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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디 위드 돈벌러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 죽어서까지도 손가락질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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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 죽어서까지도 손가락질받다

친일은커녕 일본을 싫어했던 이완용은 어떻게 조선을 팔아먹었나

1. 이완용, 처음에는 일본을 증오하다

 

이완용은 사실 처음부터 친일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친일은커녕 이완용에게 일본은 증오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대체 이완용은 언제부터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조선 땅의 모든 것을 일본에 넘겼을까요?

오늘은 이완용의 지난 행적을 함께 벌거 벗겨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이완용, '육영공원'에 입학할 수 있었던 인재였다

친일은커녕 일본을 싫어했던 이완용은 어떻게 조선을 팔아먹었을까요?

이렇게 나라를 팔아먹었던 대신 이완용, 사실 그는 고종이 신임하던 신하이자 조선의 인텔리 중에 인텔리였습니다.

고종
고종

고종에게 이완용은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해서  옆에 두고 싶어 했던 신하였습니다.

이완용이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된 특별한 계기는 무엇일까요?

이완용의 관직 생활 터닝 포인트가 된 곳은 서구식 '학교'입니다.

영어, 수학, 세계사, 서양의 정치와 법률까지 이전의 조선에서는 배운 적 없는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은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수업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는 파격적인 수업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학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 이름은 바로 '육영공원(育英公院)'입니다.

육영공원은 오로지 명문가의 자제와 현직 관리 중 아주 세심한 기준에 의해 선발된 단 30여 명만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까다롭고 세심하게 선발된 인재들 중 한 명이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3. 이완용, 주미공사관원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미국에 가게 되다 

젊은 시절의 이완용
젊은 시절의 이완용

이완용이 29살이 되던 1886년, 이완용은 육영공원에 자원 입학합니다.

이완용은 왜 어떤 생각으로 육영공원에 자발적으로 입학했을까요?

이완용은 자신이 영어에 익숙해지면 조선의 최고 권력자 고종의 눈에 들 수 있게 되어 관직자로서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을 세운 고종의 의중을 빠르게 눈치채고 육영공원에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리고 입학 10개월 만에 아주 큰 행운을 쥐게 됩니다.

이완용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그 행운은 무엇이었을까요?

'미국과의 교제가 점점 긴요해졌기 때문에 그때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미국에 가게 되었다'

이완용은 미국에 직접 갈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조선에서 미국에 직접 간다는 것은 손에 꼽을 만큼의 사람만 가능한 엄청난 기회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완용은 대체 어떤 이유로 미국에 가게 된 것일까요?

1882년, 조선과 미국 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이후 서울 정동에 '미국 공사관'이 세워집니다.

이완용과 전권공사 박정양
이완용과 전권공사 박정양

그리고 이번에는 조선이 미국에 '조선 공사관'을 세우러 가야 됐었고 이완용은 그 주미공사관원 중 한 명으로 선발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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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완용, 주미 공사관의 '임시대리공사'로 임명되는 절호의 기회를 잡게 되다 

이완용이 31살이 되던 1888년 1월 1일, 2달간의 긴 여정 끝에 조선공사관원들은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고 공식으로 조선 공사관을 엽니다.

그렇게 미국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미국 도착 후 11개월 만에 주미책임공사관은 경성으로 귀국하라는 명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청나라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조선 공사관원들의 미국행을 허락하면서 청나라가 제시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조선 공사는 주요 외교 사항이 있을 때 항상 청 공사의 지시를 따르라'

당시 잡지에 실린 조선 공사관원들의 모습
당시 잡지에 실린 조선 공사관원들의 모습

하지만 청나라 허가 없이 공사가 미국 대통령을 방문했다면서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을 계기로 청나라는 주미 전권공사의 철수를 요구했으며 고종은 전권공사 박정양을 조선으로 소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미 전권공사의 파면이라는 이 불미스러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됩니다.

공석이 된 주미 전권공사 자리에 이완용이 임명된 것입니다.

이완용은 전권공사 다음으로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약 2년 동안 주미 공사관의 임시대리공사로 일하게 됩니다.

