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통해 바라보다
1.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오해?
오스트리아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그녀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더 유명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자 황제로 탁월한 정치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약녀 이미지이고 명품과 사치를 즐겼던 여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혁명의 과정 속에서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살펴보고 그녀의 실제 모습은 어땠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마리 앙투아네트, 적대국으로 시집온 오스트리아 공주
1750년 5월 어느 날, 유럽을 주름잡던 두 강대국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왕세자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열린 것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 당시 각각 15세, 14세의 어린 나이로 정략결혼을 올린 것입니다.
이 결혼에 숨겨진 비밀이 있습니다.
원래 루이 16세의 약혼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였습니다.
그런데 아픈 언니를 대신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이 있음에도 결혼을 시켜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결혼을 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756년에 7년 전쟁이 벌어집니다.
7년 전쟁은 당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던 유럽의 대부분 나라가 참전한 대규모 전쟁입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약 300년 이상 적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는데 프로이센이 새로운 강국으로 올라서서 세력 확장을 하게 되고 영국과의 동맹을 체결해 프랑스를 공격하자 오스트리아도 그것을 지켜보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프로이센과 영국 세력에 맞서기 위해 적대 관계였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게 됩니다.
그 당시에 동맹을 맺는 방법 중 하나가 정략결혼이었던 것입니다.
3. 화려하고 성대했던 결혼식, 하지만 당일 천둥 벼락이 치면서 불길한 징조를 보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을 올리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를 떠나 약 50대가 넘는 마차에 시종들을 싣고 라인강가에 있는 '스트라스부르'라는 도시로 향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식 하기 전에 국경 지역인 스트라스부르에서 완전한 프랑스인이 되기 위해 특별한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바로 이름을 바꾸는 의식이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원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였습니다.
원래 이름을 버리고 프랑스식 이름으로 개명한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곳에서 과거와 결별한다는 의미로 이름도 바꾸고 옷도 갈아입고 데리고 온 하인들과 어릴 때부터 키웠던 반려견까지 모두 포기하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식을 앞두고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스트라스부르 숲 속에서 루이 16세를 결혼 이틀 전인 5월 14일에 처음 만납니다.
1750년 5월 16일, 베르사유 궁전 왕실 예배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펼쳐집니다.
위 그림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을 축하하는 수많은 인파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결혼식에 초대된 인물만 약 5,000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화려하게 거행된 결혼식 당일에 엄청난 천둥과 벼락이 치는 불길한 기운이 감돕니다.
이것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불길한 앞날의 징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4.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가짜뉴스의 시작
콩코르드 광장에서 결혼식 축하 행사가 열렸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고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현장에서 약 132명이 압사 사고를 당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터지게 됩니다.
이 사고에 깜짝 놀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때부터 결혼을 축하하는 행사를 모두 중간시킵니다.
또한 자신들의 궁정 비용을 희생자 가족들에게 위로금으로 전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상황과 다르게 베르사유 궁에서는 여전히 축하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등의 악소문이 퍼집니다.
이런 악소문이 퍼지니 그간 오스트리아와의 우호를 증진하려고 노력을 해온 프랑스 시민들은 불현듯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라는 적국에서 온 왕비라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 처음 왔을 때부터 불리는 별명이 바로 'Autrichienne'으로 이것은 '오스트리아인'을 뜻했고 이것을 발음을 좀 달리해서 '오스트리아개'라고 비꼬면서 그녀를 불렀습니다.
결혼 시작부터 퍼진 그녀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악소문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프랑스에서의 결혼 생활 내내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힙니다.
5. '불임'이 불러온 최악의 가짜뉴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국민들에게 미움을 받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왕비는 왕위 계승을 위한 후계자를 출산해야 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 후 7년 동안이나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이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어려웠던 일이었습니다.
루이 16세는 평소 사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물었습니다.
정략결혼을 결정했던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막내딸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편지를 보내 조언을 해줍니다.
'월경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니 이 어미로서는 기쁘다고 말할 수 없군요. 머지않아 그대에게 사랑하는 아기 엄마라고 부를 날이 오기를 손꼽아 고대합니다'
어머니의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편지입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두 나라가 맺은 동맹을 공고히 하려면은 왕위를 잇는 후계자를 출산해야 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여왕으로서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서의 염원을 담아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불가능했습니다.
루이 16세는 소심한 성격이었고 사냥이나 자물쇠나 가구 만들기 등에만 몰두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에서 재기된 주장이 있습니다.
