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서양 미술사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색채의 마술사(2) 고흐의 전성기 아를에서의 삶부터 죽음 그리고 유명화가가 되기까지
18. 35세 고흐, 프랑스 '아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다
고흐는 2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파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화가로서의 자질을 확인했고, 그리고 파리를 떠나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고흐 인생 최대의 격동기를 맞는 이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바로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예술과 낭만이 가능한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반 고흐가 사랑한 도시 '아를'입니다.
고흐가 파리를 떠나 프랑스의 남쪽 프로방스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고흐는 파리에서 자신의 그림이 팔릴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트 딜러 테오가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그림 한 장 팔리지 않았습니다.
고흐에게 이 위기를 돌파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고흐는 일본을 태양 볕이 강렬한 따뜻한 곳이기 때문에 '우키요에'같은 강렬한 작품이 탄생했다고 생각하고 자신도 따뜻한 남쪽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고흐가 화가 생활을 한 지 8년째가 되던 1888년 35살의 나이에 프랑스 남쪽의 '아를'로 떠나게 됩니다.
고흐가 아를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봄이 찾아왔고, 나무에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강렬한 햇살과 선명한 자연 풍경에 영감을 받은 고흐는 그토록 바라던 곳에서 곧장 화구를 들고나가서 하루종일 그곳의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5월, 고흐는 그림에 더욱더 몰두할 운명적인 장소를 찾아내는데 고흐가 화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안식처이자 작업실이었던 <노란 집>입니다.
고흐는 두 채 중 오른쪽 집에서 지냈는데, 단정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40년이나 지난 낡고 깨끗하지도 않은 그런 집이었고 바로 뒤로 보이는 철도 때문에 밤낮없이 기차가 다니는 기차 소음으로 가득했던 집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이 집이 맘에 들었고, 동생 테오에게 연락해 노란 집을 얻을 돈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때 고흐가 계약도 하기 전에 그 집을 노란색 페인트로 칠을 해버렸고, 테오는 집값을 따져 볼 겨를도 없이 임대를 허락합니다.
원래는 노란 집이 아니었던 이 집이 너무나도 맘에 들었던 나머지 테오에게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노란색 페인트를 칠해 노란 집으로 만들어버렸고 테오는 어쩔 수 없이 이 집을 임대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흐는 <노란 집> 이후 자신의 방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침실>이라는 이 그림 속 방이 노란 집의 2층에 있는 방을 그린 것입니다.
고흐의 방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모서리가 각지고 좁은 구조였는데, 그는 이 방을 정말 좋아했고 침대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물고 사색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고흐의 떠돌이 인생을 돌아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고흐는 37년 사는 동안에 총 37번 이사를 했기 때문에 거의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를이라는 도시에 가서 처음으로 자신만의 작업 공간이 생긴 것에 굉장히 좋아하며 애정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방에 대한 애정을 나타낸 고흐는 이 시기 어느 때부터 안정된 생활을 합니다.
아를에서 수많은 그림을 그리면서 차츰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이 시기 고흐의 대표작이 대거 탄생합니다.
<카페테라스>라고 알려진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그림을 시작으로 고흐의 대표적인 보색을 활용한 화풍이 활용됩니다.
대부분 밤하늘은 검정으로 표현하게 되는데 고흐는 하늘을 푸른색으로 사용해서 그렸고 파란색과는 잘 쓰지 않았던 주황과 노란색을 과감하게 함께 사용합니다.
노란색과 대비되는 파란색과 보라색은 기존 미술에서는 보색이라 너무 튀기 때문에 잘 쓰이지 않았지만 고흐는 밤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보색을 과감히 사용합니다.
밤의 거리를 이렇게 따뜻하고 온화하게 그린 그림은 고흐가 아마도 최초일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보색 대비가 돋보이는 또 다른 고흐의 최대 걸작 중 하나인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입니다.
한 쌍의 커플이 사이좋게 산책을 하고 있고, <카페테라스>라는 작품과 동일하게 밤하늘을 짙은 파랑으로 채색하고 보색인 노란색으로 파란 하늘에 선명하게 빛나는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습니다.
또한 치덕치덕 발린 것 같은 물감의 질감이 밤하늘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불어넣었습니다.
고흐가 물감을 아낌없이 쓰면서 풍부한 질감을 끌어내려고 했는데 강물에 아주 잘 퍼져있습니다.
