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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킨 해결사 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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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권율을 추천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킨 해결사 유성룡

1. 유성룡, 21살에 스승 '퇴계 이황'으로부터 극찬을 받다 

 

유성룡은 21살이 되던 해에 당시 저명한 학자였던 퇴계 이황을 직접 찾아가서 제자가 되기를 청합니다.

첫 만남에서 유성룡과 몇 마디 주고받은 이후에 퇴계 이황은 유성룡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단 몇 마디 나눴을 뿐이지만 퇴계 이황은 유성룡의 명민함과 범상치 않은 재능을 알아본 것입니다.

'자네는 반드시 훗날 큰 일을 해낼 걸세!'

심지어 퇴계 이황은 유성룡이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해낼 거라면서 호언장담까지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퇴계 이황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퇴계 이황으로부터 이런 극찬을 받은 것은 유성룡이 유일했다는 것입니다.

유성룡은 겨우 21살 때 당대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으로부터 확실한 인증을 받은 인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듯 25살이 된 유성룡은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2. 유성룡, 25세에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승승장구 쾌속승진을 이어가다

25살에 관직생활을 시작한 유성룡은 고위 관직자로 가는 엘리트 코스를 차례로 밟아나갑니다.

유성룡은 1569년 28세에 사헌부, 1576년 35세에 사간원, 1581년 40세에 홍문관 이렇게 조선의 언론기관 3사의 주요 관직에 차례로 오르더니 41살에는 조선 조정의 문무백관을 단속하고 감시하는 사헌부의 '대사헌'까지 꿰차게 됩니다.

유성룡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쾌속승진을 이어갑니다.

게다가 유성룡은 어찌나 일을 잘하고 모르는 게 없었던 지 노련한 대신들도 업무를 보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유성룡을 찾았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유성룡은 조선 조정에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던 것입니다.

유성룡은 궁궐에서 이런 평가를 받게 됩니다.

' 유성룡은 어진 선비이면서도 재주가 있는 바, 조정 신하들 가운데 아주 걸출한 자이다'

<우복집>

유성룡을 조정 신하 중에서도 최고라고 극찬한 것인데 이처럼 극찬한 인물은 바로 당시 조선의 왕 '선조'였습니다.

선조는 심지어 유성룡에 대해서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나만큼 유성룡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없다'

선조가 특히 유성룡을 신임했던 데에는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조정 관료들이 세력을 나누고 논쟁을 벌였던 것을 '붕당정치'라고 말합니다.

선조는 붕당정치로 인해 국정을 이끌면서 여러 신하들이 논쟁도 벌이고 경쟁도 하니 이를 화합시키면서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웠습니다.

조정 내 논쟁이나 분쟁이 일어날 때 유성룡이 의견을 내서 국왕이나 동료신하들을 설득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황을 재빨리 수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붕당 간 다툼을 중재하며 갈등 상황을 해결했던 유성룡의 역할이 선조에게는 매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갈등이 일어나면 해결사처럼 나타나서 정리해 주는 유성룡은 일도 잘하는 데다 뛰어난 문제해결 능력으로 선조의 마음에 쏙 드는 선조의 신임을 듬뿍 받은 인재였던 것입니다.

3. 조선 조정,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문제로 논쟁하는데 유성룡이 나서 일본에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3년 전인 1589년, 조선 조정의 핵심 관료로 우뚝 선 유성룡은 큰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선이 파견한  정식 외교 사절단인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 선조와 대신들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때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했을까요?

몇 해 전부터 조선 조정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이 계획에 동참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명나라와 조선은 외교적으로는 임금과 신하 같은 관계 즉 군신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친다는 것은 조선 조정 전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해괴한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 속에서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다면 정말 조선이 일본과 내통을 한다는 오해를 명나라에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조선 조정은 당시 일본을 조선 보다 국력이나 문화 수준이 한참 낮은 나라로 얕잡아보고 있었기도 했습니다.

일본을 얕잡아 보던 조선은 감히 일본이 명나라를 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조정 대신들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지 말자고 합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선조는  해결사 유성룡을 불러들여 그에게 답을 구합니다.

'지금은 한 지방에 일이 발생하면 8도가 소동하는 실정이므로, 만약 적합한 장수를 얻지 못하여 한번 불리해지면 극히 염려할 만한 일입니다'

유성룡의 의견은 과연 어떤 뜻일까요?

