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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에 이용당한 잔 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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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백년전쟁에 이용당한 잔 다르크

1.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17세의 영웅, 잔 다르크

 

1420년 트루아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가 프랑스 샤를 6세의 딸과 결혼해서 그 사이에 왕자가 태어나면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공동 왕이 된다는 엄청난 내용의 조약이 체결됩니다.

샤를 7세
샤를 7세

이렇게 되면 프랑스 왕위 계승권 1순위였던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7세는 왕위 계승권에서 밀리게 될 뿐 아니라 트루아 조약대로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프랑스의 왕이 되면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속국으로 전락해 버리는 프랑스로서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프랑스에서 한 영웅이 등장합니다.

바로 17세 소녀 '잔 다르크'입니다.

사실 잔 다르크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것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각종 소문과 전설이 쌓이고 쌓여서 전설인지 역사적 사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는데 잔 다르크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잔 다르크
잔 다르크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잔 다르크와 관련된 방대한 재판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잔 다르크의 공식 기록을 토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2. 평번한 농부의 딸이었던 잔 다르크, 프랑스 왕을 구하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샤를 7세와의 만남을 청하다

동레미
동레미

잔다르크는 백년전쟁 기간 중에 프랑스 동부의 '동레미'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잔 다르크의 부모님은 농부였고 그녀는 부모님을 도와 일을 도왔던 평범한 시골 소녀였습니다.

따로 교육을 받지도 않아 글을 읽고 쓰는 법도 몰랐고 그저 교회만 열심히 다녔던 독실한 소녀였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1424년 여름, 12살이 된 잔다르크는 이상한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위기에 빠진 프랑스 왕을 구하라'

라고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몇 년 간 지속되는 목소리에 결국 이것은 신의 목소리를 전하는 천사의 목소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용기를 내서 동레미 인근에 위치한 보쿨뢰르의 수비대장을 찾아가서 자신이 들은 천사의 소리를 전하기로 작정합니다.

'인내심을 가지세요. 적을 공격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주님께서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왕국은 왕세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이며 이 나라를 왕에게 맡긴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잔 다르크의 말을 들은 수비대장은 어이없어하며 잔 다르크의 뺨을 몇 대 때리고 그녀를 쫓아내 버립니다.

잔 다르크는 번번이 쫓겨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수비대장을 찾아가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에 탄복했는지 결국 잔 다르크의 요청을 샤를 7세에게 전합니다.

'신의 목소리를 전하겠다는 소녀가 전하를 알현하기를 원합니다'

3. 남장을 하고 샤를 7세를 만나러 간 잔 다르크에게 샤를 7세는 여러 가지 검증을 하다

당시 여성은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는 것이 당연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왕을 만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헤어스타일에도 변화를 줍니다.

남장을 한 잔 다르크
남장을 한 잔 다르크

잔 다르크는 머리를 자르고 남자 기사가 입는 갑옷을 입고 남장을 한 상태로 약 500km를 이동해 왕세자 샤를 7세가 있는 쉬농 성에 도착합니다.

이때 샤를 7세와 잔 다르크가 처음 만날 날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설이 존재합니다.

바로 왕세자 샤를 7세가 잔 다르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테스트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샤를 7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왕세자복을 신하에게 입히고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커다란 홀에 자신은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홀에 들어온 잔 다르크는 숨어있던 샤를 7세를 향해 곧바로 다가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고귀하신 왕세자시여, 처녀 잔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군주께서는 전하가 왕관을 쓰기고 프랑스 왕이 되어 하늘의 군주의 권한을 위임받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샤를 7세는 조금 허황되고 황당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샤를 7세는 신이 보내서 왔다는 잔 다르크를 단번에 믿지는 못합니다.

잔 다르크를 인근에 있는 푸아티에로 보내서 다시 검증을 받게 합니다.

당시 푸아티에는 법원과 대학이 있던 곳으로 사제와 법학자들의 중심지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이곳에 가서 두 가지 검사를 받습니다.

첫 번째 검사는 바로 처녀성 검사였습니다.

궁정 부인들이 잔 다르크를 처녀인지 아닌지 검증했는데 처녀성 유무는 곧 악마와 교접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가 처녀가 아니라면 악마와 교접했을 것이고 처녀라면 악마와 접한 적이 없을 것이라는 증거로 읽혔습니다.