이완용은 이렇게 미국에서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이완용과 그의 부인
이완용과 그의 부인

당시 이완용이 어떤 모습으로 일했는지 실제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서양인들 사이에서 갓을 쓰고 도포를 두른 모습입니다.

주미 공사관원과 가족들은 미국에서도 한복을 입고 생활했습니다.

이완용은 미국에서 주둔하는 동안 더듬거리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미국 공사관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5. 이완용, 친미파 '대미 외교의 일인자'로 고종의 총애를 받다 

그리고 1890년 10월, 이완용은 대리공사직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3년여간의 미국 생활의 경험이 이완용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이완용은 대미 외교의 일인자이자 친미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부상합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완용은 고종의 최측근 기구인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일하게 됩니다.

해외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고종은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이완용이 꼭 필요한 인재였던 것입니다.

이런 고종의 총애 속에  이완용은 34살이 됐을 때 무려 종 2품까지 승진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종 2품이 되는 데에는 보통 20~30년이 걸렸기 때문에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이완용은 친미파로 고종의 측근에서 승승장구합니다.

6.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을미사변까지 일으키다 

그런데 1894년, 조선땅에서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바로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청일전쟁은 1894년~1895년까지 조선의 지배를 두고 청나라와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내정마저 간섭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여러 열강의 힘을 빌려서 일본을 견제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화가 난 일본은 조선 궁궐 한 복판에서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게 됩니다.

앙심을 품은 일본은 1895년 10월 8이 새벽,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고종은 경복궁에 꼼짝없이 갇혀서 친일파 관리와 일본의 감시 속에 두려움에 떨며 잠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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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완용, '아관파천'을 이끌며 고종의 최측근 관료로 우뚝 서다

이때 고종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관료였던 이완용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완용은 자신과 친분이 돈독했던 미국 공사관으로 재빨리 대피해 있었습니다.

이완용이 그동안 고종과 명성황후 곁에서 일본을 배척하고 미국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당연히 이 과정 속에서 이완용의 목숨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완용은 치외법권지역이었던 미국 공사관으로 도피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공사관에서 이완용은 큰 결심을 합니다.

일본이 장악한 궁에서 고종을 구출할 작전을 계획한 것입니다.

고종의 입지를 흔들고 위협하는 일본은 그 당시 이완용에게는 밀어내고 물리쳐야 할 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완용은 고종을 구출한 다음 어디로 도피시키려고 했을까요?

바로 '미국 공사관'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조선의 최고 권력자 고종을 구출하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올라갈 거라고 계산이 이미 끝난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완용은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서 30여 명의 행동대를 데리고 궁으로 갑니다.

그런데 사전에 구출계획이 발각되면서 결국 첫 번째 시도는 실패합니다.

이완용은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고종과 연락하면서 다음 기회를 노립니다.

그리고 1896년 2월 11일, 드디어 고종 탈출 계획이 성공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 공사관
러시아 공사관

하지만 경복궁을 떠나 고종이 피신한 곳은 '미국 공사관'이 아닌 '러시아 공사관'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이완용은 이렇듯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끈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러시아와 접점이 없던 이완용은 어떻게 미국 공사관이 아닌 러시아 공사관에 고종을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요?

이완용은 외국 공사관이 많은 정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외교 커뮤니티인 '정동구락부'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정동구락부에서 미국, 러시아와 가까웠던 회원들과 함께 고종을 러시아로 탈출시켰던 것입니다.

이완용은 미국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어떤 외세의 힘을 빌리던 상관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관파천을 성공시킨 후 이완용은 어떻게 됐을까요?

고종을 구출해 낸 이완용은 하루아침에 관료직 감투를 3개나 획득하게 되며 그야말로 고종의 최측근 관료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8. 이완용, 일본의 고종 폐위 압박 신문기사로 불안에 떠는 백성들을 수습하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다 

하지만 일본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을 계속 압박합니다.

일본은 조선 백성들이 모두 보는 신문에 한글로 글을 싣습니다.

