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사생활 2-9(그리스 로마 신화/탐욕이 부른 허기의 끝을 보여주는 데메테르, 에리시크톤, 허기의 여신 이야기)
1. 데메테르, 모든 곡식을 태우는 '불'이 가장 강한 무기이다
데메테르는 '곡식의 신'으로 '풍요'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자비, 자애로움'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플루톤(하데스)은 페르세포네를 욕망하였고 제우스가 작당하여 몰래 그녀를 납치하였다. 그러자 데메테르는 횃불을 들고 밤이며 낮이며 온 땅을 찾아 돌아다녔다'
<아폴로도로스 作 '신화집'>
하지만 이런 데메테르가 한 번 분노를 하면 걷잡을 수 없었고, 딸 페르세포네가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를 당했을 때 '횃불'을 들고 딸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곡식은 불이 닿으면 모든 것이 불타오르게 되기 때문에 곡식의 신인 그녀에게 횃불은 가장 강한 무기이자 분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신들의사생활7
2. 탐욕스러운 인간 에리시크톤, 자애로운 데메테르 여신의 참나무를 베어 분노에 휩싸이게 하다
자애로운 데메테르가 화가 나는데 그 이유는 한 인간 때문입니다.
테살리아 지방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그 앞으로 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지역으로 옥토에 씨만 뿌리면 곡식이 자라나는 데메테르의 축복을 받은 땅입니다.
심지어 바다가 눈앞에 쫘악 펼쳐진 그야말로 신의축복이 함께 하는 그림 같은 곳입니다.
테살리아 지방의 왕 '에리시크톤'은 테살리아 지방의 땅을 모두 가진 왕이자 부자였고,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리시크톤은 풍요로운 곡식을 수확한 이후에도, 데메테르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괘씸한 에리시크톤을 벌하라며 님프들은 데메테르를 찾아가 하소연하지만, 자애롭고 자비로운 성품으로 인해 분노하지 않자 님프들은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에리시크톤은 심지어 만족할 줄 몰랐습니다.
새로운 농경지를 만들기 위해 숲을 다 밀어버리고 이제 더 이상 농경지로 만들 땅이 없자, 바다로 눈을 돌립니다.
테살리아는 해안가에 서로 무역을 하기 위한 마켓이 형성되어 상선들이 줄지어 있었고, 덕분에 사람들로 북새통이 되곤 했는데 에리시크톤은 뱃사람들이 머물 숙박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조성하기 위해 숲을 훼손하는 것을 넘어서서 산을 벌거숭이로 모두 밀어버립니다.
높이는 가늠할 수 없었고 둘레가 6.75m로 성인 남성 3명이 안아야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데메테르 여신이 아끼는 참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우리나라로 치면 성황당과 같이 테살리아지방의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소원을 빌고 함께 하던 곳입니다.
이 신성한 테메테르의 나무 앞에 에리시크톤이 노예 20명을 데리고 와서 노예들에게 나무를 베도록 하자, 노예들이 벌벌 떨며 베기를 두려워했고 에리시크톤은 보란 듯 그들 앞에서 나무를 베려고 하자 나무가 벌벌 떨며 신음하기 시작합니다.
'무리고 비스듬히 내려찍으려 자세를 취하자 데오 나무는 벌벌 떨며 신음하였다. 나뭇잎이며 도토리며 창백해졌고 긴 나뭇가지는 창백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오비디우스 作 '변신이야기'>
에리시크톤은 개의치 않고 나무를 내리쳤는데 나무에서 피가 튀자, 에리시크톤은 고로쇠물이라며 이것을 빨아먹습니다.
돌아선 에리시크톤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고 노예 중 하나가 '당신은 왕도 아니야, 어떻게 신의 나무에 상처를 낼 수가 있어!'라고 외쳤고, 분노한 에리시크톤은 그 노예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찍어 죽여버립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예들이 모두 혼비백산해 도망가버렸고, 에리시크톤은 결국 혼자 남아서 나무를 마저 베어버립니다.
