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계승과 영토 문제로 발발한 백년전쟁
1. 잉글랜드와 프랑스 백년전쟁의 서막, 필리프 6세 프랑스 왕위에 오르다
1328년, 프랑스의 샤를 4세는 왕위를 이을 후계자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새로운 왕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이때 프랑스 왕위 후보로 두 사람이 거론됩니다.
다름 아닌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발루아 백작의 아들 필리프 6세였습니다.
프랑스 왕위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중세 버전의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프랑스 왕위를 두고 왜 잉글랜드 왕이 후보로 거론된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조의 가계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328년 사망한 샤를 4세에게는 형제 3명과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형인 루이 10세와 필리프 5세도 차례로 모두 후사 없이 사망했습니다.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다 보니 그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 후보를 찾았습니다.
샤를 4세에게는 '이자벨'이라고 하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여동생은 잉글랜드 왕실의 에드워드 2세와 혼인을 했고 그 둘 사이에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샤를 4세의 아버지 필리프 4세에게는 남동생 발루아 백작이 있었고 그 발루아 백작의 아들이 바로 또 다른 프랑스 왕 후보 필리프 6세인 것입니다.
프랑스 왕의 조카와 프랑스 왕의 사촌지간 중 과연 누가 프랑스 왕위에 올랐을까요?
왕위에 오른 것은 샤를 4세의 사촌 '필리프 6세'였습니다.
2.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에서는 백작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이유는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아무리 왕의 핏줄이라고 해도 멀리 바다 건너 잉글랜드의 왕이 프랑스의 왕까지 겸하는 상황을 막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프랑스 왕위 다툼에서 밀린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뿐 아니라 프랑스까지 두 나라의 왕이 될 기회를 놓쳐 분했지만 일단은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에드워드 3세가 참을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은 동등한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에서는 왕이지만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의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의 신하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생각하기 힘든 개념이지만 중세에는 국가 개념이 현대의 국가 개념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중세 사회를 '봉건제 사회'라고 합니다.
봉건제는 특별한 '주종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령 왕과 기사가 서로 계약을 통해 서로 주종 관계를 맺으면 기사는 왕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기사에게 충성을 받은 왕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봉토'라고 불리는 땅을 하사했습니다.
즉 충성과 봉토가 오고 가면서 주군과 가신, 왕과 신하 사이의 쌍무적 계약관계가 성립됩니다.
이 땅을 봉토를 받은 기사들은 자손들에게 그 땅을 대대로 상속했습니다.
3. 노르만 정복(1066~1071년) 이후 프랑스왕과 잉글랜드 왕의 주군과 가신의 관계가 이어지다
이런 봉건제 사회에서 약 300년 전에 백년전쟁이 벌어집니다.
프랑스왕에 충성을 맹세했던 가신이었던 '노르망디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쳐들어가서 잉글랜드의 왕이 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을 '노르만 정복'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왕은 바다 건너 잉글랜드로 가면 왕이었지만 프랑스로 오면 프랑스왕의 신하라는 두 개의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이후 프랑스 귀족들과 잉글랜드 왕가는 혼인을 통해서 프랑스 내에 영토를 넓혀 갔고 반대로 프랑스 왕들은 그 영토를 몰수하는 과정이 반복되었고 노르만 정복 이후 약 300년 동안 계속하게 됩니다.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의 왕위 계승권 다툼이 일어날 즈음에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에서 '기옌'이라고 하는 알짜배기 지방만을 봉토로 가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 다툼이 끝나고 난 뒤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 새로운 왕이 된 필리프 6세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기옌'이라고 하는 땅을 계속 봉토로서 유지하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마리앙투아네트
4. 프랑스 왕 필리프 6세,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에게 부여한 봉토인 '기옌' 지방을 몰수하기로 선언하다
이렇게 한 국가의 왕이지만 결코 대등한 관계일 수 없었던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이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두 왕의 신경전이 벌어진 곳은 프랑스 북부에 있는 '플랑드르'라고 하는 지방이었습니다.
플랑드르는 유럽 최대의 모직물 생산지로 이를 통해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프랑스의 경제적 요충지 중 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플랑드르는 동시에 잉글랜드에게도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왜냐하면 플랑드르의 모직물을 만드는 주원료인 양모가 주로 잉글랜드에게서 수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플랑드르는 프랑스 왕가와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프랑스 왕가가 플랑드르에서 나오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탐내고 빼앗아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플랑드르는 자주 프랑스 왕권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며 반란을 일으켜왔습니다.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른 직후에도 플랑드르에서 또다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빌미로 필리프 6세가 직접 플랑드르에 군대를 이끌고 가서 봉기를 진압한 후 플랑드르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플랑드르에서 활동하던 잉글랜드 상인을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대한 잉글랜드의 양모 수출을 전면금지해 버립니다.
