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터디 위드 돈벌러

경종, 생모 장희빈과 이복동생 영조에 가려진 생애

반응형

경종, 생모 장희빈과 이복동생 영조에 가려진 생애 

1. 경종, 태어난 지 100일도 안돼 원자의 자리에 오르고 그 덕을 보고 친모인 장희빈도 중전자리를 꿰차다

지금 새로 태어난 왕자(경종)를 원자로서 명호를 정하려 한다
<숙종실록>

 

경종은 태어난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원자로 책봉됩니다.

원자책봉 당시 장희빈은 후궁이었고 숙종에게는 왕비인 인현왕후가 있었던 상태였기 파격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전 인현왕후는 23세로 언제든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후궁 소생의 아들을 태어나자마자 후계자로 책봉한 것으로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종이 원자로 책봉되고 4개월이 지날 무렵의 어느 날, 중전 인현왕후가 혼인한 지 8년 만에 폐비가 되어 궁궐밖으로 쫓겨납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내쫓기 위해 무려 3년 전인 1689년의 일을 들춰냅니다.

인현왕후가 3년 전 어느 날 숙종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꿈에 선왕과 선대비가 나와서 장희빈에게 아들 복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장희빈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사람이니 나라에 좋은 사람이 아니라며 장희빈의 흉을 봤다는 것입니다.

인현왕후의 꿈과는 달리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고, 중전이 그런 꿈을 꿨던 이유를 왕의 총애를 받는 장희빈을 오랫동안 질투했다며 인현왕후를 궁밖으로 내쫓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폐비되면서 중전의 자리는 공석이 되었는데, 다음으로 중전자리에 다름 아닌 장희빈이 앉게 됩니다.

인현왕후가 궁에서 쫓겨나고 단 4일 만에 경종의 친모 장희빈은 새로운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아들 경종 덕에 장희빈 역시 중전의 자리까지 꿰차며 신분이 급상승하게 됩니다.

경종은 태어난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조선왕실의 대를 이을 원자로 책봉된데 이어 조정 진료들이 아직은 세자로 책봉하기 너무 이르다며 반대했지만 숙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3살이 되던 1690년 세자로 책봉되기까지 합니다.

경종은 숙종의 총애 아래 훗날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었던 것입니다.

2. 장희빈,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세력이 약해지다

그런데 경종이 7살이 되던 1694년,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어명을 내립니다.

중전 장 씨의 옥보(중전의 상징인 옥으로 만든 도장)를 부수고 타고 다니던 가마를 불태우라!

 

경종의 아버지 숙종이 장희빈을 다시 후궁으로 강등시킨 것입니다.

숙종代 붕당구도
숙종代 붕당구도

당시 조정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장희빈이 중전이 되면서 남인의 세력이 너무 커져 숙종은 환국을 통해서 다시 남인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1694년 갑술년에 집권 세력을 뒤바꾼 사건이라 하여 갑술환국이라고 합니다.

감술환국 이후 장희빈을 주축으로 한 남인 세력이 줄어든 반면 인현왕후를 주축으로 한 서인세력이 다시금 힘을 얻게 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장희빈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 일개 궁녀에서 중전이 된 장희빈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 일개 궁녀에서 중전이 된 장희빈 1. 숙종, 궁녀 장희빈에 빠지다 1686년, 궁궐에 호통소리가 쩌렁쩌렁 울립니다. 왕이 한 신하를 잡아 가두라는 매서운 어명을 내립니다. 이

donbuller.tistory.com

3. 경종, 인현왕후의 아들로 입적되다 

친모 장희빈의 달라진 위치만큼 경종의 위치 또한 180도 뒤바뀌고 맙니다.

환국을 통해 궁밖으로 쫓겨났던 인현왕후는 다시 중전으로 복권되어 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원래 후궁 소생의 원자와 세자는 중전의 아들로 입적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은 법적으로 인현왕후의 아들이 됩니다.

경종은 친모인 장희빈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아침에 어머니가 뒤바뀐 것입니다.

사이좋았던 아버지 숙종과 어머니 장희빈 사이가 달라진 모습을 지켜보며 어린 경종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종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5년 만에 궁으로 돌아온 새어머니 인현왕후에게 인사를 올리러 가야만 했습니다.

