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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진짜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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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진짜 했을까?

진리라고 믿었던 사실들에 대한 배신

 

내가 굳건히 믿고 있던 진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 믿어 온 상식들을 거짓이라고 주장한다면? 

지구 평면설 주장1
지구 평면설 주장1
지구 평면설 주장2
지구 평면설 주장2
지구 평면설 주장3
지구 평면설 주장3

지구는 둥글다는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도  이와 같은 근거를 들어 꾸준히 지구 평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은 평평한 지구를 증명하겠다고 합니다.

직접 로켓을 만들어 우주 비행을 시도한 한 남자는 로켓이 추락하며 결국 사망하고 맙니다.

2018년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발표에 의하면 지구 평면론을 믿는 사람들이 약 650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가 평평함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을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야기를 통해 풀어나가 보고자 합니다.

1. 갈릴레오 갈릴레이, 중세 시대 절대 진리였던 '천동설'에 맞선 '지동설'을 주장하다

1960년 촬영된 지구 사진
1960년 촬영된 지구 사진

이미 1960년대에 달에서 촬영된 지구 사진을 통해서 '지구가 둥글다'라고 하는 사실 자체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400여 년 전에 이것과 비슷한 주장으로 맞붙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구는 고정되어 있다는 천동설과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지동설의 맞대결입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었고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태양과 태양계 행성들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이 이론은  '지구 중심설 즉 천동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도 회전 운동을 하며 태양의 주위를 여러 행성이 돌고 있다는 이론인 태양 중심설 즉 지동설이 등장하게 됩니다.

당시  대부분의 중세 사람들은 당시 절대진리였던 천동설을 뒤집고 기존의 진리를 깨부수는 지동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때 집요한 관측을 통해서 지동설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 실험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 실험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오 갈릴레이

바로 피사의 사탑에서의 실험과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움직이는 지구를 증명한 것으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그는 이탈리아의 물리, 수학, 천문학자이자 진자의 등시성 및 지동설을 확립하는 등의 업적을 세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갈릴레오-뉴턴-아인슈타인
갈릴레오-뉴턴-아인슈타인

갈릴레오는 근대과학의 아버지로 칭해지는 인물이여, 만일 갈릴레오가 없었다면 이후 뉴턴,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 과학계 거장들의 계보가 과연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과학자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갈릴레오를 만나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지구는 돈다'라고 주장하며 중세시대 당연한 진리로 믿어졌던 천동설에 대한 믿음들을 서서히 반박하며 무너뜨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동설을 거의 대부분 믿지 않았으며, 지동설은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지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신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었고 결국 교수 재임용에서 실패하며 실직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달의 표면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달의 표면

하지만 20배 크기로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이틀 만에 직접 만들어 하늘을 보며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달의 표면'등을 관찰하며 천동설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증거들을 발견하고 모아가기 시작합니다.

이때 갈릴레오가 주장하던 지동설이 천상계를 모독하는 주장과 다름없다며 종교계의 심기를 건드렸고, 로마에서 열린 종교 재판에까지 서게 되었고 화형까지 당할 수 있는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갈릴레오는 왜 이렇게 목숨을 위협받으면서까지 지동설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을까요?

2. 아리스토텔레스 이론과 신의 섭리가 지대하던 중세시대

갈릴레오가 태어 날 당시 16세기 중세 이탈리아는 한 미디로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이 문학이나 철학, 과학과 같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피사는 이런 다양한 학문들이 활발히 연구되던 도시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신 중심의 사회 토대를 만드는 데 일조한 인물이 고대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던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뿐 아니라 나무나 돌멩이 같은 우주의 모든 문제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기고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에는 특정한 '목적'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생명체의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섭리는 신께서 다 의도했고, 신의 섭리에 따라 우주가 탄생했으며 우주의 모든 것들은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고, 이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믿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봤을 때 땅은 가만히 있고 하늘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지구는 신이 인간을 위해 만든 곳이기 때문에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달과 태양, 행성들이 신이 만들어놓은 법칙에 따라서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과 같이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중세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해석되던 것이 충분히 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갈릴레오, 단테 신곡 속 지옥의 크기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며, 피사 대학 수학과 교수가 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564년에 피사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태어납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당대의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한 천재의 탄생이었습니다.

