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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 해가 지지 않는 최초의 제국(2) 비극의 시작 근친혼과 가문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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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 해가 지지 않는 최초의 제국(2) 비극의 시작 근친혼과 가문의 몰락

14. 합스부르크 가문 비극의 시작, '근친혼'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원래 '오스트리아'였는데, 새롭게 얻은 스페인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카를 5세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동시에 다스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숙적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의 유력 제후들과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맺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협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스트리아든 스페인이든 왕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각각 통치
합스부르크 가문,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각각 통치

그래서 카를 5세는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내의 자기 영토를 아들인 '필리페 2세'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그 일대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각각 독립적으로 통치하게 됐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가문의 결속을 공고히 해야만 했습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그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혈통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 바로 자신들끼리 결혼을 해서 혈통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근친혼'이었던 것입니다.

15. 펠리페 2세, 네 번의 결혼 중 두 번이 근친혼이었다 

이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가문들과 교류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의 경우에는 프랑스를 사이에 두고 다른 유럽 가문들과의 교류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은 가톨릭을 철저하게 신봉해 '이교도'들 특히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와의 결혼을 금지했기 때문에 배우자 선택의 폭이 더 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을 물려받은 펠리페 2세 때부터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근친혼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펠리페 2세는 총 네 번의 결혼을 했는데 그중에서 2번이 근친혼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의 부인들
펠리페 2세의 부인들

펠리페 2세의 첫 번째 결혼 상대는 사촌지간이었던 포르투갈의 공주 '마누엘라'였는데, 그녀는 결혼 2년 만에 아이를 출산하다가 죽게 됩니다.

펠리페 2세는 이후 2번 더 결혼을 하지만 자녀를 얻는 데 실패합니다.

세 번째 아내는 프랑스 공주로 숙적 프랑스 왕가와 정략결혼까지 했지만 후사를 얻는데 실패하자, 네 번째로 그래서 또다시 근친혼을 택하게 됩니다.

네 번째 부인 '안나'는 작은아버지와 결혼한 여동생 '마리아'의 딸 즉, 펠리페 2세에게는 '조카'였습니다.

결국 펠리페 2세는 근친혼으로 낳은 조카와 또다시 근친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펠리페 2세는 이미 41살이었고, 조카인 안나는 이제 막 20살이었습니다.

 

펠리페 2세의 부인 중 두 번째 부인 메리는 '피의 메리'라고 널리 알려진 영국 여왕입니다.

펠리페 2세와 메리 여왕의 부부 생활에 재미있는 설이 있습니다.

메리 여왕에게는 몸에서 심한 악취가 났었는데 펠리페 2세는 입에서 심한 악취가 나서 여름에는 파리가 꼬일 정도로 악취가 났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악취 때문에 대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펠리페 2세는 메리 여왕이 죽은 후에 심지어 죽은 아내의 여동생에게 청혼을 했는데 그녀는 바로 대영제국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였습니다.

만약, 펠리페 2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을 했다면 유럽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근친혼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때부터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저주라고 할 만한 비극이 연달아 일어나게 됩니다.

16.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에 발생한 저주, '돈 카를로스'

그중에서 예술 작품으로 형성화되어서 후대에까지 비극의 주인공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돈 카를로스(Don Carlos)
돈 카를로스(Don Carlos)

이 인물은 펠리페 2세와 사촌지간이었던 첫 번째 아내 마누엘라 사이에서 태어난 '돈 카를로스'라는 인물입니다.

돈 카를로스
돈 카를로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와 '실러'의 희곡인 <돈 카를로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입니다.

사실 돈 카를로스는 친모인 마누엘라의 죽음과 맞바꾼 아들이었지만,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돈 카를로스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주걱턱과 튀어나온 아랫입술 이외에도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당시 스페인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돈 카를로스의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보다 짧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는데 심지어 7살 아이의 지능을 가졌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돈 카를로스는 어릴 때 산토끼를 잡아 태워 죽이거나 마구간에 있는 말의 눈을 멀게 하는 등 동물 학대를 일삼기도 했으며 심지어 신발 장인에게 부츠를 먹게 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며 심한 폭력성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X염색체의 취약 부위로 인해 지적 장애, 발달 장애 등 정신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유전적인 질환인 취약 X 증후군(Fragile X Syndrome)에 걸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17. 펠리페 3세, 왕권이 불안해지자 다시 근친혼을 선택하다 

펠리페 2세의 3명의 아내가 죽고 외동아들인 '돈 카를로스'도 죽은 지 10년 후에 네 번째 부인에게서 드디어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가 바로  '펠리페 3세'입니다.