'루이 16세는 성적인 문제로 외과적인 수술이 필요했다'
루이 16세가 포경 수술을 한 다음에야 아이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가로서 권위와 영향력이 높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쓴 책의 내용을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틀리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과장일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반면 영국 작가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불인의 원인을 이렇게 주장합니다.
'루이 16세의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가 컸을 것이다'
루이 16세는 매일 일기를 썼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는 거의 매일 승마와 운동을 즐겼습니다.
중간에 포경수술을 했다면 이렇게 매일같이 운동을 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아 프레이저가 제기한 또 다른 가능성은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국으로부터 왔으니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까 의심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불임의 원인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 15살 밖에 안된 아이들이었고 서로 잘 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졌을지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신체적이건 정신적 이유이건 간에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던 7년이라는 기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루이 16세의 남동생 '아르투아 백작' 부부가 아들을 먼저 출산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소문들까지 만들어냅니다.
당시 <파리의 혁명>이라는 팸플릿에 실린 실제 내용입니다.
'왕비가 국왕의 남동생 중 하나인 아르투아 백작, 스웨덴의 페르센 백작 등과 방탕한 향연을 벌였다'
팸플릿 <파리의 혁명> 中
'성욕이 강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여 왕실의 여자들과 동성애를 한다'
<당시 다른 팸플릿 中>
당시 사람들은 사실이든 아니든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를 프랑스 전역에 퍼트렸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5. 마리 앙투아네트, 사치의 여왕으로 만든 가짜뉴스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서 외롭고 답답했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의 화려한 생활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빠지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도박을 많이 해서 빚을 지게 될 정도가 되었고 베르사유 궁전 안으로 매일밤 친구들이나 고관대작의 부인들을 불러 연회를 열었습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도 다른 귀족 여성들처럼 보석을 좋아했습니다.
호화로운 드레스로 한껏 꾸민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고 당시 귀부인이나 젊은 여성들은 그녀를 따라 하곤 했습니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머리 스타일이 있습니다.
바로 '푸프(pouf)'입니다.
머리를 풍선같이 부풀려서 그것에 보석이나 과일, 액세서리 등 다양하고 특이한 장식으로 스타일링한 것입니다.
위 그림은 당시 귀족 여성들의 푸프를 풍자한 만화입니다.
푸프 높이가 적게는 30cm부터 1m가 넘는 것까지 있었습니다.
어떻게 높고 화려하게 푸프를 꾸밀 수 있었을까요?
방법은 바로 머리 안에 철사 프레임을 넣어 기초 공사를 하고 쿠션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푸프를 올리는 것입니다.
또한 올린 머리가 붙어있도록 하기 위해서 머리카락을 고정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밀가루와 물을 섞어서 점액성이 생기게 해 사용했습니다.
귀족들은 밀가루를 얼굴에 발라 하얗게 꾸미기도 했습니다.
당시 평민들은 이런 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합니다.
귀족들이 밀가루로 치장하느라 프랑스에 빵이 부족한 것이라는 농담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러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또 한 번 국민 밉상이 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푸프를 먼저 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해왔던 것을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을 시키자 그녀에게만 비난이 쏟아진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일생 동안 수많은 가짜뉴스에 시달렸는데 이 중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관련된 것도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고 질 좋은 다이아몬드로 만든 어마어마한 가격의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기꾼으로 유명했던 '라모트 백작' 부부가 왕비의 측근이라고 추기경에게 찾아가 왕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하라고 설득해서 돈을 받아냅니다.
계약금을 건네고 보석상에게 목걸이를 받은 후 라모트 백작 부부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고 오해합니다.
이후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건과 무관하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진실은 사라지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캔들로만 기억하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러한 사건들이 있었을 때 황망하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이런 가짜뉴스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그녀는 온갖 구설수에 오르내리면서 민심을 잃어 갔습니다.
6. 마리 앙투아네트, 임신해 후계자를 낳지만 한번 떠난 민심은 되돌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가 찾아오는 데 그녀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또한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 오빠 요제프 2세가 동생이 쳐한 곤경을 본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방문합니다.
요제프 2세는 루이 16세에게 가정생활에 충실하라고 충고를 합니다.
루이 16세가 그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 인지 약 7년 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출산에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번 떠난 민심은 되돌리기가 쉽지 않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람들의 사랑을 되찾는 데 실패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포기하지 않고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예술과 과학을 후원했습니다.