피렌체 아카데미라고 하는 문학, 과학의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당대 지식인들이 의견을 교류하던 일종의 학회 같은 단체가 있었는데 이 학회의 학자들 사이에서 한 가지 쟁점이 화제로 떠오르고 됩니다.

13세기 이탈리아 작가 단테가 쓴 '신곡'이라고 하는 서사시는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가로지르는 사후 세계관을 다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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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지옥 편 내용 총정리

단테의 신곡 지옥 편 내용 총정리단테의 신곡은 35살의 단테가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길잡이를 만나서 지옥부터 천국까지 돌아보는 일주일간의 여행기입니다. 이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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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가 그린 단테 <신곡> 속 지옥의 모습
보티첼리가 그린 단테 <신곡> 속 지옥의 모습

이 작품은 보티첼리가 그린 신곡 속 지옥의 모습으로 실제로 지옥을 다녀와 본 것처럼 생생했고, 신곡이라는 시는 곧 학자들 사이에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렌체 아카데미에 당대의 지식인들이 갈릴레오에게 단테가 묘사한 지옥이라는 곳을 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지 요청하게 됩니다.

갈릴레오는 신곡의 구절들을 기반으로 수학적으로 입증하려 하는데, 갈릴레오가 신곡 중 수학적인 힌트를 얻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그 거인의 얼굴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의 솔방울만큼 길고 거대했으며
2. 거인의 크기와 나(단테)만큼의 비율은 그 거인들과 루시퍼의 팔 길이 정도였다.
<신곡 지옥 편 중에서>

이 문장들로 갈릴레오는 지옥의 크기를 계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거인의 얼굴=성베드로 성당의 솔방울 크기
거인의 얼굴=성베드로 성당의 솔방울 크기

성 베드로 성당의 솔방울의 지름은 약 3.19m이며, 당시에 썼던 머리의 비율로 따지면 '거인의 키= 얼굴 크기 X8'이므로 거인의 키는 대략 25m가 됩니다.

거인의 키: 내키=루시퍼의 팔: 거인의 키
거인의 키: 내키=루시퍼의 팔: 거인의 키

그 거인의 키와 내 키만큼의 비율이 루시퍼의 팔과 거인의 키만큼의 비율이기 때문에 이 비율대로 계산해 보면 루시퍼의 키는 약 1.12km가 됩니다.

이렇듯 갈릴레오는 상상 속 존재들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증명을 해 낸 것입니다.

이후 루시퍼의 키를 토대로 지옥의 크기도 추정하기 시작했는데, 신곡에 적힌 여러 힌트들을 수학적으로 조합해서 '지옥의 너비'를 계산해 내게 됩니다.

그 결과 '지옥의 부피는 지구의 약 1/14일 것입니다'라는 것을 증명해 냅니다.

1589년 25살의 갈릴레오는 피사대학의 수학 교수로 임용됩니다.

갈릴레오는 아버지의 학비 지원이 끊겨 학위도 따지 못했지만, 불과 4년 만에 모교의 수학과 교수가 된 것입니다.

4. 갈릴레오, 진리에 대한 도전 (1) 자유 낙하 운동에 대한 도전

하지만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갈릴레오의 인생에 위기가 닥칩니다.

갈릴레오는 교수로 임용된 후 그동안의 의구심을 드러내며 약 2천여 년 동안 세계관을 지탱해 왔던 진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 것입니다.

갈릴레오의 첫 번째 의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유 낙하 운동'에 대한 법칙이었습니다.

지상계는 흙, 물, 불, 바람이라는 4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이 4 원소의 성질과 목적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 상대적으로 무거운 흙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가벼운 불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붙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의 이론을 확장하게 되면 물체의 낙하 속도는 무게에 따르기 때문에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져야 합니다.

자유 낙하 운동의 원리는 신의 목적에 따른 운동이라고 믿었고, 신의 섭리이기 때문에 절대 진리로서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갈릴레오가 학생이던 시절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됐고, 그가 보기에 우박이 크기와 상관없이 동시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갈릴레오는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맞다면 우박 중에서도 무겁거나 큰 우박은 더 빨리 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의구심을 품고 수학 교수를 찾아가 질문하자, 교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박이 각각 다른 위치에서 떨어져서 그렇단다. 무거운 우박은 더 높은 곳에서 가벼운 우박은 낮은 곳에서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동시에 땅에 닿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란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교수의 답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뭔가 설명할 수 없는 허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피사대학의 교수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지하며 그의 이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했고,  갈릴레오는 맹신하는 교수들을 향해서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고 계속된 대립으로 '논쟁꾼'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합니다.