에드워드 3세가 양모 수출을 중단하자 필리프 6세는 보다 강경한 조치로 응대합니다.
즉 신하인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인 자신에게 불충한다면서 반역죄를 들어 잉글랜드왕이 프랑스 내에 가지고 있던 영지인 기옌땅을 몰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기옌은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의 공작으로서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었는데 기옌의 중심지는 유럽 최대의 와인 산지인 '보르도'입니다.
보르도는 당시에도 유럽 전역에 와인을 수출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던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당시 보르도에서 수출하던 와인이 750ml 병 기준으로 1년에 2억 병 이상을 수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르도에서 나오는 세금이 잉글랜드 땅 전체에서 걷는 세금보다 많았습니다.
보르도가 잉글랜드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년전쟁은 왕위 계승 문제와 영토 문제가 계기가 되어 발발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5. 에드워드 3세의 전쟁 선포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 시작되다
기옌을 몰수하겠다는 소식에 화가 난 에드워드 3세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신경전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합니다.
'프랑스의 진정한 왕위 계승자는 바로 나다'
에드워드 3세는 이렇게 외치며 필리프 6세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1337년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는 호기롭게 전쟁을 선포하며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자존심을 건 일생일대의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바로 백년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6. 프랑스, 기사도로 충만한 장갑 기사들이 든든하게 전장을 지키다
하지만 초기상황은 잉글랜드에게 절대 유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국력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프랑스의 인구는 약 1700만 명으로 잉글랜드 인구의 4배 정도 됐습니다.
또힌 프랑스는 봉건제가 발달했었기 때문에 싸우는 기사의 수가 유럽에서 가장 많았습니다.
과연 강대국 프랑스와 대서양 건너에 있는 작은 섬나라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1339년 10월, 에드워드 3세가 약 1만 2천 명의 군대로 직접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이끌고 온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군과 직접적으로 맞붙어 싸우지는 않습니다.
대신 프랑스의 수많은 경작지, 마을, 방어가 허약해 보이는 도시과 마을을 약탈하고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합니다.
프랑스군에 비하면 잉글랜드 군이 전력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잉글랜드 전면전 대신 소규모의 병력으로 약탈 전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잉글랜드 군에 의한 10여 년간 약탈에 대응하던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규모 병력을 모집해서 참전을 결정합니다.
이때 필리프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영주들이 데리고 나온 병력은 약 3만 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프랑스군의 자랑인 '기사'들이 있었습니다.
긴 창을 들고 온몸에 무거운 강철 갑옷을 입은 모습입니다.
강철 갑옷의 무게만 20~25kg에 투구무게만 2~4kg으로 무장했습니다.
프랑스는 영주들을 통해 많은 기사들을 키웠고 이 기사들은 이미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던 검증된 전력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기사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덕목이 바로 '기사도'입니다.
'기사도'란 봉건 제도였던 중세의 서유럽에서 이상적인 기사의 삶을 제시하기 위해 성립된 규범의식 또는 행동 지침을 말합니다.
★기사도의 원칙★
적에게 등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명예를 지켜야 한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약자를 존중하고 지켜라
교회를 보호해라
이런 기사도를 지키지 않으면 기사답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 기사도가 처음 생겼고 알렉상드르 뒤마의 책 <삼총사>에 보면 첫눈에 반한 보나쉬 부인을 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달타냥의 모습을 통해서 기사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여성을 대하는 매너들이 당시 기사도에서부터 유래됐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나폴레옹
7. 여러모로 열세였던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첫 전면전인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다
강력한 프랑스군에 맞서는 잉글랜드 군의 전력은 어땠을까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가 약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나선 반면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에게는 약 1만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습니다.
잉글랜드 군 중 갑옷을 입고 무장한 기사는 약 2천 명뿐이었습니다.
드디어 잉글랜드와 프랑스나 두나라의 군대가 제대로 맞붙어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346년 벌어진 '크레시 전투'입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에 먼저 도착해서 지대가 조금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잉글랜드, 파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프랑스 군대가 자리 잡은 곳이었습니다.
