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절규>로 대표되는 표현주의의 거장, 죽음의 공포를 그림으로 승화시키다
1. 어린 뭉크,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신체적, 정서적 학대로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다
미술가들에게 있어서 어릴 때의 경험들은 그들의 작품에 반영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에드바르트 뭉크'는 슬픔과 절망을 다룬 작품들이 많고, 이는 그의 삶과 관련이 깊습니다.
뭉크는 평생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뭉크는 태어날 때부터 류머티즘을 앓았고 평생 열병과 관절염의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 소년 뭉크를 더 아프게 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뭉크가 5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뭉크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밤마다 주로 살인, 죽음, 유령 등이 등장하는 공포 소설을 읽어주면서, 아이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각인시키곤 했습니다.
뭉크 아버지의 이상행동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런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아이들을 꾸짖기까지 합니다.
'너희는 매번 신의 뜻을 여기는 악마이기 때문에 충격요법을 받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 돌아가신 엄마가 천국에서 너희를 지켜보면서 슬퍼하고 있다. 기도 중에 너희 엄마를 만났는데 너희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엄마가 때리라고 시켰다'
이처럼 뭉크의 아버지는 어린 뭉크에게 공포와 불안을 주입시켰고 뭉크는 이런 폭언과 폭행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큰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뭉크 아버지는 뭉크에게 신체적 학대뿐만 아니라 정서적 학대를 일삼았고 아이는 보통 부모의 행동을 보고 거울삼아 배우며 성장하는데 어린 뭉크에게 지속적으로 공포와 불안감을 주었기 때문에 불안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어 뭉크는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뭉크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로 인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세계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삶과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실제 이 시기에 뭉크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환영에 시달렸고 자신의 방 천장에 악마가 남겨놓은 말굽 자국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 뭉크의 눈에 나타난 악마는 '말의 발을 가졌고 큰 뿔이 나있고 꼬리가 있는 검은 형체였다'라고 기억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뭉크는 어린 시절 내내 공포에 사로잡힌 채 극도로 불안한 나날을 보냅니다.
2. 누나 소피에의 죽음과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원 입원이 연달아 벌어지며 뭉크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다
이런 상황에서 뭉크는 한 살 터울의 누나 '소피에'를 의지했고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이모 '카렌'이 집안 살림을 돌보았고 어둡기만 한 뭉크의 곁에도 의지하고 믿을 만한 어른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1877년 뭉크가에 또 한 번 죽음이 닥치고 맙니다.
뭉크가 엄마처럼 아끼고 따랐던 누나 소피에가 15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똑같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누나의 죽음은 뭉크에게 평생 잊히지 않는 비극으로 남았고, 이 광경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1893년 그린 <병실에서의 죽음>이라는 그림으로 실제로 뭉크의 누나 소피에가 숨지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늘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에 어느 날 의자에 앉고 싶었던 소피에는 '의자에 앉고 싶다'라고 말했고 의자에 앉은 소피에는 '우리 함께 좋은 시간 보냈는데, 나는 더 살고 싶다'라고 말하고 의자에 앉은 채 세상을 떠납니다.
누나 소피에가 위쪽 의자에 소피에가 앉은 채 죽어있고, 의자 양옆에 기도하고 있는 뭉크의 아버지와 가족들을 돌본 카렌 이모가 있습니다.
앞쪽으로 뭉크의 여동생 잉게르와 라우라고 있고, 왼쪽 뒤편으로 두 남자 중 맨 왼쪽에 벽에 손을 올리고 우는 사람이 남동생 안드레아스이고 여동생 잉게르 뒤에서 얼굴을 돌리고 있는 사람이 뭉크입니다.
