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열한 살 정은이]를 읽고(책 리뷰, 독후감)/정유정 작가
[열한 살 정은이]는 정유정 작가의 첫 장편 소설입니다. 추측컨대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나 자란 정유정 작가의 자전적 소설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표현할 수 없는 시골아이의 콩트인 것만 같은 소소하지만 나름 치열했던 일상이 열한 살 정은이의 시선으로 맛깔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전라도 사투리를 물씬 느낄 수 있는 투박하지만 정겨운 전라도사투리 대사들은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가끔은 폭소를 터트리게도 합니다.
소설은 1974년 1월 11살이 된 정은이가 목욕탕에서 친구인 승룡이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시절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다른 측면에서 흥미와 궁금증, 호기심을 일으킵니다. 정은이는 찢어지게까지는 아니지만, 6.25 전쟁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궁핍과 가난을 겪습니다. 부모님 두 분이 공무원이지만, 부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이곳저곳 전출을 다니며 수시로 이별을 해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정은의 아빠는 광주에서 지내며 토요일마다 시골집을 찾고, 어머니는 갓 태어난 동생을 포함해 2남 2녀의 올망졸망한 자식들을 홀로 건사하며 사회생활까지 해야 하는 소위 슈퍼맘입니다. 하지만 이런 슈퍼맘인 엄마는 가부장제가 팽배했던 시대에서, 그 공로가 폄하되며 오히려 남편의 감시와 통제하에 살아가지만, 이러한 모습을 어린 정은의 시선에서 바라보며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이해가 도무지 가지 않게,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울컥하게, 때로는 경쾌하게 그려냅니다. 돌아보면 그마저도 다 추억인 것인데, 그 시절을 살아가라고 한다면 선뜻 그러겠다고 할 수 없는, 먹을 것 하나 맘껏 먹을 수 없었지만 사람은 늘 위기 속에 기회를 찾는 존재이고, 어려움을 극복할수록 더욱더 처연해지고 삶의 지혜를 몸소 체험하는 존재이기에 그렇게나 빨리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일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정은이 부모와의 이러저러한 갈등 속에 제2차 성징을 겪으며 가슴에 몽우리가 잡히고, 생리를 시작하는 장면은 나의 사춘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마음과는 달리 몸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자꾸만 세상의 모든 것이 싫고 반항하고 싶은 걷잡을 수 없었던 그때 말입니다. 정은이와 나의 여러 가지 공통점을 찾는 재미 또한 쏠쏠했습니다. 나는 청개구리입니다. 하지 말라면 기를 쓰고 해 대는 그런 아이였고, 그 기질은 지금까지도 퇴화하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있습니다. 어른이 되고도 한 참이 지난 지금도, 기어이 하라는 것은 안 하고, 금지된 장난을 했을 때 느끼는 쾌감처럼 하지 말라는 것을 해대는데, 너무 오래된 습관이기 앞서 그냥 내 유전자에 각인이 된 일종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 사실상 제어는 불가능합니다. 그저 적응하며, 때로 억누르며, 간혹 순응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정은이 말대로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고, 나는 그냥 자란 것이 아니므로 내 마음 내키는 데로만 살 수는 없는 노릇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은 감정에 무디다는 것입니다. 정은이는 언제부턴가 절친인 승룡이가 불편해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자꾸만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승룡이가 보나와 귓속말을 하는 것이 눈엣 가시처럼 거슬리고, 언젠가부터 자신을 피하는 것만 같은 승룡의 태도에 속상하지만 그렇다고 먼저 다가가 말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전근으로 급작스럽게 전학을 가게 됐을 때, 이별을 코 앞에 둔 그 때야 깨닫습니다.
내가 그동안 고민했던 것들의 정체를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승룡이를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그 감정을 정은이는 넘어지고, 깨지고, 먼 길을 돌아가며, 눈물을 수도 없이 흘린 후에야,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야 어렴풋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의 골이 깊은 갈등입니다. 소설을 읽으며 제일 가슴을 후볐던 대사가 있습니다.
나는, 나는... 아빠가 죽어부렀으믄 좋겠어! 진짜로!
