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흥망성쇠
1. 백제 초기 역사
백제는 위대했지만 고구려만큼 넓은 영토를 차지하지 못했고, 신라와 같이 삼국통일을 이룩하며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해서인지 그 위대함에 비해 저평가된 것이 사실입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백제의시조
4세기 근초고왕 때 백제는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요서, 산둥, 남중국(교류), 일본까지 진출하고 심지어는 고구려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까지 죽입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됩니다.
4세기말 5세기 초반 고구려 광고토대왕이 백제를 쳐들어가 백제의 왕에게 무릎을 꿇렸고 이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등장해 백제를 다시 쳐들어와 백제 최초 수도인 오늘날 잠실 부근의 '한성'을 함락하게 됩니다.
이때 백제의 개로왕이 맞아 죽었고, 그의 아들인 문주왕이 금강 쪽으로 피난을 가 웅진성(공주)에 도착합니다.
웅진성은 성 앞으로 금강이 흐르고 삼면이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라 방어하기 좋은 입지여서 고구려 군대가 쉽게 쳐들어오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웅진성에 자리를 잡았지만 힘이 없던 문주왕과 동성왕 등 국왕들이 무시를 당하며 암살당합니다.
6세기 이대로는 안된다고 하며 웅진성에서 다시금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 백제를 중흥으로 이끈 '무령왕'입니다.
2. 백제를 제2의 전성기를 이끈 성왕의 업적(6세기)
2. 1 수도를 웅진성(공주)에서 사비성(부여)으로 천도
백제 제1의 전성기 왕은 근초고왕이었다면 제2의 전성기를 이끈 왕은 제26대 왕 '성왕'입니다.
고려와 조선의 '성종'은 두 분 다 제도와 문물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이룰 성(成)'자를 씁니다.
하지만 백제의 '성왕'은 성스러울 성(聖, 영어로는 Saint) 자를 써, 성스러운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업적을 남겼기에 성스러운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는지 알아보아야겠습니다.
백제는 성종대에 왕권이 강화되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다 보니 엄청난 물자가 몰려들고 인구도 많아져 당시 백제의 수도 공주(웅진성)가 비좁게 느껴집니다.
당시 웅진성의 둘레가 약 2.6Km로 밖에 안 됐는데 수원화성의 둘레가 약 5.7Km, 서울도성(북대문, 서대문, 남대문, 동대문을 연결한 둘레) 전체의 길이 약 18km 인 것과 비교해 보면 그 크기가 짐작되며, 수도로서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서 성왕은 수도를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사비성)로 천도합니다.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유는 수도로서 모든 면에서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① 수성에 유리
사비성 부소상성으로 수도를 옮기는 데 북쪽으로는 금강이 흘러 당시 백제의 주적이었던 고구려를 1차적으로 막을 수 있었고, 지대가 높아 적이 쳐들어왔을 때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며 활을 쏴서 적을 막기에 수월한 위치였습니다.
② 생업에 유리
위로 흐르는 금강 덕분에 식수와 농업용수가 풍부했고 산 아래로는 '호서평야'가 있어 쌀을 수확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량공급에도 유리했습니다.
③ 교역에 유리
금강 따라 죽 내려오면 서해바다로 이어져 중국과 교역이 용이했으며 일본과도 교역에 용이했습니다.
때문에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3박자를 완벽히 갖춘 지리적으로 완벽한 사비성으로 천도했던 것입니다.
2. 2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
부여에서 주몽이 내려와 고구려를 만들었고 주몽의 아들 온조가 또 내려와서 백제를 만들었으니 백제의 뿌리가 고구려였지만, 고구려는 당시 적국이었기 때문에 부여를 계승한 국가라 하여 남쪽에 다시금 부여가 부활하였다고 하여 '남부여'라고 국호를 변경합니다.
2. 3 중앙체계를 22부로 변경, 완성했으며 전국을 5부와 5방으로 나눔
중앙체계를 22부로 변경, 완성했다는 것은 현재의 시스템으로 비유하자면 국방부, 교육부 등 장관 부처를 22부로 변경,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전국을 5부와 5방으로 나누었다는 것은 현재 서울이 서초구, 송파구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과 같이 수도인 사비를 5개의 구로 나누고, 전국을 5개의 도(방)로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성왕은 이렇듯 중앙정치체계, 수도, 행정구역, 정국 행정구역을 나눈 백제를 완전히 체계화시킨 것입니다.
2. 4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을 회복
성왕의 업적 중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바로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을 회복한 것입니다.
성왕 집권 당시 고구려는 제24대 양원왕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이끌었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빼앗긴 한강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신라 진흥왕을 설득합니다.
장수왕 시절부터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고구려 왕권이 약한 틈을 타 함께 고구려를 쳐들어가자고 한 것입니다.
성왕은 백제가 한강 하류를 공격할 것이니 동시에 신라는 한강 상류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고 백제와 신라는 그렇게 협공하여 한강을 다시 차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업적들로 인해 백제를 제2의 전성기로 이끈 성왕은 성스러운 왕으로 칭송된 것입니다.
3. 성왕,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전역을 빼앗기고, 결국 신라를 쳐들어가다 전사하다
3. 1 신라 진흥왕이 배신한 이유에 대한 추측
이때 신라가 차지한 한강상류는 영서지역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대관령, 미시령, 한계령도 있는 태백산맥에 서쪽지역을 영서지역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초여름에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으로 바람이 불어오다가 태백산맥에 한 번 부딪치고 나오며 푄현상(높새바람)이 일어나는 지역입니다.