뭉크는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누나의 죽음이 슬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작품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소피에가 숨졌던 1877년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16년의 세월이 흐른 뭉크가 그림을 그리던 시점인 1893년의 가족들 모습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뭉크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소피에가 떠나던 그 순간, 그 병실을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소피에의 죽음은 이처럼 뭉크와 가족들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를 미치게 만들었다면 누나 소피에의 죽음은 당시 14살의 소년이었던 뭉크를 패닉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누나 소피에의 죽음 이후에 여동생 라우라마저 정신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고 나중에는 점점 더 그 정도가 악화돼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라우라는 처음에는 정면을 응시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고, 길거리에서 자고 있기도 하고, 망상과 환영에 시달렸는데 그녀는 '조현병'을 추측되는 증상들을 보입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치료 방법이 없었고, 입원 치료가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뭉크는 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죽음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의지했던 누나마저 잃고 여동생도 미쳐가기 시작하면서, '다음으로 죽게 될 사람은 나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뭉크는 이런 지워버리고 싶은 죽음의 공포를 외면하지 않고 반대로 행동하며 죽음을 더 강렬히 기억해서 자신의 예술 세계의 핵심주제 적극적으로 반영합니다.
3. 뭉크, 그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하며 화가의 길로 들어서다
이 힘든 시기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집안을 돌보던 카렌 이모가 집안일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려 파는 모습을 보고 그림에 흥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당시 안정적이라고 여겨졌던 직업인 건축가가 되거나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고, 뭉크도 아버지의 바람대로 1879년 15살의 나이에 기술전문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런데 워낙 잦은 병치레로 수업도 빠지는 날이 많았고 시간이 갈수록 그림을 향한 열망이 커져 간 뭉크는 1880년 16살 뭉크는 기술학교를 자퇴하게 됩니다.
다음 해인 1881년 17살 때 크리스티아니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뭉크는 비로소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4. 뭉크, 등단하자마자 독일 미술계에 '뭉크 스캔들'을 일으키다
뭉크의 작품들이 공개되자마자 베를린 미술계는 발칵 뒤집힐 정도였고, 이를 두고 추후에 '뭉크 스캔들'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당시 베를린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으로는 <환상>, <우울>, <여름밤의 신비>등 암울하고 섬뜩한 그림 일색이었습니다.
당시 뭉크의 전시회를 찾았던 사람들이 '악령이 들린 그림이다'라고 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신문기사의 제목에는 '지옥의 그림이다'라는 표현까지 쓰기도 했으며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기운에 전염될지 모르니 관람에 주의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독일 프랑크푸르터 신문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 하나가 고상한 부르주아 미술가들 사이에 난입했다'면서 '미술이 위험에 빠져 있다'라는 식의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아름답고 예쁘고 리얼하게 그림을 그리던 당시 화풍과는 맞지 않는 뭉크의 그림에 동료 화가들조차도 '이런 쓰레기를 당장 치워라'라고 화를 낼 정도였고, 평론가들은 '습작이 아니라 졸작'이며 뭉크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베를린에서 뭉크의 그림이 이렇게까지 혹을 받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격앙된 반응들은 단지 뭉크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과 새로운 모더니즘 화풍이 충돌하던 중 그 가운데 뭉크가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독일 베를린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있던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안톤 폰 베르너가 그린 <독일제국의 선포>라는 그림인데 베르너는 전통 아카데미 화풍을 대표하면서 당시 독일에서 가장 성공한 화가였고, 사실적인 역사화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구스타프 벤첼의 <아침 식사>라는 작품으로 벤첼은 뭉크와 같은 선생님 아래서 공부했으며 그는 사진보다 더 리얼한 '리얼리즘'이라는 화풍의 그림을 그려 당시 독일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얼리즘은 프랑스 파리 사실주의 미술의 선구 쿠르베가 이미 30년 전부터 하고 있었던 스타일입니다.
이미 30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했던 스타일이 독일에서는 아직까지 유행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독일은 모더니즘 화풍의 미술 발전이 상대적으로 더뎠던 지역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출품된 뭉크의 그림들은 독일 미술계에서는 충격적인 작품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논란이 너무 거세지니 베를린 미술 협회 회원들이 투표를 하게 됐고 뭉크의 전시회 중단에 대한 찬성 120표, 반대 105표로 뭉크의 개인 전시회는 결국 일주일 만에 중단됩니다.