19. 미술계의 전환점 튜브 물감의 탄생
당시 고흐가 아를의 풍경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튜브 물감의 발명입니다.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 화가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러 나갈 때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의 방광으로 물감을 보관하여 가지고 나갔습니다.
실내에서 보관하는 것은 괜찮지만 야외에서 사용 시에는 부피도 컸고 자주 터져서 물감이 새는 불상사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때 '존 고프 랜드'라는 화가가 튜브 용기를 발명했고 1841년 9월 11일 특허를 내며 점차 상용화됩니다.
'만일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모네, 세잔, 피사로 그리고 인상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오귀스트 르누아르(인상주의 화가)>
고흐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 모두가 튜브 물감 덕분에 마음껏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릴 수 있게 됩니다.
20. 35세 고흐, 노란 집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다
고흐는 이렇게 튜브 물감 사용으로 자신만의 색채를 활용하여 그림에 열중할 수 있었고, 이때 고흐에게 또 하나의 목표가 생기게 됩니다.
바로 자신이 살던 노란 집을 화가들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대인관계에 서툴렀던 고흐였지만 화가들이 힘을 모아서 서로의 발전을 돕는 공동체의 설립을 희망했습니다.
고흐는 무엇보다도 외딴곳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외로움도 많이 느꼈고, 외로움을 채워 줄 함계할 동료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흐는 파리에 있는 화가들에게 초대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때 초대에 응한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폴 고갱'으로 그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 <타히티의 여인들>의 주인공으로 훗날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선두주자로 유명해진 화가입니다.
고갱은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남미 페루에서 보낸 뒤, 이후 파리로 돌아와서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1882년 파리 증권 거래소가 파산하며 파리 주식 시장이 붕괴되면서 실직하게 되었고 평소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동생 테오가 고갱을 후원하면서 1887년 파리에서 고흐와 고갱은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처럼 미술대학에 다니지도 않고 늦깎이에 그림을 시작한 고갱에게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고흐 자신이 이끄는 화가들의 공동체에 고갱이 꼭 합류하기를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갱은 고흐의 계획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테오가 고갱에게 아를에 내려가서 고흐와 함께 지내면 생활비를 지원해 주겠다는 말에 아를로 이사를 결심하게 됩니다.
테오는 당시 고갱이 고흐와 함께 보낼 때 한 달에 약 300프랑, 한화로 환산하면 약 300만 원 정도를 지원해 줬고,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 어렵지 않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테오가 돈을 더 들여서라도 고갱을 지원해 준 이유는 사실 형 고흐를 응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테오는 형제들끼리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아를에서 고흐가 얼마나 외로워했는지, 고흐가 고갱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1. 고흐, <해바라기> 그림 네 점을 그려 고갱방을 꾸미다
마침내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고갱이 아를에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때부터 고흐는 손님인 고갱을 맞을 준비로 바빠집니다.
고흐는 자신이 직접 준비한 <해바라기> 그림으로 고갱의 방을 장식합니다.
우리가 고흐 하면 떠오르는 작품 중 하나가 <해바라기>인데, 이 네 점의 해바라기 작품은 원래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한 선물로 준비한 그림이었습니다.
썰에 의하면 고갱의 방을 해바라기로 가득 채워주고 싶었는데, 체력이 닿지 않아 네 점만 준비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흐는 이 네 점의 그림을 1888년 8월 20일부터 26일까지 단 7일에 걸쳐 완성합니다.
고흐는 고갱이 조용한 시골 마을인 아를을 싫어하면 어떡할까 고민했고 고갱의 눈을 사로잡을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고갱을 위한 특별한 그림 <해바라기>를 그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고흐가 많은 꽃들 중 해바라기를 그렸던 데에는 고갱이 유년 시절을 보낸 남아메리카에 서식했던 꽃이 바로 해바라기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해바라기는 고갱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꽃이었고, 이 사실을 기억한 고흐는 고갱을 위해 해바라기 그림을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해바라기는 유럽에서 건강, 삶 그리고 돈을 불러오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1888년 10월 23일 드디어 아를에 도착한 고갱은 고흐의 뜨거운 환영 때문이었는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설레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매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됩니다.
22. 고흐와 고갱, 극명한 성격차이로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다
하지만 이렇듯 평화롭게 지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고갱의 마음속에서 고흐에 대한 불만이 점점 쌓여갔고 고흐 또한 고갱의 말이 어느 순간부터 잔소리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고갱은 고흐가 물감을 엉망진창으로 뒤섞은 채 대충 마르도록 내팽개쳐둔다고 지적했고 불만을 표합니다.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주방살림이 서툴러서 맛없는 수프를 내오는 것도 두 사람 싸움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너무나도 달랐던 성격 탓에 인해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고흐와 고갱의 성격이 얼마나 달랐는지 당시 그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왼쪽은 <반 고흐의 의자>, 오른쪽은 <고갱의 의자>로 각각 자신의 의자를 그린 그림입니다.