두 번째 검사는 고위 사제들과 법학자들의 청문회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검사를 해도 잔 다르크에게는 사악하다거나 거짓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고 왕세자 샤를 7세가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아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프랑스는 워낙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다 보니 설령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도움을 받는 것이 프랑스 왕에게 손해 될 일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백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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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번한 소녀 잔 다르크, 가장 치열한 전장인 '오를레앙 전투'에 투입되어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다

마침내 왕세자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받아들이고 그녀를 당시 가장 치열하고 중요한 전장이었던 오를레앙 전투에 투입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잉글랜드인들은 오를레앙의 별칭으로 '프랑스 부르주 왕국을 향하는 자물쇠'라고 불렀습니다.

오를레앙을 열면 프랑스 남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물쇠 같은 지역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잉글랜드는 오를레앙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오를레앙 성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항전을 이어나갔지만 반년 넘게 이어진 공성전에 지쳐가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오를레앙 성은 잉글랜드 군의 요새에 200일 넘게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대는 오랜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데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프랑스 군의 계속되는 패배소식에 사기도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절망에 빠져있는 오를레앙과 샤를 7세를 구해줄 영웅이 등장했고 그녀가 바로 '잔 다르크'입니다.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에 투입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가 참전한 첫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잉글랜드를 공격해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전장의 중앙에서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프랑스 군의 기세에 잉글랜드 군이 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를레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
오를레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

훗날 그려진 미화된 그림이기는 하지만 잔 다르크는 갑옷을 입고 치열한 전장 한가운데서 용맹하게 깃발을 흔들며 프랑스 군에게 '전진, 공격'을 외치며 프랑스 군의 사기를 한껏 드높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때부터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3일간 거의 매일 잉글랜드 군과 전투를 벌여서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마침내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에 투입된 지 9일째 되던 날, 오를레앙 성을 반년 넘게 포위하고 있던 잉글랜드 군이 철수하게 됩니다.

물론 잉글랜드가 200일 넘게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다 포위를 푼 것이 반드시 잔 다르크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기는 합니다.

역사가들의 추측에 의하면 가장 큰 문제는 '보급'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잉글랜드 본토에서 벌어진 전투도 아니고 타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에게 전쟁 물자 보급이 6개월 이상 지속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쨌든 오를레앙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에 엄청난 희망의 불씨를 지핍니다.

5. 잔 다르크, '오를레앙의 성녀'로 추앙받다

프랑스 군들은 잔 다르크가 이제 정말로 '진짜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살아있는 '오를레앙의 성녀'로 인정하고 그렇게 부르기 시작합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깊은 애정을 갖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놀라울 만큼 많은 무리가 그녀가 오면 달려가서 손이라도 대보려 했고 심지어는 그녀가 타고 있는 말이라도 만지려고 했습니다.

오를레앙에서의 프랑스군의 승전 소식은 빠르게 전 유럽으로 퍼져갔습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도 잔 다르크를 둘러싼 신화가 창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이렇게 유명한 인물이 등장하면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 출생의 비밀이었고 잔 다르크 또한 태어날 때 신비한 현상이 나타났다거나 양치기 소녀였던 잔 다르크가 한 번도 양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거나 하는 등 출생에 관련된 수많은 신화가 만들어집니다.

6. 잔 다르크, 적국 잉글랜드에서는 악마로 추정하다

세상 사람들이 잔 다르크를 신기해했고 프랑스에서는 기적의 소녀라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입장에서 본 잔 다르크는 웬 시골소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프랑스군을 이끌더니 잉글랜드를 무찌른 것이라 잔 다르크는 악마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잉글랜드 공작은 헨리 5세에게 잔 다르크에 대해 이렇게 보고합니다.

'악마의 추종자가 나쁜 주술을 부린 것 같습니다'

즉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를 성녀가 아니라 정반대의 '마녀'로 간주하게 됩니다.

성녀와 마녀가 이렇게 쉽게 언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 시대에는 세상을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고 사람들은 악마나 마녀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진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앞에 '신이 프랑스 편'이라 외치며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한 소녀가 등장한 것입니다.