이것이 '뭉크 스캔들'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전말입니다.
5. 뭉크 스캔들, 엄청난 노이즈 마케팅으로 모더니즘을 갈망하던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다
자신의 그림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와 같은 격렬한 반응에 대해서 뭉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가 이모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제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이었어요! 이보다 더 좋은 광고는 바랄 수도 없답니다. 이제 전시가 개막되고, 새로운 경향 때문에 이성을 잃은 끔찍한 원로 화가들이 많기 때문에 제 전시가 엄청난 분노를 사고 있답니다. 하지만 젊은 화가들은 모두 제 그림을 아주 좋아해요'
이 편지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 하나가 젊은 화가들이 뭉크의 작품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뭉크의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의 혁신적인 신진 화가들이 모여 기존의 미술을 거부하고 정부와 황실이 규제하는 제도권 미술로부터 탈피하는 의미로 집단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하며 '베를린 분리파'라고 하는 그룹을 만들게 됩니다.
베를린 분리파란 전통적인 아카데미 형식에서 분리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추구하는 독일 화가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뭉크에게 있어서 뭉크 스캔들은 엄청난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버렸고 뭉크 스캔들 이후에 덴마크, 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에서 연달아서 전시를 개최하게 되고 나중에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다시 열었던 베를린 전시회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베를린 내에서도 현대미술, 모더니즘을 갈망하는 화가들이 존재했었고 뭉크 스캔들로 인해서 뭉크는 유럽인 모두가 알게 되는 스타 작가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6. 뭉크, 독일 표현주의 미술학의 선구자가 되다
이렇게 '뭉크 스캔들'로 뭉크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작가가 된 동시에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미술학을 선보였습니다.
표현주의란 20세기 초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학파로 화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감정이나 불안, 공포, 기쁨 등 화가의 감정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을 중점을 두고 색채와 형태의 묘사가 자유로운 화풍입니다.
뭉크는 독일 화단에 충격적인 이슈를 던지면서 아티스트로서 한 단계 더 진일보한 전시를 기획합니다.
1893년부터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사랑의 시작부터 소멸, 생의 불안과 죽음의 4개의 주제로 구성된 시리즈 작품입니다.
<생의 프리즈>를 두고 뭉크는 '삶과 죽음과 사랑에 관한 시'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랑의 시작에서부터 소멸, 인간이 겪는 불안과 죽음같이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시리즈의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7. 뭉크, <생의 프리즈> 시리즈 중 <절규>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선보이다
그런데 뭉크의 <생의 프리즈> 연작 중에 뭉크의 기념비적 작품이자 현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절규>라는 작품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절규>는 현재 박물관 소장 작품으로 가격 산정이 불가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그림 중 하나입니다.
<절규>는 현대 미술사에서 엄청난 화제와 영향을 미친 작품인 만큼 이 그림을 둘러싼 수많은 의문과 미스터리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절규>를 둘러싼 미스터리들을 하나씩 풀어가 보겠습니다.
8. <절규>를
먼저 <절규> 속에 패닉상태처럼 보이는 앙상한 모습의 남자는 대체 왜 이토록 절규하는 것일까요?
뭉크는 해 질 녘에 한 언덕을 산책하던 중 문득 굉장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아낸 것이 바로 <절규>이며' 이때 뭉크가 구체적으로 느낀 감정을 담아낸 글이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 나는 두 친구와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피처럼 빨갛게 변했다. 극도의 피로를 느낀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댔다. 불의 혓바닥과 핏물이 검푸른 피오르 해안을 따라 퍼져 갔다. 내 친구들은 공포에 몸을 떨며 뒤처진 나를 남겨두고 계속 걸어갔다. 그때 나는 거대하고 무한한 자연의 절규를 들었다'
뭉크가 남긴 글로 추측해 보면 <절규> 속의 남자는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비명을 듣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를 막아도 멈추지 않았고 남자의 절규가 눈과 입을 통해 터져 나오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마치 온 세상이 절규하는데 그것이 내 몸까지 뚫고 들어온다는 모습입니다.
