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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읽기

16. [희랍어시간]을 읽고(책 리뷰/독후감)/한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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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희랍어시간]을 읽고(책 리뷰/독후감)/한강 작가

희랍어시간(한강)
희랍어시간(한강)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한강 작가는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척'이란 ' 누가 있는 줄을 짐작하여 알 만한 소리나 기색'을 일컫습니다. 언젠가는 말을 할 줄 알았으나 지금은 하지 못하는 여자의 목구멍과 혀에 머물고 있는 소리와 시력이 소멸되는 유전병을 앓고 있는 남자의 흐릿한 기색이 만나는 것이겠지요. 여자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상대방의 손바닥 위에 검지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소리를 대신합니다. 남자 또한 볼 수 없지만 손바닥에 그려진 소리는 온몸과 머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리가 고막을 울려 온몸으로 느낄 수 있듯. 

 

이 책은 장편소설이지만 중편소설에 가까울 정도의 두께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반나절만에 도 다 읽어버릴 것 같았지만, 한강 작가 특유의 시적 산문은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하게 합니다. 걷고, 버스를 타고, 보고 듣는 일상의 행동과 분위기 그리고 나를 둘러싼 배경들이 한 편의 시와 같습니다. 흡사 20개의 시를 엮어 만든 시집과도 같아, 점자를 읽듯 더듬더듬 촘촘히 어루만지듯 읽게 됩니다. 천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를 좇아가면서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나의 그것과 비교해 보고, 다시 무슨 계기로 그 여자의 말이 트일지, 언제 그 남자의 시력은 암흑으로 변할지, 그 속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어떻게 그 침묵과 암흑의 강을 건너 서로에게 닿게 될지, 고요하고 침묵만이 그득한 그들의 세계를 가슴 졸이면서 바라보게 됩니다.  희랍어 시간에 대해 한 동료 작가는 정말로 천천히 읽어가다 보면 작가가 마지막에 큰 선물을 안겨준다고 서평 하는 것을 보았는데, 천천히 곱씹고 음미하다 보면 어느덧 작가의 선물에 당도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는 길지 않은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끝마치고, 남편과의 사이에서 잉태된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위한 소송 중입니다. 여자는 아픈 마음과 생활고로 아들을 빼앗긴 상태이고 머지않아 아들이 외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자는 불현듯 소리를 잃습니다. 아마도 마음의 병이 증상으로 발현되는 심인성 질환으로 보입니다. 실어증이라는 병명이라고 불리는. 글자 또한 예전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여자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같은 증상을 보였는데 이때 다시 말문을 트이게 해 준 것이 중학교에 올라가 배운 불어의 단어 '비블리오떼끄' 덕분이었음을 기억해 내고는, 최대한 생소한 문자,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문자인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희랍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이미 수천 년 전에 없어져 현재는 사용하고 있는 나라가 없는 언어입니다. 다만 고대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에 의해 아직도 공부되고 보존되고 있습니다. 불어 단어 '비블리오떼끄( bibliothèque(f.) '는 "도서관"을 의미합니다. "책"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중성형 명사 biblíon(n., βῐβλῐ́ον)과 "상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여성형 명사 thḗkē(f., θήκη)가 결합된 단어로 원래는 "책을 보관하는 상자"라는 의미입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던 그 단어가 고대 그리스어를 기원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희랍어의 복잡한 문법체계와 이미 수천 년 전 죽은 언어라는 사실이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집니다.

남자는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라는 부계로 이어지는 유전병을 가져, 언젠가는 시력을 영원히 잃게 되는 운명을 가진채 살아갑니다. 그 아버지가 시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생면부지 독일로 가족들과 함께 이민을 와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으나, 그 병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와 결국 일을 그만두고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 죽게 됩니다.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느라 억척스러워지고, 억지로 웃음 지으며 살아가는 삶에 진저리를 칩니다. 여동생은 성악을 전공해 중찬단에서 당차게 자리를 꿰찹니다. 남자는 자신의 시력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속에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크게 대꾸하는 법도 반항하지도 않습니다. 남자는 마흔을 앞두고 고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합니다. 어차피 앞이 안 보이는 채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가족들의 우려에도 혼자 돌아온 고국에서 더 이상 외국인이기 때문에 받았던 경계심의 눈초리를 받음에 안도하는 듯합니다. 어느 날 독일의 거의 유일한 친구가 죽었다는 편지를 받습니다. 그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고대 희압인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 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독일친구는 남자에게 죽어가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리고 차에 깔려 달궈진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붙어서 죽어가던 백구가 여자 어깨의 살점을 왜 마지막 순간까지 물어뜯어야만 했는지, 여자는 끝까지 그를 껴안으로 했을까에 대해서도 생각헤보게 합니다. 죽음과 맞닥뜨리는 그 순간, 살아가는 것에 더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이고 이치였던 것은 아닐까!!

 

새가 건물 지하계단 아래 암흑 속에 길을 잃고 소리를 내며 머리를 찧어댑니다. 남자는 이 새를 밖으로 내보내려다 계단 아래 암흑에 갇히게 되고 자신의 눈인 안경마저 깨집니다. 한강 작가의 소설에는 새가 많이 등장합니다. 희랍어 시간에 나오는 새는 제 갈길을 잃고 공포에 떨고 있는 인간군상 그 자체인 것만 같습니다. 벽이며 우체통이며 머리를 박아대는 모습은 불안에 휩싸여 눈에 뵈는 게 없이 이리저리 치여 피가 흐르고 고름이 터져 나오고 살점이 뜯기고 머리가 깨진 채 살아가는 그 남자와 그 여자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이 공포 속에서 손을 내밀어주는 어스름한 빛과 같은 소리를 잃은 여자는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며 직감한 대로 남자를 안경원이 아닌 병원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남자의 집에서 남자는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말하고, 여자는 피곤하지만 조용히 그것을 듣습니다. 두 사람의 기척이 여름밤, 선풍기도 없는 남자의 방에서 서로의 어깨를, 등을 쓰다듬습니다. 고단함을 어루만지듯, 생의 아름다움을 안듯이.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 입고 문밖으로 걸어 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가.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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