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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의 어머니 마리 퀴리(퀴리부인)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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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의 어머니 마리 퀴리(퀴리부인) 일대기

1. 최초의 아이콘 마리 퀴리

방사능 활용
방사능 활용

방사능은 핵실험, 원자력, 의약품, 방사선 치료, 항암 치료, 우주 탐사선 등을 통해서 우리 생활과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마리 퀴리
마리 퀴리

오늘의 주인공은 '방사능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위대한 과학자 '마리 퀴리'입니다.

마리 퀴리는 두 개의 방사성 원소를 최초로 발견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방사능, 방사선'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마리 퀴리는 이 업적으로 서로 다른 과학 분야에서 유일하게 화학상과 물리학상으로  2개의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퀴리 가문은 한번 받기도 힘든 노벨상을 딸과 사위들을 포함해 무려 6개나 받아내는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흔히 우리에게는 '퀴리 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마리 퀴리는 최초의 두 분야 노벨상 수상, 최초의 여성 노벨상, 최초의 여성 소르본 대학 교수 등 아무도 가지 않는 최초의 길을 개척한 여성으로 지금까지도 기려지고 있습니다.

'그녀(마리 퀴리) 인생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중략) 가장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헌신과 집념으로 수행한 결과였습니다'

<아인슈타인 에세이 中>

프랑스 500프랑
프랑스 500프랑

심지어 프랑스 화폐 중 최고액권인 500프랑의 인물로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 부부가 나란히 선정될 만큼 큰 업적을 남긴 과학자입니다.

마리 퀴리는 당시 여성을 무시하고 차별하던 과학계에서 방사능 연구를 통해 독보적인 과학자로 우뚝 섰습니다.

하지만 마리 퀴리와 그 가족들은 이러한 영광을 위해서 혹독한 비극을 치러야 했습니다.

마리 퀴리 본인은 악성빈혈과 각종 합병증에 걸려 죽었고, 마리 퀴리의 남편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참혹한 죽음을 맞았으며, 딸 역시 이른 나이에 병으로 사망합니다.

대체 위대한 과학자 마리 퀴리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2. 마리 퀴리, 과학 선생님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과학을 쉽고 재밌게 접하다

마리 퀴리의 고향은 폴란드 바르샤바입니다.

마리 퀴리 형제
마리 퀴리 형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과학자로 불리는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교육자 집안에서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마리 퀴리의 어린 시절 그녀의 집안은 무척 지적인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마리 퀴리 아버지
마리 퀴리 아버지

과학선생님인 아버지 덕분에 집안에 실험기구들이 굉장히 많았고, 아버지는 마리 퀴리에게 실험 기구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과학을 놀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마리 퀴리의 형제들은 모두 굉장히 똑똑했고, 그중에서도 막내인 마리 퀴리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부모님 앞에서 책을 읽고 있던 둘째 언니는 6살임에도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는데 글을 배운 적도 없는 4살 마리 퀴리가 막힘없이 글을 술술 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리 퀴리는 어릴 때부터 한 번 읽은 책은 모두 기억하는 그야말로 천재, 신동 그 자체였습니다.

마리 퀴리가 너무 똑똑하다 보니 학년을 2년이나 뛰어넘을 수 있었고 다른 학생들보다 2살이 어렸지만 수학, 역사, 문학, 과학등  많은 과목에서 쭉 1등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5개 국어가 가능한 언어능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3. 마리 퀴리, 남성들만 대학에 갈 수 있던 시대에 대학 가기를 꿈꾸다

하지만 마리 퀴리의 행복한 어린 시절은 금세 끝나버리고 맙니다.

마리 퀴리가 8살 때 큰언니가 장티푸스로 갑자기 사망한데 이어서 2년 후에는 어머니마저도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설상가상 얼마 뒤에는 교사였던 아버지마저 갑자기 실직을 하게 되면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합니다.

힘든 생활을 이어 가던 중 마리 퀴리가 18살이 되던 188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리 퀴리는 한 가지 소원을 가지게 되는데 바로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 퀴리가 살던 당시는 대부분 남성들만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시대였고, 특히 마리 퀴리가 대학게 들어가려 했던 19세기말에는 유럽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상상이상으로 최악이었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폴란드를 떠난다 하더라도 유럽 어느 곳에 가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4. 여자의 뇌가 남자의 뇌보다 작아서 열등할 것으로 보던 시대

독일의 한 해부학 교수는 여성과 남성의 이것을 비교하며 여성이 대학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주장했는데, 어떤 주장이었을까요?

'연구에 따르면 여성 뇌의 무게는 남성보다 34g 가볍다. 따라서 여성은 지적인 일에 적합하지 않다'

<독일의 해부학자 테오도르 폰 비쇼프>

당시 여성의 대학 입학을 반대하는 쪽에서 내놓은 주장은 여성의 뇌가 남성의 뇌보다 가벼워서였다고 합니다.

실제 평균 뇌 무게는 남성의 경우 약 1,370g인데 비해, 여성은 1,200g으로 여성의 뇌가 남성의 뇌보다 가볍습니다.