해가 지고 있는 붉은 노을이 피처럼 보였고 뭉크의 눈에는 이것이 자연이 절규하는 것처럼 들린 것이고, 이 비명을 듣고 남자는 '볼'이 아니리라 '귀'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뭉크의 정신 상태로 미루어 짐작컨대 '공황발작'이었다고 보입니다.
해가 질 무렵의 평범한 일상을 핏빛으로 공포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공황발작 증상 중 하나입니다.
공황발작이 있을 때 환자는 어지럽고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댔다'라는 구절로 미루어보아 어지럼증을 동반하는 공황발작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뭉크는 살아생전에 두통과 현기증 증상을 평상시에도 수시로 호소했고 이를 근거로 불안장애의 일종인 공황장애로 평생을 고통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규>가
이번에도 뭉크에게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특징적인 것은 단순 혹평이 아니라 '작가가 미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심각하게 제기되기까지 했습니다.
<절규>에
'뭉크는 미쳤고 타락한 인물이다. 이런 인간은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서 더는 그림을 못 그리게 만들어야 한다'
9. <절규>를
그런데 이런 논란거리를 만든 <절규>에는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절규>의 배경 장소였던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위치한 실제 장소인 '에케베르크 언덕'과 연관이 있습니다.
현재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절규>의 영감이 되었을 붉은 하늘도 볼 수 있습니다.
에케베르크 언덕은 뭉크가 <절규>에서만 배경으로 그린 것이 아니었고, 이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그림들이 존재합니다.
<절망>, <절규>, <불안>이라는 작품 모두 배경이 에케베르크 언덕입니다.
뭉크의 어머니, 누나, 아버지의 장례식이 에케베르크 언덕에서 차례로 치러졌고, 심지어 여동생 라우라가 정신질환으로 입원한 정신병원도 에케베르크 언덕 근처였습니다.
이런 사연을 듣고 보면 에케베르크 언덕에서 뭉크가 <절규>를 그린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에케베르크 언덕은 어릴 적 받은 깊은 상처와 관련된 장소였고 뭉크가 이곳을 배경으로 삼아서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10. <절규>를
그런데 <절규> 속에서는 100년이 넘게 풀리지 않았던 또 다른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뭉크가 <절규>를 발표하고 나서 11년이 지난 1904년에 <절규>의 한 귀퉁이에서 심상치 않은 의문의 작은 낙서 하나가 발견됩니다.
<절규>의 노을 속에 감춰져 있던 비밀 낙서는 이러합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
<절규>가 1904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전시가 되고 있었는데 그때 낙서가 발견됩니다.
사람들은 뭉크를 싫어하는 관람객이 작품을 훼손하려고 일부로 써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21년에 필체 대조 끝에 범인이 드디어 밝혀집니다.
낙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뭉크 본인이었습니다.
2021년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에서 적외선 촬영기법을 통해 낙서를 스캔했고 기존에 남겨진 뭉크의 필체와 비교해 보니 99.9% 뭉크의 글씨체가 확실하다고 결론이 내려진 상황입니다.
뭉크가 자기 자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물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절규>를 그리고 나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당시 뭉크의 심경을 고백한 내용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미쳐 있었다. 광기에 대한 공포가 비틀린 고개를 쳐들던 시기였다. 핏속에서 자연이 절규하고 있었다. 나는 한계점에 와 있었다'
뭉크는 자신을 '광기에 사로잡힌 미친 사람이다'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작품에도 그런 낙서를 남긴 것 같습니다.