밀집된 공기 덩어리가 산을 타면서 비를 뿌리고 산을 내려오면서 건조한 바람을 일으켜 가뭄이 생기는 현상으로 영서지방에서는 초여름에 밭작물이 말라죽게 됩니다.
또한 푄현상으로 인해 한여름에는 편서풍이 불어와 태백산택을 넘으면서 엄청난 양의 비를 뿌리며 하계 우리나라에서 강수율 1위를 차지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한 겨울에는 시베리아 기단의 영향으로 바람이 태백산맥을 타고 넘으며 폭설이 내리는 지역이라 과거에는 너무나 척박했던 지역이었습니다.
반면 백제가 차지한 한강상류는 비옥한 김포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식량공급에 용이했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곳으로 이를 통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이 용이했습니다.
고구려를 같이 공격해 한강을 함락했는데 차지 한 땅의 질에서 위와 같이 차이가 나자 진흥왕이 동맹을 깨고 한강하류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모두 차지해 버립니다.
고대사는 사료가 부족해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으나 추정컨대 이러한 이유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처럼 추론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사료를 통해 볼 때 성왕의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방어를 위해 신라가 선공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으며 추측만 할 뿐이지만, 팩트는 신라가 동맹을 깨고 백제를 공격해 한강을 차지했다는 사실입니다.
3. 2 아들 위덕왕을 구하려 참전했으나 전사하다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성왕은 화가 났지만, 주적이 고구려인 상황에서 신라까지 적으로 돌린다면 양쪽에서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위협에 쳐하게 되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553년 10월) 그(위덕왕)가... 고구려 장수와 맞대결을 벌였다. 적을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로, 이를 창끝에 꽂아 들고 돌아와서는 군사들에게 보였다. 그러자 백제군은 사기가 올라, 고구려군을 멀리 쫓아버렸다.
<일본서기>
성왕의 아들 위덕왕은 위의 사례처럼 성격이 불같았고 성왕의 걱정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쳐들어 갑니다.
그런데 위덕왕이 신라군에 포위가 되자 신라와 전쟁을 피했던 성왕은 이 소식을 듣고 아들을 위해 결국 참전을 하게 됩니다.
32년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拘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
그렇게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선왕이 출전하게 되었는데, 신라로 향하는 길에 관성성에서 신라 김무력 장군에게 목이 잘리게 됩니다.
도도(都刀)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들이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9600명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결국 성왕은 성스러운 이름을 남긴 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때 함께 갔던 군사 3만 명도 거의 다 전사하고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했다는 사료가 있기도 합니다.
백제의 완벽한 패배였고 성왕의 죽음으로 사실상 백제는 운이 다하게 되었고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김유신
4. 성왕 죽음 뒷이야기
성왕이 아들 위덕왕을 구하기 위해서 참전하면서 관산성 전투에서 죽고 군사 대부분이 전멸한 상황에서 위덕왕만 살아남게 됩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위덕왕은 왕위를 거부하고 속세를 떠나 스님이 되겠다고 했고, 이에 신하들이 만류하며 '백성 100명을 대신 스님으로 출가시켜 업보를 씻지고 제안합니다.
위덕왕은 신하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반인 100명이 스님이 되었고 그는 27대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위덕왕의 목표는 아버지 성왕을 죽인 신라의 복수를 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대가야를 찾아갔는데, 진흥왕이 대가야를 쳐들어와 함락해 버립니다.
다급했던 위덕왕은 바다 건너 일본에게 도움을 구했으나 일본 또한 신라에 완패를 당하고 맙니다.
이런 와중에 자신의 아들마저 목숨을 잃었고 원통함과 슬픔에 남은 생을 살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5. 정리
백제의 마지막 중흥을 위해 노력했던 의장왕이 성왕의 복수를 위해 힘을 쓰지만 이에 실패하며 힘을 잃어갔고 결국 660년에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의자왕
오늘 이야기를 통해 한 나라에서 정말 잘 나갔을 때의 왕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시밭길 속에서 활로를 찾아 다시 한번 부흥을 도모했던 왕들에게도 우리는 박수를 보내게 되는데 백제에서 그런 대표적인 왕이 바로 성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왕은 수도천도와 국호변경, 중앙과 지방체제 정리, 행정구역 변경 그리고 백제의 숙원이었던 한강유역 회복까지 많은 업적을 남기며 성스러운 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화이불치 검이불루( 儉而不陋 華而不侈)는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백제의 문화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상은 위대한 문화유산과 멋진 역사를 가졌음에도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잊고 있었던 백제의 흥망성쇠였습니다.
<출처: 설쌤TV>
'스터디 위드 돈벌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릴레오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진짜 했을까? (0) | 2024.06.23 |
---|---|
에디슨(EDISON), 위인전에서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발명왕의 이면 (0) | 2024.06.19 |
경종, 생모 장희빈과 이복동생 영조에 가려진 생애 (1) | 2024.06.17 |
임사홍, 연산군의 광기를 점화시킨 희대의 간신 (1) | 2024.06.15 |
백제의 시조와 탄생 과정 (0) | 2024.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