인현왕후를 섬기시매 자애와 효도에 틈이 없었다
<경종실록>

 

혼란스러웠을 테지만 어린 나이였지만 총명했던 세자 경종은 새어머니 인현왕후에게 세자로서 예를 다했는데, 이렇게 해야만 아버지 숙종이 흡족해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총명하게 상황에 대처한 것입니다.

왕세자를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져 사랑하였다
<숙종실록>

 

인현왕후 또한 당시 7살인 어린 세자가 자신에게 예를 다하는 모습이 기특해서일까 세자 경종을 자신이 낳은 아들처럼 대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경종의 친모 장희빈은 경종의 친모가 자신이니 인현왕후에게 절을 받아야겠다고 소란을 피웁니다.

궁지에 몰린 장희빈에게 믿을 구석이라고는 자신의 배에서 나온 왕실의 핏줄인 경종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친모 장희빈의 난동에 경종은 하루하루 피 말리고 막막한 나날을 보냈을 터입니다.

4. 경종, 연잉군에게 세자자리를 위협받다

이맘때쯤 조선 조정에서 세자 경종을 위협하는 뜻밖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은 연잉군이 어떻습니까?

 

숙종 가계도
숙종 가계도

숙종의 새로운 후궁 숙빈최 씨가 낳은 아들로 경종보다 6살 어린 이복동생이었던 연잉군이 경종의 세자자리에서 위협했던 것입니다.

왕실에 또 다른 왕자가 태어나면서 세자 자리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후계자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싸운 두 파를 연잉군을 지지하는 세력인 '노론'과 경종을 지지하는 세력인 '소론'이라고 부릅니다.

서인에서 나뉜 노론, 소론
서인에서 나뉜 노론, 소론

노론과 소론의 뿌리는 서인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갑술환국 이후 장희빈을 지지하던 남인 세력은 크게 힘을 잃었고 인현왕후를 지지하던 서인이 조정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 서인세력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노론입장에서 숙종은 한번 마음을 빼앗기면 무엇이든 다 내어줄 것 같다가도 또 마음이 식으면 불같은 성격으로 내치는 성격이었고, 이런 숙종의 성격이라면 세자를 언제든 단숨에 바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노론은 일찌감치 연잉군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입니다.

반면 소론은 정통성을 가진 세자를 입맛에 따라 바꾸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조정은 연잉군의 편을 드는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몰아내고자 호시탐탐 약점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5. 장희빈,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를 물어 사사당하다 

경종의 불안감이 커져가던 1701년 8월 어느 날, 조정을 슬픔에 빠지게 하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왕비 민 씨(인현왕후)가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숙종실록>

 

경종의 새어머니 중전 인현왕후가 3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때 경종의 나이는 14살이었고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주던 새어머니 인현왕후의 죽음에 무척이나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사망하고 한 달 뒤, 경종의 친모 장희빈의 처소 병풍 뒤에서 날카로운 화살에 꿰뚫린 처참한 상태의 초상화가 발견되면서 궁궐이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경종은 친모 장희빈이 저주를 내려 인현왕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로 경종은 다시금 친모의 행동에 발을 구르며 불안에 떨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701년 10월, 숙종은 경종의 친모 장희빈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을 내립니다.

인현왕후 전 기록에 따르면 장희빈은 자진하라는 숙종의 명을 전하러 온 궁녀에게 이렇게 말하며 완강히 거부했다고 합니다.

민 씨(인현왕후)가 명이 짧아 죽은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들이 나를 죽이고 훗날 세자에게 살기를 바랄쏘냐?
<인현왕후 전>

 

이렇듯 장희빈은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세자 경종은 궁문 앞에 거적을 깔고 납작 엎드려 '제발 어머니를 살려주시옵소서!'라고 울부짖습니다.

하지만 세자 경종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자 경종이 어머니 장희빈을 살리기 위해 작심한 덧글을 올립니다.

신의 어머니가 그릇된 일을 하는데 신이 알지 못할 리 없으니 함께 죽기를 청합니다
<당의통략>

 

경종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져 막아보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1701년 10월 10일 장희빈은 끝내 사사되고 맙니다.

6. 경종,  장희빈의 죽음과 숙종의 꾸짖음에 심신이 쇠약해져만 가다

14살 경종은 아버지 숙종이 어머니 장희빈을 죽게 만든 비극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만 것입니다.