불과 2년 전인 1587년, 전라도 손죽도에서 왜구가 침략해 약탈과 살인을 벌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포로가 돼 일본으로 끌려갔고 지역책임자였던 전라도 좌수사는 사형까지 당하게 됩니다.

'손죽도 왜변을 생각하면 조선의 국방력이 심각합니다'

지금의 조선은 한 지역에서  왜변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8도가 들썩일 정도로 국방이 약해질 데로 약해진 상황이니 훈련한 장수를 내세워 국방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며 일본의 공격력이 심상치 않으니 이를 확인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유성룡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선조는 유성룡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 3월,  2명의 통신사가 일본을 정탐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하게 됩니다.

일본에 갔던 통신사가 다시 조선에 돌아오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요?

일본의 수도인 교토로 가는 데만 석 달이었으므로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4. 유성룡, 발 빠르게 국방을 재정비하기로 하다(이순신을 좌수사에 권율을 평안도 의주 목사에 추천)

이렇게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유성룡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통신사만 기다리지 않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조선의 군사를 재정비하기로 합니다.

앞서 유성룡이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서 선조에게 훌륭한 장수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었습니다.

전략이 뛰어나고 군사를 다룰 줄 아는 훌륭한 장수가 필요했습니다.

유성룡은 일본의 숱한 공격을 받는 남쪽지역을 지킬 좌수사로 당시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인물을 추천합니다.

이순신
이순신

바로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입니다.

그런데 유성룡이 이순신을 추천하자 조선 조정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대체 이순신이 누구요?'

지금에 와서는 이순신은 임진왜란의 영웅이지만 당시 중앙 조선 조정에서는 무신 이순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무명의 장수에 불과했습니다.

이순신은 지방 수령 중 가장 낮은 관직이었던 종 6품 현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순신은 병방에서 성을 비우고 적을 쫒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한 이력까지 있었습니다.

일본 때문에 조선조정이 심란하던 바로 그때, 유성룡은 경력에 흠이 있는 무명의 무신 이순신에게 국방을 맡기자고 추천한 것입니다.

유성룡을 향한 싸늘한 눈빛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어진 선조의 결정에 그야말로 조정 대신들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순신은 초자(벼슬의 품계를 건너뛰어 올림)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

<선조실록>

한마디로 유성룡의 의견을 선조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당시 선조의 이런 결정은 파격적이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순신 종6품 현감에서 무려 7단계를 높인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한 초고속 승진
이순신 종6품 현감에서 무려 7단계를 높인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한 초고속 승진

이순신은 종 6품 현감에서 무려 7단계를 높인 정 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한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었습니다.

유성룡이 추천한 인물이 또 있습니다.

권율
권율

바로 유성룡과 함께 형조에서 일했던 정 5품 정랑 '권율'입니다.

유성룡은 문신이었던 권율을 북쪽 군사들의 요충지 평안도 의주의 목사로 추천합니다.

바다에서 일본을 막는 것은 이순신, 북방 이민족을 막는 것은 권율로 이들이 적임자라고 유성룡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5.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의 엇갈린 견해, 그 속에서 유성룡은 일본의 명나라와 조선에 대한 침략의지를 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3월, 1년 만에 일본에 갔던 2명의 통신사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2명의 통신사의 보고를 받고 조선 조정은 큰 혼란에 빠집니다.

통신사 '황윤길'이 먼저 일본에서 겪은 일을 글로 올리며 말합니다.

'풍신수길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라는 자는 전국을 통일한 직후라 자신감과 야심으로 가득 찬 것이 금방이라도 조선으로 쳐들어올 듯하였습니다'

머지않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일본으로 갔던 통신사 '김성일'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왜군이 쉬이 올 것 같지 않고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 되옵니다'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올 낌새가 없다는 정반대의 보고였던 것입니다.

두 통신사의 상반된 주장에 유성룡이 이상함을 느껴 직접 진실을 밝히려 합니다.

유성룡은 평소 친분이 있었던 김성일을 불러서 자리를 따로 마련합니다.

'왜변이 일어날 가능성이 단 1할도 없는 것입니까?'

유성룡과 마주한 김성일은 유성룡의 물음에 이제야 숨겨왔던 속마음을 놓아놓습니다.

