀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바뀌었으며, 그 효과로 그녀의 지지율이 치솟았습니다.
포틀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해인 1983년 열린 총선에서 전체 650석 중에 397석을 확보한 보수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마거릿 대처는 58세의 나이에 정치인으로서 가장 위태로웠던 순간을 정면 돌파하며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두 번째로 영국의 총리에 임명됩니다.
15. 영국병 타파를 위한 마거릿 대처의 전략 (3) 복지제도 정비(축소)
그리고 마거릿 대처는 영국병을 타파하기 위해 더 강력한 정책을 시행합니다.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은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시행해 왔고, 이때 영국의 복지정책을 표현한 대표적인 말이 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cradle to the grave)
한 사람이 태어나 요람에 있을 때부터 죽어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국가의 복지 정책이 책임져준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영국은 이런 의미에서 중등교육 의무화, 무상 의료 보험, 완전 고용, 공영 주택 확대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굉장히 다양한 복지 정책을 시행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영국 정부는 당연히 많은 돈을 쓸 수밖에 없었고 1979년 영국 연간예산에서 복지 예산만 약 45.7%를 기록하는 등 거의 절반 가까이를 복지예산에 투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처가 생각한 복지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정부의 복지 확대 정책은 국민의 의지를 꺾는 나쁜 정책이다. 복지는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국가의 복지는 국가에서 무조건적인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자립 방법을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한 개인도 자본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을 진정한 복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마거릿 대처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정책이 공공 임대주택을 대폭 축소한 정책입니다.
이전까지는 집이 없는 서민들은 나라에서 제공하는 공공 임대주택에서 값싼 임대료를 내면서 살 수 있었지만 마거릿 대처는 이 공공주택들을 최대 70% 정도까지 저렴하게 개인에게 매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싼값에 주택을 구매했고 마거릿 대처가 자신의 임기동안 공공주택을 매각해서 얻은 수익은 약 176억 파운드(한화 현재 가치 약 72조 원)에 이릅니다.
하지만 주택을 사지 못한 사람들은 주택을 산 사람들에게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세 들어 살아야만 했고, 주택을 구매하거나 임대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주거권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빈부격차를 가속화시킵니다.
16. 마거릿 대처, 주식을 개인에게 판매하며 금융업을 발전시키다
마거릿 대처 이전까지는 영국에서 개인이 주식을 소유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공기업을 민영화시키면서 회사의 주식을 싼값에 개인에게도 팔도록 했고 이후 급속도로 금융업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도 전 세계 금융의 중심지하면 런던 거래소가 떠오를 정도가 됩니다.
17. 마거릿 대처, 축구를 영국병으로 규정해 축구팬들로부터 미움을 받다
이처럼 마거릿 대처의 많은 정책으로 저조했던 경제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었고, 이때 영국 국민들에게 더 크게 미움을 받게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인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도 영국병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축구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발단한 한 사건 때문이 발단이 됩니다.
1989년 4월 15일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간 영국 FA컵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평소보다 많은 관객들이 몰리는 가운데 경기가 시작되었고, 경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경기가 중단됩니다.
당시 경기장을 통제하던 경찰은 입장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입구를 추가로 개방했지만 수용 가능한 인원보다 약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더 들어왔고 결국 관중석이 무너져내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하고 맙니다.
속출하는 부상자에 광고판까지 들것으로 사용하고 경기장 곳곳에서 심폐소생술까지 이어지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이날 사고로 발생한 부상자가 약 770여 명이었고 압사한 사망자는 무려 97명에 달했으며, 심지어 가장 어린 사망자의 나이는 고작 10살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이 사고의 원인은 관중들 때문이 아닌 당시 경철이 인원 통제에 실패한 것 그리고 너무 많은 관중을 한 구역에만 몰아넣은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마거릿 대처의 정부는 이 사고의 원인을 광분하고 술에 취한 관중들의 탓으로만 몰아갔습니다.
이러한 참사의 진실을 숨기려는 듯한 마거릿 대처의 대응을 비판한 만평입니다.
이후 축구장 입장 시 특별한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법을 제정하였고 영국 축구팀들의 유럽 경기를 금지시키며 축구 팬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치며 영국 사람들은 서민들이 즐기는 축구를 무시하는 것이 곧 서민들을 미워하며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영국 축구팬들은 마거릿 대처가 죽었을 때에도 저주의 말을 퍼붓는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셀럽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직접 마거릿 대처로 분장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며 공개적으로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대중문화 속에서 마거릿 대처는 늘 부정적인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영화 '셜록'에서 이제껏 만나 본 인물 중 마거릿 대처가 가장 거만했다는 대목이 나오며, 소설 <해리포터>에서 '멍청한 총리(dumbstruck Prime Minister)'라고 비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 시대 배경이 마거릿 대처가 총리였던 시절이어서 그녀에 대한 암시로 읽히고 있습니다.