경종의 설움은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세자가 조금이라도 주상의 뜻에 어긋나면 문득 장 씨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누구의 자식인데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면서 반드시 성난 목소리로 엄치 꾸짖었다
<단암만록>

 

숙종은 경종이 조금만 잘못을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행동을 하면 경종에게  '누굴 닮아서 저 모양인고!'라고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고 합니다.

경종은 어머니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세자로서 아무런 힘이 없는 자각 하면서 씁쓸한 마음을 삼켜야만 했습니다.

이 무렵 경종이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세자가 어머니의 변고를 당한 뒤부터는 근심하고 조심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더니 잠을 자는 것도 처음과 같지 못했다
<당의통략>

 

또한 야사인 <대사편년>에 따르면 장희빈이 사망한 뒤 경종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고 합니다.

벽을 보며 혼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대화하거나 한밤에 궁궐을 배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자의 자리는 위협을 받고 자신을 지켜주던 친모 장희빈이 사사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며 경종은 심신이 쇠약해져만 갔습니다.

7. 경종, 몸을 낮추며 대리청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경종이 30살이 된 1717년 7월 19일,  경종을 쫓아내고 연잉군을 세자로 세우려 한 노론의 우두머리 '이이명'이  숙종과 독대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옵니다.

숙종이 이이명과 밀담을 나눈 사건을 '정유독대(丁酉獨對)'라고 하며 그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두 사람의 독대 후 숙종은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미안스러운 하교가 많이 있었다... 이미 착한데도 더 착하기를 책하는 것이니
<숙종실록>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대리청정을 명령할 당시 숙종이 경종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그리고 학계에서는 숙종이 성격 상 눈 밖에 한 번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측면이 있었기에 아마도 대리청정을 시켜보고 세자 경종이 제 역할을 못하면 이를 구실로 삼아 세자를 교체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대리청정 명령에 경종은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경종을 지지해 왔던 소론은 쌍수를 들고 반대합니다.

소론의 우두머리였던 83세 고령의 윤지완이 병석에 누워 있다가 소식을 듣고 곧장 궁으로 달려왔으며, 병든 몸으로 관까지 들고 와 반대 상소를 올립니다.

세자 경종과 소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끝내 자신의 뜻을 밀어붙이고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킵니다.

여러 업무를 재결하는 것이 모두 사리에 합당했으며 일을 당하면 모두 위를 품한 뒤에 행해서 감히 마음대로 독단하지 않음을 보였다
<경종실록>

 

경종은 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을 낮추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대리청정 이후에는 말수를 점점 더 줄였는데, '침묵이 금'이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경종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또 한 번 자신을 낮춥니다.

경종이 모든 일에 숙종과 신하들의 조언을 구하니 도무지 경종의 잘못을 찾아낼 방법이 없어, 노론과 숙종은 당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8. 경종,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노론이 장악한 조정에서 힘없는 허수아비 처지가 되다

1720년 6월 8일,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재위 46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게 되면서  3년간 이어온 경종의 대리청정이 끝납니다.

세자 경종은 무려 30년이라는 조선 왕조 최장기 세자 생활을 끝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때 경종의 나이는 33살이었습니다.

마침내 경종이  왕이 된 지 약 한 달 뒤, 경종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상소문 하나가 올라옵니다.

생모의 작호를 바로잡으시옵소서

 

경종의 친모 장희빈은 죄인 신분으로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당시 작호인 '희빈' 대신 그냥 '장 씨'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경종이 왕이 되었으니 생모의 호칭을 바로잡으라는 상소였습니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은 친모 장희빈의 호칭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유생 조중우를 격렬히 비난합니다.

숙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선왕 숙종의 엄중한 처분을 욕보이고 장희빈의 작호 회복을 함부로 입에 올린 유생 조중우를 강력하게 규탄한 것입니다.

결국 경종은 이 상소를 덜컥 받아들였다가 자신을 줄곧 공격해 온 노론 세력에게 공격을 당할까 우려해 유생 조중우를 유배 보낼 수밖에 없었고, 조중우는 유배지로 떠나는 길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이 왕이 되기는 했지만 당시는 비변사, 육조, 삼사, 성균관 등의 주요 관직을 모두 노론이 차지한, 즉 왕을 제외한 주요 관직을 모두 노론이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숙종이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하들까지 대거 교체하면 조정이 또 한 번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에 경종은 함부로 신하들을 내칠 수도 없었습니다.