'자신의 궁궐을 떠나 외국 열강에 보호를 요청한 국왕을 폐위해야 한다'

나라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런 신문기사가 나자 백성들은 더욱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해하는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고종은 이완용에게 이 사태를 수습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완용은 고종의 명령을 받들어서 신물사에 엄중히 경고하고 선동성 기사를 싣지 않도록 일본 공사에도 조치를 취합니다.

우리가 대표 친일파로 익히 알고 있는 이완용은 이때까지는 일본을 철저하게 적대시하고 경계했던 것입니다.

9. 이완용, 대규모 횡령 혐의로 관직에서 파면되다 

그런데 승승장구하고 있던 이완용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고 실체가 드러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898년, 이완용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나라의 이권을 해외에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적이 신문에 실립니다.

오늘날 교육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을 맡았던 1895년,  나라가 어려워 해외에서 돈을 빌리게 됐을 때 빌린 돈의 일부를 빼돌려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외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외무대신을 맡았던 1896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미국에 뇌물 5만 달러를 받고 철도부설권을 넘겼다는 의혹까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완용의 커리어를 뒤흔드는 엄청난 횡령 스캔들이 또 터집니다.

1898년 전북 감찰사로 새롭게 부임했던 이완용이 세금 20만 냥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완용을 아끼던 고종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고종은 이완용을 관직에서 파면시켜 버립니다.

10.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고종, 대미 외교 일인자 이완용을 소환하다

그렇다면 이완용은 중앙정계를 영영 떠나게 됐을까요?

이완용은 경성 주변을 떠나지 않으면서 호시탐탐 고종의 신임을 얻어 중앙 정계로 나아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 1897년, 조선에는 엄청난 변화가 찾아옵니다.

당시 고종이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것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조선이 제국임을 선포하며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꿉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조선의 왕이 아닌 대한제국의 황제가 됩니다.

이완용이 정계를 떠난 지 3년 후인 1904년 2월, 이완용이 정계에 복귀할 수 있게 된 엄청난 사건이 또 벌어집니다.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 역사를 뒤바꿔 놓은 '러일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대한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러시아와 일본이 결국 주도권을 두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이 더 커진 일본과 아관파천 이후 조선을 간섭해 온 러시아,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 양국의 압력을 받게 됩니다.   

계속되는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해결의 열쇠를 쥔 누군가를 급히 찾습니다.

바로 '이완용'입니다.

당시 고종은 러일전쟁으로 맞은 위기를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하고 싶어 했고 이를 위해 미국과 친한 이완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직당한 대미 외교의 일인자 이완용을 소환합니다.

이완용은 고종의 직속부서인 궁내부의 '특진관', 현재 '대통령실 보좌관'으로 임명됩니다.

이완용은 이렇게 고종의 최측근이 되어 정계로 돌아오게 됩니다.

11. 이완용, '친러파'로 오해되어 '친일파' 대신들의 반대로 정계에서 쫓겨나다

그런데 정계에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이완용은 해임됩니다.

바로 이완용의 정치활동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일본을 배후에 두고 있는 친일파들의 반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친일파들은 왜 이완용을 경계했을까요?

당시 친일파들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켰던 이완용을 친러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친일파들은 고종을 압박해서 이완용을 내쫓았던 것입니다.

이완용이 무려 3년 7개월 만에 얻은 정계 복귀의 기회가 친일파들에 의해서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든 중앙정계에 복귀하고자 했던 이완용에게 일본은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12. 이완용, '친일파'가 되다 

그리고 1905, 일본의 승리 '러일전쟁'을 끝이 납니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조선에서 물러나고 대한제국은 그야말로 일본 세상이 됩니다.

고종은 측근세력을 동원해서 끝까지 '미국'에 지원을 호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미국마저 일본을 지원하는 노선으로 입장이 바뀌게 됩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은 필리핀 점령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 모든 힘의 균형이 일본으로 기울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와중에 갑자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고종이 신임하던 신하가 일본에 납치가 된 것입니다.

그가 납치된 이유는 일본의 간섭과 침략에 끝까지 맞섰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한제국에서는 일본에 등을 돌리면 아무리 직책이 높아도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완용은 급히 누군가를 찾아갑니다.

