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터디 위드 돈벌러

노량해전,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바라본 고독하고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

반응형

노량해전,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통해 바라본 고독하고 치열했던 마지막 전투

1. 이순신, 몸은 죽고 나라는 살다

 

난중일기는 1591년, 임진(壬辰) 일기를 시작으로 1598년 무술(戊戌) 일기로 끝을 맺습니다.

그중 이순신 최후의 모습이 그려진 무술년의 기록, 그해 42일간의 일기는 1598년 11월 17일에 멈춰있습니다.

이순신은 11월 17일 그 일기를 쓴 후 18일 최후의 전장인 노량 해역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1598년 11월 19일 아침, 이순신은 사망합니다.

이순신의 죽음으로 일본과의 7년 전쟁이 막을 내렸으나 곧 그의 죽음에 대한 석연치 않은 의혹이 제기됩니다.

'싸움에 임하여 스스로 갑옷을 벗고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이순신이 스스로 죽음을 불러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논란, 그 한가운데 다시 <난중일기>가 있습니다.

이순신
이순신

2. 이순신의 죽음, 전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의견이나 소문이 끊이지 않다

이순신의 절명과 함께 임진왜란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조선땅을 지켜낸 그 순간, 이순신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순신의 죽음이 전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의견이나 소문을 기록한 사람들
이순신의 죽음이 전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의견이나 소문을 기록한 사람들

이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의 죽음이 전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의견이나 소문을 기록한 사람들입니다.

이민서

전사를 가장한 자살, 이러한 의혹들은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라는 인물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민서는 이순신이 스스로 갑옷을 벗고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민서는 '숙종'때의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순신이 살아있던 당시가 기록된 <선조실록>에는 이순신이 전사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저술한 <이충무공행록>에는 '지나가는 탄환에 맞아 숨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자살설은 17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세상은 왜 이순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끌고 그 후 노량해전으로 사망하기까지의 1년 2개월, 이순신이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에 생애를 살펴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XEpZpnImY8

3. 이순신, '고하도'에 진을 치고 군량을 마련하다 

'공로가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싸움에 임해 자기 몸을 버렸으니 공의 죽음은 본시부터 작정한 것이다'

< 이충무공전서 신구차>

공이 커서 용납될 수가 없기에 스스로 죽음을 작정했다는 이유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 사망 197년 뒤 정조(1752~1800) 때 출간 되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수원화성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담긴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다 1. 정조, 10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다 정조는 조선 제22대 왕으로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을 만든 장본

donbuller.tistory.com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성덕임

 

정조와 성덕임의 사랑(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모티브)

정조와 성덕임의 사랑(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모티브) 1. 정조와 성덕임의 첫 만남 때는 영조가 나라를 다스리던 1762년 윤 5월 13일 새벽, 당시 좌의정이었던 '홍봉한의 집에서 갑자기 통곡소

donbuller.tistory.com

이순신 사망 후 200여 년이 지난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이순신이 죽을 고비에서 벗어난 후 죽음을 결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위 내용은 이순신이 1597년, 서인들의 주장으로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결국 사형 직전까지 간 일을 말합니다.

'죽여야 마땅하다'

<선조실록>

당시 조정 여론은 이순신을 죽여야 마땅한 인물로 몰고 갔습니다.

'군량이나 무기 등은 보잘것없었다'

<이충무공행록>

그러나 그 후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역사에 남는 대승을 거두었고 비록 보잘것없는 군량과 무기였지만 가열차게 수군 재건에 임했습니다.

가장 시급히 마련해야 했던 것은 새로운 수군진을 꾸릴 장소였습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이끌고 어이도, 법성포, 위도와 고흥산도를 거칩니다.

고하도( 전남 목포시 )
고하도( 전남 목포시 )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  고하도( 전남 목포시), 그곳은 이순신이 원하는 수군진을 꾸릴 딱 맞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목포에 이르렀다가 보화도(고하도)에 옮겨 정박하니 서북풍을 막을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 섬 안을 돌아보니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29일>

모충각
모충각

<모충각>에 세워진 '고하도유허비'의 비문에는  이순신이 고하도에 닻을 내린 또 다른 까닭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서울의 선조와 고하도의 수군을 위해 양식을 마련하고 또 군사를 재정비하기 위해 택했다'

<모충각 고하도유허비 비문>

 

그렇다면 현재 고하도에는 당시의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요?