잘린 나무는 쓰러져 주변에 있는 나무들까지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이 님프들에 의해서 데메테르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3. 데메테르, 탐욕스러운 인간 에리시크톤에게 허기의 여신을 보내 끝없는 허기를 주다
여느 때와는 달리 데메테르는 님프들의 말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전 세계에 있는 풀포기들과 나무들이 함께 고개를 숙입니다.
데메테르는 에리시크톤에게 복수를 시전 하며, 님프를 불러 '허기의 여신 리모스'에게 전하라고 편지를 하나 건넵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엉겨 붙어 있고, 눈은 움푹 패어 있으며 얼굴에는 창백함이 입술은 회색빛이 목은 곰팡이가 끼여 꺼칠하며 피부는 말라비틀어져 내장이 비쳐 보였다. 굽은 허리 아래로 엉덩이뼈가 튀어나왔고 배가 있을 곳에는 텅 비었으며...'
<오비디우스 作 '변신이야기'>
허기의 여신은 앙상한 몸으로 배고픔을 하소연하며 마른풀을 좀 씹다가, 돌을 빨다가, 흙을 빨면서 있었는데, 편지를 건네는 님프마저 너무나 공포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풍요의 여신에게 온 편지를 받은 허기의 여신은 내용을 읽고는, 자신이 한번 핥아줘야겠다며 대기와 바람을 타고 에리시크톤에게 갑니다.
'그자의 목구멍과 가슴과 입에 숨을 불어넣었고 그의 혈관에는 배고픔을 흩뿌렸다'
<오비디우스 作 '변신이야기'>
마침 잠에 빠져있던 에리시크톤에게 허기의 여신이 다가가 설태 가득한 혀를 에리시크톤의 입속에 집어넣었고, 그 긴 혀는 식도를 넘어서 위를 한 번 핥더니 다시 한번 왼쪽에 있는 심장에 숨결을 불어넣고는 떠납니다.
4. 에리시크톤,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에 온 재산을 먹는 것에 쓰고 급기야 딸 마저 노예로 팔아버리다
탐욕이 지나칠 때 어떻게 망가지는지 한번 보고 싶다면 이후 에리시크톤의 모습을 보며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잠에서 깬 에리시크톤은 허기짐에 음식을 먹는데 포만감이 없고 공복감이 여전했고, 먹을수록 배가 더 고파 잠도 자지 않고 계속해서 음식을 흡입합니다.
'여러 도시에게도, 아니 한 민족에게도 충분할 만한 양이 단 한 사람을 충족시키지 못했소. 그자는 더 많이 뱃속으로 내려 보낼수록 더 많이 요구했소'
<오비디우스 作 '변신이야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에리시크톤은 그동안 모은 재산을 먹는 것에 모두 탕진하였고, 노예들도 다 도망가고 이제는 왕이 아닌 그냥 비렁뱅이가 되어 버립니다.
급기야 에리시크톤은 단 하나뿐인 가족인 딸마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아무리 탐욕스러운 자라도 딸을 노예로 팔아넘긴 후 먹을 것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던 에리시크톤은 딸 생각에 입 밖으로 음식을 뱉어버립니다.
그때 팔려갔던 딸이 돌아왔고, 배에 실려 팔려 가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기도를 해서 구출되었고, 변신의 능력까지 얻어서 선원으로 변신해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에리시크톤은 살아 돌아온 딸을 또 팔아넘겼고, 팔려간 딸은 아버지 걱정에 또다시 변신을 해서 돌아오기를 무한 반복하다 결국 지친 딸은 도망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5. 에리시크톤, 결국 허기짐에 자신의 온몸을 뜯어먹다 죽음을 맞이하다
결국 딸도 잃고 먹을 것도 구하지 못한 에리시크톤은 잔치집에 찾아가 구걸하다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하였고, 자신에게 울며 다가오는 고양이마저 잡아먹고 맙니다.
그때부터 마을에 고양이들이 사라지고, 곤충이 사라지고, 개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마을의 생명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던 에리시크톤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감금당합니다.
