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책 리뷰/ 독후감)/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이 책의 제목만큼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소설에서 제목이 지닌 힘을 말할 때 바로 이 책이 언급될 만큼 소설의 제목은 굉장했고, 솔직히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림짐작해 볼 수 있을 만큼 제목이 다 한 책입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명문 펜시예비학교에서 5과목 중 4과목을 낙제하여 퇴학 처분이 내려진 16살, 이제 막 17살에 접어드는 홀든 콜필드가 룸메인 스트레들레이터와의 다툼 후 기숙사를 나와 집으로 가기로 한 날까지 버티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과정을 담은 기괴한 모험물입니다. 세계 2차 대전직후 전 세계가 전쟁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는 시점에 혼란한 사회상이 콜필드의 1인칭 시점으로 어휘와 맞춤법을 깨부수다시피 한 문체에 어지럽게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반항으로 점철된 콜필드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본다고 하더라도 문장들은 몹시 일차원적이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면 읽는 내내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책을 끝까지 읽어 말아했던 나라는 한 독자만큼은 그 의도에 완벽하고 철저히 관통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콜필드는 세상에 모든 형태의 가식을 거부하는 아이, 아니 청소년입니다. 하지만 그가 기숙사를 떠나 펜시 예비학교의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그 며칠간의 여정은 가식 그 자체로 느껴집니다. 미성년이라 까일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술을 주문하고, 거부당하면 또 별 반항 없이-물론 속으로 백 만큼 투덜대기는 하지만- 콜라를 먹습니다. 호텔방을 잡기 위해, 호텔방에서 몇 시간 매춘여성과의 만남을 위해, 이동하며 택시비로, 공연티켓값으로, 선물을 사기 위해, 급하기 긁어모은 돈을 탕진합니다. 심지어 단지 꿀꿀하다는 이유만으로 동전으로 물수제비를 뜨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도 그리워한 동생 피비의 방에 몰래 들어가 피비가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마련해 놓은 용돈을 빌려서 나옵니다. 물론 그 돈은 다 쓰지 않았고, 다시 일부를 피비에게 돌려주려고 하지만 피비의 강력한 거부로 다시금 콜필드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갑니다. 다시금 피비가 다 낡아빠진 회전목마를 2번 타기 위한 비용으로 조금 지불되지만...
콜필드는 영어에서만큼은 낙제를 면해 나름 자부심이 있지만, 맞춤법이나 어휘력, '이' 나 '우리'의 과다사용, 접속사의 오남용 등 독자로 하여금 정신분열을 유도하며 이야기를 이끕니다. 이것 또한 작가의 의도일까요? 이런 혼란과 분열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에 더 큰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무기가 불을 뿜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어나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시절 '구두 표현' 수업시간에 그랬듯 핵심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 벗어났어"라고 질책하고 야유합니다. 그 핵심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지도 않은 다수에 의해서.
형식은 비슷한 앞서 읽어 본 [자기 앞의 생]에서의 모모와 콜필드에게는 하나의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콜필드를 더 미치게 하는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모모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해 주었던 로자아줌마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준 하밀할아버지, 해와 같은 롤라아줌마와 아프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카츠선생님, 하다못해 우산 아르튀르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들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콜필드에게 어른은 동생의 죽음 이후 의욕을 잃은 어머니와 늘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 미스터 스펜서와 미스터 아톨리니 같은 조금은 의지가 되는 선생님뿐입니다. 그나마도 미스터 안톨리니는 끔찍한 기억을 줍니다. 대신 콜필드에게는 늘 자랑스러운 형 D.B 와 백혈병으로 사망한 착하고 똑똑한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동생 알리 그리고 사랑스럽고 좋은 많이 어린 동생 피비, 그리고 내리는 비를 조금은 막아줄 빨간 사냥모자뿐입니다. 그래서인지 콜필드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집안도 괜찮아 펜시 예비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 모든 어린 꼬마들이 호밀밭이나 그런 커다란 밭에서 어떤 놀이를 하는 모습을 계속 그려봐. 그런데 나는 어떤 미친 절벽 가장자리에 서 있어. 만일 꼬마들이 절벽을 넘어가려 하면 내가 모두 붙잡아야 해-그러니까 꼬마들이 어디로 가는지 보지도 않고 마구 달리면 내가 어딘가에서 나가 꼬마를 붙잡는 거야. 그게 내가 온종일 하는 일이야. 나는 그냥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그런 노릇만 하는 거지. 나도 그게 미쳤다는 거 알아. 하지만 그게 내가 진짜로 되고 싶은 유일한 거애. 나도 그게 미쳤다는 거 알아
그럼에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은 콜필드는 호밀밭의 가장자리, 그 절벽에서 마음껏 아이들이 뛰놀다 절벽아래로 뛰어내리는 일이 없도록 붙잡아주는 파수꾼을 꿈꿉니다. 보고 싶고 좋아하는 여동생 피비의 부탁으로 집을 떠나 귀머거리, 벙어리인 것처럼 살며 가식적인 인간들과의 교류를 철저히 거부하고자 한 바람을 접습니다. 죽은 동생 알리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 만나고 그와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 콜필드처럼 아무 이유 없이, 그러고 싶어서, 화가 나서, 빌어먹을 엉덩이에 가시가 박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서, 우아(콜필드가 잘 쓰는 말), 맥없이 방황하고 떠돌고 휩쓸리고 추위에 머리칼에 고드름이 열려도, 객기 있기 꽥 소리 한번 내는 용기를 인생에 한 번은 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또 다른 호밀밭의 파수꾼인 방황하고 반항하고 거부하다 절벽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붙잡아줄 가족이 있는 집이 있다면. 적어도, 밀집으로 된 파수꾼이더라도. 콜필드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너무도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자기앞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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