그녀는 1782년 12월에 최초로 열기구를 띄운 몽골피에 형제가 열기구 연구를 하는 것에 후원했고 직접 참관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모차르트와도 만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모차르트가 6살, 마리 앙투아네트는 8살 때의 일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차르트의 연주를 보고 나오는 길에 넘어지는 모차르트를 발견하고 일으켜 세워줬는데 그때 모차르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훗날 그녀는 음악 선생님으로 모차르트와 다시 재회했다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예술에 대한 사랑도 높았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와 로렌초 다 폰테가 만든 오페라로 표면적으로는 남녀 관계 이야기를 다루지만 내부적으로는 신분 제도의 도전과 조롱을 담은 작품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메디치가문1
신분 제도 조롱 때문에 루이 16세는 그 공연을 전면 금지했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편에게 끈질기게 간청해서 <피가로의 결혼>의 공연을 허락받은 적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초상화를 공개합니다.
하지만 슈미즈(속옷) 같은 것을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 공개 된 후 더 큰 비난을 받게 됩니다.
게다가 슈미즈는 면화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당시 면화는 인도에서 수입을 해왔는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국인 영국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람들의 비난만 받게 됩니다.
또다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다른 초상화를 공개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가정적인 분위기의 초상화입니다.
이런 각고의 노력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는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7. 마리 앙투아네트,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과도한 세금 징수에 시달렸던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게 일종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사람들의 미움을 받은 이유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더 큰 맥락에서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백성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매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티를 즐기는 귀족들과 다르게 프랑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기 직전에 내몰렸습니다.
바로 이때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발생하며 엄청난 흉년이 듭니다.
최악의 자연재해로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국가도 재정난에 시달리니 시민들에게 혹독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왕이나 영주의 지배에 있는 토지에 타이유세를 부과하고 교회에는 십일세를 냅니다.
사람 머릿수에 맞춰서 걷는 인두세, 게다가 영주가 독점하는 시설의 사용료까지 내야 했습니다.
보라색 옷을 입고 십자가를 멘 사람은 성직자가 1 신분입니다.
타조 깃털 모자를 쓰고 칼을 다룰 수 있었던 귀족이 2 신분입니다.
이 두 계급은 세금을 내는 유일한 계급이었던 3 신분 평민의 등 위에 타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사치를 위해서 98% 해당하는 평민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을 풍자한 그림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메디치가문2
8.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가 미국 독립 전쟁 지원을 하도록 부추겨 프랑스 재정 파단에 일조하여 비난을 자초하다
1789년 프랑스 왕국 총수입이 4억 7,500만 리브르였는데 루이 16세가 미국 독립전쟁에 3~4년 정도 참전해 지원하는 동안 약 20억 리브르를 사용했습니다.
매년 왕국 총수입 대부분을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는 데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독립에 성공했는데 미국이 독립 한 이후에 교역을 한 나라는 프랑스가 아닌 영국이었습니다.
독립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미국의 도움도 못 받고 오히려 프랑스는 빚만 늘어나게 됩니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전쟁금을 지원했는데 전쟁 후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게 되자 시민들의 분노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살상가상으로 그 결정을 하는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루이 16세가 그러한 결정을 하도록 마리 앙투아네트가 부추겼고 그녀는 스스로 시민들의 비난을 자초한 측면도 있었습니다.
9. 삼부회 제3 신분 평민, 개인별 투표권을 주장하다
미국 독립 전쟁 지원으로 프랑스 국가 상황은 점점 힘들어지게 되고 왕실 재정 또한 거의 파탄 날 지경에 이릅니다.
루이 16세가 이러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선례를 이끌어내며 엄청난 결심을 합니다.
루이 16세는 세계사 교과서에는 '삼부회'라는 이름으로 많이 일컬어지고 있는, 14세기에 만들어진 '삼부회'를 소집합니다.
삼부회는 결국 '전국 신분회'로 제1 신분 성직자, 제2 신분 귀족, 제3 신분 평민 출신의 각 대표자들이 모여 세금 징수 등 국가의 중요 사안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신분제 의회입니다.
이렇게 3개의 신분을 한 자리에 모이게끔 해서 국가 재정을 위해 모든 신분에게 세금을 징수하자는 의견을 냈을 때 당연히 귀족과 성직자들이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삼부회는 각 신분마다 1표만 부여되어 1표만 가진 평민들에게는 불리한 결정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역사 속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제3 신분 평민들이 '개인별 투표권'을 주장한 것입니다.