그리고 소위 당시 교육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지적 능력이 부족한 여성이 대학에 들어오면 대학이 결국 붕괴될 것이다라고 경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성인 남성 평균 뇌가 약 1,370g인데 비해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뇌는 약 1,230g이었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뇌는 평균 성인 남성의 뇌보다 140g 정도 무게가 적게 나갔던 것인데  사실 저 주장을 받아들이면 아인슈타인도 대학에서 내보내야 했기에 억지주장에 가까웠습니다.

5. 마리 퀴리, 여성 대학 입학에 관한 입법을 추진 한 프랑스로 유학을 결심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던 마리 퀴리는 한 가지 방법을 찾게 됩니다.

바로 프랑스에서는 1880년 제정한 여학생 중등 교육에 관한 법안 제1조에서 '정부는 데파르트망 및 코뮌의 지원을 받아 여학생의 중등 교육을 위한 시설을 설립한다'라고 하여 이례적으로 여성의 중등교육 보장 및 대학 입학도 허용됐고 이를 알게 된 마리 퀴리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로 유학을 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 퀴리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가 홀로 네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돈이 많이 들어가는 프랑스 유학은 너무나 부담스러웠던 가정형편이었던 것입니다.

6. 마리 퀴리, 공부를 하다가 집중이 되지 않으면 수학문제를 풀다

마리 퀴리는 공부를 하다가 집중이 되지 않으면 수학문제를 풀 곤 했습니다.

마리 퀴리가 수학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음 사촌언니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한 번에 여러 가지를 같이 읽어. 한 가지만 공부하면 그렇지 않아도 혹사당하는 소중한 두뇌를 더욱더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야.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수학 문제를 풀어. 그러면 자연스레 집중이 되고 기분도 상쾌해지거든'

이때 마리 퀴리의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막내딸 마리 퀴리를 위해서 편지를 통해 수학을 가르쳐 주기까지 했습니다.

7. 마리 퀴리, 세계 최고 명문 대학 소르본 대학에 입학하다 

아버지의 정성 덕분인지 24살 마리 퀴리는 드디어 소르본 대학 자연과학부에 입학해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어 과학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소르본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 당시에도 세계 최고의 명문 대학으로 손꼽히는 곳이었습니다.

마리 퀴리 지도 교수 가브리엘 리프만
마리 퀴리 지도 교수 가브리엘 리프만

게다가 마리 퀴리를 지도했던 '가브리엘 리프만' 교수는 컬러 사진술 개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마리 퀴리가 물리학을 공부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만큼 최고의 대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대학에서 철저한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소르본 대학 자연과학부에 1,800명의 학생 중 여학생은 단 23명에 불과했고, 게다가 마리 퀴리는 폴란드에서 온 외국인이기까지 했던 터라 마리 퀴리는 동기들 사이에서 멀쩡한 이름 대신 '말수 적은 걔'로 불렸습니다.

마리 퀴리의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이 보내준 돈으로 근근이 살다 보니 돈이 부족해 열악한 다락방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었기에 하루하루 열정적으로 공부에 임합니다.

마리 퀴리는 '공기'만 먹는다고 할 정도로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고, 동기들은 이 상황에도 놀리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 공부한 덕에 마리 퀴리는 물리학 학사 자격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합니다.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학 학사 자격시험에서 수석을 한 여성은 마리 퀴리가 최초였습니다.

8. 마리 퀴리, 과학으로 맺어진 피에르 퀴리와 백년가약을 맺다

이렇게 치열하게 공부에 매진하던 27살의 마리 퀴리에게 어느 날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피에르 퀴리
피에르 퀴리

바로 35살의 과학자 피에르 퀴리입니다.

강철의 자성 연구를 하던 마리 퀴리는 장비를 놓고 연구를 할 만한 연구실이 없어 찾던 중 그녀의 사정을 듣게 된 한 교수가 이 사람이라면 연구실을 빌려줄 것이라면서 알려줬는데 그 인물이 바로 피에르 퀴리입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는 만나자마자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피에르 퀴리는 이미 프랑스에서 전자기 분야에서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피에르 퀴리는 기존의 관습에 구애받지 않았던 자유로운 성격을 가졌고 여성이 공부하는 것에도 열려 있는 사고를 가졌던 인물로 마리 퀴리에게는 운명 같은 남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과학 관련 이야기를 할 때 대화가 아주 잘 통했다고 하며 복잡한 공식과 전문 용어가 난무했지만 대화가 막힘없이 술술 통해서 마치 잃어버렸던 영혼의 단짝을 찾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퀴리 커플은 서로에게 선물을 논문으로 할 정도였으며, 피에르 퀴리는 열렬히 마리퀴리에게 구애를 했다고 합니다.

1895년 7월, 퀴리 커플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당시 마리 퀴리는 28살, 피에르 퀴리는 36살이었고 이때부터 마리 퀴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Mrs. 퀴리 즉 퀴리부인으로 불리게 됩니다.