11. 뭉크, 자신의 작품과 떨어지면 분리불안을 느껴 팔려나간 그림을 다시 그려 소장하는 습관이 있었다
스스로 미친 사람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우울과 불안의 감정에 시달렸던 뭉크가 유달리 집착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과 떨어지지 못하고 자신의 작품에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이 팔려도 다시 그려서 소장한 것입니다.
<절규>에도 약 30여 개의 여러 버전이 있었던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뭉크가 반복적으로 작품을 그린 이유는 자신의 불안이나 공포를 달래기 위해서라고 보이는 데, 이를 심리학에서는 '승화'라고 하는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승화란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충동을 허용되는 행위로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뭉크는 불안이나 공포를 승화하기 위한 수단이 같은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뭉크는 아픈 기억을 작품으로 많이 남기게 됩니다.
게다가 뭉크는 자신의 작품이 팔리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습니다.
이미 팔려나간 자신의 작품을 그리워해서 이미 그림을 구입해 간 사람에게 다시 그 그림을 빌려오기까지 했습니다.
뭉크는 자신의 작품과 떨어지면 분리불안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12. <절규>, 두 번이나 도난당하다
그런데 이 세기의 걸작 <절규>가 예기치 못한 수난을 겪었는데 두 번이나 도난을 당한 것입니다.
첫 번째 도난 사건은 1994년 2월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있던 <절규> 유화버전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CCTV 영상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범인은 창문을 뚫고 들어가서 그림을 떼서 고정하던 와이어를 끊고 순식간에 도망을 갔는데 그림을 훔치는데 고작 50초가 걸렸습니다.
심지어 범인들은 '허술하고 한심한 경비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내용을 담은 쪽지까지 남기는 여유까지 보이며,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도난 당일에 새로 온 경비원이 근무를 했는데, 보안이 뚫려서 알람이 울렸는데 무시하고 경보를 꺼버립니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오슬로 경찰들은 작품을 찾기 위해 고민에 빠집니다.
암거래 시장에 <절규>를 구입하고 싶어 하는 수집가가 있다고 거짓 정보를 흘려 수사를 했고 다행히
당시 노르웨이 갱 단원이었던 폴 엥거라는 범인이 잡힙니다.
폴 엥거는 징역 6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첫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 10년이 지난 2004년 8월 22일 오전 11시 10분경에 두 번째 도난사건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더 황당하게도 복면을 쓰고 무장한 괴한 2~3명이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을 대낮에 습격해 관격들이 보는 앞에서 <절규>를 포함한 뭉크의 작품 2점을 훔쳐 갔습니다.
목격자가 찍은 미술관 밖 현장 사진을 보면 그림을 들고 도주 차량에 탑승하는 범인들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오슬로 미술관이 관람객으로 붐비던 그때 검은 복면을 쓴 괴한 2명이 나타나서 총으로 위협하더니 순식간에 <절규>를 훔쳐갔던 것입니다.
이때 범인들이 가져간 것은 <절규> 템페라 버전이었고, 이번에도 노르웨이 갱단의 소행으로 밝혀집니다.
결국 범인을 검거하고 2년 만에 작품을 되찾게 됩니다.
갱단의 보스가 자신의 사면을 조건으로 작품을 이용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작품이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완벽히 밝혀진 않고 있습니다.
13. 뭉크, 또 다른 걸작들
뭉크가 남긴 또 다른 명작이 있습니다.
공포스럽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작품들로 <흡혈귀>, <마돈나>, <마라의 죽음>과 같이 제목도 심상치가 않은 작품들입니다.
사실 이 작품들에는 광기와 불안으로 점점 미쳐 가는 뭉크의 정신 상태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14. 뭉크의 첫사랑 '밀리 타울로브', 뭉크를 여성혐오주의자로 만들다
그런 데다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성들이 모두 뭉크가 사랑했던 세명의 여인들이었습니다.
왜 이 세 명의 여성들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를 왜 더 미치게 만들었던 것일까요?
