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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연산군의 광기를 점화시킨 희대의 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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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홍, 연산군의 광기를 점화시킨 희대의 간신

1. 임사홍, 뛰어난 능력과 집안 배경으로 조정에 진출하다

 

17살의 어린 임사홍은 전국에서 난다긴다하는 유생들과 학문을 겨뤄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자랑하며, 이른바 소년등과로 화려하게 관직에 나섭니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한 임사홍에게 우리가 알지 못한 숨은 배경이 숨어져 있습니다.

사실 임사홍이 과거 합격전에 세조 대에 이미 '사재감 사정(司宰監 司正)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사재감'은 조선시대 궁중의 어류, 육류, 장작 등 진상품에 대한 일을 맡던 관청으로 그 중 '사정'은 정7품 관직이었습니다.

이것은 음서(蔭敍)라고 하는 제도 덕분인데 음서는 공신이나 전, 현직 고위 관리의 자제를 과거 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고위 공무원의 자제들을 시험없이 공무원으로 특별 채용해 주는 셈인 것입니다.

임사홍이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는 말은 그의 능력만큼이나 좋았던 든든한 집안 배경이 있었다는 것인데 사실 임사홍이 태어난 풍천 임씨 집안은 양반가였지만 대단한 명문가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풍천 임씨 집안을 일으킨 것은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인데, 그는 당시 왕이었던 세조의 총애를 받고 조정에서 승승장구하며 집안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2. 임사홍, 성종의 젊은 스승이 되다 

그리고 이때 임원준을 눈여겨 보던 한 사람 떄문에 임사홍은 인생이 뒤바뀌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의 차남이자 세조의 삼촌인 효령대군의 손녀사위로 임사홍이 낙점된 것입니다.

임원준의 출중한 능력을 지켜보던 효령대군이 그의 맞아들인 임사홍 역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것을 보고 자기 손녀의 베풀로 점찍은 것입니다.

효령대군의 손녀사위가 되면서 평범한 양반에서 왕실 유력 가문의 일원이 된것으로, 임사홍은 큰 꿈을 펼칠 기회를 갑게 됩니다.

이런 임사홍은 겨우 사재감 사정정도의 자리에 만족할 수 없었고 이미 관직을 받은 상태에서 과거를 치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음서로 얻은 관직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임사홍은 더 큰 꿈과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겠다는 목표가 있었고, 그 꿈이 허황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17세의 나이에 과거시험에 3등으로 당당히 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임사홍이 조정에 진출한 지 불과 2년이 지난 1498년 조선의 제 7대 왕 세조가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제 8대 왕 예종도 재위 1년 3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 조선 9대 왕 성종이 즉위하면서 22살 임사홍의 보직도 바뀌게 됩니다.

 

밤에 경영관 임사홍 등을 불러 국조보감(역대 왕의 업적을 모은 역사서)을 강하게 했다
<성종실록>

 

경연은 왕이 신하와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는 일종의 제왕 수업이었는데, 22살의 임사홍이 14살의 어린 왕 성종의 스승이 된 것입니다.

성종은 세자 책봉도 받지 못한 채 12살에 왕이 된 이례적인 사례로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조정이 선택한 방법이 어린 성종을 대신해 세조의 부인이며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가 정사를 도맡았던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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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이때 할머니 치마폭에 둘어싸여 안주하지 않았고, 언젠가 자신이 직접 정사를 돌볼 날을 기다리며 밤낮으로 학문에 힘습니다.

이때 어린 왕 성종 곁에 함꼐 성장하는 젊은 관리 임사홍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종 곁에서 신뢰하고 아끼는 측근세력이었던 임사홍은 빛나는 탄탄대로의 미래가 보장된 듯 보였습니다.

3. 임사홍, 공주 며느리를 보며 또 한번 신분 상승을 이루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성종이 즉위한 지 7년 후인 1476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마침내 성종이 친정(親定)을 하게 됩니다.

성종은 '언관(言官)'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언관은 국정에 대한 의견을 내고 왕과 관료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언론 담당 관직입니다.

드라마에 흔히 볼 수 있는 '아니되옵니다 전하!'를 외치는 신하들이 대부분 언관들이었습니다.

