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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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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최악의 폭군, 패륜의 대명사 연산군 그리고 장녹수 1(연산군과 장녹수의 만남)

1. 흥청망청

연산군의 기생을 향한 사랑은 유별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연산군은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모아 '운평'이라 이름 붙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예쁘고 노래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운평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부릅니다.

즉 최고의 운평을 이르는 말이 '흥청'이었던 것입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흥청들이랑 놀다가 나라 망한다는 것으로 돈이나 물건을 마구 사용하거나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것을 뜻합니다. 

연산군은 흥청들에게 수시로 재물과 노비를 내린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를 한양으로 불러 집과 땅을 하사하기까지 합니다.

연산 10년 운평과 흥청의 수가 1000명으로 증원되었고 이후에는 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연산군, 채홍사라는 새로운 관직을 만들어 흥청과 운평을 모으다

연산군은 '채홍사(採紅使/캘 채, 붉을 홍, 부릴 )'라고 하는 새로운 관직을 만듭니다.

말 그대로 '여자들을 모으는 관직'인 것입니다.

신하들을 채홍사로 임명하고  전국에서 흥청이 될만한 미녀를 뽑아오라고 명합니다. 

 

연산군은 최대의 관심사인 미녀 뽑는 일은 누구에게 맡겼을까요?

바로 임사홍과 임숭재입니다.

이들 부자는 채홍사로 임명되어 각지에서 여자들을 마구 잡아 궁궐로 데려옵니다.

그들은 전국의 기생들을 끌고 간 것은 물론이고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해 백성들의 아내와 딸, 심지어 양반의 첩까지도 끌고 갑니다. 

연산군의 신임을 얻기 위해 이 간신 부자는 이런 만행까지 저지릅니다.

임숭재는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한 가지를 아쉬워하며 연산군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어떤 내용일까요?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전하께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임숭재는 심지어 이미 시집을 갔던 자신의 누이동생까지도 연산군의 침소에 들게 한 인물입니다.

3. 연산군, 장녹수를 만나다

연산군 8년이었던 1502년, 연산군의 폭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입니다.

연산군은 조선팔도의 미인들을 색출해 궁궐로 볼러들입니다.

연산군은 춤, 노래, 미모가 뛰어난 이들을 기생으로 뽑아 음주가무를 즐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궁궐 연회에서 연산군의 눈에 띄어 운평으로 뽑히는 과정 없이 바로 흥청이 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장녹수'였습니다. 

기생이었던 장녹수는 어떻게 연산군의 눈에 띄었을까요?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다'

<연산군일기>

당시 연산군은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예민한 눈과 귀를 지닌 왕이었습니다.

타고난 감수성이 풍부했던 연산군은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해서 스스로 쓴 시를 모아 시집을 낼 정도였고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에도 능했습니다.

그렇게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던 연산군이었기 때문에 노래 실력이 뛰어났던 장녹수가 더 눈에 들어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반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연산군일기>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26세였었고 장녹수가 연상이었던 것입니다.

장녹수는 탁월한 노래실력을 갖춘 동안의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연산군이 장녹수를 만나게 된 계기를 알려면 장녹수가 어떻게 기생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장녹수의 집안을 살펴보겠습니다.

장녹수 아버지의 이름은 '장한필'입니다.

장한필은 흥성장씨로 예종 1년에 문과시험에 합격해서 충청도 문의현 현령이라는 자방 사또직을 지낸 양반이었습니다.

장녹수는 양반 가문의 딸이었기 때문에 나름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장녹수는 제안대군(조선 제8대 와, 예종의 둘째 아들)의 가비(노비)였다'

<연산군일기>

양반가문의 딸로 태어나 노비가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장녹수의 친언니의 남편 또한 궁궐의 노비였습니다.

즉 장녹수뿐 아니라 장녹수의 친언니 그리고 형부까지 노비인 것입니다. 

이 사례로 볼 때 장녹수의 어머니가 아마도 지방 관청에 있는 관비를 지낸 천민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천민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아버지가 양반인 것은 장녹수의 신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제안대군의 노비가 되기 전 장녹수의 삶은 더 비참했었습니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다'

<연산군일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장녹수가 너무 가난해서 몸까지 팔아가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장녹수는...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연산군일기>

즉 장녹수가 유부녀였다는 것이며 심지어 혼인도 여러 번 했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당시 조선은 여성이 혼자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였습니다.

때문에 장녹수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남편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번의 혼인은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제안대군이 거느린 남자노비와 결혼하면서 그 집에 들어가서 사노비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안대군이 거느린 남자노비의 아들까지 낳게 됩니다.

장녹수는 아들까지 낳으면서 노비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노래와 춤을 배워서 기생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장녹수는 사노비인 동시에 기생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당시 장안에 장녹수의 가무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게 됩니다.

제안대군이 권세도 있고 부유한 왕족이다 보니 가끔 집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제안대군이 소유한 기생들이 흥을 돋우는데 그때 장녹수의 모습을 보고 연산군이 반하게 된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선택을 받아 흥청이 되어 궁궐에 들어가게 됩니다.

