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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돈벌러

고흐,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서양 미술사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색채의 마술사(1) 탄생부터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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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서양 미술사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색채의 마술사(1) 탄생부터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까지

1. 고흐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의 성, 반 고흐 

 

때는 바야흐로 산업혁명으로 격동기를 맞았던 19세기, 서양 미술사에는 엄청난 위기가 찾아옵니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모나리자>,<엘리자베스 1세>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모나리자>,<엘리자베스 1세>

바로 최초의 사진기 발명으로 초상화와 같이 눈에 보이는 데로 그렸던 그림들이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진기의 등장으로 화가들은 직업을 잃을 위기에 놓이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구군분투했고, 그리고 이 시기 지금까지도 전 세계 가장 유명한 미술계 최고의 셀럽이자 전설이 된 한 화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에 그가 이름을 알린 것은 그림이 아니라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대체 어떤 사건인지 당시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관련 기사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관련 기사

바로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네덜란드 출신의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입니다.

독일 고흐
독일 고흐

이름이 빈센트, 성이 반 고흐(van Gagh)로 'van'은 '~에서 왔다'라는 뜻으로 반 고흐는 '고흐에서 왔다'는 의미가 됩니다.

고흐는 네덜란드와 독일의 접경지인 '고흐'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반 고흐'라는 성을 썼고 실제 그의 이름은 '빈센트'이지만 우리에게는 성인 반 고흐가 더욱더 익숙하기 때문에 오늘도 고흐라고 칭하며 이야기를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2. 고흐, 프랑스 , 이탈리아 등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

고흐가 그린 프랑스 생 레미&#44; 프랑스 파리&#44; 프랑스 아를
고흐가 그린 프랑스 생 레미, 프랑스 파리, 프랑스 아를

특히 프랑스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고흐는 프랑스에서 오랜 기간 거주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프랑스 사람들은 이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컸습니다.

르네상스 미술로 알려진 미술의 본고장 이탈리아 미술사에서도 고흐는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유명한 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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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고흐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화가입니다.

그런 고흐 그림의 가치는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고흐 &lt;사이프러스가 있는 과수원&gt;
고흐 <사이프러스가 있는 과수원>

고흐의 대표작은 경매에 거의 나오지 않아서 정확한 작품의 가치를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2022년 11월 경매에 고흐의 <사이프러스가 있는 과수원>이라는 작품이 등장합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아를'이라고 하는 남부 프랑스에 막 도착하고 얼마 후에 봄기운이 완연한 4월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이 작품의 낙찰가는 얼마였을까요?

이 그림은 약 1억 1천7백만 달러로 한화로 계산하면 약 1600억 원가량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고흐의 그림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낙찰가를 받았기 때문에 고흐 그림의 가치가 인정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 '준데르트'

지금은 이렇게 최고의 찬사를 받는 고흐이지만 19세기 당시에는 그림 한 점 팔기 힘들었던 무명의 화가에 불과했습니다.

고흐가 그린 네덜란드 풍차 그림
고흐가 그린 네덜란드 풍차 그림
네덜란드 준데르트
네덜란드 준데르트

고흐의 삶이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고흐의 고향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는 고흐 작품 속 실제풍경과 발자취가 곳곳에 남겨져 있습니다.

네덜란드 준데르트에는 대표적인 플라워 퍼레이드가 있는데 '코르소 준데르트(Coroso Zundert)'라 불리는 이 축제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행사로 네덜란드 '빌헬미나'여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936년부터 시작된 꽃차 퍼레이드입니다.

고흐가 인생 첫 좌절을 겪은 곳 또한 그의 고향 준데르트였습니다.

고흐 가족관계도
고흐 가족관계도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의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고흐가 태어난 준데르트는 네덜란드와 벨기에 사이에 위치한 농촌 마을로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가 목회 활동을 위해서 터를 잡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준데르트에는 가톨릭 신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부모님은 종교적으로 매우 엄격했고, 종교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고흐는 가족들끼리만의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4. 고흐, 소극적인 성격 탓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다 

이때 고흐는 미술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흐가 11살에 그린 그림
고흐가 11살에 그린 그림

위 그림은 고흐가 11살에 그린 그림으로 당시에는 평범했던 수준의 그림실력으로 보입니다.