만약 잔 다르크의 말이 맞다면 신이 편들어주고 있는 프랑스에 맞서는 잉글랜드는 악마가 되는 논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잉글랜드는 어떻게 주장을 해야 했을까요?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잔 다르크가 들었다는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잔 다르크가 지어낸 환상이거나 사탄의 목소리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잉글랜드 작가 셰익스피어가 지은 <헨리 6세>라는 역사 소설에서 잔 다르크에 대해 다뤘는데 잔 다르크가 '저주를 내리는 치명적인 마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믿는 중세 세계관에서 신이 성녀를 보내 프랑스를 지킨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믿음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잔 다르크가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을 맡아 전투 지휘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현대 역사가들은 그녀가 이러한 중세 시대 세게관 속에서 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칼이나 무기를 써서 직접 적들의 목을 베고 다녔던 것도 아니었고 잔 다르크는 전투에서 깃발을 들고나가 깃발을 흔들면서 전투의 선봉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잔 다르크가 전투에 참전해서 승리의 여신으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오를레앙 전투 이후 잔 다르크가 참전한 여러 전투를 통해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뺏긴 여러 도시들을 탈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7. 잔 다르크,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이 열리도록 도우며 프랑스를 구해낸 영웅이 되다

랭스
랭스

그리고 잔 다르크의 다음 목적지는 오를레앙에서 약 300km 떨어진 '랭스'라는 도시였습니다.

랭스는 프랑스 왕국에서 국왕이 전통적으로 대관식을 치르는 곳이었습니다.

랭스 대성당
랭스 대성당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해야만 프랑스 왕국의 정통성과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왕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든 왕이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릅니다.

때문에 잔 다르크는 왕세자 샤를 7세가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서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러야 한다면서 랭스로 샤를 7세와 함께 향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랭스는 브루고뉴 파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였기 때문에 오를레앙에서 랭스까지는 적진 한가운데를 뚫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1429년 6월, 잔 다르크는 샤를 7세와 함께 랭스로 향합니다.

그런데 브루고뉴에 넘어갔던 여러 도시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왕세자 샤를 7세 편으로 돌아섭니다.

잉글랜드가 차지한 트루아 섬도 이 중 하나였는데 트루아섬 앞에서 잔 다르크는 트루아의 시민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충성스러운 프랑스 사람들이여. 여러분의 생명과 재산을 잃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모두 샤를 국왕에게 나오라. 그대들 앞에 생명을 걸고 말하노니 거룩한 왕국에 이미 속하거나 앞으로 속하게 될 모든 도시에 우리가 들어가 선하고 확실한 평화를 이루어낼 것이다. 누가 막아서더라도 소용없다'

잔 다르크의 확신이 담긴 편지를 본 트루아 시민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샤를 7세의 군대가 공격을 게시하자 성문을 열고 왕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오를레앙을 출발한 지 20여 일이 지나고 나서 잔 다르크 일행은 드디어 랭스에 도착합니다.

랭스 주민들 또한 문을 활짝 열고 프랑스군 일행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잔 다르크와 샤를 7세는 랭스에 입성했습니다.

그렇게 랭스 대성당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이 거행됩니다.

샤를 7세 대관식에 증인으로 선 잔 다르크
샤를 7세 대관식에 증인으로 선 잔 다르크

잔 다르크는 대관식 내내 깃발을 들고 샤를 7세의 곁을 지키며 성녀로서 왕이 정당성을 부여받을 때 증인이자 수호자를 자처합니다.

이로서 더 이상 샤를 7세는 왕세자가 아니라 정식으로 프랑스 왕이 됩니다.

트루아 조약으로 한때 왕위 계승권을 잃고 위기에 몰렸던 샤를 7세는 잔 다르크 덕분에 신의 인정을 받는 왕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때 왕을 인도한 잔 다르크의 명성도 절정에 이릅니다.

적진 한가운데를 뚫고 왕의 대관식을 치른 것이 또 하나의 기적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프랑스 전역에서 잔 다르크를 성녀로 숭배했고 그녀는 프랑스를 구해낸 영웅이 됩니다.

8. 잔 다르크, 콩피에뉴 성에서 포로로 잡히다

그런데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내세우는 헨리 6세와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친 프랑스의 왕이 된 샤를 7세  두 명의 왕이 세워진 상황이 된 것입니다.

두 명의 왕을 두고 프랑스가 둘로 쪼개집니다.

잔 다르크는 이번에는 샤를 7세의 왕위를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되찾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잔 다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파리로 돌진했지만 다리에 화살을 맞아 부상만 당한 채 파리에서 퇴각하고 맙니다.