'악의 힘이 모든 물질을 삼켜버렸고 심각한 질병에게 새로운 음식을 주자 그는 자신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더니 불행하게도 몸을 먹기 시작하였다'
<오비디우스 作 '변신이야기'>
감금당해서도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에리시크톤은 도끼를 발견하고 자신의 다리를 잘라 뜯어먹고, 한쪽 팔을 뜯어먹고, 남은 한쪽 팔은 자를 수 없어 그냥 입으로 뜯어먹었는데그래도 허기가 지니 자신의 혀를 깨물어 먹었고 에리시크톤은 과다출혈로 결국 죽게 됩니다.
어쩌면 만족함을 모르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스스로 자신의 살을 뜯어먹는 에리시크톤과 닮아 있지 않나 하는 엄중한 경고를 그리스 로마 신화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6. 에리시크톤과 데메테르, 이름의 의미
에리시크톤 이야기는 '그가 우리 모습 같다, 인간의 탐욕을 보여주는 것 같다'라고 생각하게 하며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에 경종을 불러일으킵니다.
사실, 에리시크톤이라는 이름 자체가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에리시'는 '파괴하다'라는 뜻이고, '크톤'은 '땅'이라는 뜻이라, 에리시크톤은 '땅을 파괴하는 자' 좀 더 넓은 의미로 '자연을 파괴하는 자'를 뜻합니다.
즉, 땅과 자연을 파괴하는 자는 전부 다 '에리시크톤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데메테르'의 경우 '데'와 '메테르'를 결합한 이름인데 '데'는 '대지, 땅'을 의미하고, '메테르'는 '어머니'라는 뜻이라, 데메테르는 '대지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즉 '대지인 어머니'라는 뜻도 되어 땅이 그냥 땅이 아니라 우리를 길러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땅을 어머니를 대하듯이 조심스럽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교훈이 신화에 잘 녹여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예술 작품 속 데메테르의 모습
위 작품은 '밀레'의 <여름,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라는 그림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수확을 가을에 한다고 생각하는데, 프랑스는 밀 수확을 여름에 합니다.
데메테르 여신은 밀로 관을 만들어서 쓰고 있고 오른손에는 '낫'을 쥐고 있습니다.
그림 속 데메테르는 그냥 언뜻 보기에는 풍요로움 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며, 강렬하다 못해 아마존 여신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가 아는 데메테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기는 합니다.
'밀레'가 생각했을 때 '진정한 농부의 수호신이라면 농부를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농부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짜 데메테르이다'라고 생각해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하나 더 밀레의 의중을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이 왼손에 들려 있는 '키'입니다.
'키'는 추수 기간 동안에는 항상 품에 끼고 다니는 필수품으로 데메테르 여신이 농부들과 함께 추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더라도 화가에 따라서 작가에 따라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8. 곳곳에 존재한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 신전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전은 그리스, 로마 거의 모든 지역에 존재했다고 보면 됩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엘레우시스의 데메테르 신전'인데 현재도 계속해서 발굴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엘레우시스에 가면 엘레우시스 언덕이 있는데 소박한 크기이기는 하지만 '높은 도시'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 중심이나 배후에 있던 언덕을 이르는 '아크로폴리스'중 하나로, 그 맞은편에 데메테르 신전이 있습니다.
데메테르 신전 가기 전에 데메테르와 앙숙이었던 하데스 신전도 있습니다.
엘레우시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 밑에 동굴이 있는데, 저곳이 하데스 신전 '플루토니온'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승의 신 하데스가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해서 저승으로 내려갔는데, 바로 저기가 저승으로 내려가는 동굴이라고 알려져 있고, 동굴 바닥을 자세히 보면 실제로 구멍이 존재하고 그 구멍이 저승으로 가는 구멍이라고 불립니다.
저곳에서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두 여신을 주신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의 엘레우시스에서 행해진 비밀 종교의식인 '엘레우시스 밀교의식'이라는 곳이 벌어졌는데 이 의식을 통해 딸을 잃은 슬픔을 함께 경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여사제 중의 한 명이 페르세포네 역할을 했고 그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구멍이 굉장히 작아 몸집이 작고 마른 여사제가 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출처: 설민석/신들의사생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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