퀴리 부부의 결혼식 사진을 보면 일반적인 결혼식 사진과 비교해서 어딘가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순백의 웨딩드레스 차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퀴리 부부는 웨딩드레스는 허례허식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고 추후 연구실에서도 입고 다닐 생각으로 어두운 색의 남색 드레스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퀴리 부부는 평생 과학에만 매진하자고 다짐한 열혈 과학자 커플이었습니다.

퀴리부부 신혼여행
퀴리부부&nbsp; 신혼여행

퀴리부부는 신혼여행 또한 남달랐는데 두 사람은 각각 자전거 한 대씩을 타고 숙소도 목적지도 정해놓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신혼여행 중에도 두 사람 사이의 대화 대부분은 과학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행복했던 신혼여행을 마친 뒤 돌아온 퀴리 부부는 한 가지 특별한 목표를 세웁니다.

실제 퀴리 부부 연구실
실제 퀴리 부부 연구실

바로 더욱 과학에 매진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심지어 신혼집으로 얻은 파리의 아파트에는 다른 사람들이 찾아와서 방해하지 못하게 손님용 의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누가 찾아오면 공부와 연구시간에 방해를 받게 되니 아예 의자를 두지 않아 방해 요소를 원천 차단했던 것입니다.

9. X-선(엑스레이), 새로운 광선의 발견으로 과학계뿐 아니라 의학계까지 들썩이다

마리 퀴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프랑스에서 자신만의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마리 퀴리는 보수적이고 편견 가득한 사회에서 물리학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박사 논문을 쓰기로 결심하고 논문주제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전 세계 과학계에서 핫한 주제로 떠오르고 있던 정체불명의 광선이 있었습니다.

이 광선은 사람의 몸을 통과하는 놀라운 현상을 보여줬는데 'X-선' 즉 '엑스레이'였습니다.

엑스레이는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우연히 발견한 광선으로 인체의 일부를 투과해서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최초의 엑스레이 사진
최초의 엑스레이 사진

위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뭔가 두껍게 보이는 것이 있는데, 실험 대상이었던 뢴트겐의 아내가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고 그 반지까지 함께 찍힌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엑스레이 발생 원인을 알 수 없자, '정체를 모른다'는 의미로 엑스(X) 레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최초로 사람의 몸 안을 볼 수 있는 엑스레이가 발견됐을 당시인 1890년대에 당시 물리학에서는 정립될 만한 것은 다 정립되어 이제 남은 과제가 거의 없다는 분위기였고, 막막했던 과학계에 뢴트겐의 엑스레이 발견은 과학계의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학뿐만 아니라 의학계에서도 X-선이 큰 화제가 되었는데 총알이 뼈에 박혔을 때 총알 위치를 확인한다던가 골절된 뼈를 맞추는 등 치료 방법 발전에 큰 기여를 하다 보니 수요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엑스레이는 현재까지도 의학계뿐 아니라 공항 수화물 검사 등 실생황에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10. 마리 퀴리, '방사선, 방사능' 개념을 처음으로 만들다

인류가 몰랐던 미지의 광선이 발견되자 전 세계가 열광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X-선처럼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또 다른 광선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하며 새로운 광선을 찾으려는 연구가 과학계에 뜨겁게 진행되게 됩니다.

앙투안 베크렐
앙투안 베크렐

이때 새로운 광선을 찾기 위해 맹렬하게 연구를 하고 있던 물리학자 중에 한 명이 프랑스 물리학자 '앙투안 베크렐'이었습니다.

우라늄
우라늄

베크렐은 실험을 하던 도중에 어떤 물질에서 엑스레이와 다른 새로운 광선을 발견했는데, 바로 '우라늄'이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신들의사생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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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라늄은 색유리를 만들거나 도자기 도색에 쓰였지만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물질이었습니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정체를 밝히지 못한 베크렐 광선에 흥미를 느낀 마리 퀴리는 '우라늄 외에 다른 물질에서도 광선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가설을 세운 후 연구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마리 퀴리는 특별한 광선은 우라늄만이 갖는 독특한 특징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물질에서도 광선들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리 퀴리는 '주변에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광선'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방사선'입니다.

방사선이란 방사성 원소가 붕괴할 때 주변으로 내뿜는 입자와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또한 방사선을 내뿜을 수 있는 특별한 성질을 '방사능'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처럼 마리 퀴리는 방사선과 방사능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리 퀴리를 '방사능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1. 마리 퀴리, 세상에 없던 원소 '폴로늄'을 발견하다 

 

그런데 마리 퀴리의 발견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피치블렌드
피치블렌드

우라늄을 다량으로 포함한 '피치블렌드'라는 광석을 조사하다가 우라늄 보다 더 강한 방사선을 뿜는 물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모르던 광석 안에 또 다른 새로운 방사능을 내뿜는 방사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만약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발견해 내면 엄청난 과학적 업적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마리 퀴리를 도와 피에르 퀴리까지 함께 연구에 뛰어들게 됩니다.

퀴리 부부는 치열한 토론을 해가면서 연구에 박차를 가합니다.

