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 민주주의를 위해 광주 시민이 흘린 피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
1. 10.26 사태로 대통령 박정희의 죽음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다
'광주'는 절대 잊지 말아야 하고 또 잊기 힘든 사건이 있었던 곳입니다.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권력 서열 2위였던 최측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로서는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사망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게 됩니다.
'계엄'이란 전쟁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에 발생하는 긴급 조치로 나라의 행정과 사법을 군대가 맡아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계엄 이후에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 중 하나가 바로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2.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하나회'를 필두로 쿠데타를 일으키다
일단 대통령이 사망하니까 빨리 이 사건을 누군가가 조사하고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합동수사본부가 꾸려지는데 합동수사본부의 장을 맡은 사람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입니다.
당시 군 내부에 '하나회'라는 사조직이 있었습니다.
하나회는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사조직으로 하나회의 우두머리가 전두환이었습니다.
이후 하나회는 소위 '신군부'가 됩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차근차근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결과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신군부는 약간의 무력충돌이 있었던 '12.12 사태'를 일으켜 군 장악에 성공합니다.
3.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으로 다시금 민주주의를 꿈꾸는 '서울의 봄' 시기를 맞이하다
당시 국민들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박정희의 독재가 끝나자 다시금 민주주의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계엄을 해제하고 정상적인 선거를 치러서 민주주의를 복구하자는 열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두 한마음으로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을 외쳤습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서울의봄
국민들은 신군부의 시대가 잠깐 일 거라고 믿었습니다.
혼란한 시국에 신군부가 질서를 잡고 금방 물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4.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다
하지만 국민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신군부는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었는데 신군부는 이 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해서 이를 이용해 권력을 쥐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기 위해 잡은 D-DAY가 바로 1980년 5월 17일이었습니다.
계엄을 확대하기 위한 전두환의 두 가지 계획은 이랬습니다.
첫째, 'K공작계획'을 진행합니다.
주요 신문사, 방송사 등 언론사에 근무하는 100여 명의 언론인을 1:1로 만나서 협박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언론을 통제한 것입니다.
둘째, '충정훈련'을 실시합니다.
5.17일에 전국단위로 계엄을 확대하게 되면 일어날 시민들의 반란이나 저항을 막기 위해서 특수 부대와 군인들을 훈련시킨 것입니다.
즉, 군인들을 적이 아닌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진압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5.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다
드디어 1980년 5월 17일이 되었고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위한 국무회의를 소집합니다.
회의장에는 군인들이 완전히 도열해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안건은 10분 만에 급하게 통과됩니다.
그렇게 1980년 5월 17일, 24를 기하여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이 중지되었고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모든 집회와 시위는 금지됩니다.
또한 언론 보도는 사전 검열되었고 우리나라의 행정부의 기능은 중지되고 계엄군이 모든 것을 집행하게 됩니다.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다시 쿠데타가 왔구나'라며 절망에 빠져있을 때 단 한 도시만이 이에 저항합니다.
바로 '광주'입니다.
광주 시민들이 신군부의 총칼에 끝까지 저항하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되는 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인 것입니다.
6. 1980년 5월 18일, 신군부는 광주 점령을 위한 작전을 수행하다
1980년 5월 18일, 신군부는 광주 점령을 위한 작전을 수행합니다.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된 군인들이 무장하고 들이닥쳐서 학생들을 체포합니다.
평소 같으면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 쫓아버리고 말았을 것을 이 공수부대원들은 일단 한 번 목표물로 찍으면 피곤죽이 되도록 사람을 폭행하고 끝까지 쫓아가서 연행했습니다.
이유를 모른 채,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연행을 당하게 됩니다.
1980년 5월 18일, 하루 동안 연행된 사람만 405명이었습니다.
그중 68명이 외상, 12명이 중태였습니다.
5.18 첫 번째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씨였습니다.
김경철 씨는 길을 가다 공수대원한테 얻어맞게 되었고 청각장애를 가져 말을 못 하니 손짓 발짓을 하는데 그럴수록 더 많이 얻어맞았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다음날인 1980년 5월 19일 사망합니다.