성종은 언관의 영향력을 키워 힘센 조정 대신들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27살의 임사홍은 언관을 거쳐 고위직으로 향하는 지름길에 오르는 중이었습니다.

임사홍의 아들들
임사홍의 아들들
임사홍 가계도
임사홍 가계도
임사홍 가계도
임사홍 가계도

엘리트 관리로 승승장구하던 임사홍에게 더한 경사가 찾아왔는데, 임사홍의 장남 임광재가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혼인을 해 왕가와 사돈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 뿐 아니라 며느리 까지 왕실 사람을 들이며 임사홍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뿐 아니라 출세에 힘이 되어주는 탄탄한 집안 배경 덕을 보게 됩니다.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에서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의 시아버지로 또 한번 승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이때쯤부터 임사홍은 조정 관료 중 가장 높은 자리인 '재상 자리는 따 놓은 당상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4. 조정 신료들, 임사홍의 안하무인 행태에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다

성종 6년 1475년 10월 어느 날, 왕의 말과 명령을 문서화하는 예문관이라는 관청에 '최한정'이라는 한 관리가 추천을 받아 임용이 됩니다.

그런데 성종과 신하들이 토론하는 경연 자리에서 임사홍이 최한정을 예문관으로 임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나이가 50이 지나고 본래의 학문이 없으니 제 비록 이업(학업을 익히다)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성종실록>

 

한마디로 최한정이 나이가 50이 넘어 늙은데다 학문도 부족한데 이제와 학문을 익힌다고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는 이유였습니다.

이때 겨우 26살의 젊은 관리였던 임사홍이 나이가 두 배나 많은 관리를 모욕했 던 것입니다.

임사홍의 비난을 받은 최한정은 얼마 후 성종을 찾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임사홍이 소신을 헐뜯었는데 제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직을 청합니다

 

이렇듯 임사홍은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위 아래 상관없이 거침없이 상대방을 물어뜯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조정 신료들은 안하무인으로 구는 임사홍의 오만한 행태가 눈에 가시처럼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5. 임사홍, 승지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해 성종의 눈밖에 나기 시작하다

승승장구하며 제 잘난 맛에 살던 임사홍의 앞날에 적신호가 켜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때는 1476년 성종이 친정을 시작한 첫해 단오제 날이었습니다.

퓽작을 기원하며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올렸는데, 제사를 마친 성종이  

 

선왕인 예종께 승지 임사홍이 마땅히 첫 잔을 올려야 하는데 어쨰서 부른 뒤에야 온단 말인가?

 

당시 임사홍은 국가의 큰 행사와 궁궐의 의례를 담당하는 예방승지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예방승지였던 임사홍은 선왕 예종의 영전 앞에 첫  술잔을 올리는 역할을 맡았는데 준비를 철저히 하기는 커녕 왕이 부르기 전까지 자기 임무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종이 자신을 부르니 뒤늦게 자신의 임무를 알아차리는 일이 벌어진 것인데, 아무리 안하무인 임사홍이지만 상대는 조선의 만인지상인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성종은 불편함을 드러내며 에둘러 질책할 뿐이었습니다.

 

주상께 그대는 마땅히 죄인으로서 벌을 청하시게!

 

이때 또 다른 승지가 나서 임사홍에게 이 일을 그냥 넘어가려 하지 말고 성종에게 사죄해 노여움을 풀라고 조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료의 조언을 들은 임사홍은 조금의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질책을 받았는데 또다시 벌을 청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말을 들은 동료승지는 '어쨰서 그렇게 거만하게 말하느냐!' 며 벌쩍 뛰었고 임사홍이 성종에게 직접 벌을 청하지 않는다면 조정 신료들이 성종에게 요청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결국 임사홍은 내키지 않는 티를 팍팍 내면서 할 수 없이 성종에게 죄를 청했다고 합니다.

 

종친의 사위이자 선왕과는 사돈 관계였던 임사홍은 성종이 챙겨야할 집안식구이기도 해, 불편한 속내야 어찌 되었든 성종은 임사홍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눈감아 주었던 것입니다.

 

주상 또한 나를 어찌 못하는데 조정에서 날 막을 자가 누구냐!

