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 미국의 아이콘에서 전세계인의 음료가 될 수 있었던 이유와 전략
1. 콜라의 탄생, 남북전쟁
전 세계적인 음료인 콜라는 미국 남부의 문화 중심지 애틀랜타에서 탄생됩니다.
콜라가 탄생된 배경은 미국을 뒤흔든 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바로 1861년에 시작해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불린 남북전쟁입니다.
맨 왼쪽 사진은 포탄 파편으로 눈, 뺨, 코까지 얼굴 전체가 골절된 부상병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진은 팔뚝과 팔꿈치에 입은 총상으로 팔에 심한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스며든 부상병의 모습입니다.
오른쪽 사진은 등에 총상을 입고 피부가 괴사한 부상병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수술이 끝났다 하더라도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더 큰 문제는 수술 후 생긴 신경계의 이상으로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일이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부상병들에게는 고통을 줄여주는 치료약은 턱없이 부족했고 남북전쟁이 끝나도 의사의 진료를 받기에는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2. 특효약으로 쓰인 '매약'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매약'이 널리 유행했는데, 매약은 약효가 있다고 주장하며 판매하는 모든약을 통칭하는것으로 미국에서는 Patent medicine(특허 의약품)으로 불렸습니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만병통치약의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물론 몸에 좋고 특별한 성분이 있다면 공개를 했겠지만 매약의 대부분은 성분을 공개하지 않은 채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의약품이 지금과 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는 의사의 진료 대신 특효약으로 쓰였습니다.
이 사진 속 매약은 류머티즘성 관절염과 신경통 등 온갖 통증을 치료하는 지통제 효과를 주장한 매약입니다.
위 사진 속 직역을 하면 '금발 성장제'라고 쓰여진 이 매약은 탈모 치료제로 선전했던 매약입니다.
정확한 성분은 알 수 없지만 열악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은 값싼 매약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며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매약에 마약성 진통제인 모르핀이나 아편, 알콜 등의 위험한 성분이 꽤 들어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러한 성분을 넣는 것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없어 불법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경만 하더라도 미국 내 매약은 약 1500가지 이상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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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콜라를 탄생시킨 기적의 매약 '프렌치 와인 코카'
그러던 1885년 매약이 성행하던 남부 애틀랜타에서 새로운 매약이 출시되었고, 바로 이 매약이 오늘의 주제인 콜라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애틀랜타의 약제사이자 '존 펨버튼'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 군인으로 참전했다 부상을 당했습니다.
전쟁 부상으로 모르핀 중독 상태에 있던 존 펨버튼은 대체할 수 있던 약을 찾던 중에 기적의 성분이라 불리는 '코카인'을 발견합니다.
코카인은 '코카 잎'에서 추출했는데 코카 잎은 남아메리카 원산의 식물로 수천 년 전부터 의약품과 기호식품을 이용해 왔으며 기력 보충을 위해 잎을 씹기도 했습니다.
코카 잎은 순간적으로 뇌를 꺠우는 듯한 느낌을 주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었고 코카 잎에서 추출한 코카인 성분과 콜라 나무에서 자라는 콜라 열매의 추출물을 배합해 펨버튼은 프랑스산 와인을 넣어 콜라의 원조인 '프렌치 와인 코카'(French Wine Coca)라는 매약을 만들었습니다.
프렌치 와인 코카의 효능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입니다.
굉장한 활력제, 위대한 신경강장제, 맛도 최고. 몸과 두뇌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쾌함을 선사합니다. 모르핀과 아편 중독 및 알코올 성분에 대한 욕구도 치유합니다.
펨버튼은 코카인 성분에는 중독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프렌치 와인 코카가 맛도 있고 중독성도 없고 몸에도 좋은 만병통치약으로 선전을 했습니다.
이 매약은 펨버튼의 명성과 새로운 성분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 곳에서만 하루 900여개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히트 상품이 되는 듯 보였습니다.
5. 금주법으로인해 최초로 콜라가 탄생하다
그런데 펨버튼이 사용한 원료 떄문에 출시 된지 1년도 되지 않아 판매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애틀랜타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금주법'이 시행되었고 때문에 와인이 들어간 프렌치 와인 코카는 적어도 애틀랜타 지역에서는 판매가 불가하게 되었습니다.
펜버튼은 이에 1886년 프렌치 와인 코카에서 와인을 빼고 설탕과 물을 넣어 단 맛을 내는 새로운 매약을 출시하였습니다.
이렇게 금주법으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는 콜라가 최초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존 펨버튼은 콜라를 단지 프렌치 와인 코카처럼 매약으로 한정짓지 않았고 보다 많은 소비자를 생각하면서 탄산수를 섞어 탄산 음료로 만들어 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콜라 원액을 탄산수에 섞어 탄산 음료 매장에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금주법 이후 탄산음료 매장은 술집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사회적인 교류가 가능한 장소로 각광받는 곳이었습니다.
