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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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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의 역사

1. 중세 유럽 교회의 강력한 힘

 

지난 2000년에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발표한 사과문이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은 수 백 년 전에 일어났던 마녀 사냥이 가톨릭 교회의 과오였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대체 왜 마녀사냥에 대해서 사과한 것일까요?

마녀사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5~15세기에 이르는 중세 시대 교회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5세기 무렵부터 유럽에 빠르게 전파되면서 전 유럽인의 종교가 됩니다.

당시 사람들의 삶은 이 세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인간은 교회의 품 안에서 태어나서 
교회의 품 안에서 살다가

교회의 품 안에서 죽는다

이런 기독교적인 세계관 안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구심점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교황'입니다.

교황은 가톨릭의 수장이자 로마의 주교, 바티칸 시국의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상징하는 열쇠 모양의 문양 

사람들은 신이 교황이라는 대리인을 내려보냈고, 교황과 교회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으로 이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 하에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고 교황은 왕들과 함께 중세 유럽의 질서를 유지하는 거대한 두 축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왕이 지방 곳곳에 있는 영주와 귀족들을 통해서 나라를 이끌었다면 교황은 유럽 각 나라의 주교를 파견해 사람들의 영혼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힘이 점차 강력해지면서 교황과 왕 사이 힘의 균형이 교황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교회의 법이 국가의 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교회가 범죄로 지목한 것에 왕국도 여기에 협조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왕보다 더 강력한 힘을 휘두르게 되면서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

 

당시 교회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왕의 대관식입니다.

예를 들어 샤를 7세 프랑스 왕 대관식 그림에서 볼 수 있듯 프랑스의 왕들은 대관식에서 무릎을 꿇고 맹세를 한 후에야 왕으로 인정받는 의식을 치를 수 있었는데 그 맹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모든 폭력을 금지하며, 정의롭고 자비로운 판결을 수행할 것이며, 다스리는 땅에서 모든 이교도들을 추방할 것입니다.

 

이렇듯 왕이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잔다르크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에 이용당한 잔 다르크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에 이용당한 잔 다르크 1.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17세의 영웅, 잔 다르크 1420년 트루아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가 프랑스 샤를 6세의 딸과 결혼

donbuller.tistory.com

2.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이 나타나다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막강한 힘을 얻게 되면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모든 권력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면 생기는 문제, 바로 '부패'입니다.

당시 주교나 수도원장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성직을 돈으로 팔며 부를 축적했고 순결의 의무를 저버리고 첩을 두거나 사생아를 낳기도 했습니다.

굳게 믿었던 교회에 사람들의 배신감과 실망을 하면서 부패한 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했으며, 특히 교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곳이 바로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알비를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활동하던 교회 비판 세력을 '알비파'(카타리파)라고 부르며, 이들은 금욕주의와 극단적인 청빈을 내세운 중세의 이단 종파입니다

이들은 부패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순결하지 않은 성직자를 맹렬히 비판했고, 급기야 '교회는 아예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며 십자가를 불태우기까지 합니다.

3. 교황, 기존 교회를 부정하는 알비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십자군을 파견해 척결하다

교회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알비파를 이단이라고 낙인을 찍고 부르게 됩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기존 교회가 정한 정통 교리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와 다른 주장을 하거나 다른 해석을 내세우면 이단으로 지목하고 처벌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알비파를 이단으로 규정한 후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120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서 십자군을 결성하고 프랑스 남부로 파견합니다.

십자군은 알비파의 거점인 프랑스 남부의 '베지에'라는 도시를 점령할 당시 현장에 있던 교황 특사가 십자군 병사를 앞에 두고 이렇게 대답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모두 죽여라, 신께서는 자신의 자식을 알아보실 것이다

 

죽고 나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때 신이 이단을 구별해 줄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남프랑스의 알비파를 척결한 후 교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도 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반기를 드는 세력을 제압해 나갔고 유럽 곳곳에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기 시작합니다.

4. 마녀는 대체 누구인가

종교재판소는 교회의 일치를 지키기 위해 다른 교리를 전파하는 자들을 회개시키고 처벌하기 위해 마련된 재판소로 당시 종교재판소는 알비파 척결을 위해 설치된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체 감옥을 운영하고 고문의 사용도 허가했으며, 이단심문관과 종교재판관들을 파견했습니다.