하지만 이때 연구 방법은 막노동에 가까웠는데 체력적으로 보통 일이 아닌 실험이었습니다.

피치블렌드 광석 안에 극미량의 물질을 추출해야 했기 때문에 실험을 위해서 마리 퀴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광석을 실험실에 옮긴 후 커다란 솥에 광석과 용액을 부어 큰 쇠막대리고 저으며 광석을 녹였습니다.

원소를 분리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광석에 산성 강한 용액을 부어서 녹이면 나머지 것들은 날아가고 방사성이 농축된 원소를 또다시 녹여서 농축시키기를 반복하다 보면 극소량의 방사선 물질을 추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 실험과정이 얼마나 고됐는지 방사성 물질 추출 실험 시작 1년 만에 체중이 9kg이나 빠지게 됩니다.

마침내 광석에서 강한 방사능을 내뿜는 화합물을 정제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고생해서 얻어낸 결과물 안에는 이전에 그 누구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원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소란 다른 물질과 섞이지 않는 가장 순수한 물질로 수소, 산소, 질소 등이 원소에 속합니다.

마리 퀴리는 이 원소에 자신의 조국인 폴란드에서 따온 원소 주기율표 84번 '폴로늄(Po, Polonium, 209)'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마리 퀴리는 폴로늄이 우라늄보다 무려 400배나 더 강력한 방사능을 내뿜는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마리 퀴리의 폴로늄 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한 엄청난 대발견이었습니다.

1898년 직전까지 세상에 알려진 원소는 단 77개뿐이었는데, 마리 퀴리가 인류에게 새로운 원소인 폴로늄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12. 마리 퀴리 연구, 핵폭탄의 개발로 이어지게 하는 교두보가 되다

인류 역사에서 철이나 구리와 같은 새로운 물질의 발견은 철기, 청동기와 같은 새로운 문명이 탄생하였고 전쟁 방식까지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마리 퀴리가 방사능 개념을 정립하고 폴로늄 같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게 되면서 인류는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화가 눈앞에 두게 됩니다.

퀴리 부부가 방사능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특성을 보이는 원소가 존재한다는 것과 새로운 방사성 물질인 폴로늄을 발표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방사능의 발견이라는 것은 태양 외에도 스스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기 때문에 마리 퀴리의 연구는 특별했던 것이었습니다.

마리 퀴리의 발견은 약 50년이 지난 후인 1945년 세계사를 뒤흔들어 놓은 '핵폭탄'의 개발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리 퀴리 연구 이후 과학자들은 앞다투어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찾기에 나서게 됩니다.

이 연구가 진행되면서 핵폭탄의 원리인 핵분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마리 퀴리를 핵폭탄의 할머니 정도까지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핵폭탄, 원자력 발전과 같은 변화들은 마리 퀴리가 방사능의 정체를 밝혀내고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발견해 내면서 시작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면서 마리 퀴리는 무명의 과학자에서 1903년 일약 노벨 물리학상 수상을 앞둔 유명 과학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13. 노벨 위원회, 남편 피에르 퀴리에게만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했으나 남편의 간곡한 편지로 마리 퀴리와 공동 수상을 결정하다

마리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 전까지 엄청난 마음고생을 하게 되는데, 노벨상을 주는 주체인 노벨 위원회에서 남편 피에르 퀴리에게만 상을 수여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 퀴리는 여자라는 이유로 그저 남편의 조수역할이나 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했었고 노벨 위원회 또한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이에 피에르 퀴리는 즉각 노벨 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방사능 연구는 함께 연구한 결과이고 중요한 역할을 한 마리 퀴리 또한 꼭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편지를 받은 노벨 위원회 내에서는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마리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로서 마리 퀴리는 36살의 나이에 역사상 최초로 여성 노벨상 수상자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마리 퀴리는 수상에 대한 기쁨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노벨 위원회에서 주는 상금을 더 반겼던 것 같습니다.

해마다 금액이 달라지기는 하는데 2023년 노벨 물리학상의 상금은 약 14억 원이었으니, 당시에도 꽤 큰 금액의 상금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는 베크렐과 퀴리 부부로 3명이었기 때문에 상금이 분할되기는 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비용을 확보하게 된 마리 퀴리는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합니다.

14. 마리 퀴리, 노벨상 수상 후에도 여전히 과학자로 인정받지 못하다

마리 퀴리는 노벨상 수상 후 과학자로서 인정을 받았을까요?

당시 일부 언론과 과학자들은 여전히 마리 퀴리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속에서 여전히 마리 퀴리 역할을 옆에서 보조하는 조수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미국의 한 과학자는 '나도 피레르 퀴리 같은 남편이 있었으면 노벨상을 수상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마리 퀴리의 수상을 비아냥대기까지 했습니다.

실제로 노벨상 수상 이후에 피에르 퀴리는 소르본 대학 물리학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마리 퀴리는 프랑스의 어떤 대학에서도 교수 제안을 받지 못합니다.