환한 낮에 그린 고흐의 의자 위에는 자연스럽게 담뱃대가 올려져 있고, 밤에 그려진 고갱의 의자는 팔걸이가 있고 촛불과 책을 올려놓았습니다.
고흐는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담뱃대처럼 감정적이고 솔직했었던 반면, 고갱은 사색을 즐기며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림을 보는 세계관이 너무나도 달랐던 두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의견 충돌이 잦아지며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23. 고흐, 고갱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실망하다
이렇듯 고흐와 고갱은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집니다.
당시 환청과 신경증에 시달리던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갱하고 싸울 땐 방전된 배터리처럼 머리가 텅 빈다'
고흐는 극도로 흥분하면 발작과 환각 증상까지 보였고 나중에 정신이 돌아왔을 때 기억하지 못하기까지 했으며 고흐가 흥분한 모습을 본 고갱은 고흐가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갱이 아를에서 지낸 지 약 두 달이 된 어느 날, 고갱은 고흐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하는데 이 소식에 대한 고흐의 심정을 동생 테오에게 편지로 전하게 됩니다.
'고갱이 내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을 그의 역작이 되리라 생각해'
<해바라기 화가>라는 그림 속에서는 고갱은 고흐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그려 은연중에 고흐를 낮춰 보는 고갱의 속마음이 드러나 보입니다.
이 그림에 대해 고흐는 이렇게 말하며 그림에 대한 실망감을 나타냅니다.
'내 모습은 맞지만, 미쳐버린 내 모습이야'
하지만 고흐는 고갱과의 충돌에도 고갱이 계속해서 아를에 남기를 원했지만, 그때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파리에서 팔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를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24. 고흐, 고갱이 떠나고 발작을 일으켜 자신의 왼쪽 귀를 스스로 자르다
파리로 떠나려는 고갱과 그를 붙잡으려는 고흐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그러던 중 1888년 12월 23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고흐가 면도날로 스스로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버린 것입니다.
당시 고흐와의 다툼 끝에 고갱이 파리로 떠나면서 발작을 일으킨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때 고흐의 귀 상태가 어땠는지 소견서를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사건 발생 당시가 아닌 42년 후 1930년에 주치의가 기억을 더듬어 그린 고흐의 귀 상태 소견서입니다.
위쪽 정상적인 귀그림에 빗금이 그어져 있는데 고흐의 귀가 저만큼 절단되었음을 보여주며 아래쪽 그림처럼 귓불 쪽만 조금 남아 있음을 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고갱이 떠나고 테오마저 결혼소식을 전하자 고흐는 테오마저 자신을 떠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습니다.
25. 36세 고흐,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다
이후 고흐는 고갱이 떠난 텅 빈 집에서 절망에 빠져 혼자 남아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 고흐가 그린 그림으로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자신의 모습 뒤로 '이젤'을 그려 넣어 화가로서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보이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흐는 그림을 다시 그리고자 몸과 마음을 회복하려 여러 가지 노력을 하지만, 정신 질환이 계속 재발하면서 1889년 5월 36살의 나이에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당시 아를의 주민들이 고흐가 이 마을에서 살 수 없게 해 달라는 탄원서를 냈습니다.
'그는 내 고객을 모욕하고 집으로 쫓아가 동네 여성들을 만지는 데 탐닉합니다. 공공 안전에 확실히 위험이 될 반 고흐의 존재로 인해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겁을 먹고 있습니다'
<탄원서 내용 中>
아를 주민들의 탄원서에는 고흐가 여성을 성추행하고 귀를 자르는 등 마을의 질서를 해쳤기 때문에 내쫓아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이런 압박 때문에 고흐는 스스로 정신병원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6. 고흐, 자신을 경제적으로 도와준 동생 테오를 위해 악화된 건강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작품활동에 몰두하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고흐는 불안과 발작 증상이 반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정신병원 창살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 이 탄생합니다.
고흐가 정신병원 입원 당시 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입니다.