 

이러한 성종의 배려에 임사홍은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었고 건방짐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6. 임사홍, 중전 윤씨의 폐위를 반대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477년 성종은 추상같은 목소리로 명합니다.

 

오늘 중전이 출궁할 모든 준비를 갖추어라!

 

 

성종이 부인인 중전 윤씨를 궁 밖으로 쫒아내겠따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중전의 폐위를 명령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성종의 폐비 명령에 순식간에 얼어붙은 조정 분위기를 꺠고 임사홍이 앞장서서 중전의 폐위를 반대합니다.

이때 우승지였던 임사홍을 비롯해 다른 승지들도 중전 윤씨의 폐위를 반대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중전 윤씨의 폐위 명분이 불분명해 신하들도 그 사유를 잘 알지 못했던 상태였으며, 이에 조정 신료들은 훗날 연산군이 되는 원자의 생모가 폐위되었을 때 벌어질 후폭풍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사홍은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폐위에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상황에서 중전 윤씨의 폐위 논의는 중전 중씨가 별궁에서 근신하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이때는 결국 중전 윤씨의 폐위 논의가 중단된 것입니다.

성종에게 정면으로 맞서 반대의견을 내놓을 정도로 임사홍의 자신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있었던 떄였습니다.

7. 조정신료들 왕에게 아첨을 일삼는 임사홍을 '소인'이라고 부르다

그리고 1 년 후인 1478년 성종은 임사홍에게 한 가지 어명을 내리게 됩니다.

 

임사홍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삼았다

 

29세의 임사홍이 정3품 도승지가 되어 조선 권력의 중심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입니다.

그런데 임사홍이 도승지를 맡은 지 약 2주 뒤, 이 무렵 조선에는 흙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이런 천재지변이 있을 경우 왕은 자신이 국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하면서 반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반성의 의미로 금주령을 내리거나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때 도승지 임사홍이 위엄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흙비도 떄의 운수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인데 어찌 재이(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성종실록>

 

 

임사홍은 흙비도 자연 현상의 일부라 내일 때가 되어 내린 것인데 어찌 불길한 징조라 하는 것이냐며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임사홍 입장에서는 성종의 편을 들어준다는 의미기도했지만, 한편 권력을 독점하고 싶었던 임사홍이 성종이 자꾸 젊은 언관들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아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언관들은 그저 임사홍에게는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데 걸림돌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임사홍이 이런 식으로 왕과 신하들의 소통을 막고 있었던 이때, 임사홍의 이런 행태가 못마땅했던 조정 신료들은 대동단결하며 임사홍을 이렇게 부릅니다.

 

소인(小人)

 

'군자'란 행실이 젊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데, '군자'가 도덕을 추구하면서 그들이 지향하는 성인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해당한다면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을 일컫는 '소인'은 정반대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유교가 진리인 조선에서 '소인'이란 선비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모욕이었습니다.

조정 신료들은 왕에게 아첨하는 임사홍을 소인이라며 총공세를 펼치며, 소인 임사홍을 처벌하라고 요청했는데 이에 성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도 어질다고 말할 순 없다!
그대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줄 아는가?

 

성종은 임사홍의 발언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임사홍을 소인으로 낙인찍으려는 조정신료들 역시 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8. 임사홍, 붕당조성죄로 유배형에 처해지다

임사홍이 흙비 논쟁이 일어난 지 8일이 지난 1478년 4월 29일, 성종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임사홍을 당장 의금부로 끌고가라는 명을 내립니다.

'현석규'라는 인물때문이었습니다.

현석규 역시 임사홍과 같이 언관직을 거친 엘리트 관료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성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임사홍이 승지일때 현석류는 승지의 수장인 도승지였기 때문에 한때 현석류는 임사홍의 선임이었던 것입니다.

때는 1년 전, 도승지였던 현석규와 승지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데, 이때 화를 참지 못한 현석규가 상대방인 승지에게 '너' 라고 부르면서 욕을 한 것입니다.