평민들은 각 신분의 모든 인원이 개별의 투표권을 가져서 대등한 상황을 만들려 했습니다.
10. 국민의회, '테니스 코트의 선언'을 하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평민들의 요구를 반대하면서 감히 '평민 따위가 왕의 명령을 거역해?'라는 방식으로 대응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루이 16세의 태도에 분노한 평민들은 '국민 의회'를 만들게 됩니다.
국민 의회는 제3신분 평민 의원이 모여서 성립한 최초의 근대적 의회로 평민들이 주도하는 프랑스를 만들기 위해 결성합니다.
루이 16세는 이런 평민들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끼고 공사를 핑계로 모든 회의실을 봉쇄해 버립니다.
그 사실을 알고 분노에 휩싸인 프랑스 국민들은 근처 테니스 코트장으로 향하였고 그곳에서 역사적인 선언을 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한다. 설사 강제로 대표들을 쫓아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모이면 그곳이 어디건 국회임을 밝힌다.(중략) 필요하다면 어디서나 모일 것이다'
<1789년 6월 20일 테니스코트 선언 中>
11. 루이 16세의 국민의회 무력 진압은 프랑스혁명의 시작점이 되다
루이 16세의 입장에서는 국민의회의 선언은 평민들이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하면서 국민 의회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루이 16세의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시민들이 분노를 터트린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이 프랑스 역사를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파리 시민들은 혹독한 세금과 빈곤으로 귀족들에게 분노를 느끼고 화가 나 있었는데 루이 16세가 무력으로 국민의회를 해산시켜 버리자 더 이상 시민들은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 것입니다.
12. 파리 시민들, 봉건제도와 절대왕정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다
1789년 7월 14일, 폭발한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합니다.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절대왕정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프랑스의 역사를 뒤집을 만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민심은 헤아리지 못한 채 향락에 빠진 귀족들에 분노했던 바스티유 감옥 성탑에 모인 시민들은 봉건제도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을 습격합니다.
바스티유 감옥은 원래는 요새였는데 루이 13세 이후에 계몽사상가나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했습니다.
시민들이 보기에 절대왕정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바스티유 감옥은 타파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간 2번째 이유는 바로 이곳으로 가면 무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바스티유 습격에 성공한 1789년 7월 14일이 프랑스혁명의 시작을 알린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 파리시민들,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혁명이 본격화되다
습격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에서 만난 죄수는 고작 7명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사기꾼 4명, 정신이상자 2명, 바람둥이 1명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스티유 감옥에는 여러 종류의 '금서'가 있었습니다.
금서를 그 당시에는 철학서라고 불렀는데 철학을 다룬 책만이 아니라 '포르노 그라피'나 국왕이나 국가를 비난하는 시와 중상 비방문까지 다양한 종류의 금서가 발견된 것입니다.
바스티유 감옥을 혁명 정부가 습격해 파괴했고 파리 시민들은 철거 후 남은 돌들을 직접 날라 '콩코르드 다리'를 만듭니다.
이렇게 절대왕정 체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은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고 그곳의 돌들을 시민들이 직접 옮겨 지금의 콩코르드 다리를 만듭니다.
다리를 지나다니며 구 체제를 짓밟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다리를 만든 것으로 이것은 파리 시민들의 의지가 담긴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이어진 이 다리의 다른 이름이 '혁명의 다리'입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통해서 프랑스혁명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4. 마리 앙투아네트, 알몸 팸플릿으로 조롱당하다
프랑스혁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향한 가짜뉴스는 더욱더 악랄해지고 노골적이고 외설적으로 변합니다.
18세기 내내 프랑스 많은 여성 귀족들은 외설적 팸플릿의 대상이었습니다.
1787년 약 200건 정도였던 것이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1789년에는 약 3000건의 팸플릿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실제로 돌아다였던 마리 앙투아네트 팸플릿이 남아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알몸 팸플릿으로 그림뿐 아니라 밑에 쓰인 글들도 굉장히 노골적입니다.
'신이시여! 이 황홀경이라니! 내 영혼은 날아가고, 나는 표현할 말이 없네요!'
