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프랑스의 자존심이 된 이유와 위기 및 극복의 역사
1. 프랑스가 최고의 와인 생산지가 된 이유 1 종교(아비뇽 유수 사건)
와인이 로마에 의해 전유럽으로 퍼져나간 후 수많은 유럽 국가 중에서 '프랑스'가 독보적인 와인 종주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종교'였습니다.
395년은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어진 시기의 지도입니다.
이때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에 의해서 무너지는데 그 자리에 들어선 나라가 바로 '프랑크 왕국'이었습니다.
프랑크왕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했고, 이때 프랑크 왕국 곳곳에서는 교회와 수도원이 건설되기 시작합니다.
이때 다수의 수도원이 와인 양조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수도원은 자급자족의 원칙에 따라 성찬식용 와인을 만들기 위해 수도사들이 포도나무를 심어 재배하고 와인을 양조하며 직접 관리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판매하기 쉬워 현금화할 수 있는 가장 편한 농산물이 바로 와인이었습니다.
수도원의 살림을 꾸리기 위해 수도사들이 와인을 만들어 팔았고 그렇다 보니 수도사들은 와인양조에 있어서는 중세시대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중세의 와인 산업은 프랑크 왕국 전역의 수도원들이 중심이 돼서 이끌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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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843년 와인 산업의 판도를 뒤바꿀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후계 문제로 거대한 프랑크 왕국이 분열하게 된 것입니다.
분열을 시작한 프랑크 왕국은 서프랑크, 동프랑크, 중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때 갈라진 서프랑크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이며 중프랑크는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독일'입니다.
그렇다면 프랑크 왕국이 이처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로 나누어졌는데 그중 왜 유독 프랑스 와인만 유명해진 것일까요?
프랑스 와인이 세계 최고의 와인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유럽 정세를 뒤흔드는 한 사건 때문입니다.
바로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교황청을 강제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르게 한 '아비뇽 유수 사건'입니다.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 연합군이 이슬람교에 패하자 교황의 권위는 추락하게 됩니다.
반면 십자군 전쟁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 프랑스 왕권은 더욱 강화됩니다.
이때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로마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버립니다.
이후 약 70년간 아비뇽에 강제 유폐된 교황은 프랑스 왕의 통치를 받게 되는데 이 사건을 '잡아 가둔다'는 뜻의 '아비뇽 유수'라고 합니다.
아비뇽 유수로 교황과 함께 대규모 사제단 또한 프랑스로 이동했고, 이들은 미사에 사용할 와인을 찾아다니던 중 쉽게 맛볼 수 없는 최상급 와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2.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의 탄생, 유럽 최고의 셀럽 교황이 선택한 '시토 수도회' 와인
바로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수도원에서 만든 와인이었습니다.
현재도 부르고뉴는 중세시대 분위기가 물씬 나는 건축물이 남아있고,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수도원과 와이너리로 유명한 곳입니다.
부르고뉴 지방은 일조량이 매우 풍부하며, 석회질로 배수가 잘되는 토양이라 품질 좋은 포도를 키우기에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런 천혜의 환경 속에서 교황과 사제단의 입맛을 사로잡은 최상의 와인을 만든 곳은 '시토 수도회'였습니다.
포도와 와인을 돌보는데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 시토 수도원의 교리였습니다.
때문에 수도사들은 토양과 기온은 물론 포도 재배와 와인을 생산하는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직접 연구하고 실험했으며 이런 노력 끝에 완성한 와인을 맛봤던 교황 '클레멘스 5세'를 비롯한 사제단은 와인 맛에 반하게 되었고, 시토 수도회의 와인을 미사에 사용하게 됩니다.
곧 이 와인은 파리의 왕과 귀족들의 식탁에까지 올라가며 인기를 더해가게 됩니다.