예의를 갖추어서 상대를 대하는것을 중시하는 관료들에게 아무리 승지들의 수장이라고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은 무례함으로 비쳐 심각한 문제에 해당했고, 그래서 승지들은 현석규의 태도를 문제삼아 그의 처분을 요청했고 결국 체통을 잃은 도승지 현석규에 대한 언관 직책의 탄핵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현석규를 끌어내리기 위해 탄핵을 주동한 인물이 임사홍이었고, 그는 자신의 신분인 언관까지 동원해서 키웠다는 사실이 1년이 지난 시점에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성종은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고, 얼마 후 임사홍은 

붕당조성죄(朋黨造成罪)

 

를 뒤집어 쓰고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임사홍이 붕당을 이루려고 한 죄를 지었다는 것인데, 이 죄는 흙비 사건이후로 임사홍을 소인이라고 부르던 조정 신료들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형률은 대명률(大明律)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붕당을 만든 죄인의 가산을 몰수하고 당사자들은 참형에 처하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종은 왕실 사람이었던 임사홍의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명합니다.

그렇게 성종은 임사홍을 평안도 의주로 유배보내면서 사건을 마무리 짖게 됩니다.

감형을 받은 임사홍을 보면서 조정신료들은 소인 임사홍에게 뒷배마저 있으니 지금보다 큰 일을 저지를 자가 확실하니, 절대 조정에 돌아오게 해서는안 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9. 임사홍, 조정 신료들의 맹렬한 반대로 조정 복귀가 번번히 무산되다

임사홍이 조정에서 쫒겨난 지 8년째 되던 1486년, 성종은 어명을 내립니다.

임사홍의(...) 직첩을 도로 주라
<성종실록>

 

직첩이란 신료가 관직을 하사받을 떄 받는 임명장으로 성종이 직첩을 돌려줬다는 것은 임사홍의 벼슬을 다시 회복시켜 조정에 부르겠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에 조정신료들은 임사홍은 목숨을 보전한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이제 또 직접을 돌려받았다며, 성종에게 임사홍이라는 악을 징계하라며 호소합니다.

조정 신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임사홍의 조정 복귀를 반대하고 나선것입니다.

하지만 성종 역시 쉽사리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고, 이에 조정신료들은 성종에게 초강수를 둡니다.

성종의 뜻을 꺽지 못했는데 뻔뻔스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부끄럽다며 사직을 청하면서 임사홍의 복귀를 결사반대합니다.

그렇게 성종과 신료들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결국 조정신료들의 승리로 끝나며, 임사홍의 조정 복귀는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임사홍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권력에서 물러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후로도 성종은 임사홍을 재등용하겠다는 의사를 여러차례 밝혔지만, 그럴때마다 조정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쳐 번번히 실패하고 맙니다.

이런 와중에 전도유망했던 29살 청년에서 어느덧 47살이 되어 버립니다.

 

1496년 7월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임사홍에게 또 한번 어명이 내려옵니다.

 

임사홍(...)에게 각각 한 자급씩 올려주라
<연산군일기>

 

임사홍은 피의 군주 조선 10대 왕 연산군을 만들어 낸 간신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면서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연산군이 새로운 왕으로 즉위를 하면서 어명을 내린 것입니다.

즉위 초반 연산군이 일종에 공신 우대 차원에서 공신 집안 적장자들의 품계를 올리는 과정에서 임사홍이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선왕(성종)께서는 임사홍에게 다시 일을 맡기지도 않고, 품계도 올려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정 신료들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조차 임사홍을 다시는 등용하지 않았다면서 임사홍의 품계를 올리라는 연산군의 어명에 맹렬히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렇게 시작된 연산군과 조정신료들의 논쟁은 자그만치 1년이나 지속됩니다.

그 사이 임사홍에서 품계를 올려주어서는 안된다는 조정 신료들이 사직을 청한 것만 무려 70여 회에 달했습니다.

결국 조정 신료들의 지독한 반대에 연산군은 임사홍의 품계를 도로 회수하라고 명합니다.

임사홍이 결국 1년여의 희망고문 끝에 받았던 품계를 다시 뺏기는 치욕을 당한 것입니다.

임사홍은 이때 당한 치욕을 반드시 되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을 터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연산군1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1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1(연산군과 장녹수의 만남) 1. 흥청망청 연산군의 기생을 향한 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연산군은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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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연산군와 각별했던 4남 임숭재, 아버지 임사홍의 구명 상소를 올리다

그러던 1500년 8월, 연산군에게 의문의 상소문 하나가 올라옵니다.

