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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돈벌러

와인의 탄생부터 전파과정(조지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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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탄생부터 전파과정(조지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1. 와인 역사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곳, 조지아 

 

조지아에서는 약 8천 년 전 신석기시대 인류 최초로 와인을 양조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와인을 발효했던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 토기 항아리
와인을 발효했던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 토기 항아리

이것은 점토로 빚은 커다란 토기 항아리입니다.

토기가 발견된 후 잔여 유기물을 조사해 보니 와인에서 많이 발견되는 주석산, 포도씨, 송진 등이 검출되었니다.

때문에 당시 신석기인들이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김장과 비슷하게  토기를 땅에 묻고 와인을 발효해 마셨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와인은 우연히 발견됐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신석기인들은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해 토기에 저장했고, 포도송이를 쌓아놓은 토기에서는 쌓인 포도의 무게로 인해 눌리면서 자연스럽게 포도즙이 나왔고 이때 포도 껍질에서 발생한 천연 효모로 인해 포도즙에서 발효가 진행되었고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포도즙을 마신 신석기인들은 기분이 들뜨고 취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인류는 점차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을 양조해 마시기 시작합니다.

최근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연 효모만을 이용하여 양조한 내추럴와인이 굉장히 사랑받고 있는데, 내추럴 와인은 다량의 침전물을 볼 수 있으며 조지아가 내추럴 와인의 원조라고 할 수 있어 조지아 와인의 인기가 높습니다.

2. 이집트, 최초의 현대적인 방식과 유사한 와인 양조를 시작하다 

조지아지역에서 우연히 시작된 와인은 곧 인근 지역의 국가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3천 년 경부터 지중해 동쪽 해안을 중심으로 와인 수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 조지아
이집트, 조지아

이때 무역을 통해서 와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나라는 바로 '이집트'였고, 당시 이집트는 와인에 푹 빠져버립니다.

무역으로 와인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이집트는 직접 와인을 양조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이후 현대 와인 양조와 비슷하게 포도나무를 수입하여 재배하고 와인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최초의 지역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는 당시 농사 기술이 부족한 시기에 어떻게 포도나무를 재배했을까요?

이집트, 가나안
이집트, 가나안

이집트는 당시 와인 교역이 활발했던 '가나안'에서 포도나무 묘목을 수입했고 농업 전문가를 초빙해 포도나무 재배 기술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1834년에 재현된 <센네페르의 정원>
1834년에 재현된&nbsp; <센네페르의 정원>

이 그림은 당시 이집트 고위 관료였던 '센네페르의 정원'을 재현한 그림입니다.

정원 한가운데의 포도밭에서 재배된 포도를 가지고 와인을 양조했습니다.

3. 고대 이집트 와인 양조 레시피

포도 덩굴시렁
포도 덩굴시렁
포도즙 내기
포도즙 내기

아치형 덩굴시렁에 포도를 매달아 재배한 후 포도를 밟아 즙을 냈는데 이때 천정에는 즙을 내는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밧줄을 매달아 놓아 이 줄을 잡고 작업했습니다.

압착기 착즙
압착기 착즙

그리고 더 많은 포도즙을 얻기 위해서 2차로 남은 찌꺼기를 압착기에 넣어 남은 한 방울까지 짜주기 위해 막대로 비틀어 짰습니다.

와인 발효
와인 발효

이후 이렇게 짜낸 포도즙을 항아리에 넣고 발효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당시 양조 방식은 사실 현대의 와인 양조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와인 압착기의 신 &#39;셰스무&#39;
와인 압착기의 신 '셰스무'

이집트 신화에는 '셰스무'라는 와인 압착기의  신이 나오는데, 이 신은 죄인에게 벌을 줄 때 와인 압착기를 사용합니다.

압착기에 넣고 짜는 신화 속 형벌
압착기에 넣고 짜는 신화 속 형벌

위 그림은 태양신의 적들인 저주받은 사람들의 머리를 와인 압착기에 넣고 피를 짜내는 신화 속 형벌의 모습입니다.