하지만 펠리페 3세는 아버지 펠리페 2세처럼 막강한 왕권을 가지지 못했고, 정치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하에게 권력을 일임하고 스페인 통치에 소홀했습니다.

왕권이 불안해지자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다시 근친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가계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 가계도

펠리페 3세의 결혼 상대는 작은할아버지였던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 '마르가리타'로, 두 사람은 육촌 지간이었습니다.

18.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펠리페 4세와 그녀의 딸 마르가리타, 정략결혼을 하다 

펠리페 4세
펠리페 4세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낳은 자식이 '펠리페 4세'입니다.

펠리페 4세 때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은 더욱 정략적으로 변해갑니다.

오랫동안 숙적이었던 프랑스가 부르봉 가문의 통치로 절대왕정을 설립하며 국력이 막강해졌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 펠리페 4세는 1615년 3살의 나이에 프랑스 왕가의 공주 '엘리자베트'와 정략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펠리페 4세 가계도
펠리페 4세 가계도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 마리아 테레사는 훗날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펠리페 4세는 첫 번째 아내가 죽자 곧바로 새 아내를 맞았는데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로 시집간 여동생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29살 차이의 '마리아나'였습니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근친혼을 해서라도 가문의 핏줄이 조상들이 힘들게 얻은 영토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펠리페 4세와 조카인 마리아나 사이에서는 딸과 두 아들은 태어났지만 모두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그런 가운데 이 둘에게 희망이 되는 딸이 태어납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마르가리타 테레사

1651년에 태어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입니다.

마르가리타공주는 펠리페 4세가 너무나 예뻐하고 애지중지했던 딸이었고, 펠리페 4세는 그녀를 늘 '나의 기쁨'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왕손이 귀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펠리페 4세가 마르가리타공주의 삼촌뻘인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1세' 황제와 일찌감치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펠리페 4세가 만약 아들을 낳지 못하더라도 사위이자 같은 가문인 레오폴트 1세가 스페인 왕조를 이으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5살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5살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8살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8살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15살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15살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첫 번째 그림은 5살 무렵, 두 번째 그림은 8살 무렵 그리고 세 번째 그림은 펠리페 4세가 죽은 그 해의 15살 시절 상복을 입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마르가리타 공주가 커가는 모습을 초상화로 그렸는데 이는 정혼자인 레오폴트 1세에게 그녀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그림에 공주의 손에 들린 것은 레오폴트 1세가 보낸 모피로 레오폴트 1세가 보낸 선물을 잘 받았는지 확인시켜 주고자 초상화를 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듯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얼굴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장하면서 점점 턱이 자라나고 앞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형적인 턱모양인 일명 '합스부르크 턱'이라고 불리는 주걱턱의 모습이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 근친혼과 합스부르크 턱(주걱턱)과의 관계를 연구하다 

2019년에 'Annals of Hunan Biology'라는 일명 '인간 생물학 연대기'라는 과학 학술지에 '합스부르크 턱과 근친혼과의 관계'가 게재된 바 있습니다.

인간 생물학 연대기( Annals of Hunan Biology)
인간 생물학 연대기( Annals of Hunan Biology)
인간 생물학 연대기( Annals of Hunan Biology)
인간 생물학 연대기( Annals of Hunan Biology)

'Is the "Habsburg jaw" related to inbreeding?'("합스부르크 턱"은 근친 교배와 관련이 있는가?)

이 학술지에서는 20세대에 걸쳐서 얼굴 변형의 정도와 근친혼의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근친혼을 하면 유전자를 공유하는 비율이 높아져서 부모와 같은 유전자를 계승하는 일이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즉 근친혼을 할수록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일명 합스부르크 턱이 나타날 확률이 훨씬 더 커진다는 사실이 밝혀진 연구인 것입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발표된 또 다른 자료들을 보면 펠리페 2세는 부정교합이 심각해서 '서류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부정교합으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던 펠리페 2세가 자신의 의사가 신하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자 결국 왕가 최초로 서류 결재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20. 합스부르크 가문, 외모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다

하지만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상화를 그렸던 화가들은 그들의 턱을 가능하면 부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벨라스케스
벨라스케스

특히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화를 그린 17세기 당대 최고의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는 공주의 턱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펠리페 4세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초상화를 그릴 때 주변 인물을 활용했습니다.

&#39;벨라스케스&#39;의 &lt;시녀들&gt;
'벨라스케스'의&nbsp; <시녀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작품인데 마르가리타 테레사가 돋보일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시녀들을 배치했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인물이 오른쪽 하단에 위치한 '왜소증' 여성입니다.