학자들과의 대립이 끊이지 않자 교수 재임용에 실패하고 맙니다.

5. 갈릴레오, 진리에 대한 도전 (2) 밀물과 썰물의 원리에 대한 도전

갈릴레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지며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칩니다.

아버지 대신 가장이 된 갈릴레오는 교수 재임용에 실패하고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고,  여동생의 어마어마한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빚까지 져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1592년, 그동안 친분을 유지해 왔던 귀족들이 갈릴레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고 귀족들의 추천을 받아 파도바대학의 수학 교수로 임용됩니다.

1592년 바다를 건너 베네치아를 방문한 갈릴레오는 바다를 보며 ' 바다의 밀물과 썰물은 어떤 원리로 생기는 것일까?'  또 한 번 의구심에 사로잡힙니다.

당시 학자들 역시 밀물과 썰물이 오는 시기가 매번 달라지는 것에 대한 원리를 밝히려 노력했지만, 명확한 답은 없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갈릴레오는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고 가정하면 밀물과 썰물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게 됩니다.

지구가 움직이는 것과 밀물, 썰물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요?

그 당시 갈릴레오의 생각을 쉽게 설명해 보면 국이 든 국그릇이 지구라고 한다면, 그릇을 손에 쥐고 왔다 갔다 움직이면 그 안에 국이 출렁거리는 것과 같이 그릇(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물(바다)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밀물과 썰물은 달의 인력과 지구의 원심력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지구와 달이 마주 보는 부분과 반대편은 밀물이 그 외의 부분은 물이 빠져나가면서 썰물이 발생합니다. 

지금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원리를 다양한 연구를 통해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원리는 몰랐지만 갈릴레오의 위와 같은 생각은 굉장히 신선한 발상을 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6. 갈릴레오, 진리에 대한 도전 (3) 천동설에 대한 도전

천동설
천동설

당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당시 종교계와 사회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다고 생각했고, 지구의 주위를 달, 수성, 금성, 태양, 화성, 목성, 토성의 순서로 완벽하게 원운동을 하면서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단, 지구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천동설 절대불면의 원칙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레오는 과학계뿐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절대 원칙으로 삼았던 천동설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그는 이 의문에 확신을 주게 된 폴란드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이라는 학설을 발견합니다.

가톨릭 사제였던 코페르니쿠스는 평소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하늘을 자주 관찰하곤 했는데, 이때 천체들의 움직임을 천동설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해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꾼다'라고 생각 자체를 바꾸는 시도를 합니다.

천동설로는 설명하기 힘든 천체의 움직임이 지구와 태양을 바꾸자 해결된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lt;천구의 회전에 관하여&gt; 中 지동설 모습
코페르니쿠스<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中 지동설 모습

이것은 코페르니쿠스 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동설에 의한  우주의 지도를 그린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중심에는 태양이 있고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원을 그리면서 돌고 있는 모습을 설계했고, 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과 동시에 지구 스스로도 돌고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현재 단어로 지구가 공전과 함께 자전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까지 밝혀낸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수학을 공부한 성직자였는데 천동설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천동설을 거부하는 순간부터 당대 종교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죽기 직전에야 지동설 이론의 책을 씁니다.

갈릴레오 또한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천동설을 반박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하게 지지했지만, 이것을 강력하게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1604년, 절대 불변이라 믿었던 하늘에 새로운 변화가 발견됩니다.

케플러의 별
케플러의 별

이 그림은 당대 최고의 독일 천문학자였던 요하네스 케플러가 그린 별자리 그림인데, 이 그림 속에 1604년 10월 케플러가 발견한 '케플러의 별'이라고 불렸던 새로운 별이 등장합니다.