이단을 잡아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이단심문관들은 '마녀'도 이단에 포함시키자는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 내린 이단에 대한 정의가 그 단초가 되었습니다.

마녀가 사악한 힘에 물이 들어서 악마를 숭배하는 대역죄라고 규정했으나 교황은 이단심문관들의 이런 요청을 거절합니다.

당시까지 마녀는 악마를 숭배하는 사람들로 여겨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랜 세월 동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마법 혹은 주술의 힘을 믿어왔습니다.

그리고 마법을 부리는 사람들을 마녀 혹은 마법사라고 불렀고 초자연적인 힘이나 주술로 다른 존재의 삶과 운명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과거의 마녀는 '약초사'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그들은 의사, 치유사, 약사, 산파, 무속인을 겸하는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은 병이 나면 병에 대한 지식을 자연스럽게 경험 많은 치유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기도 하고, 아이를 출산할 때는 경험 많은 산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5. 교황, 교황 암살 미수 사건을 계기로 마녀 사냥을 최초로 허락하다

그런데 1318년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합니다.

교황이 마녀사낭을 해도 된다는 허가를 처음으로 내린 것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교황 선출 선거가 있던 해인 1317년 프랑스 아비뇽에 있었던 당시 교황 요한 22세가 누군가에게 암살을 당할 뻔 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행히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쳤지만 범인이 밝혀지고 교회는 경악을 하게 됩니다.

범인은 교회의 고위 사제였던 '주교'였기 때문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교가 교황을 죽이려고 했던 방법이 칼이나 무기가 아닌 '주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황 암살 미수 사건의 파장은 실로 엄청났고 마녀를 이단자로 단정할 논리적 근거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이단자와 마녀를 혼동해 가며 마녀사냥을 허락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프랑스 남부에서 1320년부터 1350년 사이에 약 600여 명의 마녀가 기소되고 그중 약 400여 명이 화형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마녀 사냥은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이 닥쳐서 악마가 전 세계에 날뛰고 있다며 이 세상이 불행해진 원인을 악마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세계관이 강했던 당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추론을 받아들이게 됐고 악마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불안에 빠진 사람들은 벌벌 떨게 됩니다.

굶주림과 죽음에 절망한 사람들은 주변에서 원흉을 찾기 시작했고 악마와 결탁해서 세상을 어지럽힌 죄인들을 찾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악마와 결탁한 사람을 마녀라고 본 것입니다.

6.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마녀 사냥의 교과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의 망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책 중 하나가 바로 1486년에 발간된 라틴어로 사악한 여성에게 가하는 망치 즉 '마녀 잡는 망치'라는 뜻을 가진 '말레우스 말레피카룸'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입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마녀를 악으로 규정하고 심판해야 한다는 주제로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녀의 망치> 제1부, 악마와 마녀는 어떤 관계인가?

마녀가 어떻게 악마와 계약을 맺고 사악한 힘을 받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마녀의 망치> 제2부, 악마의 하수인 마녀가 저지르는 악행들은?

마녀가 악마의 하수인으로 이 세상에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마녀의 망치> 제3부, 마녀의 처분에 대한 상세한 매뉴얼을 제시

마녀들을 어떻게 재판하고 어떻게 심문해야 하는지를 재판과 처판에 대한 상세한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녀사냥의 교과서인 셈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하인리히 크라머'와 '야콥 슈프랭거'라는 두 명의 종교재판관입니다.

<마녀의 망치>를 통해 마녀를 퇴치할 신학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었고 성직자, 신학자, 법률가 등 당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으며 대중적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결국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책'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최악의 책으로 군림합니다.

사실 마녀가 과연 이런 일까지 할 수 있느냐! 악마가 직접 해를 끼치면 되는데 굳이 마녀라는 하수인을 두느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마녀의 망치>의 저자들은 악마는 물리적인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매개체'라고 주장했으며 그 매개체가 '마녀'라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마녀 이미지의 대부분을 만들어냅니다.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해골과 손이 보이는 이 그럼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마녀의 망치>에서는 마녀가 아기들을 죽여서  그 시신을 재료로 하늘을 나는 연고를 만든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녀가 냄비에 이상한 재료들을 넣고 끓이는 모습과 또 다른 마녀의 이미지인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 또한 바로 이때부터 굳어지고 확산되었습니다.