안타깝게도 현재 그때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하도 성문이 있었던 자리(추정)
고하도 성문이 있었던 자리(추정)

성문이 있었다는 자리만을 어렵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명량해전을 치른 지 두 달 후에 난중일기에  보다 선명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맑다. 일찍 새로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서 종일 거닐며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새로 지은 집에 지붕을 이었고 군량 창고도 세웠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6일>

추석도 한참이 지난 음력 11월이었지만 새로 마련한 군량 창구는 10여 일 만에 가득 찼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난중일기에는 관련된 기록이 없어 경북 안동에 '충효당'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봤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유성룡

 

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킨 해결사 유성룡

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킨 해결사 유성룡 1. 유성룡, 21살에 스승 '퇴계 이황'으로부터 극찬을 받다 유성룡은 21살이 되던 해에 당시 저명한 학자였던 퇴계 이황을 직접

donbuller.tistory.com

전쟁이 장기화되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군량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순신 또한 고하도에서 겨울을 맞으면서 군량을 확보하는 것에 대한 고뇌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보면 이순신은 백성들의 지원으로 군량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조선 수군에게 곡식을 바쳤고' 해로통행첩'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순신은 조선의 선박을 왜군으로부터 지켜주겠다며 해로통행첩을 발행했고 백성들은 흔쾌히 그것을 곡식과 바꾸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 서남해안 연안은 피난선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으로 피난선들을 통제함과 동시에 군량을 확보할 수 있는 대책으로서 해로 통행첩 발급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난하는 사람들은 기뻐하였다. 그래서 10여 일 동안에 군량 1만여 섬을 얻었다'

<징비록>

특히 피난선들은 조선수군이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도록 통제해 주었기 때문에 해로 통행첩을 반겼습니다.

그래서 10여 일 동안에 무려 군량 1만 여 섬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대략적인 수군정비를 마쳤습니다.

왜군의 공격도 더 이상 없었고 고하도는 고요했습니다.

'임준영이 와서 완도를 정탐해 보니 적의 배가 없다고 전했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20일>

4. 이순신, 병기 복구와 판옥선 구축에 박차를 가하다

편전(애기화살)
편전(애기화살)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소실된 병기 복구를 위해서 편전제작에도 힘썼습니다.

편전은 속도가 빠르고 관통력이 높아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주요 무기로 사용됐습니다.

또한 대대적인 군사모집에 나서는 한편 조선 군함 판옥선의 구축에도 박차를 가합니다.

명량해전에서 13척의 판옥선을 가지고 전투에 임했던 조선수군은 고하도에 진을 치고는 고하도를 비롯해 해남, 진도 등에서 짓거나  다른 곳에 흩어져 있던 배를 모아 50여 척의 판옥선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수군 병력을 약 8000여 명을 확보했습니다.

5. 이순신, 어머니와 막내아들 '이면'을 먼저 보내다 

'맑고 따뜻하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7일>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난중일기 1597년 11월 18일>

이 무렵의 난중일기는 대체적으로 평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드러나는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불과 한 달 전 이순신은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말을 타고 가다 떨어졌다. 막내아들 면이 끌어안은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깨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이순신은 불길한 징조의 꿈을 꿨고 그날 저녁 가족의 생사를 묻기 위해 고향집에 보냈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통곡
통곡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했다'

'왜적들이 여염집을 분탕질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가 싸우다가 복병의 칼에 찔려 길에서 죽은 것이다'

<이충무공행록>

이면의 무덤
이면의 무덤

명량해전에서 패한 왜구는 이순신의 본가가 있던 아산으로 쳐들어갔고 막내아들 이면은 왜구가 여염집을 분탕질한다는 말을 듣고 달려 나가 싸우다 왜적의 칼에 찔려 전사하고 만 것입니다.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이 아버지 이순신을 앞서 가버린 것입니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내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은 채 울부짖을 따름이다'

막내아들의 사망 소식은 불과 6개월 사이 이어진 비보로 이순신은 이미 그 해 초 어머니를 여의었었습니다.