4. 장녹수,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다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숙원으로 봉했다'

<연산군일기>

험난한 인생 끝에 흥청으로 궁에 들어오게 된 장녹수는 궁에 들어온 그 해 종 4품 숙원에 정식 책봉이 됩니다.

연산군의 후궁으로 신분이 상승한 것입니다.

연산군은 장녹수가 단지 예술적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후궁으로 삼았을까요?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다'

<연산군일기>

장녹수는 연산군 앞에서 온갖 애교와 아양을 떨며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장녹수가 비위를 맞추며 연산군의 마음에 들기는 했는데 사실 연산군 옆에는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장녹수가 총애를 받았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연산군일기>

장녹수가 연산군을 아들처럼 대하고 혼을 내며 벌을 주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연산군은 장녹수의 이런 태도에서 마치 어머니가 아들 대하는 듯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장녹수의 품에 안겨 있을 때에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행복했던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어머니에 대 애정결핍을 알고 철저하게 '모성애'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장녹수에 대한 연산군의 애정이 뜨겁게 불타오르던  입궁한 바로 그 해 장녹수가 왕의 아이를 잉태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 달 후 장녹수는 무사히 딸을 출산합니다.

이 딸의 이름은 '이영수'였고 연산군은 장녹수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영수를 애지중지 아꼈다고 합니다.

장녹수가 무사히 딸을 출산하면서 연산군의 장녹수를 향한 총애는 나날이 커져가게 됩니다.

기생출신 장녹수의 삶은 이처럼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연산군의 장녹수에 대한 총애가 극에 달한 1504년 3월, 연산군은 조선 조정뿐 아니라 백성들도 경악할만한 어마어마한 어명을 내리게 됩니다.

'장 숙용의 집이 여염 사이에 있어 화재로 연소될까 염려되니, 가까운 인가들을 헐어 넓혀라'

<연산군일기>

장녹수는 입궁 1년 만에 종 4품 숙원에서 종 3품 숙용으로 승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장녹수 사가 주변의 집들을 다 헐어버리고 장녹수의 집을 넓히라는 어명을 내립니다.

이때 조정의 신료들은 연산군의 무리한 명령에 반기를 들고일어납니다.

'장녹수는 궁궐에 들어와 지내고 있어서 사가에는 거처하지도 않는데 이웃집을 마구잡이로 철거해 버리면 백성들이 원망할 것입니다.'

연산군은 당연히 예상되는 신료들의 반발에 '능상'(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김)이라며 펄쩍 뜁니다.

신하들이 연산군에게 반기를 쓸 때 능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며 이를 물리칩니다.

연산군은 끝내 조정 신료들의 반대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방의 둑으로 논을 만들 만한 땅은 장 숙용에게 주라'

'홍윤성의 집과 양산 부수 탑의 집을 장 숙용에게 주라'

<연산군일기>

이 외에도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하사한 내용은 여러 차례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로 자신의 재산을 엄청난 규모로 불려 나갑니다.

그런데 장녹수를 향한 연산군의 파격혜택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 연산군은 장녹수 보란 듯이 누군가에게 관직을 하사합니다.

'종이를 동평관의 고직으로 영원히 정하라'

<연산군일기>

종이는 장녹수의 딸을 돌봐준 유모의 아들이었습니다.

동평관은 일본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이며 고직은 동평관에 딸린 창고의 관리자를 말합니다.

종이의 신분은 노비였고 그런 그가 동평관의 창고 관리자가 된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딸을 돌봐주는 유모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노비로서는 꿈도 못 꿀 관직을 하사 받은 데다가 심지어 영구 보직을 약속한 것입니다.

'아니 되옵니다! 동평관의 창고 관리 업무는 많은 이익이 걸려있는 자리입니다!'

조정신료는 이번에도 이렇게 외치면서 유모 아들의 인사문제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 너무 빠져 신료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신료들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또다시 이어진 연산군의 장녹수를 향한 파격 혜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김효손을 함경도 전향 별감에 제수하라'

<연산군일기>

김효손은 장녹수의 형부였습니다.

함경도 전향 별감은 왕이 함경도 제사를 위해 내린 향과 축문을 함경도에 전달하는 임시관직을 말합니다.

노비인 김효손이 장녹수 덕에 왕명으로 특별임무까지 내려받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장녹수는 연산군에게 주변인들의 관직을 청탁하고 자신의 신복들을 이관이 걸린 자리에 앉혀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산군의 호위에 기세 등등 해진 장녹수가 조정대신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장녹수는 관선 즉 나라의 선박을 이용해 쌀을 무역하는 일까지 시작한 것입니다.

장녹수는 관선을 이용해서 남쪽에서 세금으로 올라온 쌀을 착복해서 쌀이 귀한 평안도에 비싸게 판 다음 그쪽의 특산품을 다시 실어와 재판매해 재산을 불린 것입니다.

장녹수는 자신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 나라의 선박을 사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이때 무역한 쌀의 양이 무려 7000석에 달했다고 합니다.

후궁이라는 이유로 나라의 선박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는 장녹수를 보는 신료들의 심정은 참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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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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