 빗자루만 타고 날아다닌 것이 아닌 건초를 긁어모으는 쇠스랑, 난로의 장작을 뒤집는 부젓가락, 염소, 당나귀, 고양이까지도 온갖 물건을 타고 날아다닌 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부족했던 시대, 종교적인 세계관이 강했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추론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박과 폭풍, 악천후를 부른다. 마법을 걸어 인간과 가축을 살해할 수 있다. 사람과 가축에게 불임을 일으킨다. 슬쩍 만지거나,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에 비정상적인 애정이나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연재해, 죽음, 모든 불행을 마녀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마녀의 망치>에 따르면 마녀는 그 존재만으로도 끔찍한 살인자이자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범죄자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책의 서자들은 오랜 세월 이단을 추적하면서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 즉 교회의 교리에서 벗어나 민간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마녀의 행위로 규정한 것입니다.

당시 유럽 전역에 퍼져있던 마녀에 대한 온갖 구전과 설화까지 집대성했으며 당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의 교령과 당대 최고 대학 중 하나인 쾰른 대학교 신학교 교수들의 승인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서명까지 붙여지는 등 종교적, 학문적, 국가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7. 유럽을 휩쓴 집단 광기

7. 1 마녀사냥

사실 교회는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출간되고 약 2 년 후에 이 책에 오류가 있다고 인정을 했지만 이 재미난 책이 세상에 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고통받고 절망하던 사람들은 마녀를 찾는 데 혈안이 되었고 온 사회가 마녀를 잡아서 죽여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온 유럽은 마녀사냥의 광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초기에는 종교재판소 소속의 종교재판관들이 마녀를 잡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이 직접 임명한 종교재판관들은 원래 이단을 잡아들였었는데 이 이단에 마녀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재판소에서만 마녀를 재판했던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의해 마녀들이 범죄자로 낙인찍히자 대영주나 국왕, 자치도시등이 관장하는 세속 재판에서도 이 영향을 받아서 마녀를 재판하기 시작합니다.

이렇듯 마녀사냥이라는 집단 광기가  종교재판소를 넘어 세속재판소와 대중에게 퍼져버리게 됩니다.

당시 유럽은 마녀재판을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법체계가 갖춰진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재판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 그리고 자신의 기준에 맞춰 자의적으로 마녀재판이 행해집니다.

당시 마녀로 고발된 실제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1580~1590년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마녀사냥이 일어났던 알자스-로렌 지방의 유명한 치안판사 '니콜라 레미'는 자신의 책에서 약 800명 이상의 마녀 처형과 재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인물입니다.

그중에 한 사건으로 한 농촌 마을에 '마리에트'라는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여인은 이웃에 사는 클라우드라는 남성과 함께 일했는데 그가 더 많은 건초 더미를 챙겨갔던 일 때문에 말타툼을 벌이게 되었고 결국 마리에트는 클라우드에게 크게 화를 냅니다.

그런데 말다툼이 일어난 그 이후 이상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클라우드의 아이가 죽었고 클라우드의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런 불행은 클라우드 한 사람에게만 그치지 않았고 마을에서는 또 다른 남자가 병에 걸리고 닭들이 집단으로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마리에트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었고 여기에 근거 없는 말들이 하나둘씩 붙게 되면서 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마리에트가 검은 염소에 올라탔다는 소문부터 그녀가 악마를 소환해서 마을 사람들을 저주했다는 소문까지 삽시간에 마을 전체에 퍼졌고 이쯤 되자 처음 마리에트와 말다툼을 벌인 클라우드가 대표로 나서서 마리에트를 마녀로 고발해 버립니다.

당시 마녀재판은 이런 황당한 고발이 대부분이었고 사실상 각종 복수의 수단이자 이해관계가 걸린 싸움의 도구로 이용됩니다.

가족 간에 재산 분할 문제로 마녀 고발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반항기 자녀가 반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모를 고발하는 사건까지 다양한 마녀 고발이 난무하던 시기였습니다.

심지어 잠을 너무 깊게 자도 마녀로 고발됐는데 잠을 깊게 자면 자는 동안 악마를 만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녀 고발의 피해자는 대부분 혼자 사는 여성이나 노인과 같이 사회적인 보호막이 약한 사회적 약자들이었는데 특히 이중에서도 '산파'가 마녀로 많이 몰렸습니다.

당시 정식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오랜 세월 출산 경험을 쌓은 산파들을 자신들의 경쟁 상대로 여겼으며 그래서 온갖 헛소문을 퍼트려 산파를 마녀로 몰아세웁니다.