수도원에서는 와인을 만들면서 버려지는 포도들 까지 알뜰하게 제품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변질된 포도로 식초를 포도씨 기름으로는 비누나 향신료도 제작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와인의 투명도, 질감, 풍미 등을 향상해 주는 정제과정을 위해서 달걀흰자가 쓰였는데 남은 노른자를 활용해 '에그타르트'를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부르고뉴 와인 양조기술은 종교와 대중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훗날 이곳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중에 하나를 탄생시키게 되는데, 바로 1945년 산 '로마네 콩티'입니다.
로마네 콩티는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죽기 전에 꼭 마셔야 할 와인으로 꼽혀 더욱더 유명해졌습니다.
로마네 콩티는 한 병당 약 3,000만 원에 팔리고 있는 아주 고가에 와인이며 특히 가장 비쌌던 로마네 콩티는 1945년 산 빈티지로 한 병 경매가가 약 6억 6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 발사에 성공한 일론 머스크의 우주선 '스페이스 X'에 실려 440일간 우주 숙성된 한 프랑스 와인이 있습니다.
이 우주 숙성 와인의 추정되는 경매가가 약 100만 달러, 환화로 약 13억 원입니다.
3. 프랑스가 최고의 와인 생산지가 된 이유 2 떼루아
그런데 시토 수도사들이 프랑스 와인 발전에 기여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떼루아'였습니다.
떼루아는 포도 품종의 다른 맛이나 기후, 토양, 땅의 경사도, 햇빛이 비치는 각도,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의 숙련도 등 와인을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시토 수도사들은 이 떼루아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 직접 흙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떼루아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나누어진 포도밭을 구획별로 관리하고 등급을 매겼습니다.
넓게 보면 같은 땅이지만 각각의 돌담마다 인접한 구역에 같은 포도 품종을 심더라도 각각 다른 맛과 향을 지닌 와인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토 수도사들은 토양관리부터 포도재배, 와인 생산 통로까지 구역에 따라 다 다르게 맞춤 양조 방식을 적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교한 관리로 만들어낸 부르고뉴 와인만의 특색이며 핵심입니다.
4. 프랑스 떼루아의 정석 샹파뉴 와인, 샴페인
프랑스 떼루아가 특히 더 특별한 점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한 가지를 꼽으라면 당시 프랑스 수도사들이나 와인 생산자들의 '숙련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일찍부터 지역별로 적합한 포도나무를 재배하거나 와인의 양조 방식을 떼루아에 맞게 개발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안목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특별한 와인을 생산해 낸 바로 '샹파뉴'입니다.
샹파뉴는 프랑스 북쪽에 있는 와인 생산지로 프랑스에서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프랑스 포도 재배 지역 중 가장 추운 곳입니다.
추운 지방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포도 껍질이 얇고, 다른 지역 레드 와인에 비해 묽은 편이었습니다.
이때 샹파뉴에서는 적포도의 껍질을 벗겨낸 포도 알맹이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샹파뉴 지역의 또 다른 고민거리는 봄이 올 때마다 지하 창고 속 와인들이 폭발했던 것입니다.
폭발에 놀란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을 '악마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와인병이 깨지는 것은 샹파뉴 지방의 떼루아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추운 샹파뉴는 기후 차이로 포도를 늦게 수확해서 와인을 양조하다 보니 겨울철에 와인 발효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봄이 되면 날씨가 포근해지면서 다시 발효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 탄산이 발생해서 압력 때문에 병이 깨졌던 것이었습니다.
이때 샹파뉴의 고민을 해결할 와인 담당자가 임명되는데 바로 수도사 '돔 페리뇽'이었습니다.
돔 페리뇽은 탄산을 없애기 위한 개발을 하던 중 다양한 포도 품종을 혼합해서 와인을 만드는 '블렌딩 기법'을 창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7세기부터 골칫거리로 여겨왔던 탄산이 오히려 오감을 자극하는 샹파뉴 와인의 주요 특색이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와인이 톡톡 터지는 독특한 맛의 샹파뉴를 대표하는 와인, '샴페인'이었습니다.
샹파뉴 지역에서 재배되는 샹파뉴 와인에만 '샴페인'이라는 라벨을 줬고 샴페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스파클링 와인에는 샴페인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습니다.