아들이 백의종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만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장수로서 슬픔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6일>

이순신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순신은 아들의 죽음마저 내색하지 않으며 조선을 위해 수군을 재건하고 있었습니다.

6. 이순신, 보다 넓고 함대를 숨기기에 적합하며 남해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고금도'로 진을 옮기다

고금도(전남 완도군)
고금도(전남 완도군)

난중일기를 비롯한 이순신의 서간첩에 따르면 이순신은 고하도에서 108일간을 머무르다 좀 더 나은 기지를 찾아 1598년 2월 18일, 고금도에 도착합니다.

이순신은 마침내 고금도에 진영을 꾸렸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가 이룬 눈부신 성과는 언제나 그만큼의 어두움도 함께 따라다녔습니다.

고하도보다 고금도는 보다 넓고 인구가 많았습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본격적인 수군 진영을 꾸립니다.

주변의 여러 섬들로 인해서 고금도의 위치는 함대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리고 서해가 아닌 남해 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전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약 9개월 간, <난중일기>의 기록이 빠져있습니다.

1598년 1월 5일부터 9월 14일까지의 <무술일기>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누락된 날짜에 해당되는 기록이 서간첩에 있는데 무술년 2월 19일 자로 기록된 '현건'이라는 '감역(監役)'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현충사 유물관&lt;충남 아산시&gt;
현충사 유물관<충남 아산시>
난중일기 서간첩
난중일기 서간첩

현충사 유물관에 <난중일기 서간첩> 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제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1598년 2월 19일에 보낸 편지를 통해 2월 18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살펴보면 <난중일기>와는 사뭇 다른 이순신의 부드러운 감수성이 드러납니다.

'편지는 오래전에 보낸 것이지만 그리운 마음은 더욱 새롭습니다. 언제나 월악산의 구름과 대숲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속으로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1598년 2월 19일 감역(監役) 현건에게 보낸 편지>

임진왜란 전의 평화로움을 그리워하며 이순신은 조선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채 고금도에서 새로운 수군기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고금도에서 이순신은 그간 소실된 군사력을 완전하게 회복합니다.

병기, 군량, 군사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어란정
어란정

현재 고금도에는 군사들이 전투 훈련을 마치고 와서 목을 축였을 것으로 보이는 어란정(於蘭井)이 남아 있습니다.

7. 명나라 군사 최초의 수군이 지원되다

여기에 명나라의 수군까지 가세합니다.

'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을 전별하면서 두 차례 다례와 주례를 베풀었다'

<선조실록>

명나라 군사 최초의 수군지원이었습니다.

명나라 도독 진린은 친히 선조의 전송을 받으며 1598년 6월 동작강(지금의 한강)에서 고금도로 향합니다.

그러나 선조의 극진한 배웅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진린은 조선 장수를 때리고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포악한 성질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5,000여 명의 명나라 수군 지원을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특히 이순신의 든든한 조력자 유성룡(1542~1607)의 걱정은 사뭇 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패할 것이다'

<징비록>

이순신의 성격을 잘 아는 유성룡은 진린과 이순신이 화합하지 못해 결국 패할 것이라 장담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려가 크기는 선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후하게 대접하여 도독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하라'

<이충무공행록>

선조는 이순신에게 도독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전교까지 내렸습니다.

예상한 바대로 고금도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진린은 분을 참지 못하고 술상을 엎었습니다.

1598년 7월, '절이도전투'에서 이순신의 군사가 크게 싸워 이겼는데 문제는 명나라 수군은 전공을 전혀 거두지 못하고 조선수군만 싸워서 이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싸우지 않는 부하장수를 진린이 참수하려는 것을 이순신이 말립니다.

'본국에 있을 때부터 장군의 이름을 수없이 많이 들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허명이 아니었소'

<이충무공행록>

조선수군의 전공이 진린의 전공이 될 수 있다라면서 이순신은 전공을 모두 진린에게 돌립니다.

절이도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은 고흥반도까지 장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 이순신, 명나라 군대의 통제권까지 얻게 되다

이제 계속 동진해서 여수반도를 끼고 있는 순천만과 남해도의 광양만을 확보하면 전라도 수역을 차지하는 상황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문제가 불거지고 맙니다.