잉글랜드는 해발 20~60m 내의 작은 언덕 위에 진을 펼치고 있었고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병사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립니다.
'말에서 내려라'
말을 타면 돌격할 때는 용이하지만 방어를 하기에는 빈틈이 많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이런 잉글랜드 군의 전략을 대략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가 보낸 척후병이 이 상황을 보고 했기 때문입니다.
척후병은 프랑스의 필리프 6세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잉글랜드군들이 철저하게 전투 대형을 갖추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밤은 쉬고 내일 전열을 가다듬어 진군할 것을 간언 드립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도 척후병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멈추고 진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적과 대치한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프랑스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3만 명이나 되는 군대가 움직이다 보니 선두에 서 있던 왕의 명령이 뒤까지 전달되지 못해 선두에 선 프랑스군이 멈추지 않고 진군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프랑스 기사들이 막무가내로 진군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오랜 기근 때문에 국가적으로 불황이 심했는데 그 때문에 기사들의 수입이 줄었고 그 부족한 수입을 만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전쟁터에서 적군을 포로로 잡아서 몸값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눈앞에 잉글랜드 군을 마주한 프랑스군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서로 포로를 잡겠다고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프랑스에 3만 명에 달하는 군대는 잉글랜드 군이 있는 언덕을 향해서 그대로 돌진합니다.
프랑스 왕은 당황했지만 도저히 군사들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일단 공격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난간함 상황에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믿고 있던 히든카드가 하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럽에서 강하기로 소문난 '제노바의 용병'을 약 3천 명이나 고용해서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노바 용병이 쓰던 '석궁'이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석궁이 워낙 타이트하게 묶여 있어 다소 조작법이 어렵고 힘을 필요로 해서 한 손이 아닌 두 손으로 돌려서 장전을 해야 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 군이 쓰던 것은 장궁인데 장궁을 쏘던 궁수가 약 7천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장궁으로 언덕 위에 있던 잉글랜드 궁수들은 하늘을 어둡게 뒤덮을 정도로 많은 화살을 쏘아댑니다.
언덕 위에 적진이 배치된 상황이라 프랑스의 기대와는 달리 제노바 용병들의 석궁으로 이 장궁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석궁은 장궁에 비해서 장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끊임없이 쏘아대는 잉글랜드 군의 화살에 대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악재가 하나 더 겹쳐집니다.
바로 전투 전에 비가 내린 것입니다.
석궁을 쓰는 제노바 용병들에게 비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석궁이 습기로 인해서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노바 용병들은 결국 전장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프랑스 측 사령관은 이렇게 명령을 내립니다.
'프랑스군의 전진을 가로막는 저 오합지졸들을 짓밟아라'
프랑스의 기사들은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제노바 용병이 기사도 정신을 위배한 것이라며 분노하였고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서 거침없이 선두에서 후퇴하던 제노바 용병들을 말로 짓밟아 죽입니다.
그런데 프랑스군내에서는 이때 죽어가는 제노바 용병의 비병을 듣고 또다시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
앞에서 비명소리가 나니 후방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 군사들이 '우리 편이 공격당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계속 멈추지 않고 밀어붙인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전투 전날 내렸던 비 때문에 언덕 아래 땅이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진창이 되어 있어 이동마저 어려웠습니다.
이때 잉글랜드 군의 화살세례에 먼저 말이 맞고 쓰러지고 프랑스 기병들이 쓰러진 말에서 겨우 일어나서 공격이라도 하려고 하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잉글랜드 기병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맙니다.
결과는 잉글랜드의 압승이었습니다.
잉글랜드 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반전의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군은 약 4천 명 사망하고 필리프 6세도 화살을 맞은 채 필사적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크레시 전투 승리 후 잉글랜드 군의 사기는 하늘까지 치솟았습니다.
참고로 전설 속의 명궁 '로빈 후드'의 활도 잉글랜드 장궁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도 매주 일요일마다 남성은 장궁 연습을 해야 한다는 법까지 제정합니다.
덕분에 잉글랜드 사람들은 매주 장궁을 즐기게 되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8. 잉글랜드, 칼레 전투 승리 후 유럽 전역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흑사병으로 7년간 전투를 멈추다
크레시 전투 이후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가 정한 다음 목적지가 바로 프랑스 북쪽의 항구 도시 '칼레'라는 곳이었습니다.