노론이 장악한 조선조정에서 경종이 왕이 되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었고, 경종은 그야말로 반쪽짜리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9. 경종, 노론 대신들의 압박에 못 이겨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다

그렇게 노론세력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던 경종에게 또 한 번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대한(大旱, 큰 가뭄)과 풍재(風災, 바람으로 인한 재해)가 근년에 볼 수 없을 만큼 심했고 궁궐의 정문이 또한 무너졌으니(...)이는 하늘의 경고하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종실록>

 

경종이 즉위한 지 약 1년 후, 가뭄과 태풍이 조선 전역을 덮쳤고, 이러한 자연재해가 경종이 부덕한 탓이라고 신료들이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즉위 후에도 노론 대신들의  압박이 점점 더 거세지는 상황에서 경종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721년 8월 20일 늦은 밤, 노론의 몇몇 신하 드리 바쁜 걸음으로 경종을 찾아가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아직껏 저사(임금의 뒤를 이을 아들)가 없으시니(...) 신은 이를 개탕 하는 바입니다
<경종실록>

 

경종이 왕이 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루빨리 후계자를 세우자는 상소가 올라온 것입니다.

당시 

34살이었던 경종은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를 1718년에 잃고 두 번째 왕비 17세의 선의왕후를 맞은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소를 올린 신하들은 하루빨리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며 압박했고 자신을 조여 오는 노론 대신들의 압박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경종은 연잉군을 세자에 책봉시킵니다.

결국노론의 강력한 요구대로 단 하루 만에 34살의 경종과 6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28살의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됩니다.

반역이나 다름없던 노론 대신들의 한 반의 날치기 인사였던 것인데 노론은 오랫동안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경종과 선의왕후가 종친 중에서 양자를 구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경종에게 양자가 생긴다면 연잉군을 이용해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노론의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노론은 한 반 중 날치기 인사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밀어붙인 것입니다.

경종은 왕위에 오른 지 채 1년도 안된 상황이었고 게다가 둘째 부인인 선의왕후의 나이가 17세에 불과해 충분히 후사를 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왜 경종 부부가 양자를 구한다는 소문이 퍼진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한 한 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때는 1701년, 장희빈이 죽음을 맞던 바로 그날로 돌아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자를 보고 난 뒤, 스스로 죽으라는 주상의 요청을 따르겠소

죽음을 앞둔 경종의 친모 장희빈의 마지막 소원에 경종이 어머니 장희빈 앞에 섭니다.

차마 들을 수 없는 악독한 말을 쏟아내면서 그 독수를 뻗쳐서 세자의 아랫도리를 침범하였다. 세자가 그 자리에서 기절하였다가 잠시 뒤에 깨어나니 궐 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수문록>

 

그런데 이때 장희빈이 아들 경종의 아랫도리를 잡아 뜯어버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이 씨 집안의 대를 끊어버리겠다!

 

결국 친모 장희빈 때문에 경종은 평생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돼 양자를 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장희빈이 진짜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경종은 34살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음에도

황실에서 후사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대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따로 후궁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하들도 몰래 양자를 들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던 것입니다.

경종은 친모 장희빈이 처참하게 죽은 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수백 개의 눈 속에서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고, 아마도 오랜 시간 쌓인 응어리진 화가 경종이 아이를 갖지 못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습니다.

10. 경종, 왕세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명을 거두다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고 2달이 지난 1721년 10월 10일, 또 하나의 상소가 올라옵니다.

언제나 세제를 불러 곁에 모시고 참여해 듣게 하고 일에 따라 가르쳐 익히게 한다면, 반드시 서무에 밝고 익숙하여 나랏일에 도움 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경종실록>

 

한마디로 왕세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34살의 왕이 왕좌에 멀쩡히 앉아 있는데 대리청정을 논한다는 것은, 경종에게 '왕에서 물러나라'는 것과 다름없는 선언이었습니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십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 청정하게 하면 나랏일을 의탁할 수 있으니 세제에게 맡긴다.

 

상소를 받아 든 경종은 자신에게 이상한 병이 있다고 강조하며 고민 끝에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허락합니다.

어찌하여 갑자기 이런 하교를 하십니까? 신 들은 비록 죽을지라도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경종실록>


그러나 소론 대신들이 대리청정은 절대 안 된다며 결사반대를 외치고 나왔고, 거듭된 소론 대신들의 반대에 결국 경종은 반나절 만에 대리청정을 거둡니다.

그런데 3일 뒤인 10월 13일, 경종이 다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합니다.