천동설을 중심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서는 천상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곳으로 무엇인가가 새로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천동설을 믿었던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케플러의 별이 지구와 달 사이의 공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데 그곳 자체는 완벽하게 천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존의 이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갈릴레오는 이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본 케플러의 별을 다른 지역의 관측 내용과 비교하며 연구를 했고, 그 결과 케플러의 별은 지구와 달 사이 지상계가 아닌 그 보다 훨씬 먼 천상계에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lt;새로운 별에 대한 브루진의 체코 디 론키티의 대화&gt;, &lt;별의 등장에 관련한 알림베르토 마우리의 고찰&gt;
갈릴레오 갈릴레이<새로운 별에 대한 브루진의 체코 디 론키티의 대화>, <별의 등장에 관련한 알림베르토 마우리의 고찰>

그 후 갈릴레오는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문을 발간하게 되는데 이 책들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상대편의) 이런 공상은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 
왜냐하면 절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별의 등장에 관련한 알림베르토 마우리의 고찰 中>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을 맹신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연 과학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기를 바랐으며, 그것이 진정한 학자의 자세라고 생각했습니다.

7. 갈릴레오의 운명을 바꾼 망원경 등장

하지만 1609년, 갈릴레오는 네덜란드 미델뷔르흐에서 안경 제작자들이 새로운 기구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 물건으로 인해 갈릴레오의 운명이 뒤바뀝니다.

평생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남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비극을 맞게 되기도 합니다.

망원경
망원경

이 물건은 멀리 있는 물체를 가깝게 볼 수 있는 '망원경'입니다.

네덜란드 미델뷔르흐의 안경 제작자들이 렌즈를 활용해서 3~4배 확대 가능한 망원경을 만들어 냈는데, 이 소식이 전 유럽에 퍼지면서 이탈리아에 있던 갈릴레오에게도 전해지게 됩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보지도 않았지만 안경 렌즈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그동안 쌓인 발명 노하우를 활용해서 바로 망원경 제작에 돌입해 완성해 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단 이틀 만에 네덜란드에서 만들었다는 망원경 보다 유고배율, 무려 9 배율의 망원경을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만든 망원경을 팔기 위해 베네치아에 있는 산 마르코 광장의 높은 종탑으로 베네치아 귀족이나 고위 공직자들을 초대한 후 자신이 만든 9 배율 망원경을 시연하는 판촉행사를 진행합니다.

주세페 베르티니 作 베니스 총독에게 망원경 사용법을 보여주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주세페 베르티니 作 베니스 총독에게 망원경 사용법을 보여주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림 속에서 망원경 시연을 하고 있는 사람이 당시 베네치아 총독 '레오나르도 도나'이며, 그 옆에서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 갈릴레오이고 그 뒤로 베네치아의 고위공직자들이 시연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귀족이나 고위 공직자들의 니즈를 간파했고, '멀리 있는 적을 1km 안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으며 적을 2시간 전에 미리 볼 수 있다'라며 전쟁에서의 유리한 점을 홍보하였고 이것이 제대로 들여 먹혀 망원경 100개를 주문받는 데 성공합니다.

이를 계기로 갈릴레오는 귀족들에게 망원경을 판매하는 것을 넘어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게 되었고, 총독이나 고위공직자들은 갈릴레오에게 평생 동안 연금을 보장해 주고 파도바대학의 연봉도 2배나 올려주겠다고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어떤 대학의 교수들도 받아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갈릴레오는 이에 그치지 않았고 1609년 말 거듭된 망원경 연구 끝에 무려 20배 크기로 볼 수 있는 망원경의 개량에 성공했습니다.

갈릴레오가 메디치 가문에 선물한 20배율 망원경
갈릴레오가 메디치 가문에 선물한 20배율 망원경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화려한 문양의 장식이 돋보이는 이 20 배율 망원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된 코시모 2세에게 바쳐지기 위해 갈릴레오가 만든 것입니다.

코시모 2세는 이 망원경을 받고 장식 중앙에 렌즈를 따로 보관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메디치가문1

 

평민 출신 메디치 가문이 유럽최고의 가문이 되는 과정(조반니, 코시모, 로렌초)

평민 출신 메디치 가문이 유럽최고의 가문이 되는 과정(조반니, 코시모, 로렌초) 1. 르네상스가 꽃피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메디치 가문 15세기 유럽에서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엄청난 부자

donbuller.tistory.com

갈릴레오는 이 20 배율 망원경을 메디치 가문에 헌사한 것을 계기로 메디치 가문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집니다.

7.1 망원경을 통해 찾은 천동설에 맞설 첫 번째 증거, 달의 표면

망원경은 갈릴레오에게 안정된 미래를 가져온 동시에 지동설을 증명할 최고의 도구가 됩니다.