사실 어린 고흐에게 미술은 가장 큰 관심사는 아니었습니다.

고흐의 관심은 오로지 그의 교육에 열을 올렸던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흐가 11살에 기숙학교에 들어간 뒤 그때부터 그의 외톨이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고흐는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때부터 수차례 부모님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썼지만 부모님은 이를 묵살합니다.

이후 고흐는 입학과 전학을 반복하면서 여러 학교를 전전했지만 결국 한 곳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부모님 애정에 대한 결핍 등의 감정들이 고흐의 삶에 깊게 뿌리 박히게 됩니다.

5. 16세 고흐,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아트 딜러'로 일하며 그림 보는 안목을 키우다

그런데 이때 좀체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고흐에게 구원의 손길이 전해지게 됩니다.

고흐의 큰아버지
고흐의 큰아버지

1869년 16살이 된 고흐는 큰아버지의 소개로 '아트 딜러'라는 첫 직업을 얻게 됩니다.

'화상'이라고도 하는 당시 아트 딜러는 미술 작품을 사고팔거나 미술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직업입니다.

17세기 대항해시대 네덜란드가 해상무역의 중심지가 되면서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투기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시기에 미술 분야에도 투기가 몰리면서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런 분위기가 전통적으로 이어지면서 고흐가 아트 딜러로 일하던 19세기까지 미술에 대한 투기적 수요가 계속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2년 이상 다니지 못했던 고흐가 돈을 버는 직업 중에서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했던 유일한 일이 바로 이 아트 딜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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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필화랑 지점
구필화랑 지점

고흐가 일했던 '구필화랑'은 네덜란드 헤이그, 벨기에 브뤼셀,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에까지 지점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꽤 잘 나가는 화랑이었습니다.

고흐의 큰아버지가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 동업자였었고 조카 고흐에게 같이 일할 것을 추천했던 것이었습니다.

구필화랑 헤이그&#44; 파리 지점 내&#44; 외부
구필화랑 헤이그, 파리 지점 내, 외부

고흐는 이때 구필화랑의 헤이그 지점과 파리 지점등에서 근무했었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외관을 통해 알 수 있듯 귀족, 돈 많은 상인이나 부르주아 등 상위계층이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고흐는 아트 딜러로 일하며 한 달에 약 100프랑 정도를 벌었는데 연봉으로 따지면 대략 1,000만 원 정도였고, 당시 일반 근로자가 대략 500만 원가량의 평균 연봉을 벌었던 것과 비교하면 꽤 높은 소득을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살 고흐의 모습
19살 고흐의 모습

당시 아트 딜러로 잘 나가던 19살 고흐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16살부터 23살까지 총 7년 동안 화랑에서 근무를 했던 것으로 보아 고흐에게 그림을 파는 일은 꽤 적성에 맞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흐는 미술대학을 나오지 못했지만 아트 딜러로 일하면서 수준 높은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고 이 과정에서 그림을 보는 안목까지 넓히게 됩니다.

6. 고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밀레의 삶과 작품에 감동받다

고흐&lt;오스틴 프라이어스&gt;
고흐<오스틴 프라이어스>

고흐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설명하기 위해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고흐가 가족과의 소통을 위해 미숙하지만 꾸준히 그림을 그려오던 어느 날, 고흐는 운명적인 그림을 만나게 됩니다.

밀레&lt;만종&gt;
밀레<만종>

바로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대표작인 <만종>(1857~1859)이라는 그림입니다.

밀레는 프랑스의 화가로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대변하는 그림을 그려 '농민의 화가'라 불렸습니다.

<만종>은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낸 농부 부부가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고흐는 이 그림을 보고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고흐는 구필화랑에서 일하면서 헤이그와 런던, 파리로 옮겨 다니는데 대부분 대도시이다 보니 빈부 격차가 매우 컸었고 특히 런던에서 지내던 곳은 산업혁명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과 노동자들이 많이 지내던 곳이었고, 고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빈민층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쓰이고 아팠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했던 밀레의 삶과 작품에 감동을 받았고 고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7. 고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그런데 이렇게 빈민에게 연민을 느낀 고흐는 예상보다 더 빨리 그들과 함께 있을 기회를 찾게 됩니다.

고흐가 23살이 되던 해 상사와의 불화로 화랑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하게 됩니다.