뭉크의 첫사랑은 3살 연상의 밀리 타울로브입니다.
21살 청년 뭉크는 당시 사교계를 주름잡던 신여성 밀리를 만났고 처음부터 둘의 관계는 굉장히 위태로웠습니다.
심지어 밀리는 20대 청년 뭉크를 여성혐오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이미 밀리는 유부녀였고 금단의 사랑을 시작한 뭉크는 그녀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고 불륜 관계를 이어갑니다.
뭉크는 첫사랑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회백색 해변을 따라 내려갔다. 이곳은 내가 처음으로 육체적 사랑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배운 곳이었다. 그전까지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눈빛의 신비로운 마력을 그리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키스의 중독성을 알게 됐다'
두 사람은 1891년까지 약 6년 동안 불륜 관계를 이어갑니다.
뭉크는 밀리가 언젠간 이혼하고 자신에게 올 거라 기대하고 있었고, 뭉크가 그토록 염원했던 밀리의 이혼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밀리는 뭉크가 아닌 다른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됐고 뭉크는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뭉크는 자신이 밀리의 외도 상대에 불과했다고 깨닫고 나서 정말 큰 상처를 받습니다.
밀리는 뭉크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준 여인이었고 밀리와의 사랑이 끝난 이후에도 첫사랑의 상처를 평생 작품으로 남깁니다.
그중에서도 <이별>이라는 작품에서 밀리는 처음 만났던 여름날의 여신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뭉크는 화면 구석에서 그녀에게 시선조차 받지 못하고 슬퍼하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어 첫사랑의 아픔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밀리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고 뭉크는 한마디로 흑화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뭉크는 여성을 두려워하고 혐오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여성에 대한 시선이 잘 드러나 보인 작품이 <흡혈귀>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감상한 뭉크의 지인이 마치 흡혈귀가 남자의 목을 물고 피를 빠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해서 그 이후부터 이 작품의 이름이 <흡혈귀>가 된 것입니다.
뭉크는 <흡혈귀>라는 작품을 통해서 여성이 쾌락을 주지만 동시에 고통과 공포를 주는 존재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팜므파탈이었던 유부녀 밀리와의 사랑 때문에 여성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 여성혐오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15. 뭉크의 두 번째 사랑 '다그니 율', 뭉크를 '질투의 화신'으로 만들다
뭉크의 두 번째 사랑은 뭉크를 질투의 화신으로 만듭니다.
두 번째 연인은 '다그니 율'이라는 여성이고 그녀는 뭉크의 먼 친척이었습니다.
그녀가 피아노를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에 오게 되면서 뭉크와 우연히 재회하게 됩니다.
뭉크는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가진 다그니 율에게 흠뻑 빠져들어 그녀와 잠깐 사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그니 율은 여러 남성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뮤즈였습니다.
뭉크는 이때 삼각관계 때문에 좌절을 맛보게 됩니다.
다그니 율은 뭉크의 친구였고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프시비셰프스키'와 환승연애를 합니다.
그런데 다그니 율은 사랑에 빠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시비셰프스키와 결혼까지 해버립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친구의 아내가 된 것이고, 당시 뭉크는 그의 심정을 <질투>라는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림 속 온몸을 다 드러내고 있는 여인이 '다그니 율'이고 오른쪽 남자의 표정에는 질투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실제 상황과 다르게 그려진 그림입니다.
다그니 율 앞에 서 있는 남성이 뭉크였고 그림 속에서는 다그니의 연인은 뭉크 자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보며 질투에 사로잡힌 표정을 짓고 있는 남성이 실제로는 다그니의 남편인 프시비셰프스키입니다.
뭉크는 자신이 쳐해 있는 현실과는 정반대로 그림을 그려서 질투에 사로잡힌 자신의 감정을 역설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뭉크를 질투에 사로잡히게 한 두 번째 사랑 다그니 율을 모델로 삼아서 그린 뭉크의 대표작이 <마돈나>입니다.
