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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1(만남부터 사랑에 빠지기 까지) 고려 공민왕과 원나라 노국공주의 사랑 1(만남부터 사랑에 빠지기까지) 1. 개혁군주 고려 공민왕은 왜 원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졌나? 보통 영정이 한 사람의 모습만을 담고 있는 반면 위 그림에 보이는 영정은 부부가 사이좋게 한 폭의 영정에 담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과 그의 부인 노국공주는 이렇듯 영정에 함께 그릴만큼 아주 각별했던 사이였습니다. 공민왕은 원간섭기에 원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고려의 재건을 꿈꾼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때문에 이런 공민왕이 가장 견제했던 것은 원나라와 친원세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원을 배척한 공민왕의 부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나라의 공주였던 것입니다. 고려인이 아닌 원나라인이었던 공민왕의 아내 노국공주,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만나서 죽음도 .. 더보기
왕건의 손녀 천추태후 2(섭정부터 죽음까지) 왕건의 손녀 천추태후 2(섭정부터 죽음까지) 10. 천추태후의 섭정은 왜 충격적인 선언이었나? 고려시대에는 16살 이상이면 성인이었고 목종이 즉위할 당시 나이가 이미 18살이었으므로 이미 성인이었기 때문에 천추태후의 섭정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천추태후는 아들 목종을 앞세워 고려 최초로 왕의 어머니로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11. 천추태후, 김치양을 궁에 불러들이다. 궁에 돌아와서도 천추태후는 여전히 김치양을 그리워했고 섭정을 시작하자마자 김치양부터 사면시킵니다. 사랑하는 김치양을 죄를 없애고 유배지를 벗어나 개경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는 김치양을 마음 놓고 만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김치양을 만날 묘책을 다시 한번 강구하게 됩니다. 김치양에게 관직.. 더보기
왕건의 손녀 천추태후 1. 출생부터 천추태후로 불리기까지 왕건의 손녀 천추태후 1. 출생부터 천추태후로 불리기까지 1. 천추태후 출생의 비밀 천추태후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아들 '왕욱'과 '선의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천추태후는 왕건의 손녀딸이었고 왕가의 후손으로 남부럽지 않은 예쁨을 받고 자라나게 됩니다. 평범해 보이는 가계도에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천추태후의 아버지 왕욱과 천추태후의 어머니 선의왕후는 모두 태조 왕건의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즉 왕건의 자녀가 근친혼을 통해 천추태후를 낳은 것입니다. 신라 왕실의 풍습에서 영향을 받은 고려의 근친혼은 신라에서처럼 왕실 구성원들끼리 결혼을 해서 그 혈통의 신성함을 유지하고 순수한 혈통을 관리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하나의 방법인 것입니다. 왕건은 자신.. 더보기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2) 왕권 강화책부터 폭군이 되어 가는 과정과 죽음까지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2) 왕권 강화책부터 폭군이 되어 가는 과정과 죽음까지 8. 궁예의 왕권 강화책 8. 1. 철원 천도 궁예는 승승장구를 거듭하면서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송악'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선언합니다. 송악은 '패서 호족'들의 근거지였으며 특히 왕건의 직접적인 근거지였습니다. 송악에 있으면 궁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었고 자신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입니다. 궁예에게는 패서호족들의 입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궁예가 왕권 강화를 위해 들고 온 첫 번째 묘책인 '철원 천도 프로젝트'입니다. 하지만 철원으로 천도를 하게 되면 새로운 도성을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화려한 도성을 짓는데 들어간 .. 더보기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1) 출생부터 고려를 건국하기까지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1) 출생부터 고려를 건국하기까지 1. 한쪽 눈을 잃은 궁예 출생의 비밀 우리가 알고 있는 궁예의 외모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이 한쪽 눈을 가리는 안대를 쓴 모습일 것입니다. 궁예가 안대를 쓰게 된대에는 출생의 비밀과 관련이 깊습니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한 남자에게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남자는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이 궁예를 데리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아래로 던져버립니다. 지붕아래에 있던 궁예의 유모가 받아내서 목숨은 건지지만 받는 과정에서 유모의 손가락에 눈을 찔려 한쪽 눈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예는 왜 남자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일까요?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궁예의 아버지가 47대 헌안왕 혹은 48대 경문왕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후궁의.. 더보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3) 신검의 난부터 일리천전투까지 후삼국 시대의 최후와 견훤의 죽음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3) 신검의 난부터 일리천전투까지 후삼국 시대의 최후와 견훤의 죽음 1. 아들 금강에게 왕위 계승하려 하다. 견훤은 고창전투 패배 후 전세를 뒤집기 위해 줄곧 미뤄두었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금강은 몸이 크고 지략이 많았다. 견훤이 특별히 그를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 금강을 왕위 후계자로 공표한 것입니다. 금강은 풍채도 좋았던 데다 타고난 머리까 지 좋았습니다. 견훤의 기백을 쏙 빼닮은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견훤은 왜 이리 다급히 후계자를 정한 것일까요? 견훤은 젊고 뛰어난 아들을 후계자로 세워서 왕건을 꺾으려 한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함을 물론이고 기울어가고 있는 후백제를 다시 일으킬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9.. 더보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2) 후삼국시대 도래와 고려의 건국 후 공산전투 승리, 고창전투 패배까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2) 후삼국시대 도래와 고려의 건국 후 공산전투 승리, 고창전투 패배까지 1. 궁예의 후고구려의 등장으로 후삼국시대 도래 1901년 (후) 백제와 신라 두 나라로 쪼개진 한반도가 다시 세 나라로 쪼개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궁예가 고구려 부흥을 내세워 후고구려를 건국합니다. 225년 만에 다시 한번 한반도에 새로운 삼국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를 후삼국 시대라고 일컫습니다. 2. 금성(나주)이 후고구려에 투항한 사실에 분개하는 견훤 삼국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나라의 명맥을 이어가던 910년에 견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당시 후고구려의 수군이 후백제의 땅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때 쳐들어온 후고구려의 장군이 그 유명한 '왕건'입니다. 왕건(877년~943년)은 당시 후.. 더보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1) 출생부터 후백제 건국하기까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1) 출생부터 후백제 건국하기까지 1. 태생부터 비범했던 견훤 우리가 견훤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견훤이 태어났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견훤은 통일신라시대에 태어났습니다. '676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뤄내면서 통일신라시대가 도래하던 때입니다. 그리고 견훤은 867년 '경상북도 상주 가은현'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평범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짓는 농부로 신라귀족 집안이 아닌 평범한 집안이었습니다. '견훤이 태어나 아기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 아이를 수풀 아래에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견훤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의 유명한 글귀가 있습니다. 들에서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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