왜소증 신하
왜소증 신하

특히 펠리페 4세 때의 그림에서 왜소증 신하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왜소증 신하를 활용하여 화려하고 귀한  왕실 사람들과 대비 효과를 노린 왕실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마르가리타
오스트리아 마르가리타
오스트리아 마리아나
오스트리아 마리아나

이외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모 콤플렉스를 숨기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합스부르크 가문의 거의 모든 초상화에 목 부분이 풍성한 옷깃이 등장하는데 특히 여성의 경우 머리나 옷깃으로 이목을 끌어와 턱이나 입 주변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21.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와 레오폴트 1세의 결혼식, 전 유럽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마르게리타 공주는 15살이 되던 해에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결혼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 결혼식은 홍보물까지 만들어지며 대대적으로 발표되고 유럽 전역에 널리 소식을 알립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결혼식 홍보물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결혼식 홍보물

'마르가리타 테레사: 스페인의 아이, 스페인 가톨릭 국왕 펠리페 4세의 딸 우리가 원하는 고귀한 사람이자 왕의 마음에도 들 것입니다. 기도를 받고 황제의 왕좌 옆에 앉아 결실을 맺는 통치를 하십시오'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결혼식 홍보 간행물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결혼식 홍보 간행물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결혼식 홍보 간행물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결혼식 홍보 간행물

15살의 스페인공주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44살의 레오폴트 1세의 결혼식은 당시  유럽의 어마어마한 큰 이벤트였습니다.

22.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21살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다

하지만 합스부르크가 의 시련은 또다시 시작됩니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몸이 허약했지만 가문과 전 유럽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결혼 이후 계속해서 임신을 시도해 21살이 될 때까지 총 4번의 임신을 했지만, 그중 두 번의 유산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 결국 21살에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2009년과 2018년 각각 스페인과 미국의 대학 연구팀에서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과 이들의 수명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를 연구했고, 그 결과 근친혼의 횟수가 빈번할수록 문제가 되는 유전자가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래서 근친혼으로 태어난 34명의 아이들 중에 약 30% 정도는 생후 1년 안에 죽고, 50%가 10살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져 있습니다.

10. 병약한 카를로스 2세,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위를 잇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아들을 낳는데 실패하다

카를로스 2세
카를로스 2세

하지만 이때 대가 끊길 위험에서 벗어나게 만들 경사스러운 소식이 들리게 됩니다.

펠리페 4세와 조카 마리아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카를로스 2세'입니다.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났을 때 스페인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스페인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카를로스 2세 탄생 관련 기사
카를로스 2세 탄생 관련 기사

'여왕께서 11월 6일 일요일 오후 12시 30분에 큰 머리,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약간 통통한 얼굴을 가진 아름다운 왕자님을 낳으셨습니다'

<1661년 11월 16일 '기가제타' 기사>

기사에서는 카를로스 2세를 건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과연 기사의 내용은 진실이었을까요?

여러 기사를 살펴보면 왕자 카를로스 2세는 여러 가지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카를로스 2세는 3살 때까지 두개골의 상태가 닫히지 않은 상태로 있었고, 등까지 굽은 구루병을 앓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6살 때까지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고, 9살 때까지 제대로 말도 못 했으며 읽고 쓰는 것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국의 경우 카를로스 2세가 언제 죽을지에 대한 내기까지 했다고 하며, 이렇듯 카를로스 2세의 건강이 전 유럽의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펠리페 4세는 죽기 전에 병약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수가 없어 아내 마리아나에게 섭정을 부탁했고 카를로스 2세는 19살이 되던 해에서야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왕은 1679년 11월 7일, 19세가 되던 해에 즉위했습니다. 그는 평균 키보다 작고, 약간 절름발이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걷는 습관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운동하는 법을 모르고 과학이나 문학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없으며 읽고 쓰는 것도 거의 못합니다. 그의 얼굴은 매우 길고 좁고 가늘며 불균형한 이목구비가 기괴한 생김새를 형성합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카를로스 2세는 왕으로 즉위 이후에도 여전히 병을 앓고 있는 병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은 여전히 유럽에서 강국이었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야말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래서 즉위한 해에 카를로스 2세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조카인 '마리아 루이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마리아 루이사가 스페인에 왔을 때 카를로스 2세는 마리아 루이사를 보자마자 첫눈에 사랑에 빠져 너무나 좋은 나머지 사절단보다도 먼저 나가 그녀를 마중 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마리아 루이사가 변덕스러운 성격이어서 소리를 지르거나 '숨을 쉬지 않을 거라'는 등의 협박을 해,  카를로스 2세가 감당하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는 계속해서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후사 없이 마리아 루이사는 결혼생활 10년 만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후 카를로스 2세는 아내의 죽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두 번째 결혼을 준비합니다.