천도는 10년이 되면 변하고 나쁜 짓 한 사람도 10년이 되면 반드시 선에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어째서 한 말의 실수로써 한 평생의 결점으로 삼으려 하십니까
<연산군일기>

 

바로 22년째 과거의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임사홍의 구명 상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소인으로 낙인찍힌 뒤 20여 년이 지나도록 조정의 공동의 적이었던 임사홍을 위해 이런 구명 상소를 올린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임사홍의 4형제 중 막내아들인 임숭재였습니다.

임숭재가 당돌하게 아버지의 구명 상소를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임사홍의 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임사홍의 맡아들 임광재가 예종의 사위이고, 막내아들 4남 임숭재 역시 성종의 딸인 휘숙옹주와 혼인하여 성종의 사위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임사홍이 정치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왕가의 사위가 돼 겹사돈이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임숭재가 연산군에게 대놓고 상소를 올릴 수 있었던 또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숭재는 노래와 춤이 능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혹 노래도 하고, 혹 춤도 추고, 혹 활도 쏘고, 혹 말도 달리는데 날마다 숭재와 짝이 되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은 궁을 빠져나와 임숭재의 집에 자주 놀러 갈 정도로 연산군과 임숭재는 각별했던 사이였습니다.

심지어 연산군은 임숭재의 집까지 편하게 왔다갔다 하기 위해서 궁궐과 임숭재 집 사이에 있는 민가를 무려 40채나 헐어버리고는 궁궐과 임숭재 집 사이에 담을 쌓아 지름길을 만들었습니다.

연산군과 임숭재는 매부와 형님 사이를 넘어서 둘도 없는 영혼의 단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 임숭재가 연산군에게 큰 총애를 받는 모습을 보고 연산군과 임숭재의 친분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조정에 복귀할 기회만 노렸 던 것입니다.

11. 임사홍, 아들 임숭재와 무오사화로 신하들의 힘이 약해 진 틈에 조정에 복귀하다

하지만 임숭재가 아무리 연산군과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조정에는 임사홍의 복귀를 반대하는 신료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성종대에 커진 조정 신료들의 힘이 세조를 비방하는 사초가 발견되면서 벌어진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크게 위축되면서 사사건건 임사홍의 복귀를 막았던 목소리 역시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503년 마침내 임사홍은 자신을 관직에 다시 등용하도록 하라는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어명을 받게 됩니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아들 임숭재 덕에 임사홍은 54세에 조정에 복귀하게 된 것입니다.

조정에서 내쳐진 지 무려 2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임사홍은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복귀했지만 조정 신료들의 반대로 아직 실질적인 권력을 얻지는 못하며 여전히 권력의 외곽을 떠돌며 조정 신료들로부터 소인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었습니다.

12. 임사홍,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사연을 고하며 '갑자사화'의 원흉이 되다

임사홍은 더 큰 권력과 처절한 복수를 위한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설 일생일대의 전략을 준비합니다.

1504년 3월 19일 밤, 여느때처럼 연산군은 임숭재의 집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기분좋게 술잔을 주고 받으며 한껏 흥이 오른 그때 술자리에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임사홍이었습니다.

임사홍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연산군앞에 엎드리더니 목놓아 울기 시작합니다.

전하, 폐비의 일이 애통하고 애통하옵니다.

 

임사홍의 말을 들은 연산군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는데, 임사홍이 말한 폐비의 정체가  다름아닌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 였던 것입니다.

(성종의 후궁) 엄 숙의와 정 소용이 전하의 모후를 중상모략해 폐비하게 됐나이다!

 

연산군의 어머니가 성종 후궁들의 모함으로 폐위되었고, 사약을 받아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연산군은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 궁궐로 향했고, 이떄부터 연산군의 광기를 드러내며 피의 복수를 시작합니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중상모략한 성종의 후궁들을 떄려 죽였고, 그녀들의 시신으로 젖갈을 담궈 버리는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심지어 폐비 윤씨의 폐위에 동조하거나 방관한 조정 신료들까지 하나 둘 죽여 나갑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악의 사화 '갑자사화(甲子士禍)'입니다.