마리 앙투아네트와 공작부인이 알몸으로 표현된 팸플릿 밑에 그들을 조롱하는 글들이 쓰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팸플릿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을 포함해 여성까지 모든 사람과 근친상간을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다양한 팸플릿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나쁜 딸, 나쁜 아내, 나쁜 어머니, 나쁜 왕비 즉 모든 것에 있어서 괴물로 묘사됩니다.
이러한 팸플릿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당시 비난의 수위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이러한 팸플렛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더욱더 악랄하고 노골적이고 외설적이 됩니다.
왕비를 대상으로 한 포르노그래피뿐 아니라 노래, 우화 등 다양한 형태로 조롱을 당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야말로 국민 밉상이 됩니다.
'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든 음모의 영혼이었으며, 모든 정사의 핵심이었으며, 그 모든 공포의 근원이었다'
< 마리 앙투아네트 팸플릿 中>
이런 팸플릿이 증가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회적 신분이 한눈에 표현되는 것은 옷인데 신분의 척도인 옷을 벗겨 마리 앙투아네트를 알몸으로 표현하여 '벌거벗겨진 상태에서는 어떤 인간이건 같다'는 즉' 인간은 평등함'을 강조하기 위해 알몸으로 표현한 팸플릿이 증가했던 것이었습니다.
15.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궁에서 쫓겨나 시민들의 감시하에 살게 되다
점점 민심과 경제는 악화되는데 그 와중에 프랑스의 물가는 계속 치솟으며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빵 한 개의 가격이 시민들의 하루 일당과 같을 정도였습니다.
하루 일을 해야 빵 1조각을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당시 여성들은 음식값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경제적 궁핍에 분노한 여성들까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를 외치면서 시위에 나서게 됩니다.
1789년 10월 5일, 수천 명의 여성들은 막대기, 돌멩이, 도끼 등을 들고 20km가 넘는 행진을 시작합니다.
파리 시청광장까지 모였다가 결국 이 여성들이 베르사유궁까지 쳐들어갑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대면한 성난 시민들은 외쳤습니다.
'밀과 빵 권리를 요구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시민들에 의해 근위병들은 살해당하고 결국 왕비의 침실까지 쳐들어가게 됩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왕세자는 시민들에 의해 베르사유궁에서 쫓겨나 파리로 향하게 됩니다.
위 그림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파리 연행 당시 풍자화입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뒤에서 큰 핀으로 왕을 찌르는 여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살해한 근위병의 머리를 막대기에 매달고 걷는 여성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만약 당신도 배신자라면 너도 똑같이 당할 거야'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베르사유궁에는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절대왕권을 누리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왕족들은 틜르리 궁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고 이제 국민의 감시하게 살게 되는 처지가 됩니다.
16. 마리 앙투아네트, ' 빵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 그 일화의 진실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치자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브리오슈)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일화가 아직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고 오해했지만 그 말은 프랑스혁명의 핵심인 인민주권설을 제창한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제6권>에 이미 나왔던 말이었습니다.
와인을 마실 때 그 당시 사람들은 보통 바케트와 같이 먹었는데 바케트가 없자 루소가 말합니다.
'나는 한 지체 높은 공주가 제안했던 임시방편을 기억해 냈다. 사람들이 그 공주에게 '농민들에게 빵이 없다'라고 말하니, 그 공주는 '브리오슈'를 먹게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제6권 中>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제6권>이 출판될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작 9살에 불과했었고 현실적으로 그녀가 말할 수 없었던 가짜뉴스였던 것입니다.
17. 루이 16세 일가, 몽메디로 탈출하려다 국민의회에 의해 붙잡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민의 감시하에 권력도 잃고 틜르리 궁에 갇혀 지냈습니다.
소심했던 왕과 그 가족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됩니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위협을 느끼는 파리를 탈출해 '몽메디'로 가자는 제안을 합니다.
사실 루이 16세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라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만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후 심약해진 루이 16세는 왕비의 말을 잘 들었었고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제안을 처음 한 사람은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오기도 했던 인물인 스웨덴의 '한스 악셀 폰 페르센 백작'인데 스웨덴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측근이었던 명문 귀족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 백작은 불륜 관계라고 소문까지 났었던 인물입니다.
실제로 페르센 백작은 마지막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성심성의껏 도왔습니다.
1791년 6월 20일 밤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가족들은 자유를 찾아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에서 동북쪽으로 321km 떨어진 몽메디라는 곳에 왕당파의 군대와 용병대가 혁명대를 진압할 준비를 하고 루이 16세 일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사소한 실수들과 왕의 우유부단으로 계획이 지체되면서 그 사이 국왕이 도주했다는 소문이 파리는 물론 프랑스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왕가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갔다!'