4. 고대 이집트, 와인은 파라오와 일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렇듯 보통 일이 아닌 고대 이집트의 와인 양조 과정에서 알 수 있듯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려 쉽게 얻을 수 없어 귀했던 와인은 당시 아무나 마시지 못했습니다.

신들에게 음식과 와인을 바치는 모습
신들에게 음식과 와인을 바치는 모습

이집트에서 와인은 신에게 바치는 제사 때나 오직 신의 아들인 이집트 왕 '파라오'만이 먹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암포라
암포라

파라오는 죽은 후 와인을 담았던 '암포라'라는 와인 항아리와 함께 묻혔습니다.

실제로 19살에 요절한 비운의 이집트 제18왕조 파라오인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약 3,4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에 온전하게 발견된 와인 항아리만 26개나 발굴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집트인들은 왜 파라오 무덤에 와인을 함께 묻었던 것일까요?

와인이 파라오를 부활시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약 5&#44;000년 된 포도씨
약 5,000년 된 포도씨

최초 여성 파라오로 추정되는 '메르네이트'의 무덤에서 약 5,000년 된 와인 항아리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오시리스
오시리스

이러한 믿음은 한 신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녹색피부를 가진 이 신의 이름은 바로 부활의 신이자 와인의 신 '오시리스'입니다.

오시리스가 가진 부활의 이미지는 포도나무의 특성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는 겨울에는 죽은 듯이 바짝 말라 생명력을 잃어 보이지만 봄이 되면 다시 싹을 틔우고 주렁주렁 탐스러운 포도를 맺게 합니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이 모습이 포도나무가 부활하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시리스 나일강을 주기적으로 범람시켜 포도나무 재배에 중요한 물이 수급되는 것을 원활하게 해 주었기 때문에 와인의 신이 됩니다.

그래서 파라오의 무덤에 와인을 함께 묻어놓으면 와인을 관장하는 신 오시리스가 포도나무처럼 와인과 함께 파라오를 부활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후 와인 생산량이 늘어나자 파라오뿐 아니라 상류층 까지도 와인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상류층은 축하연을 열 때 절대로 와인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고대 이집트 와인을 마시고 구토하거나 들려 나는 것을 통한 과시
고대 이집트 와인을 마시고 구토하거나 들려 나는 것을 통한 과시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시대 귀족 네페르호텝의 묘에 그려져 있는 벽화에 보면 구토하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 이집트에서 와인은 맥주보다 5~10배 비쌌기 때문에 와인을 마시고 구토하는 일이 자랑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해 들려 나가는 남성들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무덤 벽화에는 자신이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주로 그렸는데, 와인을 마시고 구토하거나 들려나가는 모습을 그려놓은 것은 이러한 과시 문화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와인, 그리스로 전파되며  대중화되기 시작하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와 소수의 상류층만이 와인을 독점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이집트 와인이 이곳에 전해지면서 와인은 함께 즐기는 문화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

지중해를 건너 수출된 곳이 바로 고대 '그리스'였습니다.

바쿠스 신=디오니소스
바쿠스 신=디오니소스

이후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 신의 등장으로 와인이 친숙해지게 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신들의사생활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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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생활 2-3(그리스 로마 신화/디오니소스) 1. 제우스, 자신을 모시는 신전의 여사제와 사랑에 빠지다 제우스 신전을 지키는 여사제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바치기 위해 소를 한 마리 잡습

donbuller.tistory.com

디오니소스는 이집트 오시리스와 같이 '포도 재배와 와인의 신'이었습니다.

디오니소스의 출생 신화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신화로는 제우스가 아름다운 공주 세멜레와 바람을 피웠고 그 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바로 디오니소스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분노한 제우스의 부인 헤라가 디오니소스를 임신한 세멜레를 죽이기 위해서 꾀를 냈고, 결국 제우스의 상징인 번개의 빛과 열기에 녹아 세멜레가 죽게 되자 그녀의 배속에 있던 태아를 제우스가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키워서 출산하게 됩니다.