잔 다르크의 첫 번째 패배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잔 다르크는 연이은 패배를 하며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사실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대관식 이후 전투를 계속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샤를 7세는 원래 유약하기도 했고 즉위 후 다른 방식과 전략을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계속 싸우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잔 다르크에게 소규모의 병력만을 지원해 줬던 것입니다.

1430년 5월, 잔 다르크에게 비극이 닥칩니다.

 

이 사건은 콩피에뉴라는 성에서 일어납니다.

콩피에뉴가 적들에게 함락될 위기에 쳐했다는 소식을 들은 잔 다르크는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콩피에뉴로 출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투는 만만치 않았고 성 밖으로 나가서 싸우던 잔 다르크는 적에게 쫓겨 다시 콩피에르 성안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콩피에뉴 성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잔 다르크가 들어오지 못하게 콩피에뉴 성의 지휘관이 성문을 잠가 버린 것입니다.

벽화에 그려진 잔 다르크의 생포 장면
벽화에 그려진 잔 다르크의 생포 장면

결국 잔 다르크는 적들에게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9. 샤를 7세, 포로로 잡힌 잔 다르크를 석방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다

이때 잔 다르크를 사로잡은 것은 잉글랜드와 손을 잡은 부르고뉴군이었습니다.

잉글랜드와 손을 잡은 부르고뉴 파는 프랑스왕 샤를 7세가 아닌 잉글랜드가 내세우는 헨리 6세를 지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들에게는 잔 다르크와 샤를 7세가 눈엣가시였는데 잔 다르크를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혔을 때 샤를 7세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잔 다르크가 몇 달 동안 포로로 사로 잡혀 있었지만 샤를 7세는 배은망덕하게도 아무런 석방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샤를 7세의 이런 행동에 대한 첫 번째 추측은 '정치적'인 입장입니다.

당시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부르고뉴 파와 다시 동맹 협상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의 입장에서는 침략자인 잉글랜드나 그들과 손을 잡은 부르고뉴 파나 다 똑같은 적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잔 다르크의 이런 강경한 태도가 샤를 7세는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즉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는 성가신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잔 다르크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인 계산대로 독단적인 행보를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추측은 잔 다르크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샤를 7세는 왕세자 때부터 정통성을 의심받던 왕이었고 힘겹게 왕위에 올랐는데 잔 다르크가 등장해서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성녀로 추앙받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프랑스 왕인 자기보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고 숭배를 받는 존재가 된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프랑스 왕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제 잔 다르크를 구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10. 잔 다르크, 잉글랜드에게 팔려 '이단재판'을 받다 

이렇게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잉글랜드는 어떻게 했을까요?

잉글랜드는 적극적으로 협력하던 부르고뉴 파에게 '우리가 몸값을 지불할 테니 잔 다르크를 넘기라'라고 요구합니다.

결국 1430년 11월,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에 팔리게 됩니다.

이때 거래되었던 잔 다르크의 몸값은 무려 1만 리브르, 지금으로 치면 약 50억  이였습니다.

이렇게 잉글랜드는 부르고뉴 파로부터 몸값을 지불하고 잔 다르크의 신병을 사게 됩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인들에게 성녀로 인정받던 잔 다르크를 악마의 추종자로 몰기 위해서  그녀를 교회에 넘겨 '이단 재판'을 받게 합니다.

즉 잉글랜드는 잔 다르크의 이단 재판을 통해 '신은 프랑스 편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편이다'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던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이단 재판을 받기 위해서 노르망디의 루앙이라는 곳으로 옮겨지게 되고 그곳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성에 갇히게 됩니다.

성에 갇힌 잔 다르크에게 물 한 바가지 재를 타서 밥으로 줬는데 '재'의 의미는 이 세상에 일시적으로 머물다 갈 뿐인 인간 덧없음, 죄의 정화를 상징합니다.

모든 것이 잔 다르크에게는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심문관들은 작정하고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몰아가고자 했고 결국 이 재판에서는 피고인 잔 다르크 스스로 자신이 이단과 마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잔 다르크는 무려 5개월에 걸쳐서 29번의 심문을 당하게 됩니다.

중세 불어로 쓰인 잔 다르크의 재판 기록
중세 불어로 쓰인 잔 다르크의 재판 기록

당시 재판 기록을 담은 필사본 사진입니다.