시민들은 나라와 국민을 버리고 도주한 국왕에게 격노하고 실망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상한 마차를 탄 수상한 사람들이 어느 마을에 나타납니다.
바로 루이 16세와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마차로 다가오는 호위대원과 인사를 하려고 루이 16세가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호위대원이 마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이상할 정도로 공손했고 그 광경을 그 마을 우체국장 눈여겨봤습니다.
그는 프랑스 지폐에 그려진 루이 16세의 얼굴과 마차 안에 있는 남자가 흡사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가 국왕임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위 사진은 1791년 11월에 발행된 5 리브르 지폐입니다.
결국 우체국장의 연락을 받고 국민의회에서 사람을 보내 왕과 왕비 그리고 그 가족들을 체포해서 다시 파리로 압송해 옵니다.
이렇게 결정적인 증거인 지폐의 초상화로 인해서 루이 16세 일가는 파리 탈출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때 루이 16세 가족들이 파리로 호송되어 오는 데 국민 의회는 시민들에게 요청합니다.
'왕가를 침묵으로 맞이하라!'
국왕의 선택에 분노와 실망을 느낀 국민들은 차가운 침묵으로 왕가를 맞이합니다.
17. 루이 16세, 콩코르드 광장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다
그리고 국민을 버린 왕이 되어 버린 루이 16세 일가는 탕플 탑에 투옥당하고 맙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스 시민들은 루이 16세에게 반역죄를 묻고 싶었지만 마땅한 죄목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무죄 석방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많았습니다.
루이 16세 옹호파에서는 '왕을 퇴위시켰으면 됐지 왜 사형까지 집행하느냐'라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프랑스에서 '루이 16세가 죽어야 프랑스가 산다'라고 말하면서 루이 16세의 처형을 강하게 주장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공포정치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는 '막시밀리엄 로베스피에르'입니다.
'루이 16세를 재판하는 것은 혁명 자체를 비난하는 것입니다(중략)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결국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알, 콩코르드 광장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그렇게 프랑스 절대왕정시대는 완전히 저물게 됩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유럽 모든 국가가 왕국이었고 다른 주변 유럽국가들의 왕들은 프랑스 왕의 처형을 보고 충격과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유럽 왕국 모든 국가가 프랑스에 등을 돌려버리고 프랑스에 대해서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영국의 왕실에서는 프랑스혁명을 축하하는 자리에 사절단을 보내지 않습니다.
왕을 죽인 프랑스 혁명군에 어떻게 축하 사절단을 보내느냐는 것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나폴레옹
18. 루이 16세, 단두대에 관한 일화
루이 16세는 기술 쪽에 조예가 깊었는데 단두대의 사형 집행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단두대 칼날이 똑바르면 잘 안 듭니다. 비스듬해야 더 잘될 것입니다'
이러한 루이 16세의 의견을 참고해서 단두대의 칼날이 반원형에서 비스듬하게 개조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루이 16세 처형 당시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는데 처형을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의 손에는 하얀 손수건이 하나씩 들려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시 사람들은 사형수의 피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루이 16세의 피를 적셔오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무서워서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은 심부름꾼을 시켰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19. 마리 앙투아네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루이 16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후 그다음 타깃은 당연히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가 죽은 지 9개월 만에 사형 선고를 받고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 앞으로 끌려 나오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 전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 머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흰머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위 그림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처형장으로 끌려온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스케치인데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 마차에 타고 있는 모습을 스케치한 것인데 과거 화려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초라한 모습입니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 머리카락이 걸릴까 봐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 마리 앙투아네트, 가짜뉴스로 죄목까지 받게 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서 시작부터 가짜뉴스에 시달리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짜뉴스로 죄목을 받게 됩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영원히 가증스러울 이름이 역사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이들과 똑같이 루이 카페의 미망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 있던 기간에 프랑스 국민의 천벌이자 흡혈귀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과 내통해서 프랑스를 전복하려 했던 반역 행위, 재정 낭비, 정부의 부패를 물은 죄, 백성에 대한 기만, 왕을 타락시킨 죄, 아들과의 근친상간 등 온갖 죄목을 뒤집어썼습니다.
특히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에게 기소된 이 혐의에 관해서 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나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여기 있는 모든 어머니에게 호소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재판장에 있던 모든 여성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동조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근친상간 혐의 재판의 증언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 17세였습니다.