그렇데 태어난 디오니소스는 죽을 뻔했다 살아난 것이라 부활의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이집트와 그리스 모두 와인은 신이 주신 음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와인을 즐기는 방식에는 차이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의 산물을 함께 즐기며 나름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리스에서도 주로 귀족들이 많이 애용하던 음료였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특히 귀족들은 와인을 저녁 모임에 필수로 곁들이며 마셨습니다.

고대 그리스 연회장의 모습
고대 그리스 연회장의 모습

이 그림은 고대 그리스 사회적 제도 중 하나인 '심포지엄'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즉 '함께'라는 뜻의 'Sym'과 '마시다'라는 뜻의 'pinein'의 합성어인 'Sympinein'은 '함께 술을 마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지금의 심포지엄의 어원이 됩니다.

그림 속 연회장 그림에 침대 같은 소파가 여러 개 보이는데, 이곳에서 15~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마친 후 디오니소스를 기리면서 노래도 부르고 토론도 하고 와인을 마시면서 연회를 즐겼습니다.

또한 심포지엄에서 와인을 즐기던 특별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코타보스 게임
코타보스 게임

당시 그리스인들은 와인을 이용한 게임 '코타보스'를 즐겼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외치면서 정해진 목표물에 와인 찌꺼기를 던져서 명중시키는 게임입니다.

목표물에 명중을 하게 되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좋은 징조라고 생각해서 와인을 마시면서 이 게임을 즐겼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그리스에서 와인을 즐겼던 유명한 인물이 있는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을 남긴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펠로폰네소스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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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와인을 굉장히 좋아했고, 와인을 다음날 새벽까지 마시면서도 끄덕 없이 연설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 소크라테스가 와인을 찬양하며 남긴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여, 저도 한잔 마시는 것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진실로 와인은 사람의 영혼을 상쾌하게 적셔주며 우리의 고통을 잠재우기 때문이지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

6. 고대 그리스, 와인 때문에 생긴 법과 규칙 

와인에 푹 빠져있었던 소크라테스만큼 그리스 사람들도 와인을 칭송하고 즐겼습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취한 귀족을 공격해 상해를 입히는 일이 발생하는 일이 생기곤 했습니다.

이 시기 노예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자 귀족과 노예 간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 벌거벗은 채 와인을 서빙하는 노예
고대 그리스 벌거벗은 채 와인을 서빙하는 노예

그래서 처음에는 노예가 무기를 숨길 수 없도록  벌거벗은 채  서빙하도록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노예에게 옷을 입히고 쉽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왼손을 등 뒤로 묶은 후 한 손으로만 와인을 서빙을 하게끔 합니다.

와인을 따르는 웨이터의 기본자세
와인을 따르는 웨이터의 기본자세

이때 생긴 방법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와인을 따르는 웨이터의 기본자세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서비스'(service)의 어원 또한 라틴어로 '노예'(servus)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7. 로마, 30대 미만의 남성과 모든 여성에게 나이와 신분을 막론하고 와인을 전적으로 금지시키다

고대 로마 제국
고대 로마 제국

이렇게 그리스에서는 독자적인 와인 문화가 발달해 가는 동안 와인 산업도 점점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리스의 와인 문화를 숭배하던 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세계역사 상 가장 막강한 제국을 건설한 '로마'였습니다.

그리스로부터 와인을 받아들인 로마제국 초기,  다른 나라들처럼 와인이 귀해서 아무나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30대 미만의 남성과 모든 여성에게 나이와 신분을 막론하고 와인을 전적으로 금지시켰습니다.

만약 여성이 법을 어기고 와인을 마시면 이혼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고대 로마에서는 존경의 의미로 손등에 키스를 했지만, 남녀 간의 키스 문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부인의 음주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 기습 키스를 허용하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런 말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대의 부인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발견하면 그녀를 살해하라'

8. 로마, '포에니 전쟁'을 계기로 와인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다 

이렇게 보수적이었던 로마의 와인 문화는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한니발
한니발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에 의해 기원전 264년부터 지중해 패권을 두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약 120년간 벌인 전쟁인데, 로마는 이 전쟁에서 결국 지중해를 장악하며 승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포에니 전쟁이 대체 로마의 와인 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일까요?

