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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1) 시작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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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1) 시작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기까지

1.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황금기를 이끈 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은 중세와 근대를 거쳐 물 약 600여 년간 거대한 제국을 다스린 가문입니다.

이들은 한때 전 유럽영토의 약 1/3에 해당하는 지역을 지배했었던 왕가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때는 오스트리아가 유럽에서 가장 힘이 강했던 나라였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합스부르크가문이 다스리던 시기입니다.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것 또한 합스부르크가문의 작품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항해시대 때 강력했던 스페인도 다스렸었는데, 이때가 스페인의 황금기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포함해 유럽을 600여 년 동안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작부터 흥망성쇠에 대해서 다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신성로마제국의 변방에 말단 귀족 영주의 위치에 있었던 합스부르크 가문

스위스 '아르가우' 주는 유럽 최강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역사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0~11세기 경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아르가우
신성로마제국 아르가우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아르가우' 주는 보는 바와 같이 아주 작은 지역입니다.

아르가우를 차지하고 있던 가문들
아르가우를 차지하고 있던 가문들

심지어 당시 아르가우는 여러 가문이 땅을 나눠 가지고 있어서 이 안에서도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아주 작디작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땅이 어디에 속했는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신성로마제국'입니다.

신성로마제국(962~1806)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생긴 제국으로 과거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신성한 왕권을 천명하며 세워진 제국입니다.

지금의 독일 일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제후들의 영토로 이루어진 한때 지금의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일부,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등을 포함 국가 연합체로 거대한 국가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는 여러 공국과 황제들로부터 직접 봉토를 하사 받은 제후들 그리고 제후들 아래 수많은 영주들이 봉건적인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때 변방에 말단 귀족 영주의 위치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3.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장비밀 3가지 

신성로마제국에 보잘것없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떻게 유럽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약 200여 년에 걸친 합스부르크 가문의 몇 가지 성장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르가우의 지형'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알프스 산악 지대와 평원이 교차하던 곳에 자리잡은 합스부르크 가문
알프스 산악 지대와 평원이 교차하던 곳에 자리잡은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이 터를 잡았던 곳은 알프스 산악 지대와 평원이 교차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상인들에게 '통행료'를 걷어서 수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합스부르크 가문은 점차 세력을 넓히고 주변의 땅까지 흡수하게 됩니다.

신성로마제국 제후들의 신분
신성로마제국 제후들의 신분

그 결과 12세기에는 나름 권위를 인정받는 '백작'의 작위까지 얻게 되며 신분 상승을 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정치적 감각'이 한몫을 합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연방 체제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유력한 가문의 몇몇 제후들과 높은 지위의 성직자들이 투표를 해서 그들의 왕을 선출했는데, 이에 교황의 대관식을 거치면서 교황의 승인이 더해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이렇게 뽑힌 황제는 제후들의 견제가 워낙 강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자기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에 늘 맞서 싸워야 했고 그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합스부르크 가문은 12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정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황제의 편에 서서  정적들에 맞았고, 1211년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또다시 위험에 처했을 때 군 자금을 대주기도 하고 황제의 가문과 사돈을 맺으면서 권력에 가까워지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엄청난 '운'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큰 전환점이 되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문으로 선출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루돌프 1세'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인물은 '루돌프 백작'이라고 불렸던 '루돌프 1세'(1218~1291)입니다. 1218~1291)입니다.

루돌프 1세의 이 출세 뒤에는 사실 굉장한 '운'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돌프 1세가 황제가 되기 전에 약 20여 년 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소위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아 왕권이 불안정하던  대공위 시대(1254~1273)라고 합니다.

당시 황제를 선출할 수 있던 유력 가문들은 서로 견제하느라고 누구에게 권력을 줄지 눈치싸움만 해댔습니다.

또 황제 선출에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교회 역시 유력 가문들의 견제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습니다.

이런 시기가 길어지고 또 황제 없는 신성로마제국을 주변 국가들이 잇따라 위협을 하자 결국 황제를 선출하게 됩니다.

대신 어느 정도 정통성은 있지만 제후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할 만한 그런 가문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것입니다.

중세 유럽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약 30세였는데 왕으로 즉위할 당시 루돌프 1세의 나이는 55세였고, 때문에 당시 제후들은 루돌프 1세를 '권력에 욕심 없는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거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루돌프 1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루돌프 1세는 힘없는 가문 출신인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세력들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후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해 버렸습니다.

당시 영주들끼리는 서로 혼인을 맺고 한 가문의 대가 끊길 경우 그 땅을 대신 물려받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르가우 일대의 가문들도 서로 혼인관계를 맺고 경쟁관계 가문의 대가 끊기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3세기 초, 합스부르크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은 '체링겐 가문'이 아들을 낳지 못해서 대가 끊기게 되고 상속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체링겐 가문의 땅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물려받게 됩니다.