차이가 있다면 정은이는 소리를 대서 아빠에게 직접 전했다는 것이고, 나는 속으로만 혼자 지껄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마저의 용기도 없는 오즈의 마법사의 '사자'의 발톱의 때만큼의 용기도 가지지 못한 고집쟁이 아이였습니다. 정은이의 아빠는 너무나 청렴하고 단호해, 조금의 도덕적 결함조차도 수치심을 느끼는 고지식한 공무원이었다면, 나의 아빠는 초등학교만 졸업해 배움에 대한 피해의식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난쟁이 똥자루만 한 키에 찢어진 눈, 불거진 광대뼈로 인해 그야말로 볼품없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결합되어 그것을 가족에 대한 폭력으로 해소했던 평생 운전으로 밥 벌어먹고 살았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은의 아빠 정도라면 나도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에게 아빠는 증오와 공포였고, 그냥 하루빨리 그의 손에서 벗어나야만 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오토바이라는 꼭지를 읽으면서 문득 아빠랑 나랑 둘만의 구례섬진강 기차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기차 안에서 으레 먹었던 달걀과 사이다의 추억, 체첩국 한 사발, 맑고 반짝였던 섬진강, 그리고 멀건 짜장면이 머릿속에 풍선처럼 부풀어졌다 터지며, 그래 나도 아빠가 좋았던 적이 있었지! 하고 탄식하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습니다. 지금은 늙어 키가 더 줄어들어 나보다 더 작은 힘없는 아빠.
정은이처럼 나 또한 장녀였지만, 남동생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정은이가 동생들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장녀증후군, 장녀콤플렉스라고 불리는 증상이 있을 만큼 장녀들은 특유의 책임감의 굴레를 손수 뒤집어쓰고 있는 듯합니다. 지긋지긋하지만,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 옭아매는 올무와도 같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진하고 진득한 그 피를 나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운명이기에 때론 힘이 되기도 때론 평생의 골칫덩이이기도 한 그들을 안고 갈 수 있는 것만 같습니다. 채변봉투의 똥을 찍어서 먹어보고, 소풍에 기어이 쫓아와 바지에 똥을 싸대는 정현이가 5.18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군부의 총부리에 가슴이 겨눠진 고1 정은이를 구하기 위해 누나의 학생증을 찾아와 군인에게 누나는 정말 고등학생이고 데모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의젓한 남동생이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하니까요.
또한 정은이의 숙적으로 시작해, 6학년이 되어서는 유일한 친구가 된 지지와 정은의 이야기 또한 가슴 뭉클하게 합니다. 부잣집 딸내미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것만 같은 지지가 간질로 추측되는 질병을 남몰래 앓고 있었고, 그 모습을 처음으로 본 정은은 충격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지지를 피하게 되는데, 집안 사정으로 지지가 전학을 가게 되자 그때서야 작은 용기를 내서 지지에게 말을 걸었던 정은에게 지지는 정은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금장을 두른 빨간 표지로 감싸진 [작은 아씨들]이라는 책을 선물로 남기고 떠납니다.
아빠와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채로 고1이 된 정은에게 1980년 5월 어느 날, 반란군에 의해 광주 전체가 총칼아래에 놓였던 5.18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부모님의 걱정에도 광주에 남아있던 정은, 정현남매를 구하러 흡사 전쟁과도 같았던 광주의 자취방까지 목숨을 걸고 찾아와 준 아빠를 보며, '아빠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는구나'하고 느낍니다. 그제야 용기를 내 아빠에게 그동안 잘못했다고, 나는 아빠 딸이 맞지? 하며 확인합니다. 아빠에게 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스러운 딸이었고, 다만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생긴 오해가 켜켜이 쌓인 결과였던 것임을 마음 깊숙이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위험한 길을 돌고 또 돌아 우리를 데리러 달려온 아빠에게 안겨, 무서웠으나 가장 소중한 것을 되찾게 해 준 지난 시간들을 꿈결처럼 더듬었다. 마치 폭풍 속을 내달리는 것과 같았던 내 어린 시절, 만약 내게 나를 사량 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 엄청난 회오리들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냥 자란 것이 아니었다. 내가 휘청거릴 때에도, 넘어지려 할 때에도 또 무서운 절망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도록 끈질기게 나를 붙잡아 세어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힘,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어느덧 붉은 햇살이 차창가에 번져오는 그 새벽에 나는 이제 폭풍을 이겨내고 나의 태양을 향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보았다.
성인이 된 정은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그녀가 향했던 태양이 그녀가 원했던 그것이었을지, 만약 그랬다면 그곳에 잘 도착해 그것을 향해 화살을 명중시켰을지, 그래서 지금 행복하고 만족스러울지, 아니면 다른 태양을 향해 아직도 달리고 있을지. 지금 이 순간, 고된 어린 시절을 잘 이겨내고 자신만의 거친 날갯짓으로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을 다른 이름을 가진 수많은 정은이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것은 어떨까요?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소년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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