'약탈을 일삼았다'

<이충무공행록>

진린의 군사가 약탈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이에 이순신은 마을의 집들을 헐고 자신의 짐을 배에 싣도록 명령합니다.

의아한 진린이 이순신에게 어찌 된 일인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귀국 군사들은 오자마자 행패를 부리고 약탈하는 데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어 모두 피해 달아나고 있소. 나는 대장의 몸으로 혼자 남을 수 없기 때문에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오'

조선 수군이라는 버팀목 없이 명나라군대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간걸(懇乞)/간절히 애걸하였다'

<이충무공행록>

다급해진 진린은 이순신에게 간절히 애걸합니다.

'귀국 군사들은 우리들을 속국의 신하로만 알고 전혀 꺼림이 없소. 내가 그들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서로를 보조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하지요'

<이충무공행록>

비로소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들의 통제권까지도 갖게 됩니다.

9. 이순신, 명나라 황제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8종류의 선물을 받다 

진린은 훗날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공에 대해 보고했고 명 황제는 이순신에게 8종류의 선물을 보냈습니다.

참도
참도
도독인
도독인
홍소령기&#44; 남소령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귀도
귀도
곡나팔
곡나팔
호두령패
호두령패

은도금장식을 두른 180cm 길이의 참도 2개와 황제가 보낸 도장이라 표기된 보관함과  동으로 만든 도장인 '도독인' 그리고 군대의 명령을 전달할 때 사용했던 깃발과  183cm에 달하는 귀도 그리고 구리로 만든 곡나팔과 대장이라고 쓰인 '호두령패등'입니다.

'공은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오. 만일 중국으로 들어가 벼슬한다면 당연히 천하의 명장이 될 텐데 왜 여기서 이렇게 곤궁하게 지내려 하오'

<시장, 諡狀>

진린은 심지어 이순신에게 명나라로 함께 가서 살자고 수없이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모두 이순신의 리더십으로 인해 발생한 일들입니다.

그렇게 포악하기로 이름난 진린이었지만 곧 이순신을 존경하고 따르게 됩니다.

<징비록>에 따르면 진린은 모든 일에 있어서 이순신에게 자문을 구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가마가 감히 이순신을 앞서가는 일조차 없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10. 조선 땅에서 이순신의 목숨은 적이 아닌 오히려 조선에 의해 더 위험했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 끊임없이 명나라로 함께 가서 살자고 권유했지만 이순신은 당연히 그런 진린의 청을 무시합니다.

하지만 이순신에게 이런 진린의 제안은 어쩌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였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실 조선 땅에서 이순신의 목숨은 오히려 적이 아닌 조선에 의해 더 위험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이 위험했던 중심에는 '선조'가 있었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지 오래였습니다.

이는 1597년 9월에 있었던 명량해전에 대한 선조의 태도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뤄낸 명량해전이었지만 선조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통제사 이순신,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조실록>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당연한 것이며 큰 공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598년 4월 15일, 비변사는 이순신의 포상에 대해서 다시 건의합니다.

' 이순신은 수군이 다 망가진 후에도 이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포상을 내리는 문제는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려있습니다'

이순신이 수군이 다 망가진 후에도 이런 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포상을 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는 선조의 처분에만 달려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준다는 것은 좀 지나친 듯하다. 이를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선조실록>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줄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교합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공을 인정하는 것에 매우 인색했고 그의 전공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시 전쟁 상황을 지켜보았던 명나라 어사 '양우'라는 사람이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여 이순신에게 꼭 상을 줘야 하는 사항이라며 선조에게 강력히 권유합니다.

그래서 결국 정 3품의 품계에서 종 2품 가성대군의 품계까지 올려주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이전에 이미 정 2품의 품계를 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명나라의 강요에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취한 정도의 조치에 불과한 승진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조의 모습에 대해 이순신은 매우 서운하게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균
원균

그렇다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를 한 '원균'에 대한 선조의 평가는 어땠을까요?

선조는 '그것이 사람이 한 일이 아니라 하늘이 한 일'이라고 원균의 편을 들었습니다.