이떄 죽거나 유배당한 이들만 무려 200여명에 달했으며, 연산군은 관계자 중 이미 죽은자들의 경우 관에서 죽은 자의 목을 잘라 효수하는 무관참시까지 일삼았습니다.

조선을 피로 물들인 갑자사화의 원흉이 바로 임사홍이었던 것입니다.

임사홍은 이렇게 연산군의 광기를 폭발시켜 갑자사화를 일으킨 주범인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갑자 이후로는 앞서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였다
<중종실록>

 

임사홍이 지난 25년 간 자신을 소인이라고 낙인찍고 조정 복귀를 끝까지 막아왔던 조정 신료들에게 갑자사화를 통해 복수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사화이후 조정에는 왕에게 바른 말을 올릴 신료들이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13. 임사홍, 아들 임희재의 능지처사날에도 연회를 베푸는 냉혈안의 모습을 보이다

덕분에 임사홍은 그토록 염원하던 것을 손아귀에 넣게 됩니다.

 

임사홍을 병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연산군일기>

 

성종대에 정3품 도승지에서 물러나야 했던 임사홍이 연산군대에 단숨에 정2품 병조판서로 화려하게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임사홍이 병조 판서에 임명된 지 고작 5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연산군이 읽은 어떤 시 한 편 떄문이었습니다.

요, 순(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성군)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연려실기술>


이 시는 진시황이 외부의 적 오랑캐를 잡기위해 백성을 괴롭히며 만리장성을 쌓고 있지만, 정작 그의 폭정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면서 폭군 진시황을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읽다보면 한 사람이 떠올랐으니, 사실 이 시는 진시황에 빗대 연산군을 신랄하게 욕하는 시였던 것입니다.

대체 이 시는 왜 임사홍에게 위기가 되었을까요?

임사홍의 네 아들 중 차남 임희재가 이 시의 주인공이었고, 이 시를 읽고 분노한 연산군은 길길이 날뛰고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때 연산군은 임사홍에게 섬뜩한 질문을 던집니다.

임희재가 불경해 내가 죽이려 하는데 그대의 뜻은 어떤가?

 

그러자 임사홍이 말하기를

소신의 아들은 원래부터 성품과 행실이 불순했습니다

 

<해동야언>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가까스로 얻은 권력을 잃을까 두려웠던 임사홍은 이를 지키기 위해 아들의 행동이 원래 불순했으니 연산군의 뜻대로 처벌하라고 고한 것입니다.

농지처사에 처해진 임희재
농지처사에 처해진 임희재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임희재는 몸을 여러 갈래로 찢는 극형인 능지처사에 처해집니다.

 

아들 임희재가 피살되던 날에도 평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렸다

 

임사홍은 아들 임희재가 처참하게 처형되던 날에도 평일과 다름없이 연회를 즐겼던 것인데, 이날 벌어진 일은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임사홍은 이렇듯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핏줄조차도 끊어낼 수 있는 냉혈한(冷血漢) 이었던 것입니다.

임사홍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임희재를 평소부터 못마땅하게 여겼었는데, 임희재가 처형 된 날 연산군이 사람을 보내 임사홍을 지켜본 결과 아들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아들에 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취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14. 임사홍, '금표'(禁標)설치를 진두지휘하다

임사홍과 손잡고 조정 신료들을 숙청해 절대 권력을 손에 넣은 연산군은 극악무도한 행태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폭군 연산군 대에 벌어진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가 바로 금표였는데, 금표는 백성들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로 한양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일대에 사냥하기 좋은 장소를 골라 금표를 세우고 민가를 쓸어버리고 그 땅에 짐승을 풀어놓고 사냥터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도성 사방 100리(약 40km) 안 곳곳에 금표가 세워졌고,  혹시라도 금표 안에 잘못 들어갈 경우  사형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금표 설치에 앞장서서 진두지휘했던 인물 또한 임사홍이었습니다.

사냥을 좋아하는 연산군을 위해 임사홍은 백성들의 집과 논밥을 빼앗고 삶의 터전에서 쫒아내버립니다.