그림 왼쪽으로는 불타오르듯 하늘로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보이는데, 이 나무는 과거 로마 제국 때에는 십자가를 만들던 나무였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애도'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고흐는 없던 나무를 임의로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이며, 고흐는 삶과 죽음을 고민하면서 이것을 그림 속에 녹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흐 화풍의 대표적인 특징인 보색대비로 파란색으로 밤하늘을 칠하고 그 위에 노란색으로 별과 달을 칠해서 생생한 밤하늘을 표현하고 있으며 게다가 필획 하나하나가 꼼꼼하게 처리되어 있는 것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고흐는 아를에 도착하고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지낸 약 1년 밤의 시간 동안에만 약 150점의 그림을 그립니다.
이 시기 거의 사흘에 하나씩 그림을 그리며 작품활동에 몰두했는데 고흐가 좋지 않은 건강상태에도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이유를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
'돈문제와 관련해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50년을 살면서 1년에 2,000프랑을 쓴 사람이라면 평생 나는 10만 프랑을 쓴 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10만 프랑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로서 평생 100프랑짜리 1천 점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을 굉장히 미안해했고 그래서 자신의 작품 개당 100프랑으로 계산해 몇 개의 그림을 그려야 테오에게 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을지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약 10년간 고흐가 죽기 전까지 남긴 작품수는 유화를 기준으로 해서 약 800여 점이었고, 그가 죽기 전까지 1000점을 그리겠다는 목표를 거의 달성한 셈이었습니다.
27. 고흐, 자신의 이름을 따 작명한 조카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서양에서 가장 먼저 몸에 꽃을 피우는 아몬드 나무 그림을 그려서 선물하다
이처럼 고흐가 동생 테오를 생각했던 것만큼 형에 대한 동생 테오의 애정도 남달랐습니다.
테오는 아들을 낳자 형 이름을 그대로 따서 '빈센트 빌럼 반 고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서양권에서는 가족의 이름을 아이에게 물려주며 존경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했으며, 테오는 아들의 이름을 통해 형에 대한 애정과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조카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똑같다는 소식을 들은 고흐는 사실 기뻐하면서도 조카가 자신처럼 불행해질까 내심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조카의 탄생과 행복을 기원하면서 그림을 그려 선물하게 되는데 <꽃 피는 아몬드 나무>라는 이 그림 역시 엄청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아몬드 나무가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이며, 고흐는 이 그림에서 만개한 꽃도 보이지만 막 움트기 직전 꽃봉오리도 함께 그려 넣어 생명의 탄생을 축하는 듯한 의미를 담았습니다.
고흐는 혼신을 다해서 이 그림을 그렸고, 그 때문인지 그림을 완성한 후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28. 고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림이 판매되었다는 소식을 듣다
그런데 이 시기 고흐에게는 기쁜 소식이 연달아 전해지게 됩니다.
1890년 3월 파리에서 시작된 미술 전시회인 '살롱 아티스트 앙데팡당'에 고흐의 그림이 10점 출품하게 됩니다.
당시 테오가 고흐에게 쓴 편지를 통해 고흐 그림에 대한 평가와 전시회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전시회에 형이 있었다면 얼마나 기뻤을까. 형의 그림은 잘 배치되어 있고 아주 잘 보여. 많은 분들이 나에게 형의 칭찬을 부탁하러 왔어. 고갱은 형의 그림이 전시회의 핵심이라고 말했어'
고흐의 작품이 세간에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한 모습입니다.
같은 시기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전시회에 고흐의 작품이 6점 전시되었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고흐의 그림이 판매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붉은 포도밭>(현재 모스크바 푸슈킨 국립 미술관 소유)이라는 이 그림은 고흐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붓터치가 돋보이며 생동감 있는 묘사가 인상적인데 고흐가 생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판매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 동료 화가였던 '안나 보쉬'에게 '400프랑'에 팔았는데 환산하면 약 400만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20년 뒤에 러시아 사람인 '이반 모로조프'가 이 그림을 3만 프랑에 구입했고, 현재 소장 중인 모스크바 푸슈킨 국립 미술관에서 보험 가입비만 현재 8천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으며 한화 약 950억 원으로 최초 구입당시 보다 약 23,750배 폭등한 가치입니다.