선조는 왜 이순신과 원균에게 이렇게 다른 태도를 보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순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선조는 직계가 아닌 방계로 왕위에 오른 조선 최초의 임금이었습니다.

권력을 쥔 누군가가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면 선조의 왕위는 곧바로 위태로워졌던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순신의 연승은 왕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거대한 성과였던 것입니다.

1596년, 그것을 드러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충장사(광주광역시)
충장사(광주광역시)
김덕령
김덕령

의병총수였던 '김덕령'이 난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이었습니다.

김덕령은 20여 일간의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장살 당했습니다.

이는 김덕령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의병장 곽제우, 홍계남 등도 역적으로 모함을 받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왕권은 추락했고 이런 선조에게 이순신은 이들과 다르지 않게 경계해야 할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조정을 속이고 있다. 임금을 무시하고 있다.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아야 한다 '

<선조실록>

3번의 파직과 2번의 투옥 그리고 다시 2번의 백의종군, 이순신의 삶은 고달팠고 삶은 한결같았습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재등용하기는 했지만 선조입장에서 이순신은 항상 신경이 쓰이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간 국왕 선조는 그런 위기 속에서 조선을 구한 성웅 '이순신'의 모습과 대비되었고 이순신의 위치가 올라갈수록 선조의 입지는 낮아질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순신이라는 존재는 전쟁의 승리와 패배 그 결과와 상관없이 제거되는 것이 선조에게는 거의 수순처럼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11. 선조뿐 아니라 조정 대신들도 이순신을 제거할 기회를 수시로 엿보다

조정 대신들 또한 끊임없이 이순신을 없앨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회의가 이순신의 난중일기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특히 이순신은 어머니를 잃고 난 후로 절망이 깊어졌습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6일>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1597년 4월 19일>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난중일기 1597년 5월 5일>

임진왜란 7년 차에 적은 감역 현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순신은 '수염과 머리가 희어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므로 아침에 흰머리털 몇 오라기를 뽑았을 뿐이다'

<난중일기 1593년 6월 12일>

그러나 5년 전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으니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이순신이 얼마나 극도의 고통과 절망, 외로움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에게 조선수군통제사는 자신을 지키는 자리인 대신에 스스로에게 칼을 겨누는 역할이었습니다.

12.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으로 왜군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하다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핍박과 조선군사를 무시하는 명나라 군사들 그리고 아들과 어머니의 죽음까지 이순신의 삶은 극도로 고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희소식이 전해집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바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에서 사망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철군명령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철군명령서

그의 유언은 왜 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철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천 선진리왜성
사천 선진리왜성

사천 선진리왜성은 왜군 장수 '시마즈'가 주둔했던 곳입니다.

시마즈를 비롯한 장수들은 1598년 11월 중순경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지를 받들어 철군하고자 계획했습니다.

이때 강화에 나선 인물은 '고니시 유키나가'였습니다.

고니시는 안전한 후퇴로를 확보하기를 원했습니다.

'비밀리에 모의하여 소서행장과 강화'

<선조실록>

고니시는 조선을 따돌린 채 명나라와 강화를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순천왜성(왜교성)
순천왜성(왜교성)

고니시는 그 대가로 순천왜성 즉 왜교성을 명나라에 넘겨주겠다고 서약합니다.

전쟁이 종결되고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로서는 더 이상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순천왜성을 넘겨받는 데 합의한 이는 명나라 제독 '유정'이었습니다.

왜의 명나라에 대한 위협이 사라져 가고 있는 이상, 유정 또한 전의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로병진
사로병진

그것은 '사로병진'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사로병진이란 순천왜성과 사천왜성 그리고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공격한 진공작전이었습니다.

1598년 9월 20일 요도에 도착한 이순신은 도독부를 설치하고 곧바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이순신은 순천왜성을 유정이 이끄는 육군과 합세해서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임진왜란 최대의 수륙합동작전이었습니다.