그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하늘을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맞설 증거를 수집합니다.

망원경을 통해 찾은 첫 번째 증거는 바로 달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달은 완벽 그 자체인 천체였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따르면 

달의 표면은 마치 수정구와 같다

 

신이 사는 천상계는 어떤 흠이라는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영원불멸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천체들도 오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원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달을 구슬 같은 깨끗한 표면의 완벽한 구의 형태라고 믿었고 이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요한계시록 12장 1절>

 

'발아래 달을 둔 여성'은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며, '해를 옷 입었다'는 것은 태양을 옷처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완벽하고 성스러운 달의 이미지와는 달리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서  직접 본 달의 표면은 분화구처럼 움푹 파인 곳도 있고 매끄럽지 않았습니다.

1610년 갈릴레오가 그린 달의 표면
1610년 갈릴레오가 그린 달의 표면

1610년 갈릴레오는 달의 표면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달과 모든 천체에 대해 옛날부터 많은 철학자들이 믿었던 것과 달리 달 표면이 매끈하거나 평평하거나 완벽한 구 모양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달의 표면은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높고 낮은 돌출부로 가득 차 있다. 즉, 달 표면에도 지구 표면과 아주 비슷하게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作 '별들의 전령' 中>

 

갈릴레오의 이 주장에 독실한 종교인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론을 신봉하는 학자들은  '망원경으로 본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분노합니다.

망원경 자체에 대해서도 신뢰하지 않았고 달이 완벽하지 않다는 갈릴레오의 관측내용은 '성모 마리아의 순수성을 걔는 것과 동시에 완벽한 천상계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도 흠집을 내는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갈릴레오의 달 관측은 종교계와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냥 눈으로만 보아도 매끄럽지 않은 달 표면에 대해 천동설 신봉자들은 어둡게 보이는 부분은 달을 감싼 물체의 그림자라고 보았고 달의 밀도가 달라서 부분적으로 어둡게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달의 무결점을 깨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릴레오의 관측 이후로 달의 표면을 다르게 그리기 시작하는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합니다.

로도비코 카르디 다 치골리
로도비코 카르디 다 치골리
치골리가 그린 성모 마리아가 밝고 있는 달의 표면
치골리가 그린 성모 마리아가 밝고 있는 달의 표면

대표적으로 로마의 치골리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가 밟고 있는 달의 표면에 울퉁불퉁한 분화구를 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치골리와 갈릴레오가 어린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고, 치골리에 망원경으로 실제로 달을 관측한 후에 작품을 그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존재합니다.

7.2 망원경을 통해 찾은 천동설에 맞설 두 번째 증거, 금성과 목성의 변화

갈릴레오는 달에 이어서 종교계와 사회를 뒤흔드는 두 번째 증거는 금성과 목성의 변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으로 금성을 관찰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동설을 적용할 때 금성의 모습
지동설을 적용할 때 금성의 모습

그가 그린 스케치와 같이 금성이 초승달의 모습을 하면 점점 커지다가 보름달처럼 둥글 어질 때는 작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측을 통해서 금성이 초승달모습이 될 때는 지구와 가까워지면서 커지는 것이고, 둥글어질 때는 지구와 멀어져서 작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금성이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였고, 천동설을 적용할 때에는 금성이 보름달의 형태일 수 없다는 것을 망원경만으로 금성의 궤도를 파악해 천동설의 모순을 찾아낸 것입니다.

천동설을 적용할 때 금성의 모습
천동설을 적용할 때 금성의 모습

갈릴레오는 목성 주변을 도는 위성을 발견했는데 이것 또한 천동설을 뒤집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천동설에서는  '모든 전체는 지구 주변만 돌아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이 발견됐다는 것은 하늘의 모든 천체들이 지구만 돈다라고 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천동설을 깨부수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실제 갈릴레오의 목성 위성 메모
실제 갈릴레오의 목성 위성 메모

당시 망원경의 성능으로는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실제 갈릴레오의 목성 위성 메모를 보면 방향은 다르지만 4개의 점이 목성을 돈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며, 실제 이 네 개의 점이 바로 목성의 위성입니다.