고흐는 잠시 방황했지만 밀레에게 받은 감동과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때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는데 바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목사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목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신학대학교에 입학해야 했고, 입학을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안타깝게도 신학 대학 입학의 필수과목인 라틴어와 그리스어 과목에서 과락을 하게 되어 불합격하게 됩니다.

8. 25살 고흐, 임시 선교사가 되어 벨기에 보리나주로 떠나다 

보리나주
보리나주

그러나 고흐는 목회에 대한 열정을 눈여겨보던 지역 관계자에게 6개월간 임시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되어 드디어 25살이 되던 1878년 벨기에 보리나주로 떠나게 됩니다.

벨기에 보리나주는 유럽에서도 악명 높은 탄광지대로 그곳 탄광촌의 사람들은 고흐의 예상보다 훨씬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흐 &lt;석탄을 나르는 사람들&gt;
고흐 <석탄을 나르는 사람들>
고흐&lt;눈 속에서 석탄 부대를 나르는 사람들&gt;
고흐<눈 속에서 석탄 부대를 나르는 사람들>

당시 고흐는 탄광촌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석탄을 나르는 사람들>, <눈 속에서 석탄 부대를 나르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남깁니다.

이곳 사람들은 무거운 석탄자루를 나르면서 누구보다 고된 노동을 하고 있었고, 이 모습을 본 고흐는 자신의 물건까지 몽땅 가난한 나누어줬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탄광의 그리스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9. 동생 테오, 고흐가 직업 화가로 일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주다 

하지만 목사인 아버지마저 당시 노동자들에 보인 고흐의 행동이 지나치게 광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고흐는 이전부터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부모님은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 들은 고흐는 1년 동안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고 소식을 딱 끊어버립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고흐와 지내던 동료들마저도 고흐의 광적인 헌신에  그를 부담스러워하며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고흐는 홀로 남겨져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고흐 인생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준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동생 '테오 반 고흐'입니다.

테오는 고흐처럼 네덜란드에서 아트 딜러로 일하고 있었는데 고흐와 사이가 좋았던 그는 방황하고 있었던 고흐에게 직업 화가를 추천합니다.

그리고 테오는 수입이 없는 형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마음 편히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경제적인 지원까지 약속합니다.

결코 금수저 집안이 아니었지만 고흐의 동생 테오는 아트 딜러로서 꽤 성공을 거두어서 연봉 12,000프랑을 벌었고,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억 2천만 원가량이나 될 정도로 고수익자였습니다.

그래서 테오는 고흐에게 한 달 약 145만 원정도를 생활비로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고흐와 테오가 평생 주고받은 것은 바로 편지였고, 테오는 고흐에게 편지와 함께 돈을 보내줍니다.

고흐와 테오가 평생을 주고받은 편지
고흐와 테오가 평생을 주고받은 편지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그리고 고흐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또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는지 때로는 편지에 드로잉까지 곁들여가며 동생 테오에게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친애하는 빈센트(고흐), 형은 내게 빚진 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난 형이 갚고 싶어 하는 돈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형이 걱정 없이 그림에 전념하는 거야, 형을 항상 응원하는 테오가'

편지를 받은 테오는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답장과 함께 생활비를 보내주면서 고흐가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고흐와 테오 사이에 남아 있는 편지는 약 900여 통이고, 고흐가 태오에게 보낸 편지만 약 650통 이상될 것으로 추측됩니다.

테오는 고흐의 편지를 잘 보관했었지만, 고흐는 편지를 대부분 잃어버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0. 27세 고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다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고흐는 방황을 끝내고 직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고흐는 테오에게 1880년 9월 '이제 나는 나의 길을 찾았어' 라며 자신의 다짐을 담은 편지를 전달했고, 이때 고흐의 나이는 27살이었습니다.

화가가 되기로 한 고흐는 그동안의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들이 있는 네덜란드 '에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고흐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작업실을 만들고 그림에 집중하면서 부모님과의 관계도 조금씩 회복해 갑니다.