'저 역시 일본이 절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성일 또한 일본의 낌새가 이상했다고 생각은 했다는 것입니다.

김성일은 황윤길의 말이 너무나 강경해서 사람들이 너무 불안해해 민심이 동요할까 봐 일부로 자신의 생각을 숨긴 채 반대로 이야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를 치고자 한다는 1년 전 소문의 그 말은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6. 유성룡, 명나라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일본의 동태를 알리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낼 것을 건의하다

일본에 대한 의심이 짙어진 상황에서 조선 조정에서는 또 한차례의 논쟁이 벌어집니다.

바로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려야 한다는 입장과 통신사를 일본에 보냈다는 것을 알면 명나라가 의심할 것이라며 이를 숨겨야 한다는 입장으로 조정 대신들이 나뉜 것입니다.

이때 유성룡은 어떤 판단을 했을까요?

'우리를 모략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린다면 우리가 일본과 공모했다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징비록>

만약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다녀갔다는 사실을 일본이 명나라에 알리게 되면  그때는 이미 명나라의 의심을 사서 아무리 변명을 해봤자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유성룡의 건의대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상황을 전달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조선 조정이 등골이 오싹해지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명나라에서는 이미 여러 나라로부터 일본의 동태를 비밀스럽게 보고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만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명나라에서는 조선만 아무런 소식이 없자 조선과 일본이 내통한다는 소문이 진짜 인 것 아니냐는 의심이 커져갔었고  때마침 조선에서도 일본의 동향을 알리는 사신이 명나라에 도착한 것입니다.

남다른 판단력을 가진 유성룡 때문에 명과의 갈등을 막은 것입니다.

7. 유성룡,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다

일본의 야욕이 전면에 드러난 상황에서 조선 조정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모를 일본의 침량에 대비해 국경을 지킬 인재를 뽑아서 군사를 정비하게 했고 경상도 쪽에 새로운 성을 쌓거나 낡은 성을 고치도록 해 국방을 재정비합니다.

또한 유성룡은 급하게 전라도 좌수사 이순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곧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편지와 더불어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직접 쓴 병법서를 함께 보냅니다.

이 병법서에는 수륙전과 화공전을 치를 때 필요한 구체적이고 다양하며 실용적인 전술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병법서를 받은 이순신은 아주 뛰어난 책을 받았다면서 극찬합니다.

유성룡은 육지뿐 아니라 바다를 방어하는 일까지 나라 전역의 국방을 살피며 일본의 침략에 꼼꼼하게 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8. 임진왜란의 시작,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와 무기로 일본군 삽시간에 한양을 함락하다

그리고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를 시작으로 일본군이 구름 떼처럼 밀려왔다는 보고가 조선조정에 올라옵니다.

바로 임진왜란(1592~1598)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일본군의 침략을 예상했던 유성룡조차도 20만여 명의 압도적인 일본군의 규모가 예측한 것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으므로 화들짝 놀랍니다.

게다가 일본군의 신식무기 조총 앞에 조선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집니다.

그렇게 일본군은 부산(4월 13일), 상주(4월 25일), 충주(4월 28일), 한양(5월 3일)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 한양을 함락시킵니다.

9. 유성룡, 조선과 명나라 간 군사 외교의 임무를 맡다.

평양성
평양성

그리고 결국 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는 몰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가마를 타고 궁궐을 빠져나갑니다.

유성룡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채 선조를 모시고 한양을 떠납니다.

그런데 평양성에 도착하고 약 한 달 뒤인 1592년 6월, 유성룡은 선조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됩니다.

바로 조선을 돕기 위해 파견된 명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소통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유성룡에게 조선과 명나라 간의 군사 외교를 맡긴 것입니다.

명나라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서는 유성룡이 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명나라의 의심이었습니다.

명나라 내부에서는 여전히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유인하려고 함정을 파고 있다는 의심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애타는 파병요청에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고 조선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10. 유성룡, 명나라의 의심을 풀고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내다 

이런 상황에서 유성룡이 해결사로 나설 기회가 생깁니다.

얼마 후에 조선이 하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명나라 관리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오기로 한 것입니다.

명나라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유성룡은 명나라의 의심을 풀기 위해서 명나라 관리에게 이곳에서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유성룡은 명나라 관리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을까요?