언론들도 호의적이지 않았고 어떤 기자는 마리 퀴리가 과학을 한답시고 여성으로서 가족 일은 소홀히 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렇듯 마리 퀴리를 여성으로만 생각하고 한 명의 과학자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15. 39세 마리퀴리, 연구 동료이자 남편 피에르 퀴리를 잃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았고, 과학자로서 평소와 다름없이 연구를 이어 나갑니다.

노벨상을 탄 다음 해인 1904년에는 둘재 딸인 이브 퀴리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딸을 낳고 불과 2년 뒤인 1906년에 마리 퀴리의 인생을 뒤흔든 비극이 벌어지고 맙니다.

남편 피에르 퀴리가 47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고 만 것입니다.

때는 비가 내리던 4월이었고 피에르 퀴리가 길을 건너던 중에 짐을 싫은 마차가 그를 덮친 것입니다.

이때 마차의 뒷바퀴가 쓰러진 피에르 퀴리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고 그는 두개골이 무려 16조각을 부서지며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으면서 마리 퀴리는 충격으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습니다.

당시 마리 퀴리의 슬픔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이 남아 있습니다.

'나의 피에르, 당신이 없는 삶은 잔혹해요. 피에르, 난 이 삶을 살아내고 싶지 않아요. 고통으로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고 내 삶이 끝나버릴 것만 같아요. 저 많은 마차들 중에 혹시 내 님이 맞은 운명을 내게도 안겨줄 마차가 있지 않을까요?'

마리 퀴리는 마음으로는 주저앉고 싶었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는데 아직 어린 두 딸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 퀴리와 두 딸
마리 퀴리와 두 딸

마리 퀴리는 가장으로서 두 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남편과 함께 하던 연구도 계속 이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6. 마리 퀴리,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다 

이렇게 마리 퀴리가 마음을 다 잡을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남편 피에르 퀴리의 죽음이 마리 퀴리에게는 과학자로서 새로운 기회를 얻게 해 줍니다.

바로 남편이 죽은 후 공석이 된 소르본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 자리가 마리 퀴리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 800년 역사 속에서 최초로 여성 교수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교 물리학 교수가 되면서 방사능에 대한 선구적인 강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17. 마리 퀴리, 새로운 방사성 원소 '라듐'을 발견하고 라듐 혼합물에서 순수한 라듐을 추출하는 데 성공하다

또한 과학자로서 방사능 연구에 몰두하는데 이때 마리 퀴리가 파고든 연구주제는 새로운 방사성 물질인 '라듐'을 순수한 상태로 추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라듐
라듐

과거 폴로늄을 발견했던 당시 마리 퀴리가 발견한 또 하나의 원소가 있었는데 그것이 원소 주기율표 88번 '라듐'입니다.

이렇게 마리 퀴리는 세상에 없었던 방사성 원소를 2개나 발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순수한 라듐이 아닌 다른 물질이 섞어 화합물 상태로만 라듐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실제 라듐 추출물
실제 라듐 추출물

그런데 이때 추추한 라듐 화합물에는 한 가지 특별한 성질이 나타났는데 바로 어둠 속에서 은은한 형광빛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라듐이 아주 강력한 방사선을 내뿜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었습니다.

라듐의 발견은 세상을 또 한 번 놀라게 했고,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라듐은 엄청난 열을 무한정으로 방출한다. 태양이나 별의 놀라운 에너지의 근원과 정체도 마리 퀴리 덕분에 밝혀지게 되었다'

어떻게 저렇게 작은 조각일 뿐인 라듐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일까요?

라듐 같은 방사성 원소 내부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언제든 안정된 상태로 변하고자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자기 안에 있던 에너지와 입자를 바깥으로 방출하게 됩니다.

라듐도 강력한 방사성 원소이기 때문에 강력한 방사선을 방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에너지 그리고 무한한 잠재력의 라듐이지만 라듐 혼합물을 완전히 순수한 형태로 추출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발견이 후 약 10년 걸쳐 이루어진 연구 끝에 마리 퀴리는 0.1g의 순수한 라듐을 추출하는 것에 성공합니다.

18. 라듐,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알려지며 화장품과 먹는 제품에까지 널리 쓰이다 

라듐 등장과 함께 전 세계 사람들에게 라듐의 효과가 드러나는데 바로 라듐으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라듐으로 암 치료가 된다는 내용의 기사
라듐으로 암 치료가 된다는 내용의 기사

'보고에 따르면 암이 라듐 광선에 의해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회의에 참석한 의사들은 라듐 광선이 종양을 치료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오늘날 암세포를 죽이는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사선 치료의 효과가 라듐을 발견 한 이때 처음으로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X-선의 발견으로 암치료가 시작되었지만 라듐의 발견으로 대중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어찌 보면 마리 퀴리 덕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후 의학계와 언론계에서는 라듐의 의학적인 효과를 집중 조명하기 시작해서 라듐을 사용한 병 치료 사례가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불치병이라고 생각했던 암을 치료하는 라듐이라면 다른 병들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믿음을 갖게 되고 전 세계에서 그야말로 라듐 열풍이 불게 됩니다.