칼레는 위치상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잇는 최단거리를 잇는 항구도시로 앞으로 프랑스를 침공할 교두보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칼레 시민들은 완강하게 잉글랜드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승기를 잡은 잉글랜드 군은 결국 칼레를 점령하게 됩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약탈을 통한 수많은 전리품과 함께 고국 잉글랜드로 승전 귀환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나라는 이때부터 약 7년 간 전쟁을 멈추게 됩니다.
유럽 인구의 1/3이 죽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흑사병이 칼레를 점령한 바로 그다음 해 전유럽을 휩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흑자병이 지속되면서 7년 동안 양국 모두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9. 잉글랜드, 푸아티에 전투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뒀고 프랑스 왕 장 2세 스스로 포로가 되기로 결심하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흑사병이 잠잠해졌을 무렵 1355년, 기회를 노리던 잉글랜드 군이 다시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The Black Prince)'라고 불리던 그의 아들이 잉글랜드 군대를 지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 프랑스에서도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장 2세'가 잉글랜드에 맞서게 됩니다.
에드워드 왕세자가 '흑태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검은색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서 악마처럼 잔혹하고 잔인하게 상대방을 죽였다고 하여 생긴 별명입니다.
반면 프랑스 장 2세는 별명이 '좋은 사람(The good le Bon)'으로 불릴 만큼 기사도 정신이 강하고 선량했던 왕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은 잉글랜드 흑태자였습니다.
보르도를 시작으로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무려 1000km를 행군하면서 수많은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르도로부터 출발해서 빨간색으로 표시된 이 길이 흑태자의 약탈행로입니다.
흑태자는 거의 프랑스 남부를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왕복하며 크레시 전투와 마찬가지로 약탈을 먼저 시작합니다.
흑태자의 이런 잔혹한 도발에 프랑스 장 2세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장 2 세는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서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을 추격합니다.
그리고 두 군대는 1356년 9월, '푸아티에'에서 다시 피할 수 없는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흑태자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는 약 7천 명이었고 장 2세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그 2배인 약 1만 4천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장 2세의 아버지 필리프 6세도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잉글랜드 군에게 완패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장 2세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전술에 변화를 주기로 합니다.
바로 크레시 전투에서 말을 타고 갔다가 패배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처럼 보병 중심으로 전술을 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잉글랜드 군이 이번에도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언덕 위로 가기 위해서는 군데군데 발이 빠져 이동이 불편한 습지까지 분포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말에서 내려서 돌진했던 프랑스 기사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갑옷은 수십 킬로에 습지에 빠지면서도 기사도 정신이 충만해 눈앞에 적이 보이니 달려가고 혹시 모를 포로를 붙잡아 몸값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덤볐던 기사들은 결국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늪에서 지치면서 몸놀림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날아오는 잉글랜드 군의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크레시 전투의 악몽이 반복되었고 프랑스 군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궁지에 몰린 프랑스 장 2세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장 2세는 자신의 장갑을 잉글랜드 군에서 넘겼던 것인데 중세시대에 적에게 자신의 장갑을 넘긴다는 것은 자진해서 포로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포로로 잡는 것이 훨씬 더 몸값을 받는 게 이익이었기 때문에 중세 시대 때에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는 중에도 포로가 되겠다고 밝히면 목숨은 살려 줬습니다.
프랑스 왕 장 2세의 선택으로 왕뿐만 아니라 왕자 그리고 약 20여 명의 고위 귀족들과 2000여 명의 기사들까지도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어 버립니다.
어쨌거나 프랑스는 '푸아티에 전투'에 또다시 참패하게 됩니다.
10. 브레티니 조약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는 프랑스 영토의 1/3 가량을 차지하고 더 이상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신하가 아님을 선포하다
1360년, 잉글랜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는 데 그 조약이 바로 '브레티니 조약'입니다.
★브레티니 조약 내용★
1. 프랑스 왕에 대한 잉글랜드 왕의 모든 봉건적 의무를 면제한다
2.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아키텐을 넘긴다
3. 대신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위를 포기한다
잉글랜드는 명목상 여전히 프랑스왕위 계승권을 주장했었는데 그 주장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하는 대신 '아키텐'이라고 하는 지역을 얻게 됩니다.
또한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에 대해 봉건적 의무를 다하지 않는 즉 잉글랜드 왕이 더 이상 프랑스의 신하가 아니게 된 것입니다.
즉 잉글랜드는 프랑스왕의 신하일 수밖에 없는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보르도를 포함한 부유한 아키텐 지방의 진정한 주인이 된 것입니다.