그리고 13세기 중반에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혼인을 맺은 또 다른 가문인 '키부르크 가문'마저 대가 끊겨 이 가문의 땅까지 물려받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가 끊긴 경쟁 가문의 땅을 모두 차지하게 되면서 그 결과 프랑스 동부에서 오스트리아 서쪽의 국경일대 그리고 스위스 북부에 이르는 넓은 땅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르가우 주의 말단 귀족이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진 백작가문으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13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빨간색)
13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빨간색)

그 결과 이전까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땅이 아르가우 일대에 한정되어 있었던데 반해,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지금의 오스트리아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고 이후 자신의 아들에게 이 땅을 하사합니다.

그리고 루돌프 1세는 아들에게 황제 바로 아래인 '공작' 작위를 수여하였고,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을 오스트리아 가문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는 스위스 아르가우에서 오스트리아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약 600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다스리게 됩니다.

 

4. 합스부르크 가문, 엄청난 특권을 가진 7선제후에서 배제되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후 무려 130년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권력 중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 시작은 1291년 루돌프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부터입니다.

경쟁가문들의 견제 끝에 루돌프 1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1255~1308)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은 되지만 상속문제로 앙심을 품었던 조카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자리는 지금의 체코에 해당하는 보헤미아 지역을 다스리는 룩셈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위기를 겪는 틈을 타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여러 개로 분열되고 맙니다.

그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세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1356년,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선출하는 7개 지역의 선제후들에게 엄청난 권한을 보장하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으뜸가는 지위로 황제의 투표권을 가진 제후들입니다.

선제후들은 황제가 소환해도 이에 응하지 않을 권리, 자신의 영지 내에서 광산을 개발하거나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등 이들이 자신의 땅을 독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는 등 엄청난 특권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선제후에게 반란을 일으키면 대역죄로 처벌할 수 있는 권리까지 허락합니다.

그런데 이 선제후의 특권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당시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지만 7선제후에 들지 못하고 엄청난 특권에서 배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에 배신감뿐만 아니라 굉장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5.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을 오스트리아 '공작'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작'으로 인정한다는 과거 황제의 서신을 '위조'하다

그러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묘수를 생각해 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오스트리아 '공작'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작'으로 인정한다는 과거 황제의 서신을 찾아내서 신성로마제국에 제출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서신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공작의 지위를 가지며 선제후들과 거의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까지 했습니다.

이 서신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 오스트리아 공작이 공식적인 회의에 참석할 경우, 그는 팔츠 대공작의 지위를 가지며 집회와 회의장 입장 시 황제의 오른쪽 선제후에 이어 첫 번째 자리에 위치한다'

서신에 나오는 오스트리아 공작은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공작의 지위를 가지며 선제후들과 거의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법정 출두 거부권, 재산 보장권, 영토 세습에 관한 법 등 합스부르크 가문에 주어진 권리가 이 서신에는 16개나 더 적혀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이 서신은 법적 문서로 효력을 갖는 금 인장과 함께 1156년 9월 17일에 작성되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감쪽같이 위조된 것이었습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이 서신의 위조사실이 밝혀졌지만 과학적인 증거는 최근에 발견되었습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금 인장을 X선으로 촬영해 봤더니 미세한 균열과 가공된 흔적이 발견된 것입니다.

원본 문서에서 떼어 위조문서에 붙여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이것이 위조문서라는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 위조문서를 근거로 자신들이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심장이자 방패로 인정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들 못지않은 유력한 가문임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신들도 그들만큼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6. 합스부르크 가문, 오스트리아 '빈'을 유서 깊은 문화도시로 만들어서 가문의 자긍심을 드높이다

위조된 이 서신은 위기였던 합스부르크 가문 내의 결속을 다지고 다시 한번 가문의 자긍심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를 계시로 위조문서에 언급한 것처럼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공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 빈을 유서 깊은 문화도시로 만들어서 이를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빈의 심장부에 자리 잡은 랜드마크 슈테판 대성당을 화려하게 증축했습니다.

그리고 1365년,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빈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양한 예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양성하고 후원했습니다.

그 결과, 파리와 피렌체와 더불어서 빈 역시 다양한 예술가들이 거쳐가는 예술가의 메카가 되었던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특히 음악가들에게 많은 후원을 했으며 오스트리아 빈을 음악도시로 키웠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후원을 받은 음악가들 중에는  하이든, 베토벤, 모차르트가 대표적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서신 위조와 같은 어두운 면도 있지만 문화 예술의 발전에 일조를 많이 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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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합스부르크 가문, 약 130년 만에 다시 황제 가문이 되다

또한 대공국을 위한 기틀을 다지기 위해 노력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만 튀르크가 유럽에 침략했을 때 이에 맞서 싸우면서 기독교진영의 최전선에서  방어막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또한 여러 개로 갈라진 영지들을 재통합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또다시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합스부르크 가문은 재도약을 위한 또 다른 카드를 준비합니다.