7. 1980년 5월 19일, 착검한 군인들이 시민들을 진압하다
1980년 5월 19일, 광주에서는 전날 보다 더 잔인하게 신군부의 진압작전이 진행됩니다.
신군부에서는 '11 공수여단'을 추가 투입합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곤방에 맞았고 속옷만 입은 채로 길거리에서 기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을 트럭에 집어던진 다음에 싣고 갔는데 그중 많은 이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시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에 총에 대검까지 꽂고 무장한 군인들이 전투에 가까운 끔찍한 폭력으로 시민들의 시위에 응징했습니다.
특히 대검에 의한 피해가 너무 커져서 수많은 이들이 칼에 찔려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적이 아닌 시민들을 진압하는데 총에 대검을 착검한 것입니다.
보통 대검 착검은 전시 상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살상 무기로써의 역할인 것이지 상황 제지를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던 것입니다.
시민을 지켜야 할 장소에 가는 계엄군이 착검을 한 상태로 무자비한 진압을 한 것인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착검한 군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항할 의지를 잃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도구였던 것입니다.
8. 1980년 5월 20일, 실탄 장전을 지시하다
1980년 5월 20일 오후가 되면 시민들은 시내버스, 트럭, 택시 등 200여 대가 줄을 지어서 금남로에서 차량 시위를 통해 계엄군이 점령하고 있는 도청으로 향합니다.
그날 밤에는 이 사실을 제대로 세상에 알리지 않은 방송국이 시민들에 의해서 불타오르게 됩니다.
계속해서 시위가 잦아들지 않자 공수부대의 여단장이 '부대에게 실탄을 지급하라'는 지시까지 하게 됩니다.
민간을 상대로 군인들이 급기야 실탄을 장전한 것인데 이것은 신군부 세력이 시민을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9. 1980년 5월 21일, 시민들에 대한 대규모 집단 발포가 이루어지다
결국은 1980년 5월 21일, 신군부는 시민들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집단 발포가 이루어집니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애국가가 끝남과 동시에 군인들은 집단 발포를 하게 됩니다.
당시 공수부대는 '무릎 쏴' 자세로 횡렬로 나란히 서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시작합니다.
그 자리에서 54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금남로의 빌딩 위로 저격수들이 올라가서 밑에 있는 시민들을 조준 사격까지 했습니다.
목격자에 따르면 헬기가 동원돼서 헬기에서도 총을 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집단 발포를 명령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이 현재까지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했던 공수부대는 발포를 명령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군인들이 너무나 상황이 급박항 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쐈다'
군인들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를 한 것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날, 자기 방어를 주장한 공수부대에서는 죽은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10. 1980년 5월 27일, 신군부는 최종 진압 작전을 실시하다
1980년 5월 27일, 신군부는 본격적으로 최종 진압 작전이 실시됩니다.
0시 0분에 모든 전화가 두절됐고 2시부터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진입하기 시작해서 5시 10분 모든 작전이 종료됩니다.
그날 광주 곳곳에서는 이러한 알림 방송이 들렸습니다.
'잔당들에게 알린다. 많은 폭도들이 투항하여 생명을 보장받았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주저 말고 자수하라. 폭도에게 알린다.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날 보도된 뉴스입니다.
'계엄군은 그동안 광주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전력을 경주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는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악화되는 조짐이 보였다'
언론은 광주민주화운동 세력을 '폭도'라 불렀고 광주는 이후 아주 오랫동안 입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11. 검찰이 신군부 세력에 불기소 처분했으나 헌법소원을 통해 12.12신군부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의 처벌이 가능해지다
이렇게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약 열흘간 이어진 가슴 아픈 참사입니다.
추후 시민단체가 신군부를 내란죄로 처벌해 달라고 고발했는데 검찰이 내린 결론은 이랬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검찰은 신군부세력을 공소권 없음으로 불기소 처리하며 처벌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검찰의 판단에 전국민적인 저항이 있었고 급기야 '신군부를 내란죄로 처벌해 달라는 헌법소원을 청구합니다.
헌법재판소에서 검토한 후 '처벌 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리자 1997년 4월 18일, 대법원 판결이 이를 토대로 내려집니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
5.18 특별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5.18 특별법은 일반법에 의해서 공소시효가 끝난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가능하게 헸습니다.