어리고 심약한 루이 17세는 프랑스혁명을 이끈 혁명파들의 세뇌에 의해서 거짓 자백을 하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애 마지막까지 이렇듯 가짜뉴스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다음은 그 당시 <유럽 정치 전국 자유인 저널>이라는 신문에 기고된 장문의 사설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정오 12시 10분에 진행된 그녀의 교수형은 온 세상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했다'
<유럽 정치 전국 자유인 저널 中>
21. 마리 앙투아네트는 셀제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집사가 사망했을 때 그 아이들이 고아가 될까 봐 집사의 아이들을 입양했습니다.
이러한 측면들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채 온갖 죄목을 뒤집어쓰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시집온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 사치와 향락의 왕비로 불렸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자애로웠고 인간적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가짜뉴스 속에 매몰된 그녀는 단두대 처형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
그 말을 남긴 마리 앙투아네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22. 프랑스혁명의 의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후 프랑스의 봉건 제도는 막을 내렸고 '시민 계급'이 등장합니다.
프랑스혁명은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영국 명예혁명(1688)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혁명이 있었는데 민주주의 시작으로 프랑스혁명을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명예혁명은 '왕에 대한 귀족들의 권위를 높인 것'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미국 혁명은 미국이 18세기 후반 유럽에 의존하고 있던 것을 탈피해 미대륙을 하나로 묶어주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이익에만 부합했던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은 '인권'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보편적인 인간은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때문에 프랑스를 넘어서 '모든 인간을 위한 혁명'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23. 프랑스혁명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먼저 프랑스혁명이전에는 신분별로 다른 재료를 쓴 빵을 먹었다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똑같은 재료를 쓴 단 하나의 빵을 만들자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혁명군은 파랑, 하양, 빨간색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프랑스 국기와 같은 색깔과 같습니다.
가운데 하얀색은 부르봉 왕가를 상징하고 양쪽에 있는 파란색과 빨간색은 파리를 상징합니다.
프랑스혁명군이 구호로 내걸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프랑스의 국기인 삼색기의 파랑은 자유, 하양은 평등, 빨강은 박애를 나타낸 것이고 프랑스의 삼색기를 많은 나라에서 받아들입니다.
이탈리아의 삼색기도 초록이 파랑과 같은 의미를 보이는 것으로 이 또한 자유, 평등, 박애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프랑스의 삼색기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국가의 국기들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1948년 UN에서 '인권 헌장'을 만들었는데 그곳에도 프랑스혁명의 문구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UN 세계 인권 선언문 제1조>에 따르면
'태생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존엄과 권리에서 동등하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은 존재이며, 서로를 도우며 박애정신을 실천하는 존재이다. 모든 주권의 근본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렇듯 인권을 강조한 프랑스혁명은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측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24. 우리가 몰랐던 프랑스혁명의 이면과 한계점, 여성 인권의 배제
여성의 시각으로 본다면 프랑스혁명은 정말로 민주주의를 이룩한 혁명이었을까요?
'빵의 시위를 주도한 여성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프랑스혁명이 끝난 후 남성들은 정치는 남성의 영역이므로 여성들은 빠지라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프랑스혁명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고 하는데 박애는 '형제애'를 뜻합니다.
자매들에게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권에서 '인간(L'homme)'은 '인간'이지만 동시에 '남자'를 의미했습니다.
즉 인권 선언은 남성들의 인권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파의 여성들도 단두대에서 처형됐습니다.
혁명파의 여성들을 처형하면서 '이 사람들은 사실 남성이다'라고 성격 규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여성들을 정치에서 철저하게 배제시킵니다.
당시 '롤랑 부인'이라는 사람이 이었는데 그녀는 남편을 도피시키고 혁명파들에게 붙잡혀 형장에 끌려가가 처형을 당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혁명이여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뿌려졌는가'
아내의 죽음을 나중에 전해 들은 그녀의 남편도 나무에 목을 메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리고 '올랭프 드 구주'라는 여성이 '여성인권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고 처형당합니다.
'여성들도 정치적인 연설을 할 연단에 올라설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처형장에도 올라갈 권리를 가져야 한다'
프랑스혁명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여성들은 모두가 평등한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시민들의 자유와 주권을 회복시켰지만 결코 여성들의 인권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또 다른 이면이고 한계점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서울의봄
<출처: 벌거벗은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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