전투는 거칠었고 그 달이 넘어가도록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유정이 이끄는 육군의 태도는 이미 조선군의 의지와는 달랐습니다.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난중일기 1598년 10월 6일>

'적들은 허둥지둥 달아났다'

<난중일기 1598년 10월 4일>

'육군은 다시 정비해 전진하려고 한다'

<난중일기 1598년 10월 7일>

'육군이 이미 출수했으므로 배를 거느리고 해안의 정자에 이르렀다'

<난중일기 1598년 10월 9일>

명나라 군사들은 전투를 관망하며 지켜만 볼 뿐, 나서려 하지 않았고, 조명연합군의 승리가 목전이었지만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도발적이고 야심 찼던 '사로병진작전'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13. 이순신, 왜군의 철군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몸소 남쪽으로 내려가야 중국 장수가 이를 듣고 마음 쓰기를 반드시 달리 할 것이다'

<선조실록>

사태가 이쯤 되자 선조는 직접 남하하겠다는 결심을 표명합니다.

'목숨이 끊기지 않았는데 어찌 뒤에 물러나 있겠는가'

<선조실록>

선조는 목숨이 끊기지 않았는데 물러설 수 없다며 결의를 보인 것이었습니다.

'7년 동안 행한 모든 일이 구차하게 보전하려는 계책뿐이었는데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는 하교는 믿어지지 않는다'

<선조실록>

그러나 세상은 선조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선조의 행동은 예측한대로였습니다.

1598년 11월 8일, 이순신은 이번에도 스스로 나서 움직이려 했습니다.

명나라 진린 도독과 작전계획을 세운 이순신은 곧바로 출항했습니다.

그리고 고니시를 치기 위해 장도로 출전합니다.

이 날 왜선 10여 척이 출항했으나 조명연합수군에게 격퇴당하고 이순신에게 바닷길을 봉쇄당하여 순천왜성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깁니다.

고니시가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며 바닷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도독이 왜선을 맞이하게 하였다.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 돼지 두 마리와 술 2통을 도독에게 바쳤다. 이는 반드시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나간 왜적일 것이다 '

<난중일기 1598년 11월 14일>

진린이 왜선을 드나들게 하며 경계가 해이해진 사이 왜군들은 조선수군진영을 지나 유유히 빠져나갔습니다.

결국 고니시가 순천왜성에 고립됐다는 구원요청이 전해지고 왜군은 고니시 구출작전을 펼치기로 합니다.

이것이 임진왜란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대장 된 사람은 화친을 말할 수 없소. 이 원수는 결코 놓아 보낼 수 없소'

<1598년 11월 16일 이충무공행록>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이 철군하도록 놔두자고 요청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절합니다.

진린은 고니시에게 이미 통제사 이순신에게 말했다가 거절당했다며 이제 두 번 다시 말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소. 나는 결코 적을 놓아주고 우리 백성을 죽이도록 할 수는 없소'

<이충무공행록>

1598년 11월, 패색이 짙어지자 왜군은 명과의 밀약을 통해 탈출을 도모합니다.

난중일기에 이때 왜군이 명에 바친 물품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을 가져와 도독에게 바쳤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6일>

하지만 이순신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줄 수 없었고 탈출하는 왜선 추적을 명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598년 11월 17일, 이 날의 일기가 이순신의 마지막 기록이었습니다.

'어제 왜에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적했다. 왜적은 한산도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난중일기 1598년 11월 17일, 난중일기 마지막 기록>

'나의 목숨은 하늘에 달렸다'

<선묘중흥지>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은 온갖 회유와 회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량해역으로 진격할 것을 결심하고 출정합니다.

14. 이순신, 자신의 마지막 전투이자 임진왜란의 최후대첩인 노량해전을 죽어서까지 승리로 이끌다 

그리고 1598년 11월 19, 이순신은

노량해협
노량해협

자신의 마지막 전투이자 임진왜란의 최후대첩인 노량해전이 벌어집니다.

1598년 11월 18일 저녁, 이순신은 사천 쪽에서 동진하며 구원을 요청하고 있었던 시마즈군을 친다면 왜군에 대한 섬멸전 그리고 종결전으로 갈 수 있겠다는 판단했던 것입니다.

관음포
관음포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는 전투, 하지만 이순신은 관음포구로 길을 떠납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 출정일 자정 갑판 위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나라를 위해 적을 없앨 수만 있다면 죽어도 또한 한이 없겠나이다'

<이충무공행록>

이순신은 군사들에게 나무 재갈을 물렸습니다.