바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과의 결혼을 추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브레히트 2세
알브레히트 2세

그리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전략이 성공적으로 들어맞기 시작한 것은 '알브레히트 2세'라는 인물부터였습니다.

1438년 알브레히트 2세 대관식
1438년  알브레히트 2세 대관식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외동딸 '엘리자베트' 결혼에 성공한 것에 이어 1438년, 황제가 죽자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은 약 130년 만에 다시 황제가문이 된 것입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이 결혼을 통해서 얼마나 확장됐는지 지도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1437년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빨간색)
1437년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빨간색)
1438년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빨간색)
1438년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빨간색)

합스부르크 가문은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국 상속녀 엘리자베트의 영토까지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1452년 합스부르크 가문은 또다시 황제 '프리드리히 3세'를 배출하면서 이후 쭉 황제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3세가 남긴 'AEIOU'(아에이오우)글자
프리드리히 3세가 남긴  'AEIOU'(아에이오우)글자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건물, 성문, 그림 등에 글자 5개를 남기는데 바로' AEIOU'(아에이오우)라는 글자입니다.

'AEIOU' 글자의 정확한 뜻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다음의 문장이 가장 유명한 말입니다.

'Austria est imperatrix omnis universi(오스트리아는 전 세계의 통치자다)'

'Austria erit in orbe ultima(오스트리아는 세계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8 합스부르크 가문, 결혼 정책의 끝판왕 '막시밀리안 1세'

합스부르크 가문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결혼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갑니다.

결혼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인물이 '막시밀리안 1세'입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다른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통해서 피를 흘리지 않고 영토를 확장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렇다면 막시밀리안 1세가 결혼을 통해 어떤 땅을 얻었는지 그림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부르고뉴의 공주 '마리'
부르고뉴의 공주 '마리'

이 여성은 당시 프랑스 왕가 친척이었던 부르고뉴의 공주 '마리'입니다.

부르고뉴
부르고뉴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공국이었는데 마리는 이러한 부르고뉴의 영토들을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상속녀 마리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마리가 말에서 떨어져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 막시밀리안 1세는 마리가 상속받은 땅을 대부분 차지하게 됩니다.

 

마리가 죽은 그 해, 막시밀리안 1세는 또다시 2번째 결혼을 추진합니다.

부르타뉴 공국 상속녀 '안'
부르타뉴 공국 상속녀 '안'

이번에는 대서양연안에 있는 프랑스의 마지막 독립공국이었던 부르타뉴의 유일한 상속녀 13세의 공주 '안'과 결혼합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라는 유력한 가문 출신이기도 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 때문에 유럽의 실세로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략결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한 막시밀리안 1세가 다른 유럽 가문들을 제치고 부르타뉴의 유일한 상속녀와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 쓴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대리 결혼'을 한 것입니다.

당시 막시밀리안 1세는 헝가리와 전쟁을 치르느라 결혼식에 직접 갈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리인을 보내서 결혼식을 대신 치르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막시밀리안 1세는 두 번째 아내가 상속받은 부르타뉴 땅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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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막시밀리안 1세, 프랑스 샤를 8세에 두 번째 아내 '안'을 뺏기며 200여 년간 숙적이 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하지만 이 대리결혼은 모두 무효로 끝나고 맙니다.

당시 유럽의 또 다른 강호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영향력과 영토를 확장해 가던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했습니다.

프랑스 샤를 8세와 합스부르크 가문 마르게리타 결혼
프랑스 샤를 8세와 합스부르크 가문 마르게리타 결혼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황태자 샤를 8세와 자신의 딸 '마르게리타'를 혼인시켰습니다.

그런데 샤를 8세는 왕이 되자 자신의 아내 마르게리타 공주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했습니다.

샤를 8세는 대체 결혼을 왜 무효로 만들었을까요?

막시밀리안 1세가 부르타뉴 땅을 차지한 것에 대한 불만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 다음 샤를 8세는 법률가와 성직자들까지 동원해 장인인 막시밀리안 1세와 안의 대리 결혼은 정당한 결혼이 아니라면서 결혼을 무효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샤를 8세는 1491년에 무력으로 부르타뉴를 점령하고 '안'과 결혼해 아내로 삼아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샤를 8세가 장모였던 '안'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두 번째 아내를 뺏긴 것과 동시에 손에 쥘 수 있었던 부르타뉴 땅까지 모두 빼앗겨 버리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이후 200여 년간 숙적이 됩니다.