11. 고흐, 가족들이 결코 용납할 수 있는 사랑을 이어가다

하지만 고흐가 사랑에 빠진 여인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고흐가 사별한 사촌 누나를 보고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사촌 누나 '케이 보스'는 고흐보다 7살이 더 많았고 8살 된 아들 '얀'까지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친척, 친구들까지 모두가 그녀와의 사랑을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사촌 누나는 고흐를 거절하고 본인의 고향으로 돌아가버렸는데 고흐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녀의 고향까지 따라가 버렸고 그곳에서 충격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고흐는 등불 안으로 손을 짚어 넣고 불 속에 손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만나달라며 사촌 누나에게 협박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사촌 누나가 기겁하게 되고, 가족들이 말리자 고흐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고흐의 아버지는 고흐를 내쫓고 맙니다.

 

할 수 없이 고흐는 고향집에 돌아온 지 1년 만인 1881년 12월 가족의 품을 떠나 네덜란드 연안도시인 헤이그에 정착하게 됩니다.

고흐는 헤이그에 도착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또다시 가족들과 불화를 겪게 됩니다.

헤이그에서 고흐가 또다시 사랑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심하게 반대를 하는데, 고흐가 사랑했던 여인이 '시엔'이라는 '매춘부'였기 때문입니다.

고흐가 그린 시엔과 딸의 드로잉
고흐가 그린 시엔과 딸의 드로잉

시엔은 당시 고흐보다 4살 연상이었고 5살짜리 딸을 혼자 키우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매춘으로 임신까지 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이번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시엔과 그녀의 자식을 보살피기로 결심합니다.

고흐가 시엔의 어떤 부분 때문에 마음을 이토록 빼앗겼던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고흐&lt;슬픔&gt;
고흐<슬픔>

그림 아래쪽에 슬픔(Sorrow)이라는 글씨가 남겨져 있어 제목도 <슬픔>인 작품입니다.

고흐의 사랑은 아름다움이나 찬란함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여성은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았고 매춘으로 인한 임신으로 배는 튀어나와 있고, 가슴은 늘어져 있습니다.

머리를 팔 안에 수그려 얼굴을 감추고 있는데 아마도 고흐는 자신처럼 외롭고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시엔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고흐&lt;슬픔&gt; 작품 아래 글귀
고흐<슬픔> 작품 아래 글귀

그림 아래쪽의 글귀를 보아 '시엔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이고, 고흐는 '자신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이 책임감이 오히려 기뻤던 것입니다.

이를 정신과에서는 '구원 환상'(rescue fantasy)이라고 하며, 이것은 곤경에 처한 누군가를 단순히 돕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삶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랑에 빠진 고흐를 가족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이런 가족들의 압박은 고흐에게 엄청난 심적인 압박을 줍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고흐가 돈을 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테오가 보내 준 생활비로 시엔과 자녀,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까지 돌보아야 했고 형편은 점점 악화됩니다.

결국 시엔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시 매춘을 시작하게 되었고 화가 난 고흐는 시엔과의 사랑을 끝마치게 됩니다.

12. 30세 고흐, 노동자들을 그리며 진실된 삶을 느끼기 시작하다 

1883년 30세가 된 고흐는 그림을 시작한 지 3년 차에 접어들게 되는데, 3년 동안 이룬 것 없이 가족들에게 인정도 받지 못한 채 혼자 남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때 고흐는 그림에 몰두하게 됩니다.

고흐 &lt;감자 먹는 사람들&gt;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이 시절 고흐의 노력이 집대성된 그의 대표작 <감자 먹는 사람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유명한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고흐가 '나의 첫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가졌던 그림입니다.

고흐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고흐가 남긴 편지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이 노동을 통해 어떻게 그들의 음식을 얻었는지를 그리고 싶었다. 나는 문명인들과 분명히 다른 이들의 생활 방식에 대한 느낌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면서 감자를 캐고 돌아와 그 손으로 찐 감자를 먹는 모습에서 고흐는 삶의 진실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하루 종일 감자를 캔 투박한 손으로 감자를 먹는 모습을 그림으로서 노동을 귀하게 여기는 고흐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하루 종일 일한 노동자들의 고된 손이 너무나도 잘 표현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기 고흐는 본격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고흐가 그린 노동자들의 초상화
고흐가 그린 노동자들의 초상화

1884~1885년 겨울 동안 고흐는 무려 40여 점이 넘는 노동자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감자 먹는 사람들과 살았고 호흡했다'

이렇게 말했을 정도로 가난한 노동자들은 고흐의 그림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하지만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판화로 다시 제작해서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화풍과 달리 '왜 이렇게 어둡고 우울한 그림을 그렸냐'며 혹평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흐는 그림에 열정을 쏟아부었지만 스스로의 만족과는 달리 그의 그림은 사람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3. 33세 고흐, 프랑스 파리에서 '색(色)'을 만나다

다양한 색채의 작품을 보고 배우고자 그가 선택한 곳은 바로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결심이 선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연락을 취했고 그와 함께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정착하게 됩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는 풍요가 깃들고 예술과 문화가 번창했던 '벨 에포크'의 시대였고 이것은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입니다.