이렇듯 마거릿 대처는 유명한 작품마다 언급될 정도로 영국사에 비중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는 반증입니다.
18. 마거릿 대처, 역사상 첫 세 번째 여성 총리가 되다
영국병을 타파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친 마거릿 대처는 많은 비난과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확실하게 영국의 경제 성장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마거릿 대처의 첫 번째 총리 취임 1년 후인 1980년에 영국의 인플레이션이 22%에 달했는데 6년 후인 1986년에는 5%로 급감했으며 경제 발전의 효과가 수치로 드러나자 다음 해인 1987년 62세의 나이에 세 번째로 총리에 당선됩니다.
이로서 마거릿 대처는 영국에서 최초이자 역사상 유일하게 총리를 세 번 역임한 여성으로 기록됩니다.
19. 마거릿 대처, 인종차별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무역을 포기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입지가 흔들리다
그런데 세 번째 총리 당선 이후에 강력했던 마거릿 대처의 입지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유럽 공동체에 대한 견해 차이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국가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EU(유럽연합)의 전신인 유럽 공동체(EC)를 확대하고자 하는 상황이었고 EC가 더 크고 강한 유럽연합으로의 변화를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거릿 대처를 지지하는 보수당마저 유럽공동체에 영국이 더 적극 적어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동안 유럽 공동체에 영국이 돈만 많이 낼뿐 이득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수당과 정부 안에서도 많은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흑인을 차별하는 남아프리카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유럽대부분의 국가들이 이런 차별적인 정책에 대항하자는 의미에서 남아공과의 무역에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하지만 마거릿 대처는 남아공과의 무역을 포기함으로써 입는 손해가 크다면서 다른 유럽국가들과 다르게 남아공과의 무역을 이어가는 것을 주장합니다.
당연히 이러한 결정은 반대세력은 물론이고 보수당 내에서도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영국의 헌법 상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피력할 수 없게 되어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례적으로 반대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이로서 마거릿 대처의 정치적인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아들 마크 대처가 남아공에서 사업 중이었고 아들 때문에 남아공 무역 재재를 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 합니다.
마크 대처는 많은 사고를 치며 마거릿 대처의 명성에 먹칠을 했는데 석유 관련 이권을 탐내 기니의 쿠데타에 무기를 지원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20. 마거릿 대처, 인두세 강행으로 여론이 악화되며 총리를 사임하게 되다
이렇게 마거릿 대처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에 결정적으로 그녀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두세' 정책입니다.
보통 소득 수준이나 재산 보유량에 따라서 세금을 다르게 납부하는데 인두세는 한 달에 백만 원 버는 사람이나 천만 원 버는 사람이나 1억을 버는 사람이나 똑같은 세금을 내게 뜸한 것입니다.
그녀는 인두세를 최소치로 측정해서 누구나 공평하게 기여하자는 생각이었으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결국 1990년 3월 인두세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발생해 100명이 넘는 부상자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는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두세를 강행합니다.
이후 보수당 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나게 되면서 결국 악화된 여론과 당내 평판으로 1990년 11년 6개월의 임기 끝에 65세의 나이로 총리직을 사입하게 됩니다.
21. 마거릿 대처, 생의 마지막 평가도 극명했다
마거릿 대처의 사임에 대해 서민들은 환호했고 은퇴 후 영국 곳곳에 세워진 마거릿 대처의 동상이 테러 때문에 멀쩡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그녀를 미워하는 영국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은퇴 후에도 마거릿 대처는 연설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12년 후 77세에 뇌졸중 판정을 받았고 이후 조용히 투병생활을 하던 중 2013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마거릿 대처의 장례식은 국장에 버금가게 성대한 규모로 치러졌지만 한편에서는 마녀가 죽었다며 축하 퍼레이드를 열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PIdRJlzERo
심지어 영국 음원 차트에서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사악 마녀가 죽었을 때 축하곡으로 쓰던 노래 'DING- DONG! The Witch Is Dead' (딩동! 마녀가 죽었다)라는 노래가 몇십 년 만에 1위로 역주행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상반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마거릿 대처가 영국병을 타파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니, 무엇인지 좋지 않은 오래된 악습과 풍속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은 아닐까요?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마리퀴리
<출처: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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