29. 37세 고흐, 스스로 총을 쏴 생을 마감하다
드디어 사람들이 고흐의 작품을 알아봐 주기 시작했지만, 고흐의 몸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그에 따라 정신 상태 또한 최악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고흐가 그림을 그린 지 10년째 되던 1890년 5월, 고흐는 치료를 받기 위해서 파리 근교의 '오베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오베르는 파리와 가까워 동생 테오와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테오가 소개했던 의사 '가셰 박사'가 이곳에서 고흐를 돌보아 주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또다시 거의 하루에 한 점씩 작품 활동에 열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붉은 포도밭> 이후에 더 이상 그림 판매 소식도 없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생 테오의 건강 악화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고흐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사라져 갔고, 끊임없이 계속된 정신 질환에 지쳐갑니다.
결국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낡은 총을 들고 옥수수밭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자신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깁니다.
하지만 총알은 빗맞았고 고흐는 피를 흘리며 숙소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고흐의 신음소리를 듣고 고흐의 상태를 눈치챈 여관집 주인이 급히 의사를 불렀지만 더 이상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고흐의 소식을 들은 테오가 서둘러 고흐를 찾아왔는데 그때 고흐는 자책을 하며 테오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난 왜 이렇게 잘하는 게 없지? 스스로에게 총을 발사하는 것마저도 실패하다니'
테오는 작은 다락방 침대옆에 앉아서 죽어가는 고흐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고흐는 37살의 나이로 테오가 지켜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30. 테오의 부인 '요한나', 고흐의 작품을 알리기 위한 전락을 짜다
그런데 고흐의 사망만큼 더 비극적인 사실은 그가 죽고 6개월이 지난 후 동생 테오마저도 지병으로 숨을 거뒀다는 사실입니다.
고흐를 누구보다 잘 알던 동생 테오마저 세상을 떠났는데 그렇다면 고흐가 사후 이렇게까지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명의 화가였던 고흐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최고의 셀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테오의 아내인 '요한나'덕분입니다.
요한나는 남편 테오가 형 고흐의 작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던 것을 알고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전략을 짭니다.
첫 번째는 고흐 그림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었습니다.
고흐가 사망하고 15년이 지난 1905년 암스테르담 시립 미술관에서 고흐의 회고전이 열리게 되는데 이때 고흐의 작품 480여 점이 전시됩니다.
그리고 요한나는 런던 국립 미술관에 <해바라기>를 판매하는데 누구나 고흐의 대표작을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세계적인 국립 미술관에 고흐의 작품을 판매한 것입니다.
소수 부자들의 소유물이 아닌 공공재로서 누구나 해바라기를 볼 수 있게 된 것이고, 그 덕분에 고흐의 그림은 더욱더 가치가 높아지게 됩니다.
'고흐의 예술에 대한 순진한 진실성, 비전의 독창성을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1890년 고흐 작품에 대한 비평>
이런 비평이 나올 만큼 1890년부터 고흐의 그림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그 해에 요절을 하고 맙니다.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점차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요한나는 조금만 더 기다렸었더라면 고흐 또한 얼마든지 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나는 고흐의 훌륭한 작품들을 이렇듯 대중들이 쉽게 접하게 만들어 가치를 높이는 전략을 써 고흐의 이름과 그의 작품을 알리는 데 성공합니다.
두 번째로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나가 유산으로 받은 고흐의 그림뿐 아니라 남편 테오가 형 고흐와 주고받은 편지가 있었는데 요한나는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1914년에 책으로 발간합니다.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에 더욱 몰입도를 상승시켰고 깊은 감동을 이끌어냅니다.
고흐와 테오 형제는 현재 오베르에 나란히 묻혀있는데, 원래 테오의 묘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나가 떨어져 있던 테오의 묘를 고흐의 옆으로 옮겼고 이를 통해 형제애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현재까지도 형제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헌화하며 형제의 영면을 빌고 있습니다.
요한나의 이러한 큐레이팅 덕분에 고흐의 그림은 이야기와 함께 어우러지며 더욱 비극적이면서 아름다운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고흐의 위대한 작품과 요한나의 천재적인 마케팅 덕분에 지금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됩니다.
31. 고흐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조카 '고흐 주니어', 삼촌 이름을 딴 고흐 박물관을 개관하다
요한나의 뒤를 이어서 고흐의 명성을 높인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흐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름뿐 아니라 얼굴도 닮았던 조카 '빈센트 빌럼 반 고흐 '입니다.
고흐 주니어는 1973년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삼촌 고흐의 미술관을 개관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싶었던 고흐는 또 다른 고흐를 통해서 그 꿈을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생애를 아는 사람들 덕분에 유명해졌고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10년간의 짧은 화가 인생동안 800여 점의 유화와 1,3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기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에 매달렸던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인생과 영혼을 모두 바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고흐1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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