밤바다가 고요했고 왜선 500여 척이 노량으로 향하고 있었고 이순신은 숨죽여 왜군을 기다리고 이었습니다.

드디어 노량해전이 시작되고 명나라 선발대가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면서 이순신의 함대는 중앙을 돌파합니다.

화공전선에 왜선을 거침없이 불타올랐고 이에 뒤질세라 왜군의 조총도 불을 뿜었고 타오르는 함선들로 밤바다가 환해졌습니다.

 

이때의 급박한 상황이 <상촌집>에 실려있습니다.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면서 적선 수백 척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온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상촌집>

적군의 배와 아군의 배가 엉켜 적의 얼굴까지 보이는 근접전이 벌어지며 7년 전쟁 최대의 교전이 벌어집니다.

'죽게 되면 죽을 따름이다

<징비록>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졌고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못되었습니다.

왜군이 드디어 수세에 몰리면서 결국 필사의 탈주를 감행합니다.

일본군은 노량 해전 초기 전투에서 밀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포구 안을 해구로 잘못판단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관음포'입니다.

그러나 관음포구로 들어간 왜군은 곧 엄청난 실수를 했음을 깨닫습니다.

갑자기 육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갇힌곡(가청곡)
갇힌곡(가청곡)

가청(假靑) 곡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강진바다와 관음포바다를 사이에 작은 육지가 나오는데 육지를 누가 푸른 물감을 칠해놓아 바다처럼 보인다고 하여 거짓가에 푸를 청자를 써 '가청'이라 불립니다.

'왜적의 배 100척을 포획하고 200척을 불살랐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떠오르지 않아 그 수를 알 수 없다'

<선조실록>

왜군들은 가청곡이 수로인 줄 알고 그곳으로 도주하다가 결국은 육지에 가로막혀 수장되거나 포획된 것입니다.

빠져 죽은 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는 정도였고 왜군은 절망합니다.

1598년 11월 19일, 아침해는 어김없이 떠올랐고 이순신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의 마지막은 그 어떤 회한도 슬픔도 없이 건조했습니다.

' 전방극신물언아사(戰方急愼勿言我死),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징비록>

이순신이 마지막 남긴 것은 '의지'뿐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지휘관이 죽으면 부하들이 동요할 것을 염려해 남긴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 말로 인해 부하들은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돌아가는 왜선 500여 척 중에서 200여 척을 격파했고 온전하게 돌아간 왜선은 불과 50여 척에 불과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정오 무렵, 노량해전은 끝났습니다.

15. 이순신,  조선과 백성들을 위했던 성웅으로 길이 남게 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굳이 이순신이 퇴각하는 왜구와 마지막까지 전투를 나설 필요가 있었나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는 전쟁 목표가 달랐습니다.

정유재란은 조선 땅 침탈을 목표로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순신 입장에서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 원수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오해와 역모로 가득한 조선에서 <난중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것은 하나하나 이순신이 후세에 전하려 했던 엄혹한 사실이었습니다.

'신망국활(身亡國活)'

이순신이 쓰지 못한 마지막 일기는 '몸을 죽여 나라를 살렸다'는 역사의 평가였습니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 조선 사람들은 물론 명나라 군사들까지도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선조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1598년 11월 24일,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접한 선조는 이렇게 하교합니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

그 후 이순신이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것이 인조 21년, '영의정'으로  추촌 된 것도 정조 17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난중일기>를 통해서 조선과 백성들을 위했던 이순신의 세세한 실핏줄까지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책임져야 했던 한 사람으로서의 이순신, 난중일기는 인간 이순신의 뜨거운 독백이었습니다.

.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이순신

 

조선 바다를 지킨 이순신(한산대첩, 명량대첩)

조선 바다를 지킨 이순신(한산대첩, 명량대첩) 1. 임진왜란의 시작과 이순신의 조선 수군의 맹활약 1592년 4월 13일, 부산 앞바다로 쳐들어 온 일분군에 의해 임진왜란(任辰倭亂)이 시작됩니다. 임

donbuller.tistory.com

 

<출처: KBS역사스페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