샹파뉴 와인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상 샴페인이란 명칭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샹파뉴 지역의 와인뿐인 것입니다.
5. 탄산을 다스릴 '돔 페리뇽'의 아이디어, '코르크 마개'
그리고 샹파뉴 와인을 위해 돔 페리뇽은 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바로 탄산가스의 압력을 버틸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 바로 '코르크 마개'입니다.
코르크참나무의 껍질을 채취한 후 변형 방지를 위해 6개월~ 1년 정도 자연 건조 시키고, 건조한 껍질을 뜨거운 물에 삶고 여러 공정 과정을 거쳐 와인 코르크 마개가 완성됩니다.
코르크는 탄성과 유연성이 좋기 때문에 병을 막기 아주 쉬웠고, 돔 페리뇽은 품질 좋은 코르크 마개를 이용하면 탄산가스의 압력을 버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판단은 드러 맞았고 이러한 코르크 마개는 약 3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6. 프랑스가 최고의 와인 생산지가 된 이유 3 세계박람회
중세 유럽을 휩쓴 거대한 변화 속에서 프랑스 와인은 종교와 특유의 떼루아를 통해 최고의 와인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마침내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나아갈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는데 1851년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 박람회입니다.
그리고 1855년 드디어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박람회가 개최됩니다.
이때 영국에 첫 번째 세계박람회를 빼앗긴 프랑스는 영국과는 다른 차별점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껏 세계박람회에서 선보인 적이 없는 프랑스만의 특별한 품목을 선정합니다.
파리 박람회의 야심작은 바로 '보르도 와인'이었습니다.
보르도 와인은 명성과 거래 가격에 따라 품질 등급 체계를 갖춘 후 박람회에 출품되었습니다.
이 표는 보르도 메독 지역의 와인을 1~5등급으로 분류한 표입니다.
이 등급은 프랑스 와인 라벨지를 보면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왜 부르고뉴나 샹파뉴가 아닌 보르도 와인을 박람회에 출품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영국에서 보르도 와인은 고급 와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국은 왜 보르도 와인을 고급 와인으로 여겼을까요?
영국과 프랑스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116년 간 벌인 백년전쟁 때문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잔다르크
11세기 무렵 보르도를 포함한 현재 남프랑스 지역은 아키텐 공국이었습니다.
당시 아키텐 공국의 상속자였던 엘레오노르 공주는 프랑스 왕국의 와자 루이 7세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젊은 백작 헨리 2세와 재혼하게 되고, 이후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여왕이 된 엘레오노르 공주는 결단을 하나 내리게 되는데 영국 여왕으로서 아키텐 지역을 잉글랜드 땅으로 귀속시키기로 한 것이니다.
당시 보르도는 최대 와인 산지로 떠오르는데 당시 보르도 지방에서 와인을 수출해서 걷어들인 세금이 잉글랜드 전체의 세금보다 많을 정도였습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땅을 영국에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훗날 1328년 프랑스에 새로 즉위한 필리프 6세는 보르도 지역을 다시 찾아오겠다고 결심합니다.
이로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16년에 걸쳐 백년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결국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쟁이 지속되다가 잔다르크의 출연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보르도는 영원히 프랑스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보르도 와인은 1955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프랑스 대표 산업 중 하나로 선정되어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수가 있었습니다.
7. 프랑스 와인의 위기 1 해충의 습격
그런데 승승장구해 가던 프랑스와인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프랑스 와인을 휩쓴 위험은 바로 해충의 습격이었습니다.
파리 세계박람회를 성공리에 마치고 8년이 지난 1863년, 프랑스 포도밭에서는 처음 보는 이변이 발생하게 됩니다.
포도나무 잎이 아무 이유 없이 노란색으로 변하더니 빨간색으로 바뀌면서 포도나무가 말라죽어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노랗게 물든 포도나무 잎이 시간이 지나면서 빨갛게 물이 들며 말라죽어 갔으며, 프랑스 사회 전체가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이 미스터리한 일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한 식물학자가 죽은 포도나무를 조사하던 중에 실수로 옆에 있던 죽지 않은 포도나무뿌리를 뽑게 되었습니다.