처음에는 중세 불어로 기록하고 나중에는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위해서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약 630쪽에 달하는 재판 기록인데 잔 다르크의 재판과 그 이후의 기록까지 있는 재판기록입니다.

심문과정에서 수십 명의 성직자와 법학자들이 매일 서너 시간씩 온갖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어려운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문맹에 교육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19살 소녀 잔 다르크가 당대 가장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들과 홀로 맞서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매우 당당한 태도로 이들에 잘  맞서 싸웠다고 전해집니다.

11. 잔 다르크, 3번에 걸쳐 집요하게 화형에 처해지다

결국 재판관들은 잔 다르크에게 '마녀이자 예언가인 죄, 이단인 죄, 마법으로 적을 살해하려 한 죄, 악령의 도움을 받은 죄' 등 70여 개의 죄목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12개의 죄목으로 정리가 되는데 사실 '마녀'라는 죄목은 결국 삭제됩니다.

잔 다르크가 여러 차례 처녀로 검증됐기 때문에 마녀임을 입증하기는 어려웠던 것입니다.

최종 판결문에 남장을 한 죄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죄악인 세상이었습니다.

남장은 신의 섭리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시의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봐야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광장에는 화형대가 높이 세워졌고 잔 다르크는 화형대에 묶였고 판결문이 낭독됩니다.

잔 다르크는 일반적인 화형과는 달리 3번이나 집요하게 불에 태워지게 됩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인들에게 성녀로 추앙받았었기 때문에 시신이 남아있으면 그 남아있는 시신이 숭배의 대상이 될까 봐 잉글랜드는 그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는 화형대의 불길 속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불이 다 꺼지고 나서 남아있는 것은 작은 조각과 재뿐이었고 작은 뼛조각은 센강에 뿌려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잔 다르크에게는 제대로 된 묘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를 구해낸 영웅 잔 다르크는 열아홉 해의 짧고 뜨거운 생애를 마치게 됩니다.

12. 잔 다르크, 백년전쟁이 끝난 후에야 복권되다

잔 다르크가 죽은 뒤 백년전쟁은 어떻게 됐을까요?

전쟁은 프랑스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됩니다.

카스티용 전투
카스티용 전투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 116년 동안 이어진 백년전쟁의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칼레
칼레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아키텐'을 비롯해서 잉글랜드가 차지해 왔던 영토는 '칼레'를 제외하고 모두 프랑스로 넘어갑니다.

백년전쟁이 끝난 후에 샤를 7세는 약 3년이 지난 후에 잔 다르크를 복권시켜 줍니다.

루앙에서 벌어진 잔 다르크의 이단 재판이 무효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위해서 그녀를 복권해 준 것일까요?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고 잔 다르크가 이단 재판에서 재판을 받고 이단으로 확정돼 화형 되었기 때문에 그 이단자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자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이단이 아님을 선언했고 잔 다르크가 죽은 뒤에도 그녀를 정치적으로 이용을 하게 됩니다.

13. 잔 다르크, 현재까지도 다양한 국가에서 그녀를 활용하다

그런데 잔 다르크를 이용한 것은 샤를 7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잔 다르크는 죽은 후에도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백 년 동안 여러 나라의 여러 집단들의 아이콘이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쟁 중이던 프랑스에서는 갑자기 잔 다르크에 대한 전 국민적인 숭배 열기가 고조되었고 잔다르크를 그린 엽서가 발행됩니다.

잔 다르크를 그린 엽서
잔 다르크를 그린 엽서

'참호 속의 희망! 신의 사자, 우리 프랑스의 별 우리 자매 잔 다르크, 희망의 별, 우리나라를 구하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고 우리의 싸움을 이끌고 우리를 승리로 이끌어주세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이때 미국 재무부가 전쟁자금을 기부받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이용한 것입니다.

미국 재무부가 전쟁자금을 기부 받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이용
미국 재무부가 전쟁자금을 기부 받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이용

'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했습니다. 미국의 부인들이여. 여러분의 나라를 구하십시오'

더 놀라운 것은 잔 다르크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서 한반도까지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장지연&lt;애국부인전&gt;
장지연<애국부인전>

1907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던 시점에 애국지사 장지연 선생이 번역한 잔 다르크의 전기 소설 <애국부인전>을 출간했습니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는 3.1 운동했을 때가 18살이었는데 <애국부인전>이라는 소설을 읽고 잔 다르크에 감명을 받고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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