그리고 희석시킨 라듐 화합물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면서 다양한 제품들에 사용되게 됩니다.

라듐 파우더
라듐 파우더

바로 라듐이 들어간 화장품을 피부, 입술, 치아에 발라서 사용했습니다.

먹는 제품에도 라듐이 첨가되기도 했는데 발견 당시에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면서 먹어도 좋은 줄 알고 섭취까지 합니다.

라듐 초콜릿
라듐 초콜릿
라듐 생수
라듐 생수

라듐 생수에는 '미 특허청 인증 방사능수'라고 쓰여 있기까지 했으며, 불멸의 약이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19. 미국 시계공장 소녀들과 에벤 바이어스 등 사례를 통해 라듐의 위험성이 알려지게 되다

라듐은 방사능 물질인데 당시에는 위험성을 몰랐던 것일까요?

오늘날에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통해서 방사능의 위험성이 각인되고 방사능이 인체에 위험하다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방사능이라는 개념이 처음 만들어지고 방사능의 연구가 시작되던 극 초창기였기 때문에 강한 방사능을 가진 라듐이 얼마나 위험한지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라듐 연고&#44; 라듐 치약&#44; 라듐 성냥
라듐 연고, 라듐 치약, 라듐 성냥

당시 라듐의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아서 라듐 연고, 라듐 치약, 라듐 성냥까지 라듐이 들어간 온갖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었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라듐을 발라서 형광빛 나는 옷을 입고 공연을 하겠다는 라듐 쇼가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라듐만 들어갔다 하면 모든 제품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정력을 보장해 준다는 소문으로 라듐 콘돔까지 인기를 끌었습니다.

라듐을 내세운 제품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라듐이라는 이름만 내걸고 실제로 라듐이 들어가지 않은 허위 제품들도 무차별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 

라듐의 위험성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하고 한참 지난 1917년 미국의 시계 공장 소녀들 사건으로 조명되었습니다.

방사능에 피폭된 시계 공장 소녀
방사능에 피폭된 시계 공장 소녀
방사능에 피폭된 시계 공장 소녀
방사능에 피폭된 시계 공장 소녀

시계 공장 소녀들 중 한 소녀는 턱에 커다란 종양이 자라났고 다른 소녀는 무릎에 암이 생겨서 다리를 쓸 수 없게 되기도 했습니다.

방사능에 피폭되어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 시계 공장 소녀들의 피해가 법정 투쟁까지 이어졌지만 실제 재판결과는 너무 늦게서야 나왔고 사람들은 라듐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며 인지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30년대 벌어진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세상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게 됩니다.

에벤 바이어스
에벤 바이어스

미국의 '에벤 바이어스'라는 한 사업가의 사례였습니다.

벤 바이어스 라듐 생수 복용 이후 모습
에벤 바이어스 라듐 생수 복용 이후 모습

에벤 바이어스는 어느 날 부상을 당해 라듐 생수를 처방받았고 이것을 무려 4년간이나 매일 복용했습니다.

그 결과 방사능에 오랜 기간 동안 피폭된 그는 충격적인 모습으로 얼굴이 변하고 맙니다.

원소 주기율표 상 라듐
원소 주기율표 상 라듐

라듐은 원소 주기율표 상 칼슘족에 있는데, 라듐은 칼슘과 화학적으로 비슷하여 칼슘을 대신해 뼈에 축적돼 뼈에 치명적인 괴사를 일으키고 뼈를 삭게 하고 골수 세포를 파괴하고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벤 바이어스는 턱뼈에 암이 걸려 턱뼈가 괴사 되었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시신에서조차도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이 방출되어 납으로 봉해서 묻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듐 사건으로 종신 연금 명령
라듐 사건으로 종신 연금 명령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라듐의 위험성이 인지하게 되었고 마리 퀴리가 라듐을 발견한 1898년 이후 약 40년이 지난 1938년에서야 라듐공장 소녀들이 법정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라듐의 위험성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즈음에 라듐이 들어 있는 제품들의 끔찍한 부작용도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라듐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20. 마리 퀴리,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다

31살에 라듐을 발견한 마리 퀴리 역시 발견 당시에는 라듐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인류를 위해 특허까지 포기했던 라듐이 인간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훗날 라듐에 대한 위험성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마리 퀴리가 라듐 추출에 성공했을 당시만 해도 라듐 제품에는 퀴리의 이름이 도용될 정도로 인기가 굉장히 대단했습니다.

라듐이 인기를 얻을수록 과학자로서 마리 퀴리의 명성도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마리 퀴리는 깜짝 놀랄만한 전보 한 통을 받게 됩니다.

'당신이 노벨 화학상을 받습니다. 곧 편지가 갈 겁니다'

노벨위원회에서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공로로 마리 퀴리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21. 노벨 위원회 측에서 불륜설이 터진 마리 퀴리가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다

그런데 얼마 뒤 노벨 위원회에서 보내온 편지 한 통에 마리 퀴리는 크게 당황합니다.