카르타고 농업학자 &#39;마고&#39;
카르타고 농업학자 '마고'

전쟁으로 로마가 얻은 전리품 중에 카르타고 최고의 농업학자인 '마고'가 쓴 28권짜리 농업 교과서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책에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필수사항들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 교과서를 바탕으로 포도 재배부터 와인 양조까지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와인을 마시다 보니 지위를 막론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매일 인당 0.5~3L 정도의 와인을 마셨습니다.

2천여 년 전 로마의 인구가 약 100만 명 정도였으니 대략 1년에 최대 11억 리터의 와인을 마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인들은 와인에 다양한 첨가물을 넣어 마시는 것을 즐겼습니다.

가장 흔한 첨가제는 와인에 소금과 물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첨가물은 '납'이었는데 납을 와인에 직접 넣거나 와인잔에 발라서 마셨다고 합니다.

와인에 있는 아세토산 성분이 납과 만나면서 달달한 맛이 났고, 이 납 와인을 즐기던 인물이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였습니다.

네로 황제는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아내까지 살해했는데, 네로 황제의 이러한 폭력성이 '납 중독'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9. 로마, 와인을 전 유럽게 전파하다 

이렇게 대중음료로 점차 입지를 굳혀가던 와인은 로마를 넘어 전 유럽으로 빠르게 확산하기 시작합니다.

전유럽을 지배한 로마제국
전유럽을 지배한 로마제국

팔라티노의 작은 언덕에서 시작된 로마는 제국을 넓히기 위해 본격적으로 정복전쟁에 나섰고, 최강의 전투력으로 막강한 위세를 펼치게 됩니다.

로마제국이 전유럽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때 로마 제국 병사들의 필수품은 당연히 '와인'이었습니다.

유럽의 물에는 석회질 성분이 많아서 마음 놓고 마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군은 와인이 물보다 훨씬 위생적이고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와인은 세균 감염 방지와 상처 소독 등 의약품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당시 와인을 담은 가죽 포대
로마 제국 당시 와인을 담은 가죽 포대

로마제국은 지배하는 땅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와인이 필요했고 와인을 전달하기 위해 와인을 옮길 때 가죽 포대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운송 중에 와인이 변질되거나 신선도가 떨어져 맛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전쟁의 필수품이었던 와인에 문제가 생기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가 떠올린 아이디어는 현지에서 직접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군은 곧장 자신들이 정복한 유럽 각지에 포도밭을 만들고 현지인들에게 와인 양조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이 담당한 지역에서 양조한 와인은 정기적으로 로마로 보내 품질 검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유럽 전역에 와인이 전파되었고, 결과적으로 로마는 와인 발전에 공로를 세우게 됩니다.

또한 로마에 와인을 보낼 때 사용한 것은 바로 '오크통'이었습니다.

2세기경 로마에서 직접 사용한 오크통
2세기경 로마에서 직접 사용한 오크통

이것은 2세기경 로마에서 직접 사용한 오크통으로 열을 가해서 모양을 만들고 고정해서 사용했습니다.

이전에 사용했던 가죽포대와 비교하면 튼튼하고 양도 더 많이 담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오크통에 와인을 담아 로마로 보내면 운반 도중에 와인이 숙성되어서 품질이 향상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크통으로 와인을 숙성할 때, 오크통 내부를 태워서 와인을 담아 숙성합니다.

이때 오크통에서는 바닐라 향, 시나몬 향, 캐러멜 향, 훈연 향 등 다양한 향이 발연되는데 숙성하면서 이러한 오크통마다의 독특한 풍미들을 느낄 수 있으며, 숙성된 다양한 풍미를 통해 와인의 맛을 더욱더 맛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제국의 군인들이 현지에서 직접 와인을 양조한 것이 와인 확산의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0. 와인, 기독교의 상징이 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44; 테오도시우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황제,  테오도시우스 황제

로마는 또 한 번 와인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와인은 신성한 음료로 여겨집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39;최후의 만찬&#39;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 마지막으로 열두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나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장 27~28절>

이후 기독교인들은 성찬식 때 예수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와인은 유럽에서 종교적 문화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와인2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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