이런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산파들은 다른 여성들보다 더 마녀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던 것입니다.

7. 2 마녀재판

악명 높은 마녀 재판의 과정은 이러했습니다.

우선 마녀로 고발을 당하면 종교재판소나 세속재판소에서 마녀 혐의자들을 체포해 갑니다.

순순히 끌려가지 않았던 마녀 혐의자에 대해서는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입 쪽에 가시가 나 있는 '얼굴 수갑'을 활용해

재판소까지 끌려왔습니다.

마녀 혐의자들은 재판소에 끌려와 정식 심문 절차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공통으로 묻는 첫 번째 질문은 이러했습니다.

너는 악마를 믿느냐?

사실 이 질문은 정답이 존재하지 않은 질문입니다.

'악마를 믿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악마의 존재가 기록된 성경을 부정하는 이단이 되는 것이었고, '악마를 믿는다'라고 대답을 하게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추궁을 통해서 그 악마를 어디서 보았고 어떻게 섬기게 되었느냐며 결국 마녀로 판결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재판관들은 마녀 혐의자들의 옷을 다 벗긴 후 악마가 몸에 남긴 표식을 찾기 위해 머리카락과 겨드랑이를 포함해 온몸의 털을 모두 밀어버립니다.

만약 몸에서 작은 점 또는 흉터, 사마귀라도 발견되면 모두 악마의 표식으로 의심받게 됩니다.

심문관들은 점이나 흉터 등이 악마의 표식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바늘로 찔러보았고, 악마의 표식은 바늘로 찔러봐도 아프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15cm 정도를 깊숙이 찔러서 고통을 느끼는지 확인했습니다.

이렇게 찔렀는데 통증을 못 느끼면 악마의 표식이라고 확신했으며 아프지 않은 부위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찔렀습니다.

그 밖에도 마녀 확인을 위해 상상을 초월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습니다.

마녀 혐의자들을 묶고 물에 떨어트리는 <물의 시험>을 했는데, 마녀들의 경우 악마를 따르기 때문에 교회에서 물로 받았던 세례를 거부해서 물이 마녀를 밀어낼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불로 달궈진 쇠판 위를 걷는 <불의 시험>을 했는데 악마의 하수인이라면 불에 닿아도 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7. 3 고문

마녀 확인 과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당시 바늘, 물, 불 시험을 통한 검증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재판관들이 반드시 입증해야 했던 과정이 있었는데 바로 '자백'입니다.

당시는 악마를 숭배하는 것은 영혼의 죄라고 생각했던 시대였기에 혐의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만 마녀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자백을 받기 위해 당시 재판관들이 마녀 재판에서 실제로 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왜 마귀에 빠졌는가? 얼마나 자주 하늘을 날았는가?
어떻게 마귀와 성교를 하였는가? 어느 장소에서 비밀 집회를 열었는가?
이 집회를 이끈 자는 누구이며 몇 명이 참석했는가?

영문도 모른 채 잡혀와서 마녀 혐의를 받는 혐의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마녀 사냥에 혈안이 된 재판관들은 반드시 자신이 마녀라는 자백을 들어야만 했고 그러한 자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고문'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이렇게 마녀로 고발을 당한 사람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오른쪽 코너에 재판관이 앉아 있고 서기가 고문받는 사람들의 진술을 기록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심문실 가운데 누워 있는 혐의자는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하는 <물고문>을 받고 있고, 마녀 혐의자의 고통을 증가가 하기 위해서 다리에 무거운 추나 돌을 매달아 양 손목을 묶고 줄을 달아 공중으로 끌어올리고 밧줄을 풀어 바닥에 닿기 전에 줄을 잡아 멈추면 체중과 돌의 무게로 어깨가 빠지거나 뼈가 부러지게 되는  스트라파도(Strappado)라고 하는 고문을 받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는데 이 스트라파도를 반복하면 사실상 불구가 되는 치명적인 고문법이었습니다.

또한 마녀 혐의자의 항문이나 생식기를 피라미드처럼 생긴 뾰족한 막대 끝에 맞춘 후 밧줄을 풀어 서서히 찢어지게 만든 고문 장치인 유다의 요람(The judas cradle)과 같은 고문도 자행되었습니다.