일본군의 동향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던 '평양성' 안 정자로 명나라 사신을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평양성 남쪽으로 일본군이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왕까지 궁지에 몰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 어떻게 명나라를 노리겠느냐! 그리고 내통했다면 일본군이 우리를 왜 공격하겠느냐! 며 유성룡은 명나라관리에게 말했고 명나라 관리가 이를 직접 보고 판단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명나라는 조선의 상황을 직접 보고 나서야 의심을 풀게 됩니다.

그리고 명나라 관리는 이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천병이 한번 오면 왜적들을 섬멸할 수 있소'

유성룡은 뛰어난 기지로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명나라의 의심을 한방에 지우고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냅니다.

11. 이순신, 옥포해전 대승으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근근이 버티고 있던 평양성의 방어선인 임진강이 결국 함락당하고 맙니다.

결국 선조는 명나라의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평양성을 떠나 조선의 끝단 평안도 의주로 가는 피난길에 다시 오르게 됩니다.

선조가 떠나고 이틀 만에 평양성 역시 일본군에 함락됩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조선조정은 명나라의 지원군이 제때 도착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유성룡에게 믿기 어려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밀리기만 하던 조선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순신이 처음으로 전라좌수사로 출정한 '옥포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유성룡이 추천한 이순신이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순신이 거둔 승리는 전세를 한방에 뒤집는 계기가 되는데 이순신 수군의 대활약으로 바다에서 육로로 이어지던 일본의 보급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12. 명나라, 조선에 4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하고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다

그리고 얼마 후 1592년 7월, 명나라에서 약속한 군사를 무려 4만여 명이나 파견합니다.

유성룡은 4만여 명의 명나라 군사와 함께 조명연합군을 꾸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으로 향합니다.

평양성 전투를 앞두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을 만난 유성룡은 소매에서 평양성의 형체와 약점, 침투로 등이 상세히 적혀 있는 지도를 꺼내 건넵니다.

명나라 제독은 유성룡의 지도에 붉은 점을 찍어가면서 반드시 공략해야 할 지점을 표시합니다.

유성룡은 평양성의 공략 포인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명나라를 도와 평양성 탈환에 앞장섭니다.

1593년 1월,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평양성을 잃은 지 약 7개월여 만에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에 성공합니다.

13. 유성룡, 기지를 발휘해 칡넝쿨 다리를 만들어 무사히 임진강을 건너다

평양성 탈환직후 조명연합군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평양성에서 남쪽으로 진격합니다.

유성룡과 조명연합군이 파주의 임진강 부근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겨울이었기에 꽝꽝 얼어있어야 할 임진강이 모두 녹아 있어서 말을 타고는 임진강을 건널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말과 무기를 싣고 건널 튼튼할 다리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유성룡은 통나무도 배도 없는 이 상황에서 단 하루 만에 뚝딱 다리를 만들어냅니다.

유성룡은 임기응변으로 주변에 널린 '칡넝쿨'들을 활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칡넝쿨은 가늘고 유연하지만 아주 즐깁니다.

유성룡은 군사들과 고을 사람들에게 칡넝쿨을 있는 대로 모아 오라고 한 다음에 칡넝쿨로 새끼줄을 꼬아서 동아줄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줄기와 싸리갈대를 섞어서 펴고 흙을 덮어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 냅니다.

심지어 무거운 대포도 건널 만큼 칡넝쿨 다리는 튼튼했습니다.

해결사 유성룡의 기지와 추진력으로 조명연합군은 임진강을 건널 수 있게 됩니다.

14. 조명연합군, '벽제관'에서 일본군에 대패하다

벽제관
벽제관

그렇게 임진강을 건넌 조명연합군은 도망가던 일본군과 지금의 고양시인 벽제관에서 맞닥뜨리게 되어 전투를 벌입니다.

하지만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 처참한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군은 한양만큼은 뺏기지 않겠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한양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이 오른 2만여 명의 일본군이 벽제관에 집결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서둘러 공을 세우려는 욕심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아직 군사가 다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공에 눈이 먼 명나라제독 이여송이 군대를 정비하지 않고 섣부르게 군사를 투입했던 것입니다.