바로 자신과 함께 미국에서 일했던 동료이자 일찍이 친일파로 돌아선 법무대신 이하영(1858~1929)이었습니다.

이완용은 이하영에게 일본 공사관에 다리를 좀 놓아달라며 은밀히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일본공사의 추천을 받고 학부대신으로 대한제국 정계에 복귀를 했던 것입니다.

이완용은 이런 정세를 읽고 재빨리 친일파가 됩니다.

13.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을 포함한 을사오적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을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하다 

러일전쟁 종전 2개월 뒤인 1905년 11월 9일, 일왕의 특사가 경성에 도착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바로 일본제국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입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경성에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외교권을 일본이 차지한다'라고 국제적으로 공표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의 외교권 침탈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5일 후인 1905년 11월 15일, 결국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는 통역관을 대동하고 독대합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승낙사히든 거부하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거부한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지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거부하면 조약보다 더 불리한 상황을 맞을 것이라고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협박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대신들과 일본의 일방적인 요구를 어떻게 해결할지 의논합니다.

이에 이완용은 긴급회의를 주도하고 긴 회의 끝에 고종과 대신들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렇게 말하기로 결론을 내립니다.

'체결은 불가하다'

이완용과 대신들은 '을사늑약은 절대 체결할 수 없다'라고 반대의 뜻을 모은 것입니다.

이완용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찬성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완용은 속으로는 찬성하면서도 눈치를 보며 적절한 타이밍을 봤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완용이 미리 찬성한다고 하면 고종과 대신들이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신들의 이 회의 결과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겠다고 경성에 온 이토 히로부미의 귀에 들어갑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현병사령관과 군사령부부관을 끌고 고종을 만나기 위해 궁으로 쳐들어 갑니다.

그런데 고종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대신들과 만나 조약의 내용을 협의하라면서 이토 히로부미를 피합니다.

고종은 조약을 미룰 수 있는 한 최대한 미루려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였던 것입니다.

고종의 마음을 눈치챈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7일, 하루 안에 조약을 체결하기로 마음을 먹고는 주요 대신들이 모여 있던 '중명전'으로 향합니다.

을사늑약 당시 조선제국 주요 대신들
을사늑약 당시 조선제국 주요 대신들

저녁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중명전에는 조선의 주요 대신들이 모여있었습니다.

당시 중명전의 분위기는 이랬습니다.

'총칼이 늘어서 철통과 같고 내정부 및 궁중에도 일부 병사가 배치되어 그 공갈의 기세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대한계년사>

이런 상황에서 일본 측에게 조약을 맺자는 소리를 들으면 대신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대신들은 공포에 질려 궁을 벗어나려 했습니다. 

대신들이 회의장에서 빠져나가려던 그때, 일본 헌병들이 나가려던 대신들을 막아서고는 다시 회의장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렇듯 살벌한 분위기 속에 이토 히로부미와 마주하게 된 대신들에게 이토는 조약 승인을 강요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차례로 부르며 의견을 묻습니다.

먼저 이토 히로부미는 '참정대신 함규선'에게 묻습니다.

'참정대신은 어전에서 뭐라고 했는가'

그러자 함규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반대한다고 말했소'

다음으로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똑같은 질문을 했고 박제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외부대신으로서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폐하의 명령이라면 어찌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외부대신 박제순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면서 말꼬리를 흐립니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외부대신은 찬성하는 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외부대신 박제순이 말꼬리를 흐리고 강력히 반대하지 않았으니 찬성으로 못 박은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이토 히로부미는 '법부대신 이하영'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이하영은 정세를 운운하며 확답하지 않습니다.

이런 반응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하영도 확답하지 않은 것은 찬성이라며 제멋대로 찬성이라고 우깁니다.

대신들의 의견을 연이어 묻던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그의 시선이 이완용에게 멈춥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은 이완용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국력이 약한 우리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완용은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의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는 답을 합니다.

강력히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이완용의 대답에 분위기가 휩쓸렸던 나머지 3명의 대신들도 모두 찬성표를 던집니다.