당시 마녀로 고발당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잡혀 들어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서 그야말로 잔혹한 고문이 자행되었고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지옥이라고 생각이 들 만큼 참혹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재판에서 마녀로 판결을 받으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혐의자는 순순히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고문을 버텨내지는 못했고 한계에 다다르면 '마녀 집회에 갔다, 악마와 성관계를 했다, 아기를 재물로 바쳤다'는 등의 온갖 증언을 하면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마녀 이야기에 살을 붙여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마녀재판을 담당했던 교회와 영주, 왕은 힘없는 시민들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었을까요?

이 시대에는 마녀를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재판관들은 자신들이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했으며 프랑스에서 마녀 재판으로 악명이 높았던 한 판사가 남긴 말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직접 보고, 듣고, 가능한 한 자세히 조사하여 그들로부터 진실을 이끌어 냈다
<프랑스 마녀재판관 '앙리 보게'>

 

이렇듯 재판관들은 '마녀를 고문하고 자백을 받음으로써 세상을 정화시키는 데 기여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녀로 밝혀지면 향하는 곳은 단 한 곳!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화형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으로 끌려 나온 마녀 자백자들은 처형을 위해 여러 가지 절차를 밟게 됩니다.

우선 재판관이 긴 판결문을 읽고 피고의 죄상을 구체적으로 나열해서 모인 사람들에게 다 듣게 합니다.

죄목을 들은 사람들은 분노해 마녀자백자들에게 돌을 던지고 욕을 하며 분풀이를 해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후의 절차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하는 것이었습니다.

16세기 유럽 곳곳에서 마녀로 지목된 죄인은 죽을 때까지 끔찍한 고통을 주기 위해 산 채로 화형 시켰고, 무자비한 마녀사냥으로 집단화형을 하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8. 마녀재판을 이용해 부와 권력을 탐한 세력에 의해 마녀사냥은 마녀사업이 되다

이렇게 마녀를 희생양으로 삼는 사회적 시스템이 만들어지다 보니 마녀재판을 이용하는 사람들 또는 이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나타납니다.

바로 지역의 영주와 관리들입니다.

종교재판소는 사실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람을 처형하려면 그 지역의 처형권을 가지고 있는 영주와 관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지역의 영주와 관리들에게 이용되지 시작합니다

영지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내지 못하면 영지의 주민들이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를 욕하고 비난하게 되는데, 이때 마녀를 범인으로 지목하면 자신을 향했던 주민들의 비난과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국왕도 나서서 마녀 재판에 힘을 보태기도 했는데 마녀 재판에서의 사형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살아서 죽기 전까지 왕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여건상 왕의 지배력을 나라 곳곳에 알리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왕의 지배력을 나라 곳곳에 알리기 힘든 상황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알리는 무대로 마녀재판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즉, 교회와 재판관, 왕과 지방 영주에 이르기까지 마녀사냥을 이용하다 보니 마녀사냥의 광기와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이해관계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벌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종교인과 재판관, 영주와 왕들은 재판하고 화형 하는 데 사용한 비용을 마녀로 몰려서 죽은 사람에게 받아냅니다.

마녀들에게 청구한 품목은 재판을 주관하는 재판관의 인건비, 하급관리인 처형관의 인건비, 체포, 심문, 고문하는데 든 수수료,  재판 관계자 밥값, 고문에 사용한 밧줄 비용, 화형에 사용한 장작 비용 등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처형이 끝나고 나서 재판 관계자들의 연회 비용에 이르기까지 마녀재판에 소용된 모든 경비를 마녀로 지목된 본인이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경비를 치르고도 돈이 많아서 남은 경우는 재판관, 성직자들이 나눠 가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녀를 밀고한 사람에까지 나눠졌습니다.

마녀사냥은 어느덧 벌이가 쏠쏠한 비즈니스가 되어버립니다.

마녀사냥의 다른 이름은 마녀사업이었고, 라틴어로 속담이 생겨날 정도였는데  

maguum emolumentum est justicia
큰 돈벌이 재판(=재판은 돈벌이가 쏠쏠한 일)

 

결국 시체를 더 많이 가진 재판관이 더 많은 돈을 가지게 되니 재판관들끼리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마녀 희생자가 채권이 있다면 채무자를 불러서 돈을 회수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마녀사냥을 겨냥해 자신이 마녀를 알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 즉 '마녀 감식인'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등장했습니다.