이때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 영토가 거의 4배가량 넓어지게 됩니다.
사실상 프랑스의 1/3을 잉글랜드가 차지했습니다.
당시 왕을 포로로 잡는 것은 특별한 경우로 잉글랜드는 포로가 된 장 2세를 막 대하지는 않았고 잉글랜드 내에 궁정도 차리고 신하들도 데려오는 등 왕으로서의 대접을 받습니다.
잉글랜드는 장 2세를 포로로 잡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에 그의 몸값으로 당시 화폐로 300만 크라운, 황금으로 치면 약 12톤에 해당하는 돈을 요구합니다.
현재 가치로는 약 6천억~7천억 원 사이입니다.
300만 크라운은 프랑스 1년 예산의 2배에 해당하는 돈으로 프랑스 왕실에서도 당연히 한 번에 지불할 수 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결국 장 2세는 몸값의 선금을 지급하고 프랑스에 있던 두 아들을 볼모로 맡기고 프랑스 돌아옵니다.
프랑스로 귀환한 장 2세는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애를 쓰지만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이러한 거액을 한 번에 마련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장 2세는 빚 갚기를 포기하고 포로 생활을 재선택했고 잉글랜드에 볼모로 잡혀 있던 그의 두 아들은 프랑스로 귀환시킵니다.
11. 프랑스, 뛰어난 전략가 샤를 5세의 이른 죽음 후, 그의 아들 미치광이 '샤를 6세'가 즉위하며 혼란에 빠지다
프랑스는 장 2세에 이어 그의 아들 '샤를 5세'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샤를 5세는 즉위 후 잉글랜드에 빼앗겼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아오는 대단히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병약하던 샤를 5세가 42살의 나이에 일찍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아들인 '샤를 6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문제는 이 샤를 6세가 미치광이 왕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샤를 6세는 20대에 접어들면서 심각한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이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유리망상증'에 빠져 자신의 몸에 손도 못 대게 했습니다.
그리고 목욕도 거부하고 5개월 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는 등 기행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프랑스가 이렇게 대내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권력을 잡은 세력이 있었는데 샤를 6세의 숙부인 부르고뉴 공작과 그들의 측근이었습니다.
이 부르고뉴 세력이 왕을 대신해서 프랑스를 쥐락펴락 하는 사이, 정권의 실세였던 브루고뉴 공작이 어느 날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측근들은 그 암살의 배후로 프랑스 왕실의 음모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미치광이 왕 대신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부르고뉴 파는 잉글랜드와 손을 잡게 됩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잉글랜드에 아주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 내분에 빠진 프랑스를 벼랑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 승리의 주역은 바로 전쟁의 신 '헨리 5세'였습니다.
헨리 5세는 아직까지 받지 못한 장 2세의 몸값을 받지 못했다는 구실로 프랑스를 침공했고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는 압승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4년 뒤에는 프랑스 수도 파리까지 점령합니다.
그야말로 프랑스를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붙입니다.
12. 트루아 조약, 프랑스 샤를 6세의 딸과 잉글랜드 왕인 헨리 5세가 결혼해서 그 사이에 왕자가 태어나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동 왕이 된다는 내용을 담다
이때 헨리 5세는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운명을 바꿀 하나의 조약을 체결합니다.
바로 '트루아 조약'입니다.
트루아 조약은 1420년 5월, 백년전쟁 중 잉글랜드 왕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위 상속권을 확보하기 위해 맺은 조약입니다.
프랑스 샤를 6세의 딸과 잉글랜드 왕인 헨리 5세가 결혼해서 그 사이에 왕자가 태어나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동 왕이 된다는 엄청난 내용의 조약이었습니다.
트루아 조약으로 가장 억울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7세'였습니다.
샤를 7세는 미치광이 왕 샤를 6세의 아들로 트루아 조약 때문에 졸지에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했던 것입니다.
샤를 7세의 왕위 계승이 위험해진 상황에서 프랑스의 공주와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는 결혼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이에 왕자까지 태어납니다.
이로서 1422년 당시 생후 9개월의 아기가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동 왕의 자격을 얻는 초유의 사태가 프랑스에 닥친 것입니다.
그가 바로 '헨리 6세'입니다.
앞으로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트루아 조약대로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프랑스의 왕이 되면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리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17세의 소녀가 바로 '잔 다르크'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잔다르크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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