바로 마리 퀴리에게 노벨상 시상식에 오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마리 퀴리 당신이 12월 10일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당신이 상을 받으러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군요. 당신이 결백하다는 게 밝혀질 때까지 상을 받지 않겠다고 편지를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마리 퀴리의 불륜설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1911년 당시 마리 퀴리 불륜설 관련 기사
1911년 당시 마리 퀴리 불륜설 관련 기사

마리 퀴리의 불륜설은 당시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전역의 신문에서 이슈로 떠오르게 됩니다.

마리 퀴리와 랑주뱅이라는 남자와 불륜을 일으키고 있다며 마리 퀴리를 비난하는 기사들로 채워집니다.

폴 랑주뱅
폴 랑주뱅

상대는 마리 퀴리보다 5살 연하의 동료물리학자였던 '폴 랑주뱅'이었습니다.

폴 랑주뱅은 초음파로 잠수함을 탐지하는 기술을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그 역시 나중에 여러 차례 노벨상 후보에 오른 대단한 물리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랑주뱅에게는 이미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랑주뱅이 사실 더 문제가 됐던 것은 사망한 마리 퀴리의 남편 피에르 퀴리의 제자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남편을 잃은 마리 퀴리와 가까운 사이였던 랑주뱅은 피에르 퀴리가 죽은 것에 대해서 마리 퀴리를 위로해 주었고 그녀와 연인으로 발전했는데 나중에는 둘만의 공간을 마련해 같이 지냈을 정도로 깊은 관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22. 마리 퀴리, 불륜설이 사실로 드러나며 랑주뱅 아내에게 협박당하고 세상 사람들의 질타를 받아 힘든 시간을 보내다 

불륜을 이어 가던 어느 날 사건이 터집니다.

랑주뱅의 아내가 마리 퀴리와 랑주뱅의 불륜 관계를 알게 되었고 랑주뱅의 아내가 마리 퀴리를 찾아가서 '8일 안에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라고 협박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프랑스의 온갖 신문에는 마리 퀴리가 랑주뱅에게 썼던 편지까지 실리면서 비난이 쏟아지게 됩니다.

기자에 의해서 각색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마리 퀴리가 랑주뱅에게 쓴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만약 당신 아내가 당신(랑주뱅)의 아이를 또 낳는다면 저는 당신과 헤어질 겁니다. 당신(랑주뱅)을 위해 인생과 지위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모욕을 감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에요'

<1910년 신분 '뢰브르'에 실린 편지 구절 중에서>

랑주뱅에게  아내와 사이좋게 지내지 말아라고 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 내용으로 프랑스인들로부터 '외국인이며 여성인 주제에 과학을 하냐'는  온갖 모욕을 당해야만 했고 일부 사람들은 마리 퀴리의 집에 돌을 던져대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피에르 퀴리의 죽음이 마리 퀴리의 불륜 때문에 마차에 몸을 던졌기 때문이라는 선동성 가짜뉴스들까지 난무하게 되며 불륜 사건은 일파만파 번져나가게 됩니다.

결국 마리 퀴리는 두 딸들을 데리고 랑주뱅과 이별 후 피신을 떠나야 했고 죽을 생각을 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23. 마리 퀴리, 당당히 노벨 화학상 수상하기 위해 시상식에 참석하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과학자는 마리 퀴리라며 그녀에게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동료이기도 했던 아인슈타인은 마리 퀴리에게 편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저열한 언론의 시시껄렁한 기사는 무시하라'

마리 퀴리는 세상의 비난에 정면돌파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결국 1911년 마리 퀴리는 당당히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였고 44세의 나이에 라듐 발견 및 추출로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하게 됩니다.

이렇게 남편 없이 단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마리 퀴리는 1914년 프랑스 파리에 라듐 연구소를 열고 라듐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로 합니다.

24. 마리 퀴리, 엑스레이 장비가 실린 구급차 '리틀 퀴리'를 직접 운전하며 부상병을 치료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아수라장이 된 프랑스를 보고 마리 퀴리는 한 가지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엑스레이 장비가 실린 구급차를 만들어서 직접 전쟁터에 나가 부상병을 치료하기로 한 것입니다.

마리 퀴리는 병원에서 속성으로 엑스레이 진단법과 해부학을 배운 후 엑스레이 장비를 갖춘 개조한 구급차를 '리틀 퀴리'라고 부르며 직접 이끌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이때 기부금과 사비를 털어서 리틀 퀴리 20대를 마련했고, 마리 퀴리는 직접 리틀 퀴리를 운전하며 부상병들의 치료에 나섭니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리틀 퀴리의 도움을 받은 부상병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5. 마리 퀴리, 드디어 공식적으로도 인정받았지만 50대에 접어들자 피폭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 퀴리는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서 다시 라듐 연구를 시작합니다.

하딩 대통령과 퀴리 모녀
하딩 대통령과 퀴리 모녀

마리 퀴리의 사연과 연구를 알게 된 미국은 10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고, 그간 마리 퀴리에 대해서 적대시했던 프랑스 내부 분위기도 가라앉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밀랑은 1923년 56세의 마리 퀴리에게 종신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줍니다.