뭉크 작품 속 마돈나는 옷을 벗고 퇴폐미를 뽐내며 당당한 모습을 보입니다.
마돈나는 성경에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뜻하지만 뭉크는 이 작품에서 마돈나를 성녀인 동시에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메두사로 이중적인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여성의 사랑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는 감정을 드러낸 작품입니다.
16. 뭉크의 세 번째 연인 '툴라 라르센', 뭉크를 미쳐버리게 만든 스토커였다
세 번째 사랑 '툴라 라르센' 이야말로 뭉크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뭉크의 세 번째 연인은 뭉크를 미쳐버리게 만든 스토커였습니다.
뭉크는 툴라를 회상하며 남긴 글이 있습니다.
'그때 세상 경험이 많은 한 여성을 만나 나는 호된 체험을 했다. 나는 불행하게도 열정적인 사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몇 년간 광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녀야말로 내 인생의 악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사랑을 했길래 뭉크가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요?
1898년 34세의 뭉크는 29세 툴라를 만납니다.
툴라는 부유한 와인 수입상의 딸이었고 아름답고 자신감이 넘치는 여성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는 순조로웠는데 뭉크가 자신과의 결혼을 자꾸만 미루자, 툴라가 뭉크를 스토킹 하기 시작합니다.
뭉크가 유럽대륙을 횡단하는 1년간의 여정을 진행하고 있을 때도 툴라는 뭉크를 따라다니면서 주변에 거처를 정하고 계속해서 전화를 하고 편지 공세를 퍼붓습니다.
게다가 뭉크의 친구들을 다 동원해서 뭉크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심지어 뭉크에 대해서 거짓 소문을 퍼트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뭉크가 부유한 자신한테 빌붙어 살면서 돈을 다 빌려다 쓰더니 이제 와서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뭉크는 사실 사랑에 상처가 있었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속박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툴라와의 결혼을 한사코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삐걱대는 사이에 1902년 가을에 뭉크와 툴라와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그 사건을 겪고 뭉크가 그린 그림이 <마라의 죽음>입니다.
그림 속에 피를 흘리고 죽은 것처럼 누워 있는 남자가 뭉크이고 침대 옆에서 벌거벗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여인이 툴라입니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은 무엇일까요?
뭉크가 자꾸 자신과의 결혼을 거부하자 툴라가 극단적인 방법을 쓴 것인데 툴라가 권총을 들고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뭉크에게 협박한 것이고, 자살하려는 툴라를 말리다가 그만 권총이 발사되었고 그 총알에 뭉크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당시 뭉크의 엑스레이 사진에는 가운데 손가락에 총알이 박힌 것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결국 뭉크는 손가락을 절단하게 되었고 화가로서 중요한 손을 다친 뭉크는 자신이 두 번 다시는 예술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당시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셋 던 지 이때부터 뭉크는 남에게 손을 내보이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뭉크는 자화상에서조차 자신의 왼손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람들을 만날 때는 다친 손을 숨기려 늘 장갑을 낍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결말이 충격적인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고 사건 3주 뒤 툴라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 파리로 떠나버린 것입니다.
툴라의 새 연인도 화가였고 뭉크는 그야말로 툴라와의 총격 사건으로 붕괴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 뭉크,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다
이렇게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세 여인을 만나면서 사랑에 고통받은 뭉크는 온갖 공포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리게 됩니다.
광장 공포증에 시달려서 벽에 바짝 붙어서 인도 안쪽으로만 다니고, 급기야는 충동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총으로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뭉크와 갈등이 있었던 한 예술가가 뭉크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뭉크는 그를 보자마자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바로 총을 발사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뭉크가 벌인 총격 사건만 무려 3차례나 될 정도로 뭉크의 정신상태가 나락까지 떨어집니다.