 이 시기 파리는 런던, 베를린과 함께 유럽을 대표하던 도시였고, 1855년과 1867년 그리고 1878년 이렇게 세 번의 파리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파리는 중세의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에펠탑
에펠탑

그리고 1887년부터 에펠탑이 건축되며 파리의 모습이 더욱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1887~1889년 에펠탑 준공 전후로 파리에는 세계의 핫한 트렌드가 몰려들었고, 현대의 도시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됩니다.

예술가들은 특히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몰려들었습니다.

몽마르트르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고지대인 지역으로 예술적이고 유흥가가 발달한 장소이며 현재도 예술가들로 북적이는 곳입니다.

몽마르트르에서 바라본 파리 전경
몽마르트르에서 바라본 파리 전경

몽마르트르는 평지였던 파리에서 유일하게 언덕에 위치한 탓에 집값이 저렴했고, 도시의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고흐처럼 가난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또한 파리 도심은 술값이 비쌌는데 몽마르트르는 상대적으로 술값이 저렴했습니다.

고흐&lt;압생트와 카페 테이블&gt;
고흐<압생트와 카페 테이블>

벨 에포크 시절 유럽에서 유행했던 증류주로 '녹색 요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던 술 '압생트(Absinthe)'는 싸고, 독하다는 특징을 지녔습니다.

압생트를 마시고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
압생트를 마시고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
압생트를 마시고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
압생트를 마시고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

압생트는 알코올 도수가 무려 70도였고, 그 당시에는 '테레벤'이라는 환각 성분이 들어가 있어 이 술을 마시면 몽롱한 기분이 들고 환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압생트를 마시고 이 기분을 느끼면서 예술적 영감을 얻기도 했는데 고흐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물랑루즈
물랑루즈

자연스레 몽마르트르에는 술집과 홍등가가 발달하게 됐습니다.

이때 최초의 카바레인 '물랑루즈'가 생기게 되는데 마시고 즐기는 세계 최초의 극장식 카바레로 예술가들이 예술을 꽃피우던 장소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실제 물랑루즈의 댄서들
실제 물랑루즈의 댄서들

물랑루즈는 '캉캉'이라는 춤의 탄생지 이기도 합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숙함이 미덕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이 다리를 드러내 보이고 춤을 춘다는 것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캉캉을 추는 댄서들은 노출에 관대한 편이었고 그녀들은 예술가들에게 누드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는데 모델비가 없어서 자화상을 그려야 했던 가난한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14. 인상주의, 파리를 뒤흔든 새로운 화풍이 탄생하다 

이와 같은 몽마르트르만의 장점이 점차 입소문을 타면서 더 많은 예술가들로 붐비게 됩니다.

에두아르 마네
에두아르 마네

이때 몽마르트르를 찾은 대표적인 화가는 '에두아르 마네'입니다.

당시 마네에게는 기존에 유행했던 사실적인 그림들을 사진기가 대체함에 따라 사실적인 묘사를 뛰어넘는 세러은 화풍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마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현장에서 자신이 느낀 감동을 화폭에 담으려 노력했고 그리고 이때, 파리를 뒤흔든 새로운 화풍이 탄생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발생한 사실적인 묘사의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화가 스스로 빛과 색을 새롭게 해석하는 미술 사조인 색채 묘사의 혁명 '인상주의'가 바로 이때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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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이라는 그림은 인상주의를 이야기할 때 굉장히 중요하게 보는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입니다.

클로드 모네
클로드 모네

정숙함이 미덕이던 시절에 나체의 여성이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은 파격 그 자체였고, <풀밭 위의 점심>이 1860년대에 파격이었다면 1870년대 또 한 번 파격을 가져온 화가 있었으니 바로 '클로드 모네'입니다.