이후 꽃길만 걸었을 것 같지만 마리 퀴리는 50대에 접어들자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마리 퀴리는 오랜 기간 방사능 물질을 연구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수많은 세월을 몰두했고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피폭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라듐을 추출하는 과정 중에는 라듐이 핵분열할 때 발생하는 1급 발암물질로 구분되는 무색, 무취의 라돈 가스를 흡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전신이 쇠약해져서 커다란 이명이 들리고 백내장까지 생기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26. 마리 퀴리 큰 딸 이렌 퀴리 부부 공동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다 

하지만 퀴리 연구소에서는 멈추지 않고 연구가 계속되었고 마리 퀴리를 대신해서 큰딸 이렌 퀴리가 열정적으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렌 퀴리는 스무 살에 소르본 대학에서 물리, 화학, 수학 공부를 끝냈고 어머니 마리 퀴리의 연구실에서 폴로늄 연구를 하면서 박사 학위를 딴 과학 유망주로 발돋움합니다.

이렌 퀴리와 프레더릭 졸리오
이렌 퀴리와 프레더릭 졸리오

이렌 퀴리의 연구는 연구소 동료였던 프레더릭 졸리오와 결혼하면서 날개를 달게 됩니다.

이때 이렌 퀴리 부부는 마리 퀴리의 방사능 연구에서 한 걸음 진보하게 됩니다.

마리 퀴리가 최초로 자연에 존재하는 방사성 물질을 찾아낸 것에 이어 이렌 퀴리 부부는 인공적으로 방사선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에서 방사성 물질을 추출하기도 어려운데 딸 이렌 퀴리가 값도 싸고 대량으로 생산을 해낼 수 있는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들어 내 라듐의 비싼 가격 탓에 방사선 항암치료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준, 방사선 항암치료를 대중화했다는 점에서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렌 퀴리를 '20세기 최고의 연금술사'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이렌퀴리 부부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935년 이렌 퀴리 부부는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5개의 노벨상을 거머쥐며 퀴리 가문은 전 세계적인 노벨상 명문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27. 마리 퀴리 둘째 딸 이브 퀴리 남편 헨리 라부이스 주니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다

이브 퀴리 부부
이브 퀴리 부부
퀴리 가문 노벨상 6개 획득
퀴리 가문 노벨상 6개 획득

마지막 6번째 퀴리 가문의 노벨상은 둘째 딸 이브 퀴리의 남편이자 마리 퀴리의 사위인 '헨리 라부이스 주니어'입니다.

이브 퀴리는 국제기구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미국 외교관인 헨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후 퀴리가문의 둘째 사위인 헨리는 1965년 유니세프의 대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며 퀴리 가문은 총 6개의 노벨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브 퀴리는 어머니, 아버지, 언니, 형부, 남편까지 집안 모든 사람이 노벨상을 탔는데 자신만 타지 못했다면서 집안의 수치라고 농담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브 퀴리는 마리 퀴리의 전기를 써서 전미 도서상을 수상하고 폴란드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브 퀴리 유니세프 활동을 너무 열심한 공을 인정받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기도 합니다.

28. 마리 퀴리, 사망 후 시신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어 납으로 두른 관에 입관되다

안타깝게도 마리 퀴리는 첫째 딸 이렌 퀴리 부부가 노벨상을 받기 1년 전인 1934년 66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딸과 사위들의 노벨상 수상 소식은 끝내 듣지 못하게 됩니다.

마리 퀴리의 공식 병명은 '재생불량성 빈혈'이었지만 방사능에 많이 노출되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마리 퀴리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 위인들의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마리 퀴리 부부의 관
마리 퀴리 부부의 관

하지만 마리 퀴리의 관에는 특별한 처리를 해야 했는데 마리 퀴리의 유해에서 많은 양의 방사능이 검출됐기 때문에 관 안을 납으로 두른 특수한 관에 유해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마리 퀴리가 연구했던 방사성 물질 라듐의 반감기는 약 1600년으로, 마리 퀴리의 연구 노트는 지금도 방사능을 내뿜고 있어 방호 장비를 갖춰 입고 열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방사능에 악영향을 받은 것은 첫째 딸 이렌 퀴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사능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이렌 퀴리는 59세의 이른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29. 퀴리 가문, 오늘날까지 과학 명문가로 명성을 드높이다

마리 퀴리의 손녀
마리 퀴리의 손자
마리 퀴리의 손자
마리 퀴리의 증손자
마리 퀴리의 증손자

하지만 퀴리 가문은 이들의 죽음 후에도 대를 이어서 과학연구를 계속하면서 프랑스 과학 명문가로 이름을 남겨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리 퀴리는 '여자는 열등하다'라는 시대에 태어나서 '여자라서 안 된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갖은 희생을 치르고 무시받고 비난받으면서도 단 한순간도 연구를 향한 열망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열정과 노력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으며 인류 문명의 한 단계 진보를 이끌어 기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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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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