결국 한양을 눈앞에 두고 대패를 당한 조명연합군에게 도리어 일본군이 다시 공격을 하기까지 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5. 유성룡이 추천한 인재 권율의 부대가 일본군을 물리치고 한양을 되찾다(행주대첩)

그런데 이때 상황이 역전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폭죽이 터지듯 굉음이 들리고 일본군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갑자기 도망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장군이 고작 관군 3천여 명을 이끌고 뛰어난 통솔력으로 일본군을 물리친 것입니다.

유성룡이 의주목사로 추천했던 권율 장군이었습니다.

행주산성에 주둔해 있던 권율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면서 조명연합군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이후 일본군은 한양철수를 결정합니다.

임진왜란에서 큰 승리를 거둔 한산대첩 그리고 이번 행주대첩까지 모두 유성룡의 선구안으로 추천한 인재 이순신과 권율이 만들어낸 값진 승리였던 것입니다.

16. 유성룡, 황폐화된 한양과 불타버린 종묘를 보고 분노해 명나라 제독에 일본군을 쫓아가 달라 청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Lr0MLrg2AYY

징비록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고 얼마 후인 1593년 4월 20일, 유성룡은 명나라 군사들과 함께 한양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한양땅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한양땅을 밟은 유성룡의 표정은 금세 굳어집니다.

유성룡의 눈앞에 조선 백성들의 시신들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거리에는 시체가 가득했고 게다가 왕실의 근간인 종묘마저 불에 타버린 것입니다.

유성룡은 폐허가 된 한양을 보고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과 상실감을 느끼며 주저앉아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합니다.

나라의 근간을 불태우고 도망친 일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가며 곧장 명나라 제독을 찾아갑니다.

'일본군이 멀리 못 갔을 테니 추격해 주시지요!'

유성룡의 청을 들은 명나라 제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배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소!'

유성룡은 당장 달려가 군사들에게 한강에 널린 배를 어떻게든 모아 오게 하고 배를 왕복하게 해서 명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합니다.

17. 조선 조정, 명나라 군대에 배신당하고 일본군을 조선땅에서 내쫓지도 못하다 

그런데 강을 건너갔던 명나라 군사들을 태운 배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명나라 장수가 갑자기 발병이 났다며 군대를 철수시킨 것입니다.

명나라 장수는 애초부터 일본군을 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인데 이런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조선을 빼놓고 비밀스러운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1593년 1월 27일, 벽제관에서 벌어진 당시 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한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이후 겁을 잔뜩 먹고 일본군과 '강화교섭'을 맺기로 한 것입니다.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는 대신 일본군이 조선을 안전하게 빠져나가도록 명나라 군대가 돕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일본군은 명나라 군대의 배려 속에 안전하게 남해안에 도착하고 그곳에 17개가량의 왜성을 지으면서 조선땅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며 불안한 평화가 시작됩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을 조선에서 쫓아내지도 못하고 명나라에 배신까지 당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유성룡은 명나라의 배신에 충격을 받아 결국 병까지 얻어서 2개월가량 앓아눕고 맙니다.

18. 유성룡, 최식신 군대 '훈련도감'의 총책임자가 되다 

그렇게 분을 삭이면서 5개월이 지난 1593년 8월, 선조가 급히 유성룡을 조정으로 불러들입니다.

바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때문이었습니다.

훈련도감은 새로운 무기 사용법과 용병술을 훈련하는 최신식 군대입니다.

훈련도감은 이전의 군대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는데 일본의 신식 무기 조총을 사용할 특수부대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선조는 최신식 군대인 훈련도감의 총책임을 맡을 도제조에 영의정 유성룡을 임명합니다.

그런데 훈련도감에서 훈련이 거듭될수록 유성룡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사격훈련을 해야 하는데  조총에 넣은 '화약'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화약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그때 유성룡은 상상치도 못한 곳에서 해결책을 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바로 죄인들이 모여있던 감옥이었습니다.

당시 감옥에는 일본군에게 조총용 화약을 만들어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앞둔 화약제조기술자  조선인 '대풍손'이 수감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유성룡은 대풍손에게 화약을 만들어 제공해 준다면  특별한 혜택, 즉 사형을 면하고 출소를 시켜 주기로 합니다.