하루아침에 갈곳을 잃고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의 시신들이 길가에 즐비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참혹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 임사홍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독차지하고 있지는 못하는 상황이었고, 연산군의 곁에서 권력을 누리는 또 다른 간실들이 있었기 떄문에 그들과 충성 경쟁 속에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했기 떄문에 적극적으로 이런 일에 나선것입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유흥거리를 제공하며 연산군의 환심을 사서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에 머물며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었던  욕망에서 비롯한 행동들이었던 것입니다.

15. 임사홍, 채홍사로 임명되어 연산군에게 바칠 여인을 바치는일을 하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또 다른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사대부의 첩 및 양가의 아내와 딸(...) 창기 등을 샅샅이 수색하게 하였다

 

전국방방곡곡에서 미녀들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이때 생겨난 관직이 수집한다는 뜻의 캘 채, 여자를 뜻하는 붉을 홍자를 써서  '채홍사'라고 불렸으며, 왕에게 바칠 여성을 선발하는 관리였습니다.

연산군은 새로 만든 특별 직책인 채홍사에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를 비롯한 조정 신료들을 임명합니다.

그 주에서도 임사홍 부자는 악명이 높을 정도로 집요하게 여인들을 선발했고, 백성들은 그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까무라치듯 놀랐다고 합니다.

춤과 노래가 뛰어났던 기생 뿐 아니라 금이야 옥이야 키운 백성들의 딸부터 이미 혼인을 한 유부녀까지 가무와 미모가 뛰어난 여자라면 모두 징발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임사홍 부자의 집요함 때문이었는지 연산군 말기에는 채홍사가 전국에서 뽑혀 궁궐로 모아온 여인들이 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임사홍 부자에 대한 실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작은 소인 숭재, 큰 소인 사홍이여!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중종실록>

 

임사홍 부자를 천년에 다시없을 간사하고 극악한 간신이라고 욕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안의 사탕처럼 연산군의 비위 맞추기에 열중했고, 세간의 비난을 견딘 대가로 달콤한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연산군은 임사홍 부자를 특별대우하면서 온갖 재물을 하사했으며, 특히 임사홍에게는 넓을 활에 치열을 뜻하는 치자를 써서 활치(闊齒)옹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줍니다.

연산군은 치아 사이가 넓게 벌어진 임사홍에게 별명을 지어주며 친근함을 표현했던 것입니다.

16. 임사홍, 중종반정으로 반정군에 무참히 살해당하다

막강한 권력을 쥔 지 약 1년 후, 갑작스럽게 정치적 파트너인 든든한 지원군 아들 임숭재가 사망한 것인데 임숭재는 죽으면서 이러한 유언을 남기기까지 합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전하께 더 많은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한이옵니다

 

 

임사홍은 아들이 죽은 후에도 높은 권력을 갖기 위한 노력을 더욱 이어갑니다.

그 결과 정 2품 이조판서에 임명 된지 불과 3개월만에 삼정승 바로 아래 좌참찬으로 초고속 승진을 합니다.

임사홍은 날개를 단 듯 조정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했고, 임사홍에게 남은 것은 이제 왕 바로 아래 정승뿐이었습니다.

1506년 9월 2일,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 여느 때처럼 집에서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던 임사홍은 누군가 거세게 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꺴고 연산군의 호출로 급히 궁궐로 향하기 위해 방문 밖으로 나섭니다.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 순간, 칼을 든 10여 명의 군사들이 임사홍의 집에 들이닥쳤고 임사홍은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거들의 칼에 찔리고 맙니다.

임사홍은 늦은 밤 갑작스럽게 살해를 당한 것입니다.

연산군의 폭압에 견디지 못한 조정 신료들이 폭압을 멈추기 위해 '반정'울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폭군 연산군보다 먼저 찾아갔던 인물이 당대 최고의 간신으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었던 임사홍이었던 것입니다.

연산군 곁에서 권력을 차지한 폭군의 수족 임사홍은 반정군이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인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반정군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 임사홍은 당대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큼의 드높은 위세를 자랑했지만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연산군2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2(갑자사화부터 죽음까지)

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2(갑자사화부터 이병정 사건까지) 5. 갑자사화의 계기,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 씨의 죽음 장녹수가 입궁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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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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