이 뿌리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데, 살아있는 포도나무뿌리에 노란색 가루가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몸길이 1mm 내외의 작은 벌레 '포도나무뿌리 진딧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벌레를 지칭할 이름조차 없었습니다.
1868년 8월 3일, 프랑스과학기술원에서는 이러한 공식 발표를 했습니다.
'포도밭을 재앙으로 몰고 간 원인은 프랑스에 없던 새로운 곤충으로, '필록세라' 또는 '바스타트릭스'(파괴자)라고 명명한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필록세라 사건이 아주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프랑스에 필록세라가 나타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미국에서 들어온 포도나무 한 그루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태가 발생하기 1년 전, 프랑스 로크모어라는 작은 마을에서 와인 상인이 프랑스와 미국의 포도나무 품종을 비교하기 위해 집 마당에 미국산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이때 미국 포도나무에 붙어 있던 필록세라가 프랑스 포도나무에 옮겨진 것이었습니다.
이후 20년이 넘도록 프랑스에 막대한 피해를 줬고 필록세라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884년쯤이 되자 프랑스 전체 포도밭의 40% 이상이 증발하고 맙니다.
결국 1870년에 필록세라를 물리칠 예방법을 찾았는데 필록세라에 내성이 있는 미국종 포도나무뿌리와 프랑스종 포도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것이었습니다.
1870년에 해결책이 나왔지만 농가들은 이 방법을 소극적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으로 미국산 포도나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던 것입니다.
약 18년이 지난 1888년이 되어서야 부르고뉴 양조가 들을 비롯한 프랑스의 농부들이 접붙이기 방식을 받아들여 필록세라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유럽에서 재배되는 대부분의 포도나무는 미국산 포도나무에 접붙인 신품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8. 프랑스 와인의 위기 2 히틀러의 등장
필록세라와의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간신히 프랑스 포도밭이 복구될 즈음에 프랑스와인은 한 인물의 등장과 함께 또 한 번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바로 인류 최대의 학살자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프랑스 농부들은 포도밭이 전쟁터로 변하기 전에 포도를 수확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 정부에서는 특별히 포도 농부들에게는 현역 소집을 연기해 주기도 하고, 일손을 돕기 위해 일부 군 병력을 포도밭으로 파견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프랑스 정부 차원에서 와인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히틀러를 주축으로 한 나치 독일은 프랑스 와인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오른팔인 헤르만 괴링은 고급 보르도 와인을 즐겼고, 선전의 대가 요제프 괴벨스는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든 부르고뉴 와인을 아주 선호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들은 프랑스 와인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던 1940년 당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와인을 조직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와인 전문가들까지 파견했는데, 나치는 이들을 '바인퓌러' 즉 '와인 총통'이라고 불렀습니다.
부르고뉴와 보르도, 샹파뉴 같은 특급와인산지에 지역별로 와인 총통을 파견해서 조직적으로 프랑스 와인을 약탈했습니다.
특히 샹파뉴 지방에서는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지 단 일주일 만에 약 200만 병의 와인을 강탈해 나갔습니다.
와인을 사랑하는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을 순순히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토마토나 양배추밭에 와인을 묻어 숨기거나 동굴에 와인을 감추는 등 와인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이렇게 수탈해 간 프랑스 와인 중 많은 양을 자신의 별장인 일명 독수리 요새 와인 저장고에 보관했고, 히틀러의 와인 저장고에는 무려 50만 병의 와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9. 프랑스 와인의 위기 3 파리의 심판
그런데 이렇게 각별한 노력으로 와인을 지켜낸 프랑스인들에게 1976년 최악의 굴욕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맙니다.
일명 '파리의 심판'이었습니다.
1976년 어느 여름 당시 파리의 와인 바이어였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는 자신들의 와인숍과 와인 아카데미를 홍보하기 위한 이벤트를 기획하게 됩니다.
이때가 마침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이한 시기였기 때문에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보기로 합니다.