이완용을 포함한 8명의 대신 중 5명이 찬성한 것입니다.

을사오적
을사오적

이 날 조약에 찬성한 이들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고 부릅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대신들의 찬성을 빌미로 조약체결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황제인 고종의 찬성 없이 대신들이 다수결로 찬성했다고 해서 조약이 체결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대한제국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이고 황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국가다'라고 법에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황제가 조약 체결을 대신 회의에서 협의해서 결정하라고 했으니 대신회의에서 과반수가 넘으면 자동적으로 대한제국도 이에 찬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을사늑약은 이와 같이 국가 간에 필요한 적법한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이고 불법 조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완용의 적극적인 찬성으로 이루어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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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완용, 을사늑약 찬성에 반대하는 자를 어리석다고 말하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이제 일본의 반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결국 격분한 민중들은 을사늑약 파기를 외치면서 황궁 앞으로 몰려옵니다.

이런 과정에서 민중의 분노를 더 끌어 오르게 한 글이 퍼집니다.

'시일야방성대곡, 오늘 목놓아 통곡한다. 저 개, 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은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그 당시 민중들의 분노가 절절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민중들의 분노는 점점 더 거세졌고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게 됩니다.

이렇게 분노한 민중들에게 당시 이완용이 한 말이 있습니다.

'조약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헛된 말입니다. 외교에 대한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겨졌으나 나라가 부강해지면 돌려받으면 됩니다'

<자오서>

이완용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고 다만 외교권만 잠깐 일본에 맡겼을 뿐이라는 것이라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완용은 불합리한 상황에 분개하고 정의를 지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합리화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좇았던 것입니다.

15.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에게 '대한제국을 일본에 바치겠다'는 충성맹세를 하다

을사늑약을 체결 한 직후 일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일까요?

통감부
통감부

바로 조선을 철저히 통치하고 감시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일이었습니다.

1906년 3월, 통감부로 온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외교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를 제멋대로 간섭하는 실질적 통치기관이 됩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이후 새로운 내각에 총리대신으로 임명이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광산사무국 총재'의 자리에도 임명됩니다.

이완용은 지위와 재력, 이 두 가지를 모두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충격적인 맹세를 합니다.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고 한국을 일본에 병합시키겠습니다'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철저하게 대한제국을 일본에 바치겠다는 맹세를 한 것입니다.

'나는 비로소 일당(이완용)이 탁견과 용기를 갖춘 비범한 인물인 줄 알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을 '의지가 강한 용기 있는 자'라며 절대적을 신임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나의 스승이다'

그리고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렇게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가게 됩니다.

16. 이완용, '헤이그 특사'를 보내려다 실패한  일본의 편에 서서 고종의 폐위를 돕다

그러던 1907년, 이완용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터집니다.

매국노 이완용 입장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큰 사건이었던 것인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헤이그 특사
헤이그 특사

바로 '헤이그 특사'입니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를 파기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헤이그 특사들은 본회의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게 되며 완전한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본이 방해했다는 것은 일본이 고종의 헤이그 특사를 먼저 눈치를 챘다는 것인데 일본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이토 히로부미는 크게 분노하면서 고종을 쫓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이를 실행할 이토 히로부미가 찾은 충직한 부하는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에게 '이 일을 수습할 방법을 고종에게 전하라'라고 명령합니다.

고종에게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일본으로 직접 가서 일본천황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완용은 대한제국으로서는 굴욕적이기 그지없는 이 명령을 거리낌 없이 그대로 전합니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의 무리한 요구에 당연히 반대합니다.

그대 이완용은 고종에게 이렇게 소리칩니다.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완용은 고종에게 왕실도 보존하고 목숨도 보전하고 싶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입니다.

고종은 이때 이완용을 흘겨볼 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한때 고종을 보필하고 고종이 총애했던 대신 이완용, 그는 이제 일본의 편에 서서 고종의 목숨마저 위협하는 적이 된 것입니다.

1907년 6월, 결국 고종은 폐위당합니다.

이렇게 조선을 팔아넘기고 최고의 권세를 누리게 된 이완용은 고종까지 폐위시키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됩니다.