오락가락 바뀌는 경종의 왕명에 소론 대신들은 그저 대리청정을 거두어달라고 외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노론도 소론과 마찬가지로 대리청정을 반대하는데, 사실 멀쩡히 살아있는 왕에게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것은  왕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큰 정치적 부담이 따르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론은 직접 상소를 올리는 대신 오늘날 감찰부와 같은 사헌부 핵심 관원을 통해 상소를 올립니다.

그런데 소론의 간청과 통곡으로 조정의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노론도 어쩔 수 없이 소론과 함께 반대하는 척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대리청정 명령이 내려지고 4일이 지난 1721년 10월 17일 밤, 소론을 대표하는 신하이자 당시 우의정이었던 조태구를 몰래 불러들입니다.

한 밤중 조태구의 입궐 소식이 알려지자 황급히 노론신하들도 경종을 찾아갔고, 경종을 만나고 난 뒤 조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도로 거두게 되었으니 인심이 이제부터 안정될 것입니다
<경종실록>

 

경종이 조태구와의 만남 이후 왕세자에게 내린 대리청정 명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론의 승부수였던 왕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이 대실패로 돌아갑니다.

11. 경종, 왕권강화를 신축환국으로 노론을 제압하다

그런데 경종이 대리청정을 거두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경종은 모두가 놀랄만한 명령을 내립니다.

사흉을 파직하고 멀리 귀양 보내라!

 

사흉은 왕권을 위협하고 역심을 품은 4명의 흉악한 신하들이라는 뜻으로, 이들은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로 연잉군을 앞세워 왕을 몰아세운 노론 측 대신들이었고 경종은 이들에게 대반격을 한 것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군주의 결단을 크게 휘둘러 군흉을 물리치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였다
<경종실록>

 

강력한 환국으로 3차례나 환국을 단행했던 아버지 숙종처럼 경종이 호랑이 같은 왕의 모습으로 신하들을 단숨에 제압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왕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의 대표 대신 4흉은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로 지목돼 파직되고 모조리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심지어 조선 조정에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노론 세력이 모조리 삭탈관직되었고, 그렇게 제거된 노론 대신들의 자리에는 순식간에 소론 대신들로 채워집니다.

경종의 과감하고 신속한 결단으로 노론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고 한순간에 몰락하고 맙니다.

이 사건을 '신축환국(辛丑換局)'이라고 부르며, 1721년 신축년에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권이 교체된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는 숙종을 보고 자란 경종이 강력한 왕권을 위해 제대로 칼을 빼어 든 순간이었습니다.

경종은 확실한 자신의 세력을 도모할 때까지 때를 기다리며 엎드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종은 대리청정 사건으로 노론을 내칠만한 정치적 명분을 얻은 뒤 순식간에 환국을 단행해 확실한 자신의 지지세력까지 얻게 됩니다.

신축환국 이후 경종은 반쪽짜리 왕에서 온전한 왕이 됩니다.

12. 경종, 암살계획 발각으로 수많은 노론 대신들을 처형시키다

신축환국이 일어나고 1년이 지난 1722년 3월 27일, 한 통희 상소가 올라옵니다.

 역적으로서 성상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경종실록>

 

이 말은 곧 경종을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숙종이 사망하기 전 10명이 넘는 노론 세력들이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죽이려고 시도했는데, 심지어 노론 세력이 경종을 죽이려 한 것도 모자라 암살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까지 세웠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의 긴급한 계획이라는 뜻의 삼급수(三急手)라는 것인데 자객을 침투시켜서 경종을 직접 시해하려는 대급수, 상궁을 통해서 음식에 독약을 넣는 소급수, 숙종의 유언을 조작해서 세자를 바꿔치기하려는 평급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종은 크게 분노하며 가차 없이 칼을 뽑아 듭니다.

사흉이라고 불리던 노론의 4 대신을 포함해 약 60명의 노론 신하들이 처참하게 처형당합니다.

 피바람을 몰고 온 이 사건은 경종 2년인 1722년 노론의 경종 암살 계획이 밝혀지면서 일어난 옥사라 하여 '임인옥사(壬寅獄事)'라고 불립니다.

임인옥사로 역모에 앞장선 4 대신 사흉은 물론이고 경종을 압박하던 노론 세력이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된 것입니다.