영화 <마녀 사냥꾼>의 모티브가 된 사람들입니다.

마녀 감식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녀를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씩 고소했습니다.

17세기 프랑스 베아른 지방에서는 '장 자크 바케'라는 마녀 감식인이 30여 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무려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마녀로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녀라고 지목된 누군가의 죽음으로 많은 돈을 벌며 배를 채우게 됩니다.

 그만큼 마녀사냥은 당연시되고 있었고, 광기로 치달았기 때문입니다.

9. 로마 가톨릭이 독일 트리어(TRIER)에 미친 영향

이 마녀사냥의 광기가 극적으로 분출된 곳이 있었는데 유럽 최대의 마녀사냥지로 꼽힐 만큼 마녀사냥의 광풍이 휘몰아쳤던 곳이 있습니다.

1580년부터 약 10년간 수백 건에 달하는 마녀재판이 열렸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엄청난 마녀사냥이 벌어진 대표적인 곳이 독일의 트리어지역입니다.

9.1 종교전쟁의 발단 종교개혁

작은 로마로 불릴 만큼 교회와 연관이 깊었던 도대체 왜 이렇게 참혹한 마녀사냥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당시 이곳에서 대규모의 마녀사냥이 벌어진 것은 전 유럽을 휩쓸었던 거대한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로 16세기 로마 가톨릭의 쇄신을 요구하며 일어난 개혁 운동, '종교개혁'입니다.

종교 개혁에 불을 붙인 것은 1517년 독일의 신학자였던 '마틴 루터'였습니다.

 이즈음 교황 레오 10세는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바티칸의 아름답고 화려한 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건축비가 필요했습니다.

이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특정한 문서 하나를 팔기 시작합니다.

'면죄부'라고 알려져 있는 문서인데 정확하게는 죄를 면해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었을 때 벌에 처해지는 것을 면하게 해주는 '면벌부'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면벌부는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벌을 면한다는 뜻으로 발행하던 증서로 교회는 면벌부를 과장 광고를 하며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1517년 교황이 면벌부 발행을 남발하는 모습을 보고 마틴 루터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발표하며 교회와 교황을 크게 비판하며 '면벌부가 없어도 모든 사람은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 합니다.

루터의 주장은 당시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거의 천 년간 로마 가톨릭 문화였던 서유럽은 기독교에 의해서 장악된 세계였는데, 루터와 칼뱅의 등장 이후 기독교라는 한 세계가 분열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급기야 루터와 칼뱅을 따르는 이들은 로마 가톨릭을 벗어나 새로운 교회를 만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개신교'입니다.

당시 개신교 세력을 나타내는 지도입니다.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파의 교리는 독일 남부, 동부 그리고 북유럽으로 전파됐고, 제네바에서 시작된 칼뱅파의 교리는 스코틀랜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로 전파됩니다.

이것은 유럽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든 변화였고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갈수록 격해지며 결국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게 되는데, 바로 유럽의 종교전쟁의 발단이 됩니다.

1517년 종교개혁 이후 유럽 곳곳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두 종교 간의 전쟁이 거의 100년 넘게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독일에서 대규모 국제전으로 번진 종교전쟁은 약 8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9.2 종교전쟁 기간 중 마녀사냥이 가장 극렬했던 지역, 독일 트리어

그렇다면 이 종교전쟁은 마녀사냥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에서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했던 시기가 이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전쟁이 벌어졌던 때입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우선 로마 가톨릭에서는 개신교가 등장하면서부터 자신들이 다스리고 지배하던 영역을 빼앗기게 된 것이고, 개신교 영역이 더 커지면 안 되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의 영역을 지키고 더 나아가서 빼앗긴 지역을 되찾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기 위해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고 이때 선택한 방법이 바로 마녀사냥이었던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내부에 있었지만 과거에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던 갖가지 민간신앙,  특히 악마와 관련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예 없애기로 결정하고 이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마녀'였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엄청난 마녀사냥이 벌어지게 된 것인데 그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독일의 트리어 지역입니다.

그중 트리어 교구 안에 위치한 트리어 시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톨릭 3대 중심지로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곳에서 로마 가톨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녀사냥을 주도한 인물은 '요한 폰 쇠넨베르크'라는 트리어 대주교입니다.

쇠넨베르크 대주교는 자신의 땅에서 죄를 말끔히 지우는 것을 신성한 사명으로 여겨, 죄인들을 모두 없애고자 했습니다.