당시 대한제국 민중들은 이완용을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이완용은 개에 비유하면서 비판합니다.

그의 집 담벼락에는 온갖 욕설과 분뇨로 더럽혀집니다.

시위대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러서 집이 모두 타버리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나라를 판 매국노와 일본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대단했습니다.

17.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도하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이완용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자신이 충성을 맹세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에서 총을 맞고 죽은 것입니다.

안중근
안중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쐈고 이때 총 세 발을 맞고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하게 됩니다.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도합니다.

18. 이완용, '이재명 의사'에게 습격당해 칼에 찔리지만 살아남아 매국행위에 더욱 전념하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죽고 두 달 뒤, 또 한 번 경성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완용 피습 기사
이완용 피습 기사
이재명
이재명

바로 총리인 이완용이 칼에 찔려 생사를 오간다는 기사입니다.

한 청년이 이완용의 죄를 벌하겠다면서 그의 목숨을 노린 것입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이재명'입니다.

이재명 의사는 단도로 이완용의 어깨, 허리, 신장, 폐를 질렀고 이완용은 동맥이 잘리면서 엄청난 피를 흘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완용은 이런 엄청난 출혈에도 살아남습니다.

이완용은 친일매국 관료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당대 최고의 의료진에게 최고의 수술을 받을 수 있게 했었고 퇴원 한 뒤 요양원까지 제공해 줍니다.

강자에 기대 임금도 나라도 버린 이완용은 오히려 이 습격사건을 계기로 매국행위에 더욱 전념합니다.

19. 이완용, 일본에 먼저 찾아가 '한일강제병합조약' 체결을 제안하며 대한제국의 모든 통치권한을 일본에 바치다 

그리고 1910년 6월, 일본에서 새로운 통감이 왔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칼에 맞은 상처가 완전히 낫기도 전에 통감부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경술년 1910년 8월 22일, 결국 '한일강제병합조약(韓日强制倂合條約)'을 체결합니다.

일본과 우리나라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치욕적인 조약, '한일강제병합조약'입니다.

한일강제병합조약 제1조는 과연 어떤 내용이 올라가 있을까요?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의 모든 일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대한제국의 모든 통치 권한은 이제 일본이 갖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한일강제병합조약을 가장 먼저 제의한 주범이 바로 이완용입니다.

이완용이 일본 측에 찾아가 먼저 한일강제병합조약을 먼저 제안한 것입니다.

이완용의 적극적인 합방 제안에 훗날 일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 들어온 기분이었다'

이로서 이완용은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매국노로 남게 되었고 일본의 조선 침략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막대한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이렇게 부릅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즉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라는 뜻입니다.

20. 이완용의 매국행위

경술국치 이후 이완용의 매국행위는 다양한 곳에 행해집니다.

1.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일본어를 배우게 했고

2. <이순신전> 같은 위인전을 금서로 지정하며 읽지 말 것을 장려합니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민족의 정신까지 말살하려는 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21. 매국노 이완용, 지금까지도 손가락질받고 있다 

당시 일본은 매국인사들의 공로에 따라서 작위와 돈을 내립니다.

이완용은 백작 작위와 돈 15만 원, 현재 가치로 약 30억 원을 받습니다.

이완용이 가지고 있었던 부동산까지 포함하면 현재 가치 약 600억 원으로 재산은 더 늘어나게 됩니다.

이완용이 가진 부동산의 크기는 여의도의 몇 배나 되는 규모였습니다.

이완용은 1926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1300여 명의 조문객이 참배하는 가운데 이완용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집니다.

'팔아서는 안 될 나라를 팔아서 누려서는 안 될 부귀영화를 누린 자!' 

당시 이완용을 신문사설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대한제국의 사람들은 모두 이완용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친일파의 대명사 이완용은 지금까지 여전히 손가락질받고 있습니다.

이완용은 죽기 직전 까지도 죄를 뉘우치는 기색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 역사에 파렴치한 매국노, 나라를 판 대역죄인으로 역사에 기억될 것입니다.

 

<출처: 벌거벗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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