이런 발견을 한 갈릴레오에게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 공국의 '수학 및 철학 담당'이라는 직분에 임명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의 수학이나 철학 관련한 자문위원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영예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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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가 최고의 명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후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붙이는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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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스토, 가니메데, 유로파, 이오
칼리스토, 가니메데, 유로파, 이오

현재 목성의 위성의 이름은 칼리스토, 가니메데, 유로파, 이오이지만, 당시에는 메디치가의 이름인 코시모, 프란체스코, 카를로, 로렌초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4개의 위성을 통틀어 '메디치의 별'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메디치 가의 별들
메디치 가의 별들
갈릴레오가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는 글
갈릴레오가 목성의 4개 위성을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는 글

그리고 <별들의 전령>이라고 하는 책 앞에 '메디치 가의 별들'이라고 쓰고 서문에는 '고귀하신 토스카나의 네 번째 대공 코시모 데 메디치 2세 전하께'라고 찬양의 글까지 쓰면서 목성의 4개 위성을 헌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아직 학계의 인정도 받지 않고 교회가 쌓아 온 진리를 뒤흔들려고 하자 종교계의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7.3 망원경을 통해 찾은 천동설에 맞설 세 번째 증거, 태양의 흑점

태양의 흑점
태양의 흑점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명성을 등에 업은 후에도 천체를 관측하는 일을 계속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따른 천상계의 신성성에 직접적으로 흠집을 낼 수 있는 태양의 흑점에 대한 불경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흑점이란 태양 표면에 자기장 활동이 강하게 일어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에 태양의 대류 활동이 방해를 받아 태양의 일정 지점이 주변보다 온도가 낮아져 검게 보이는 영역을 말합니다.

갈릴레오는 태양의 흑점을 발견한 후에 매일 그 움직임을 꼼꼼히 관찰하여 기록합니다.

그는 흑점이 태양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따르면 천상계 안에서도 태양은 가장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여겨졌고 천동설을 믿었던 학자들은  흑점이 태양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태양 근처의 천체 그림자라고 봤던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 당시 예수회와 그에 소속한 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이 분리되자 더욱 강력하게 가톨릭의 교리를 지키려고 했던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이런 예수회에게 갈릴레오의 흑점에 대한 해석은 신이 만든 천상계를 모독하는 불경한 주장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
조르다노 브루노

지동설을 지지한 이탈리아 신학자 겸 자연철학자인 조르다노 브루노라는 사제는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예수회에 의해 8년간의 심문 후 화형을 당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8. 갈릴레오, 성경을 부정하는 친구와의 편지 내용으로 결국 종교재판에 회부되다

갈릴레오는 성경과 과학 간의 관계에 대해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문제가 됩니다.

성경을 풀이하는 주석가는 틀릴 수 있습니다.
(중략)

그 안에 담긴 무한하고 높고 감탄할 만한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학에서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루지는 않았을 겁니다.
(중략)
성경에는 원래의 의미에 관해 많은 거짓된 서술이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편지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틀릴 수 있고, 신학에서 발견한 것을 과학에서는 더 대단하게 다룰 수 있으며, 성경에는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거짓된 서술이 많다고 주장합니다.

종교계는 이러한 갈릴레오의 주장에 마침내 폭발하였고 그들의 노여움을 사고 맙니다.

편지를 수정한 갈릴레오
편지를 수정한 갈릴레오

갈릴레오는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편지 원본을 찾아 줄을 긋고 수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주석가는 틀릴 수 있다'라는 구절을 '주석가는 때때로 오해할 수 있다'로 '성경에 많은 거짓된 서술이 있다'라는 구절을 '진리와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라는 식으로 완곡한 표현으로 편지를 고쳐나가는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편지의 내용이 계속해서 퍼져나가다 보니 결국 로마로 불려 가 종교재판에 회부됩니다.

1616년 2월 26일,  교황청은 갈릴레오를 불러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주장을 버려야 하며, 만약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경고를 받게 됩니다.

갈릴레오는 교황청의 제안에 대해 강제 서약을 하게 됩니다.