트리어는 교황이 임명한 대주교가 그 지역의 땅을 맡고 다스리는 영주의 역할까지 했기 때문에 이런 대주교의 의지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 가톨릭의 권위를 되찾는다는 이유로 쇠넨베르크 대주교는 마녀사냥에 강력한 의지를 보입니다.

이런 막강한 권력에 의해서 트리어에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22개 마을에서 약 370여 명이 마녀라는 죄목으로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집니다.

이런 일들은 대주교의 의지뿐 아니라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엘리트 지식인들과 법률가들이 참여하여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체포하고 재판에 넘겼으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심지어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마녀를 모조리 잡아 없애겠다며 긴급 위원회까지 조직했기에 가능했습니다.

마녀재판이 가장 극심할 때 벌어지는 일이 '아이들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었고 트리어에서는 8살 난 어린아이가 증인으로 불려 나와 '마녀가 자신을 집회로 데리고 갔다. 순간이동을 시켰다. 염소에 나를 태워 날았다'는 등 믿기지 않은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며 자신이 집회에서 봤다는 주변 이웃들을 하나둘 고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광기가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마녀로 끌려오는 사람들의 신분이 귀족, 엘리트, 부유층에 이르기까지 점점 다양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22개 마을에서 수많은 사람이 산 채로 화형애 처해집니다.

급기야 트리어에서는 시장 2명과 고위 성직자까지도 마녀 혐의로 고발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트리어에서 마녀로 몰려 사망한 370명 중에 108명은 귀족이나 행정부 고위직 신분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트리어 교구 전 지역에서 7,000명의 사람들이 화형에 처해지며 마을 2곳이 전멸하고 다른 마을 2곳에서는 여성 2명만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10. 개신교 또한 신의 반역자로 '마녀사냥'을 하다

그렇다면 로마 가톨릭에 반대한 개신교는 마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개신교도 로마 가톨릭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같았었기 때문에 악마에 대한 인식은 같았고 개신교 국가에서도 마녀사냥은 격렬하게 벌어집니다.

왼쪽에는 악마가 있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밟고 있는 그림입니다

개신교에게 마녀는 성경에 나오는 사탄을 따르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신을 거부하는 신의 반역자로 인식됩니다.

개신교의 마녀사냥이 격렬했던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스코틀랜드'입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 6세'였는데 개신교는 왕에게 협조해 마녀재판을 직접 주관하기도 했으며 왕에게 마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라는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스코틀랜드에서는 약 3,000명 이상의 마녀가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는 각자의 논리로 마녀사냥을 이어갔습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녀에 대한 박해와 화형에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느 편에서도 상상된 악마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을 능가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트 프란츠과 레미기우스 보이머 作 '세계 교회사' 中>

11. 마녀에 대한 의심에 불을 지핀 '루됭의 마녀재판'

이러한 혼돈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의심과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마녀로 의심받아 처형당한 사람들 특히 고위층이나 지식인들은 진짜 마녀였을까? 마녀라는 것이 진짜 있기는 한 것일까?라고 하는 의심의 씨앗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때 의심의 씨앗이 꽃을 피운 곳은 프랑스입니다.

1632년 프랑스 중부에 위치한 소도시 루됭(Loudun)이라는 마을에서 이런 의심에 불을 지피는 재판이 벌어집니다.

17세기에 벌어진 세기의 재판이라고 알려진 사건이 '루됭의 마녀재판'입니다.

루됭 시에서는 매우 기묘하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연출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야기된 마녀들은 대부분 고발을 당해서 재판정에 끌려왔는데 루됭에서 스스로 자신이 악마에 씌었다고 자백한 여성이 등장한 것입니다.

재판장에서 발작하는 수녀의 정체는 루됭 시에 있던 우르슬라 수녀회 소속 수녀였습니다.

그녀는 기괴한 모습으로 팔다리를 비틀고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들을 내뱉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이런 증상을 보인 수녀들이 17명에 달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놀란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수녀들의 진단을 위해 루됭 시에 모이게 됩니다.

악마에 씐 마녀

 

그들은 이런 진단을 내리게 되는데 특히 '잔 데장주' 원장 수녀의 몸에는 무려 6마리 이상의 악마가 몸에 깃들었다고 진단했습니다.