더는 기댈 곳 없던 뭉크는 정신 질환으로 인한 공포를 달래려 매일같이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뭉크는 1907년 정신 상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43살에 덴마크 코펜하겐행 열차에 몸을 실었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이때 그린 <야콥슨의 진료실에 있는 뭉크>라는 그림 속 뭉크가 받고 있는 치료는 '전기치료'입니다.
당시 주치의였던 야콥슨 박사는 뭉크에게 '알코올 중독에 의한 마비성 치매'라는 진단을 내리고 그 치료 방법으로는 충분한 수면, 휴식, 마사지 그리고 약간의 전기 치료를 했다고 합니다.
입원 중 자신의 후원자에게 보낸 뭉크가 쓴 편지 내용을 보면 이 시기 정신질환에 대한 뭉크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정신 질환이 나의 인생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든 측면이 있으나 예술가로서의 활동에는 아주 좋은 것 같다.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을 잃고 떠도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이처럼 뭉크는 평생 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던 정신 질환이 화가로서는 작품 활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을 그 자신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 뭉크, 고국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 그의 작품들이 팔리고, 기사작위까지 수여받다
뭉크는 한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그와 동시에 화가로서는 명예로운 일들도 생기게 됩니다.
1908년 뭉크의 작품을 아꼈던 그의 절친 '옌스 티스'가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초대 관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뭉크의 주요 작품들이 국립 미술관에 팔리고 소장품이 됩니다.
또한 노르웨이 국왕에게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습니다.
악마의 화가라고 불린 뭉크가 이제 고국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화가가 됩니다.
19. 뭉크, <태양>이라는 작품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에너지를 표현하다
이후 뭉크는 새로운 영역에 다시 한번 도전합니다.
1911년에 오슬로 대학 설립 100주년을 맞아서 벽화 공모전이 열렸고, 뭉크는 이 공모전에 도전합니다.
이 공모전을 통해서 세상에 새롭게 선보이게 된 작품이 바로 <태양>입니다.
뭉크는 <태양><태양>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에너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뭉크 하면 <절규>만 많이 떠올리는데 노르웨이 현지에서는 <태양>이 더 사랑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노르웨이 구권 1,000 크로네 앞면이 뭉크, 뒷면이 <태양> 그림으로 인쇄되었습니다.
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에서 독립한 직후 작업한 <태양>에서 뭉크는 이제 막 독립한 조국이 떠오로는 태양처럼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 뭉크, 표현주의의 거장이 되다
뭉크가 남긴 <태양>처럼 이 시기 화가로서의 뭉크의 명성은 밝게 빛나기 시작합니다.
1912년 독일 퀠른에서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유럽전역에서 진보적인 미술가들이 참여하면서 '최초의 국제적인 현대미술전' 성격을 띠게 됩니다.
이때 뭉크는 반 고흐, 세잔, 고갱등과 함께 표현주의 선구자로 인정받으며 이들 가운에 유일한 생존작가로 전시실 하나를 전부 배정받아 32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이제 49살이 된 뭉크가 표현주의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거장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로 뭉크는 오슬로 외곽에 있는 '에켈리'라는 곳에 정착해서 쉴 새 없이 작품 활동에만 매진하였고,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고립된 은둔생활을 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카라바조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스터디 위드 돈벌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흐,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서양 미술사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색채의 마술사(2) 고흐의 전성기 아를에서의 삶부터 죽음 그리고 유명화가가 되기까지 (1) | 2024.02.21 |
---|---|
고흐,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서양 미술사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색채의 마술사(1) 탄생부터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까지 (1) | 2024.02.20 |
방사능의 어머니 마리 퀴리(퀴리부인) 일대기 (1) | 2024.02.17 |
신들의 사생활 2-11(그리스 로마 신화/올림포스 3대 미녀 아프로디테, 헤라, 아테나와 목동 파리스이야기) (1) | 2024.02.16 |
신들의 사생활 2-10(하데스, 시시포스 이야기) (2) | 2024.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