화약기술자 대풍손은 유성룡덕에 목숨을 건진 것인데 이에 보답하듯 대풍손은 하루에 10kg이 넘는 화약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훈련도감에 부족한 것은 화약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보다 훈련에 참여할 군사들이 모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성룡은 부족한 군사를 모으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당시 조선은 전쟁과 오랜 기근으로 먹을 쌀조차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훈련도감에서 좁쌀 2되씩을 매일 봉급으로 나눠준 것입니다.

이는 훈련도감의 병사가 받는 어마어마한 혜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굶주림에 지쳐있던 백성들은 좁쌀을 얻기 위해 훈련도감에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유성룡이 제공한 파격적인 혜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기로 한 것입니다.

신분 상승은 꿈꿀 수도 없었던 천인들이 군사로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면 양인이 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훈련도감의 군사지원자는 줄을 서게 되고 그렇게 모은 군사들로 최신식 무기 조총 훈련을 한 결과 한 달 만에 날아가던 새도 맞히는 실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유성룡의 추진력 덕분에 조선을 지키는 강력한 훈련도감의 조총부대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유성룡은 언제 벌어질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서 강력한 군사를 육성해 놓습니다.

19. 정유재란 발발 그리고 유성룡의 절친 이순신이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히다

시간은 흘러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4년 후인 1597년 1월, 이대로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바람이 산산조각 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정유년에 명일 강화를 깨고 다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보다 더 악랄하게 일본군은 조선을 짓밟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쳐들어오는 철체절명의 위기 속에 유성룡의 눈앞을 깜깜하게 만드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바다에서 통쾌한 승전보를 전해야 할 인물 이순신이 죄인이 되어 한양으로 연행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순신의 공을 질투했던 동료 장수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는데 이 내용이 조정에 보고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일본군이 조선조정에 거짓정보를 흘립니다.

당시 일본군을 이끄는 두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서로 앙숙 관계였는데 이 중 고니시가 조선 조정에 가토가 곧 조선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린 것입니다. 

이순신은 이것이 거짓 정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에 출정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여기에 조선 조정이 속았고 선조는 이순신 함대에게 출정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출정을 미룹니다.

바다에서 왕 노릇을 한다는 원균의 모함으로 선조의 심기가 불편한 상황에서 선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니 선조의 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전쟁을 앞두고 죄인이 된 이순신은 한성에 있는 의금부로 압송됩니다.

그렇다면 이순신의 절친 유성룡은 이런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유성룡은 이순신의 편을 들어주지 못합니다.

사실 유성룡이 이순신을 돕지 못한대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성룡과 이순신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조정대신 대부분이 알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절친인 자신이 나서서 이순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을 만들어 이순신을 더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성룡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힌 이순신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한 달여 만에 간신히 풀려나게 됩니다.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난 다음 날,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한 걸음에 달려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이순신을 챙겼다고 합니다.

20. 이순신 바다로 돌아가 명량대첩으로 대승을 거두고 육지에서는 유성룡이 키운 군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그리고 이틀 뒤 1597년 4월 3일,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을 끝으로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으로 백의종군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뒤인 1597년 9월, 이순신은 유성룡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해옵니다.

133척의 일본군에 맞선 10여 척의 조선 함대와 이순신이 조선군에 불리했던 전세를 명량의 물살을 이용해 대반격을 하여 극복하고 일본군에 대승을 거뒀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의종군에 나섰던 이순신이 바다로 돌아와 칠천량전투에서 원균의 패전 후 폐허가 된 조선 수군에 돌아와 단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쳤다는 명량대첩 승전보를 전한 것입니다.

게다가 정유재란의 전쟁터 곳곳에서 유성룡이 정비하고 키운 조선군사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조선을 지키기 위한 혈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이순신의 놀라운 승리와 조선군의 용맹함 그리고 유성룡의 선구안과 묵묵히 전쟁에 대비해 온 노력이 또다시 빛을 발한 순간이었습니다.

21. 유성룡, 명나라의 오해를 풀기 위한 사신단으로 가지 않기로 선언하고 결국 파직당하다 

1598년 8월,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일본군은 유성룡의 바람대로 조금씩 철수하기 시작합니다.

길었던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는 순간, 갑자기 명나라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조선이 명 황제를 우습게 알고 일본과 손을 잡고 전쟁을 벌였다'

임진왜란 초부터 조선을 둘러싼 해괴한 소문이 또다시 불거진 것입니다.