이때 심사위원 11명 중 9명이 프랑스인으로 권위 있는 와인 전문가였습니다.
심사위원들은 로마네 콩티 소유주,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 셰프, 수석 소믈리에, 프랑스 와인 리뷰 잡지 편집장 등 권위 있는 프랑스 와인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으로 오전에는 화이트 와인, 오후에는 레드 와인으로 구분하여 시음을 진행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서로 담소도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시작했습니다.
심사위원 11명 중 9명이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라벨을 가린 블라인드 테이스팅이기도 했고 사람들은 프랑스 와인이 무조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었기 때문에 승패보다는 하나의 이벤트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화이트 와인 시음 결과 상위 5개 와인 중 3개가 미국 와인으로 선정된 것도 모자라 화이트 와인 1위가 미국 와인인 '샤토 몬텔네나'가 차지해 버립니다.
미국 와인은 프랑스 와인에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시음회장은 결과 발표 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립니다.
그리고 오후가 되자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레드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시작되었습니다.
오후 심사위원들은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아무런 대화도 없이 오직 테이스팅만 집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레드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레드 와인 역시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미국 와인 '스택스 립 와인 셀러(1973)'가 1위를 차지합니다.
심지어 2등과 4등 프랑스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와 '샤토 오브리옹'은 그랑 브릐 1등급의 와인으로 정말 충격적인 레드 와인 결과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76년 파리의 심판에서 1등 한 샤토 몬텔네나와 스택스 립 와인 셀러는 아직까지도 그때의 사건을 활용해서 홍보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결과를 알게 된 프랑스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시음회가 잘못됐다며 화를 내기도 했으며, 특히 프랑스 와인 리뷰 잡지의 편집장 '오테뜨 칸'은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자신의 투표용지를 돌려달라며 화를 내며 시음회 자체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을 자기들만의 해프닝으로 조용히 묻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2주 후에 뉴욕 타임지의 파리 특파원이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음회 결과가 기사로 발표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며 와인 업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됩니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2006년 파리의 심판 30주년 행사 중에 1976년 당시 출품했던 레드 와인의 빈티지까지 맞춰 재대결을 합니다.
하지만 2006년 파리의 심판 레드 와인 재대결의 결과가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미국 와인이 승리했을 뿐 아니라 아예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미국 와인이 차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파리의 심판 결과는 테이스팅 하는 환경이 한몫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 와인은 오픈과 동시에 강한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는 데 반해, 프랑스 와인은 오픈 후 천천히 향과 맛이 피어나는 경우가 많아서 와인병을 따자마자 한 모금만 마시는 테이스팅 환경상 바로 강한 향과 맛이 나는 미국 와인이 유리했을 것이라고 프랑스사람들은 믿고 있습니다.
10. 최고의 와인을 만들기 위한 프랑스의 노력
프랑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기상황 속에서도 과거나 현재나 와인에 열정을 갖고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 기후 위기에 맞춰 보르도 와인 생산자들은 새로운 포도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서 연구하고 더 좋은 품질과 더 신선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낮이 아닌 새벽에 포도를 수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여전히 세계 와인 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와인의 역사는 단순히 술의 역사이기보다는 세계사 흐름을 바꾼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라고 하겠습니다.
'in vino veritas'(와인 속에 진리가 있다)
11. 추천 와인
뱅상 지라르댕은 프랑스 부르고뉴 산 와인으로 90%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것이 특징인 와인입니다.
가볍고 신선하고 상큼한 과일 맛이 인상적인 부르고뉴 와인입니다.
부르고뉴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소고기 안심스테이크를 레어로 구워서 같이 먹는 것입니다.
샤토 로장가시는 프랑스 마고 지역 보르도 와인이며 그랑 크뤼 2등급 제품입니다.
보르도 와인은 부르고뉴 와인보다 진한 풍미와 바디감이 느껴지며, 타닌의 수령성도 있어 보다 쓴 맛이 나며 풍부한 풍미가 있는 편입니다.
또한 오크통 숙성으로 생성된 바닐라 향도 매력적입니다.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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