10. 합스부르크 가문, 스페인 왕가와 겹사돈을 맺다 

프랑스 샤를 8세에 치욕을 당한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정책은 이렇게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방법을 찾던 그는 더욱 강력한 결혼 정책 시행하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스페인과 결혼동맹
합스부르크 가문, 스페인과 결혼동맹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더 강력한 동맹국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중 최적의 동맹국을 찾았고 그곳은 바로 프랑스와 맞닿은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은 당시 대항해 시대의 중심에서 활발한 무역과 교역을 통해 유럽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쳐 나가던 강대국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스페인과 힘을 합쳐 프랑스를 견제하기에 최적의 상대였습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유럽 패권국으로 떠오른 스페인과 돈독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스페인 가문과의 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특별한 결혼이 필요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 왕가의 이중 결혼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 왕가의 이중 결혼

막시밀리안 1세는 1496년 아들 '펠리페 1세'를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와 결혼시킵니다.

그리고 프랑스 샤를 8세와 결혼했다가 친정으로 쫓겨난 딸 '마르게리타'를 스페인의 황태자 '후안'과 결혼시켜 이중결혼 일명 겹사돈을 맺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과 스페인에서 대가 끊기면 원수지간인 프랑스가 언제든지 침략해서 땅을 빼앗길 위험이 높았기 때문에 이중결혼으로 대를 잇기 위한 일종의 보험을 든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 합스부르크 가문, 이중결혼정책의 성공으로 스페인까지 차지하다 

그런데 오래 지나지 않아서 이중결혼으로 이득을 얻는 쪽이 발생하는데, 바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마르게리타 공주와 결혼한 스페인 황태자 후안이 결혼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고, 게다가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중결혼의 주인공 펠리페 1세 역시 결혼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는데, 남편인 펠리페 1세의 죽음 이후 그의 아내 후아나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스페인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카를 5세
카를 5세

당시 스페인의 왕과 왕비까지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최종 상속자는 후아나와 펠리페 1세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 5세'가 됩니다.

결국 막시밀리안 1세의 이중결혼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핏줄이 스페인의 왕위를 이어받게 됩니다.

12. 합스부르크 가문, 헝가리 왕가와의 이중결혼 성공으로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까지 차지하다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정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펠리페 1세와 후아나 사이에는 자녀가 2남 4녀가 있었는데 막시밀리안 1세는 손자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 그리고 손녀 마리아의 결혼계획까지 전부 계획해 놓았습니다.

카를 5세와 포르투갈 이사벨라 결혼
카를 5세와 포르투갈 이사벨라 결혼

먼저 장손이었던 카를 5세의 결혼상대로는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였습니다.

여기까지는 평범해 보이는 듯 하지만 또다시 이중결혼을 추진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 왕가의 이중결혼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 왕가의 이중결혼

막시밀리안 1세는 또 다른 손자 페르디난트 1세와 손녀인 마리아를 헝가리 와가의 자녀들과 이중 결혼시킵니다.

또다시 추진한 이중결혼의 승자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이었습니다.

헝가리 왕이 된 러요시 2세가 후사 없이 1526년 오스만튀르크와의 모하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영토를 차지
합스부르크 가문,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영토를 차지

그래서 러요시 2세의 여동생 안나가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의 상속권을 갖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아내가 물려받은 땅 대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13.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의'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이 되다 

수명도 짧고 이유도 없이 죽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에 중세시대에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자식을 되도록 많이 낳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한 자녀가 죽더라도 다른 자녀가 그 뒤를 이어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스페인, 헝가리, 보헤미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부지역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스페인, 헝가리, 보헤미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부지역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듯 성공적인 결혼 정책으로 가문의 중심지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스페인, 헝가리, 보헤미아, 네덜란드를 얻었고 이탈리아 일부지역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로 편입되는 등 엄청난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당시 영토
합스부르크 가문,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당시 영토

뿐만 아니라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영토였던 나폴리와 시칠리아 그리고 멕시코, 잉카, 베네수엘라 지역까지도 함께 상속받았습니다.

이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전역과 아메리카 대륙까지 포함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됩니다.

카를 5세의 직함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스페인왕, 독일왕, 이탈리아 국왕, 카스티야 국왕, 아라곤 국왕, 나폴리 왕,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군주, 오스트리아 대공, 브라반트 공작, 림부르크 공작, 부르고뉴 공작, 룩셈부르크 공작, 로트링엔 공작, 겔데른 공작, 나무르 후작, 세르다뉴 백작, 아르투아 백작, 에노 백작, 홀란드 백작, 플란데런 백작, 저트펀 백작, 바르셀로나 백작, 부르고뉴 궁중백 등 20여 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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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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