명나라 황제 측근들의 권력 다툼 때문에 퍼진 유언비어였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경쟁자를 제거하려고 또 다른 측근이 일부로 거짓 소문을 퍼트린 것입니다.

이에 이 오해를 풀지 못하면 닥칠 상황에 조선조정은 다급해집니다.

선조는 급하게 명나라로 보낼 사신단을 준비합니다.

명나라에 갈 사신으로 지목된 사람은 당연하게도 전란기간 동안 명나라와의 외교를 도맡은 유성룡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조의 명령을 받고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유성룡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시옵소서'

유성룡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임금이 불러 보시므로 기어가서 아뢰기를... 고통이 심해 일어나지 못하고...'

기록에서 보듯 당시 유성룡은 건강이 심하게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꼭 본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재상이 가더라도 충분히 명나라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선조의 명을 거절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나라에 가지 않겠다는 영의정 유성룡의 폭탄선언에 나랏일에 책임지고 솔선수 번해야 하는 영의정으로서 직무유기라며 조선 대신들이 한 목소리로 유성룡의 탄핵을 요청하고 일어섭니다.

유성룡이 명나라에 가지 않는 것은 나라가 아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유성룡을 겨냥한 탄핵상소는 약 3개월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올라옵니다.

'왕의 명령을 거절한 것은 왕을 우습게 알기 때문이다' 

' 유성룡은 원래 간사한 사람이라 지위를 이용해 자신과 친한 사람만 등용했습니다'

'유성룡이 간사하고 시기하며 나라를 그르치게 했습니다'

심지어 유성룡은 이런 모함까지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선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유성룡을 아니꼽게 생각했던 조정 대신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소를 무차별적으로 올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성룡을 무척이나 아끼던 선조는 유성룡을 지켜줬을까요?

선조는 몇 차례나 신하들의 탄핵 상소를 물리며 유성룡을 곁에 두려 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계속된 상소에 결국 1598년 11월 19일 유성룡을 파직시킵니다.

22. 유성룡, 파직당하던 날 친구 이순신과 영원한 작별을 고하다 

유성룡이 파직당하던 날, 조선에 또 하나의 비보가 전해집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친구 이순신을 볼 수 없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자신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적을 섬멸한 뒤 전쟁 중 바다 한가운데서 최후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유성룡은 탄핵으로 조선 조정을 떠나게 된 그날, 오랜 친구이자 전우의 이순신의 죽음까지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선을 지키면서 오랜 시간 친구의 얼굴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성룡은 절친한 벗 이순신과 작별도 못한 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순신의 죽음 이후 정유재란도 막을 내렸습니다.

23. 유성룡, 선조들의 실수를 돌아본 후손들이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죽기 전 '징비록'을 쓰다 

https://www.youtube.com/watch?v=FZVqVeL1wso

징비록 오디오북

그리고 9년 뒤 1607년 5월 유성룡은 66세의 나이로 고향 안동에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유성룡의 죽음 후 약 90년이 지난 1695년, 유성룡의 이름이 일본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왜관을 통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조선의 책 한 권이 엄청난 주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징비록
징비록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 안동의&lt;옥연정사&gt;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 안동의<옥연정사>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 안동의&lt;옥연정사&gt;
징비록을 집필한 장소 안동의<옥연정사>

유성룡이 말년에 고향 안동에서 집필한  '징비록(懲毖錄/징계한 징, 삼갈 비, 기록할 록)'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경계한다'

징비란 지난 잘못에 대해 스스로를 징계하고 반성하며 또한 경계한다는 뜻입니다.

징비록의 서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지난 난중의 일을 생각하면 아닌 게 아니라 황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알지 못해 왔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고통을 겪게 된 것은 나와 같은 조정 대신들의 잘못이다'면서 속죄의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간 것입니다.

유성룡이 이 책을 쓴 목적은 뚜렷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안도감에 젖어 과거를 지워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게 위해 차분한 마음으로 붓을 들고 나라를 잃을 뻔 한 참담한 상황과 임진왜란에서 우리가 놓쳤던 점을  징비록에 생생히 담은 것입니다.

후대가 이와 같은 어려움을 앞으로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항상 경계하고 대비하라는 소중한 깨달음을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KBS/징비록 오디오북(고독한 낭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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