저는 로마 교황과 성직자들의 전통 그리고 교회의 규범을 확고히 믿고 따릅니다. 또 오래전부터 믿어 왔던 대로 그리고 성서의 진정한 뜻과 그에 대한 해석을 판단할 권한이 있는 성모 마리아의 교회가 지지하는 대로 성서를 믿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성서를 믿거나 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르다노 브루노가 지동설을 끝까지 주장하며 고문을 받고 결국 화형을 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갈릴레오는 교회의 명령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이어 교황청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담긴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라고 하는 책을 금서로 지정합니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교황청이 4년 뒤 내용 수정을 전제로 금서에서 조건부 해제를 시켜주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종교계가 지동설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갈릴레오가 더 이상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근거로 한 불경한 주장을 못 하게끔 일시적으로 봉인했다고 보는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9. 갈릴레오, <대화>라는 책의 내용으로 두 번째 종교재판에 회부되다

이러한 굴욕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1633년에 또다시 종교재판에 불려 갑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
교황 우르바노 8세

그는 첫 번째 종교재판 이후로 조용히 지내다가 첫 번째 종교재판에서 자신을 보호해 준 오랜 벗이었던 우르바노 8세 추기경이 새로운 교항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동설에 대해서 조금은 편하게 말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쓰려고 하는 표지와 내용까지 까다로운 검열을 받겠다는 조건을 수락하고 1630년에  <대화>라고 하는 책을 출간합니다.

이 책은 연극처럼 4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등장인물 3명의 대화로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 명은 천동설을 지지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한 명은 지동설을 지지하는 코페르니쿠스, 나머지 한 명은 지식인 프톨레마이오스 가 등장합니다.

새로운 교황이 갈릴레오에게 이 책을 출판하는 조건으로 지동설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하지 않고 가설 수준에서만 다룰 것을 전제조건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지동설의 근거를 너무 세세하고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당연히 책을 본 예수회의 학자들과 성직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교황도 더 이상 갈릴레오의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에 처합니다.

결국 예수회는 교황에게 갈릴레오의 <대화>를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오랜 벗이었지만 여기서 갈릴레오의 편을 들게 되면 자신의 입지까지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교황은 갈릴레오에게 즉시 종교재판소까지 와야 하며 이를 거부하면 강제로 구인하겠다고 굉장히 강경하게 요구합니다.

1633년 갈릴레오는 교황의 명령을 받고 종교재판소로 향하게 되었고, 그는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는 신교를 지지하지 않으며 지구가 움직이는 것이 맞다

 

라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첫 번째 재판에서 강제 서약의 내용을 스스로 어기고 책을 냈다는 이유로 유죄 선고를 받게 되었고, 이에 또다시  서약을 하게 됩니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앞으로 이단의 의혹을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말이나 글로 주장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합니다. 

 

갈릴레오는 이렇듯 종교와 사회의 반발에 부딪쳐 코페르니쿠스와 자신의 위대한 발견들을 모두 철회하고 자신의 주장이 이단적임을 참회했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종교재판 당시 갈릴레오의 나이는 이미 69세로 2개월간의 종교재판을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버티기 힘들었으며, 이 두 번째 서약 덕분에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 Eppur si muove)

 

라고 갈릴레오가 재판을 끝내고 나오면서 했다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역사 문헌에는 전혀 기록돼 있지 않은 내용으로 갈릴레오를 영웅으로 만들고 싶은 후대의 예술가들이 지어낸 말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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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반 말데겜 作 <감옥에 갇힌 갈릴레오 갈릴레이>

유진 반 말데겜의 '감옥에 갇힌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그림과 같이 이 내용을 그림에 표현하는 등 후대 예술가들에 의해서 이 말이 계속 쓰이면서 갈릴레오가 재판을 마치고 나오면서 한 말이라며 상황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 있는 말이라고 둔갑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0. 갈릴레오의 마지막

목숨을 부지했던 갈릴레오의 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재판에서 갈릴레오는 남은 평생을 집에 갇혀 지내는 '종신 가택 연금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책 <대화>는 금서로 지정되었고 노령의 나이에 건강마저 완전히 잃고 맙니다.

한쪽 눈의 시력이 이때 완전히 없어졌고 이후 다른 책을 집필하다 나머지 눈마저 실명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1642년 1월 8일, 자택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가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까지 끝까지 지동설을 주장한 데에는 과학자로서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말하려고 하는 과학자의 본분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는지 감히 추측해 봅니다.

갈릴레오 내부에서는 지동설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도 당대 종교계와 사회의 핍박으로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도출해 냈던 모든 지식들을 거부당해야만 했던 그의 고통의 크기가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습니다.

 

<출처: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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