그 결과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실형과 추징금을 선고하게 됩니다.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자 60년 지기 친구였던 두 사람은 똑같이 내란죄와 뇌물수수죄라는 불명예를 동시에 떠안았습니다.
노태우는 추징금 2,628억 원과 17년형 , 전두환은 2,205억 원의 추징금과 무기징역 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끝내 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얼마 전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12.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풀리지 않았던 진실들 속속 밝혀지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성폭행이 정부의 첫 공식조사로 확인됐습니다.
계엄군의 유혈 진압 작전을 전두환이 승인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건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이 시민들을 상대로 헬기 사격을 한 사실 또한 공식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7년 판결에서 다 해결하지 못했던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행방불명과 사망자가 몇 명인지, 당시 계엄군이 자행했던 성폭력의 진실은 무엇인지 그리고 공수부대의 헬기 사격의 진상 등 앞으로 밝혀져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13. 전일빌딩 탄흔 조사 결과, 국방부는 헬기가 광주 시민을 겨냥하여 사격했음을 인정하다
헬기 사격 문제가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헬기 사격은 절대 군인이 자기 방어용으로 총을 쏠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 발포 명령을 했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일빌딩에 적혀 있는 245라는 숫자는 전일빌딩에 5.18 당시 헬기에서 쏜 총알 자국의 수를 나타내는 것인데 245개면 거의 난사를 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 있었던 고 '조비오 신부'는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최초로 증언한 인물입니다.
당시 신군부 쪽에서 '헬기가 뭔지도 모르는 민간들이 무슨 소리냐'라고 주장하며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헬기 사격이라는 사실이 제기만 됐다가 그냥 묻혀버립니다.
그런데 2016년 전일빌딩을 리모델링하면서 전일빌딩에 남아 있는 탄흔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총탄 흔적은 헬기 발포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을 냈습니다.
국과수는 창틀을 뚫고 지나가거나 스쳐 지나간 총탄이 벽에 박혔다며 탄도를 계산했을 때 공중 정지 상태에서 비행 중인 헬기에서 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습니다.
총알이 날아온 각도를 조사해 보면 총알이 날아온 위치는 건물로부터 대략 50m 떨어진 지점에서, 높이는 28~30m 위에서 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당시 그 일대에는 이것보다 높은 건물은 없었습니다.
전일빌딩 보다 30m 높은 곳에서 비스듬히 사격할 수 있는 방법은 헬기뿐인 것입니다.
2018년 2월, 결국 국방부에서 헬기가 광주 시민을 겨냥하여 사격했음을 인정했습니다.
14. 집단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누구인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또 다른 문제는 1980년 5월 21일 집단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1997년 이후에 발포자에 대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들이 있습니다.
1980년 5월 23일, 2군 사령관이 전두환에게 보여준 문서가 있는데 이 문서는 광주 진압 작전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진압 작전에 대해서 '각하께서 '굿 아이디어'라고 하셨다'라는 메모가 확인됩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여기에 나오는 '각하'는 '전두환'입니다.
따라서 전두환이 적어도 무력 진압에 동의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또 다른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공수부대 사령부에서 일어나는 회의를 참관한 광주 경찰이 공수부대 회의를 참관하고 돌아가서 쓴 서류에 남아 있는 내용입니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돗개 하나는 무장간첩 침투 시 발령되는 최고 단계의 비상경계 태세로 실탄이 지급되고 자위권이 발동되는 상황이 됩니다.
이렇게 두 가지 증거를 통해 광주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지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집단 발포에 대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는데 현재까지 이 두 가지 증거를 찾음으로써 '발포'에 대한 지시가 있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누가 그런 무지막지한 지시를 내렸는지'에 대해서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고 이를 반드시 역사에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15.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 이전에는 누군가 흘린 피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그곳에 있었던 여섯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이 책의 내용 중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음을 당한 고등학생이 죽은 상태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대목입니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 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이전에는 누군가 흘린 피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일일 뿐 아니라 지금의 민주주의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민주주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한 일인 것입니다.
<출처: 알쓸범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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