마리아 아나
마리아 아나

바로 '마리아 아나'라고 하는 오스트리아 귀족의 딸이었습니다.

레오폴트 1세의 가계도
레오폴트 1세의 가계도

그녀의 언니는 마리가리타 공주가 죽은 후에 레오폴트 1세와 재혼한 왕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내 마리아 아나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23번이나 임신했던 다산의 이력이 있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몸이 약한 카를로스 2세에게 대를 잇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었기 때문에 배우자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다산 DNA였던 것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카를로스 2세와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23. 카를로스 2세,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악마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고 퇴마 의식을 받다

카를로스 2세는 자신의 외모뿐 아니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악마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카를로스 2세는 이 저주를 끊어내기 위해서 퇴마 의식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는 항상 목에 작은 자루를 걸고 다녔는데 그 안에는 발톱, 머리카락, 소금 등이 들어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소문에 따르면 카를로스 2세가 여성 시체와 사랑을 나누도록 강요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의 높은 제단에 올라가 여성 시체와 관계를 나누는 것이 엑소시즘이었다고 하며, 게다가 머리 위에 비둘기 시체를 올려놓는다거나 동물 내장을 먹는 것 등의 처방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임신은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아이를 갖기는커녕 카를로스 2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특사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카를로스 2세의 건강에 대해서 적혀 있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카를로스 2세의 건강상태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먹는 모든 것을 통째로 삼킵니다. 왜냐하면 아래턱이 너무 튀어나와서 위아래 치아가 맞부딪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위장이 약해서 먹은 걸 다 소화하지 못하고 모두 게워 내거나 배설합니다'

24. 카를로스 2세, 근친혼의 유전적 결함으로 끝내 후사 없이 사망하다

카를로스 2세는 발병과 회복을 반복하다 결국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고, 38살에 결국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악마에 들렸을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왕이지만 이례적으로 부검을 실시합니다.

그 결과 그의 심장은 후추 알갱이 크기로 작아졌고, 내장은 부패되어 있었으며, 게다가 신장에는 3개의 큰 돌이 있었고 고환이 석탄처럼 검게 변해서 1개만이 남아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카를로스 2세의 병이 악마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겨졌지만, 오늘날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마도 성 장애를 앓았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후대 학자들은 이것이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결함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5. 합스부르크 가문,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며 스페인 지배의 막을 내리다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온 유럽의 초미의 관심사는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있었습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향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가문 사이의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는 주변국가와 연합하여 약 10여 년간 프랑스와 왕위 계승전쟁을 벌이지만 스페인 왕위는 끝내 프랑스 부르봉 왕가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이로서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26.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 가문 유일의 여성 통치자로 추앙받다

그렇다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떻게 됐을까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약 200년간 더 존속합니다.

마리아 테리지아
마리아 테리지아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상 최초로 왕위에 오른 여성이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테레지'이며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국모라고 할 정도로 추앙받는 인물이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로서 오스트리아에서 사랑받는 인물입니다.

프란츠 1세
프란츠 1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근친혼이나 정략결혼이 아닌 진심으로 사랑해 그녀가 직접 선택한 로트링겐 가문의 공작 프란츠 1세와 결혼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저주처럼 내려왔던 근친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27.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다양한 민족을 폐쇄적으로 다스린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고 전쟁의 패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나폴레옹&#44; 신성로마제국 점령&#44; 해제
나폴레옹, 신성로마제국 점령, 해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쇄락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nbsp; 쇄락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후 1806년 나폴레옹이 신성로마제국을 점령하고 해체시킬 때까지 황제의 자리를 지키지만 19세기가 지나면서 전쟁의 패배와 민족 갈등으로 점점 국력이 쇠약해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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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지 못하고 거대한 제국을 폐쇄적으로 운영한 결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슬라브 민족주의자에 의해서 암살당하게 되고 이것이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 &#39;카를 1세&#39;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며 전쟁의 책임을 떠안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되면서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28. 현재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합스부르크 가문 후손들

전 유럽 의회 의원 '카를 폰 합스부르크'
카레이서 '페르디난트 즈보니미르'
모델 &#39;엘레오노레&#39;
모델 '엘레오노레'

하지만 현재 후손들은 유럽 곳곳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특히 근친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어떤 수준으로 욕망이 발전해 가고 어떻게 이 욕망이 왜곡되어 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욕망의 결과로 나타난 역사적인 사실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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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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