&#39;모네&#39;의 &lt;인상&#44; 일출&gt;
'모네'의 <인상, 일출>

'모네'의 <인상, 일출>이라는 이 그림은 자유롭고 빠른 붓터치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모네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빛을 남기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뭔가 그리다 만 것 같은' 모네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에게 당혹스러워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 화가들

이때 이런 모네의 움직임에 동조하며 인상주의 화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인상파 화가들에 적대적인 신문기사
인상파 화가들에 적대적인 신문기사

하지만 당시 신문들의 반응은 상당히 매서웠고, 게다가 그림을 본 한 평론가가 '마네의 그림은 마치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납작하다.  모네의 그림은 벽지 밑그림만도 못한 그림! 조잡한 낙서화'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인상주의 화가들은 그들의 그림을 인정받으면서 파리를 대표하는 화가로 자리매김 해나가게 됩니다.

15. 고흐,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으로 화사한 색채가 두드러진 파리의 모습을 담기 시작하다 

 바로 인상주의가 파리를 뒤흔들던 이 시기 고흐가 파리를 찾게 됩니다.

동생 테오와 몽마르트르에 터전을 잡은 고흐는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고흐의 그림에는 변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고흐&lt;파리 풍경&gt;&#44; &lt;클리시 대로&gt;
고흐<파리 풍경>,  <클리시 대로>

<파리 풍경>은 인상주의 화가를 만나기 전에, <클리시 대로>는 인상주의 화가를 만난 후에 변화를 시도한 시기에 그린 그림입니다.

고흐<몽마르트르의 풍차와 시민농장>
고흐<파리 성벽의 문>
고흐&lt;쿠르브부아의 다리&gt;
고흐<쿠르브부아의 다리>

기존에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어둡고 묵직한 그림과는 달리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난 후 고흐의 파리 시절의 그림은 화사한 색채가 두드러집니다.

인상주의 영향으로 선명한 색채의 물감을 다른 색과 섞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서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담아냅니다.

16. 고흐, 화구상 '탕기 영감'의 지원을 받다 

이렇게 고흐는 파리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됩니다.

하지만 동생 테오에게 생활비를 받았어도 늘 부족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물감'입니다.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게 되면서 더욱 물감이 귀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고흐에게 물감이나 화구를 내어주는 조력자가 등장합니다.

고흐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그의 초상화를 그려줬는데 그림 속 인물은 파리의 화구상이었던 파리의 '탕기 영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잔, 르누아르, 모네, 고갱 등 유명한 화가들이 탕기 영감의 단골이었는데 탕기영감은 동생 테오와 함께 고흐를 응원했던 든든한 지지자였습니다.

17. 고흐, 화려한 색채의 일본 판화로 만든 풍속화 '우키요에'에 빠지기 시작하다 

고흐&lt;탕기 영감의 초상&gt;
고흐<탕기 영감의 초상>

탕기 영감을 그린 화려한 색채의 고흐의 그림 <탕기 영감의 초상>이라는 그림을 보면 유럽 감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낯선 그림이 눈에 띕니다.

탕기 영감 뒤로 '게이샤, 후지산'등의 모습을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우키요에
우키요에

이것은 인상주의와 함께 당시 고흐가 빠져있었던 '우키요에'라고 하는 것으로 이것은 일본의 판화로 만든 풍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키요에는 주로 여인과 가부키 배우, 풍경 등을 그리고 색감이 강렬한 것이 특징입니다.

사실 고흐는 파리에 오기 전에 일본의 주요 무역항이었던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일본 미술을 이미 접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리고 고흐가 파리를 찾았을 당시에는 이미 세계 박람회를 통해서 일본 미술이 파리에까지 전파되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고흐는 이 시기에 우키요에에 더욱더 빠져드게 되고 이를 담은 여러 그림을 남겼고, 심지어 여러 작품을 모사했습니다.

히로시게&lt;가메이도의 매화정원&gt;&#44; 고흐&lt;꽃핀 매화나무&gt;
히로시게<가메이도의 매화정원>, 고흐<꽃핀 매화나무>
고흐&lt;오이란&gt;
고흐<오이란>

<오이란>이라는 이 그림은 파리에 오기 전 그림과 비교해 보면 색감과 구도, 그림 톤 등에서 굉장히 과감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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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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