13. 경종, 왕세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나는 연잉군의 청을 물리다

달라전 경종의 모습을 보며 노론의 지지를 받은 연잉군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연잉군은 결국 경종을 찾아가 왕세제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였지만,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 자리에 그대로 두겠다는 뜻밖의 선언을 합니다.

경종도 마음으로는 연잉군이 미울 수 있었겠지만, 후계자에 대한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연잉군 대신 양자를 들이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양자를 들여 후계자로 삼는다면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정국이 더욱 혼란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운영하는 국왕으로서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우선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론 세력들이 노발대발하며 연잉군을 왕세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청하지만, 경종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14. 경종, 게장과 감을 먹은 후 병세가 악화돼 사망하다

임인옥사 발생 2년 후인 1724년 8월 2일, 그해 여름은 유난히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극심한 무더위에 경종은 입맛을 잃어버렸고 한동안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병석에 앓아누울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갔고, 경종을 위해 온갖 산해진미를 대령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보름이 지난 8월 20일경, 시름시름 앓으며 간신히 미음만 먹던 경종이 모처럼 진상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게장과 감
게장과 감

바로 '게장과 감'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수라를 드는 경종의 모습에 신하들은 한숨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경종이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점점 의식까지 혼미해져 갔습니다.

갑작스레 위독해진 경종에게 어의들은 약을 처방해 올렸고 밤새워 경종을 보필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경종이 게장과 감을 먹은 지 5일 후인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 것입니다.

이때 경종의 나이는 서른일곱 살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vQm5ZPU2OE

 

15. 영조, 즉위 내내 경종 독살의 배후로 지목되어 괴로워하다

경종이 사망한 후 연잉군은 왕으로 즉위하였고 왕이 된 영조가 즉위하고 1년 후인 1725년 1월, 경종의 병세를 갑작스럽게 악화시킨 음식인 게장과 감을 올린 장본인이 바로 '영조'라는 것입니다.

경종과 영조는 세자 시절부터 갈등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고 게다가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 세력은 대리청정까지 요구하면서 경종을 몰아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경종의 반격이 시작되자 위기를 느낀 영조와 노론 세력이 경종이 먹을 게장이나 감에 독을 탔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조가 경종에게 진짜 게장과 감을 올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실록에는 영조가 음식을 올렸다는 기록이 없으며 게장과 감도 영조가 아닌 수라간에게 진상한 음식이었습니다.

 감과 게를 함께 먹으면 사람에게 복통을 일으키고 설사를 하게 된다(...) 모두 기운이 차갑기 때문이다
<본초강목>

 

다만 한의학 서적에 보면 게장과 감은 상극인 음식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경종의 죽음에 영조가 얽혀있다는 의심을 받게 된 것은 게장과 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복통과 설사가 심해져 경종은 점점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바로 이때 왕세제였던 영조가 어의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인삼과 부자가 기력을 회복시키는 데 좋으니 속히 처방하라

어의가 처방한 약과 인삼은 상극이라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영조의 명에 어의들은 아연실색해하며 처방을 망설이자 영조는 어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란 본시 자기의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긴 하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꼭 자기의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영조는 이렇게 말하며 어의를 크게 꾸짖고는 자신의 뜻대로 인삼과 부자가 든 탕약을 올립니다.

탕약을 먹은 경종은 시간이 지나자 눈에 띄게 기력을 회복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해졌고, 그 모습을 본 영조는 어의에게 위풍당당하게 말합니다.

내가 의약을 모르지만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잘 안다!

 

그런데 잠시 기력을 차리는 듯 보였던 경종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인삼과 부자가 든 탕약을 먹은 다음 날, 경종이 사망하고 맙니다.

이에 사람들은 어의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데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가 든 탕약을 지어 올린 영조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인삼과 부자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재로 왕실에서 많이 사용되는 탕약이라, 영조는 인삼과 부자를 먹으면 경종의 기력이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영조는 과연 경종을 죽이는 데 역할을 한 것일까요?

경종의 사망과 얽힌 이 일은 노론 세력들에 의해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의혹을 제기됩니다.

소론 신하로부터는 '소인은 선왕이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게장과 감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받기까지 합니다.

영조는 경종 독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것이 어찌나 억울했는지 자신의 왕위 계승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발행한 <천의소감>이라는 책일 통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 해명하기도 합니다.

천의소감
천의소감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수원화성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1. 정조, 10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다 정조는 조선 제22대 왕으로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을 만든 장본

donbuller.tistory.com

 

<출처: 벌거벗은한국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