원장수녀의 이마 한가운데는 '레비아탄'이 오른쪽 옆구리 두 번째 갈비뼈에 '발람' , 오른쪽 옆구리 마지막 갈비뼈에 아만과 이사카론이 그리고 위장 속에 아스모데우스와 베헤모스라는 악마가 깃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신성한 수녀의 몸에 악마가 깃든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 교회입장에서는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곧장 수녀들에게 악마를 쫒는 구마 의식(엑소시즘)이 행해집니다.

이렇게 구마 의식에서 필수적으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이 질문에 원장 수녀는 극렬히 거부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성직자!

 

그리고 어떤 성직자냐고 질문을 반복하자, 악마에 씐 수녀들이 내뱉은 성직자의 정체로 그 마을의 교구사제였던 '위르뱅 그랑디에'라는 신부님을 지목합니다.

기묘한 사건에 의외의 인물까지 용의자로 몰리자 이 재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데 그중에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재상(수석대신)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입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 절대왕정의 확립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정치가였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인 이상은 그가 모셨던 국왕 루이 13세의 왕권을 절대적인 수준으로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힘센 지방 대 귀족들과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도시들의 영주가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와 같은 지방 세력들을 약화하기 위해 지방의 요새화된 성처럼 가지고 있어 언제든지 반란의 근거지로 사용될 수 있는 지방 도시의 성채와 성벽을 제거했습니다.

이때 리슐리외 추기경에게 반기를 든 인물이 수녀들에게 악마를 들러붙게 했다는 의심을 받은 그랑디에 신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리슐리외 추기경은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루됭의 마녀재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하면서 어느새 루됭의 마녀재판은 정치에 이용되었고, 이때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소문이 나서 재판을 보기 위해 루됭에 몰려오기도 했습니다.

그랑디에 신부의 재판은 많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열리게 되었고 그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랑디에 신부는 다리의 정강이뼈를 으깨는 등 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자백을 하지 않았고, 판결은 미뤄지며 재판은 계속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마녀 재판의 판결에서 가장 중요한 자백이 없었음에도 그랑디에 신부는 악마의 하수인이라는 판결을 받고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정치 재판이었기 때문에 그랑디에 신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무고하게 희생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마녀사냥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열기 됩니다.

사람들이 악마가 들린 수녀들의 모습을 보고 참인지 거짓인지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랑디에 신부가 세력 다툼에 희생당했다는 의심도 싹트게 됩니다.

어느새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고 마녀와 마술, 악마라는 프레임이 거짓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17세기 프랑스는 사상적으로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등장했던 시기로 그가 주장했던 합리론이 사상적  배경이 확산되어 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수학, 과학, 의학들이 발달하면서 세상을 더 이상 중세시대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100년 넘게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전쟁도 일단락되면서 마녀사냥의 광기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12. 루이 14세, 마녀사냥을 금지하다

그리고 이틈을 타서 프랑스에서는 왕권 강화를 추구하면서 스스로 태양왕이라고 칭했던 강력한 왕 '루이 14세'가 등장했고, 그가 마녀사냥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당시 루이 14세는 군주로서 절대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명령하에서 프랑스의 모든 지역이 동일한 방식으로 다스려지기를 원했습니다.

루이 14세가 사법 체계를 통일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지방 재판소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고 있는 마녀사냥이었고,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마녀사냥을 제한하기 시작합니다.

1669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마녀 감식인에 의해 마녀로 고발당한 24명의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4세는 사형을 면해주고 지방 재판관이 그들에게 몰수한 재산도 돌려주라고 명령합니다.

루이 14세가 즉위한 지 40년이 지난 1682년 루이 14세는 왕령으로 마녀재판을 공식으로 금지시킵니다.

다양한 범죄의 처벌에 관한 칙령
첫째, 주술의 실재를 부정하고 마술과 마법, 마녀재판을 폐지한다.

둘째, 주술 행위에 대한 처벌은 체형에 그친다.
셋째, 마녀들의 행위는 악마와의 계약이 아닌 단순한 미신이다.

이렇듯 사법 체계의 통을 통해 루이 14세는 마녀사냥을 종식시키게 됩니다.

이전과 달리 마녀의 존재를 미신으로 규정하며 마녀는 악마의 사주를 받은 악의 세력이 아니라 사기꾼이나 환상에 빠져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규정합니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수세기동안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어딘가 기묘하고 으스스하고 오싹한 마녀사냥은 드디어 종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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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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