1895년 통계를 보면 미국 전역에 탄산음료 매장이 5만여 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라 탄산음료 매장이 더욱 각광을 받았던 이유는 저렴한 가격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 탄산음료 매장에서는 약 28ml가량의 콜라 원액에 142ml 정도의 탄산수를 섞어서 단돈 5샌트에 제공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톡! 쏘는 짜릿한 탄산의 콜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이떄부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당시 콜라 뿐 아니라 탄산음료 매장에서는 딸기나 라즈베리 원액이 들어간 상큼한 과일향 탄산음료도 판매되었으며 1900년대 탄산음료의 종류만 100여 가지 이상이 될 정도로 굉장히 많은 종류의 탄산음료가 판매되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탄산음료 중에서 콜라를 선택하게 할 특별한 판매 방법으로 홍보를 시작합니다.
이 지적인 음료이자 금주용 음료는 코카 잎과 콜라 열매에서 추출한 귀중한 강장제 및 긴경 자극 성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맛있고 기분을 복돋는 상쾌한 음료일 뿐만 아니라 두뇌 강장제 및 모든 신경증(두통, 신경통, 히스테리, 우울증) 등을 치료한다.
6. 코카콜라 이름과 로고 탄생 비화
이처럼 콜라를 매약같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홍보하면서도 동시에 맛있는 탄산음료라는 메시지 까지 더해 광고를 한 것입니다.
또한 동업자이자 회계사였던 '프랭크 로빈슨'은 이 음료에 이름을 지어 줘야겠다고 생각했고 주성분 두 가지인 코카 잎의 C와 콜라 열매의 콜라라는 단어를 합성해 코카콜라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원래 콜라 열매는 Kola nut 으로 앞 글자가 K 이지만 같은 알파벳인 C와 C 를 붙였을 때 보다 주목받는 효과 때문에 Coca-cola 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름을 지은 후 에 중요한 로고를 제작했습니다.
1886년에는 코카콜라 로고를 기본 글씨체로 썼다면 1887년에는 사람들에게 좀 더 잘 인식시키게 하기 위해 본인의 필기체 손글씨로 글씨를 쓴 로고를 만들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코카 콜라는 탄산음료들 사이에서도 가장 돋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콜라를 탄생시킨 존 펨버튼은 콜라의 영광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콜라가 탄생한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1888년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7. 코카콜라 대중화 마케팅 전략
7. 1 맛과 가격을 잡다
그러다 보니 콜라 회사가 누구의 손에 넘어갈지, 그 존속 여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떄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코카콜라의 사업권을 모두 사들인 사람이 있었으니 현재 코카콜라의 창립자 '에이서 캔들러'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에이서 캔들러는 콜라의 가능성을 보고 당시 돈으로 2,300달러,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원정도의 돈을 주고 모든 권리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캔들러는 1892년에 코카콜라 컴퍼니라는 정식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시킵니다.
콜라를 대중적인 음료로 만들기 위해 기본보다 원액 시럽양을 무려 10배 가량 높여 공급하는 대신에 탄산음료 매장에서 마시는 콜라 한잔당 가격은 5센트로 유지하며 맛과 가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마케팅을 실시합니다.
7. 2 무료 쿠폰 마케팅
이에 더해 콜라 무료 쿠폰을 뿌려 콜라의 대중화에 힘썼습니다.
콜라를 한 번도 안 먹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다
캔들러는 누구든 콜라를 한 번 맛보게 되면 한번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맛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무료 쿠폰 마케팅을 지금으로부터 약 130여년 전에 최초로 시작한 것입니다.
코카콜라 영업 사원을 통해서 무료 쿠폰을 대량으로 뿌리기도 하고 잡지 같은 곳에 쿠폰을 오려서 탄산음료 매장으로 모아 오면 콜라 1잔을 무료로 마실 수 있도록 합니다.
이렇게 1894년부터 1899년 사이에 뿌린 무료 쿠폰의 양이 약 900만장이 넘는다고 하고, 이때 투자한 돈이 약 45만 달러, 현재 가치로 약 237억 원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합니다.
이러한 캔들러의 전략은 완전히 적중했고 6년 동안 판매한 콜라 원액이 하루 평균 약 98000잔정도 였고 매출이 4배 이상 상승하게 되었고 투자 대비 훨씬 남는 장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7.3 코카콜라 로고를 넣은 물건 배포
캔들러는 판촉 활동용으로 코카콜라 로고를 넣은 시계나 달력, 부채, 서빙 접시 등 지금으로 치면 굿즈같은 판촉물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캔들러의 다양한 홍보 전략은 애틀랜타를 넘어서 미국의 다른 지역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마련합니다.
8. 콜라병에 담아 판매하는 방식으로 콜라판매를 미국 전역으로 확장시키다
하지만 탄산음료 매장을 운영하면서 파는 양만으로는 매출 신장에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캔들러에게 콜라 판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일이 생기게 되는데, '화이트헤드와 토마스'라는 두 명의 변호사가 캔들러 사장을 만나 자신들에게 콜라 원액을 공급해준다면 병에 담아서 팔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캔들러는 쿨하게 두 변호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병으로 콜라를 팔 수 있는 권리 즉 '보틀링 권리'를 넘겨 줍니다.
이때 보틀링 권리를 계약이라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 1달러에 넘겨줬다는 설도 있고, 심지어 계약서 원본에 금액 표시가 없이 무료로 넘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지 매입, 공장 건설 등 두 변호사가 감당하기에는 금전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고, 보틀링 권리는 보틀러라 불리는 콜라병 제조, 판매업자들에게 지분을 넘겨주는 방식으로 콜라를 제조하고 공급하게 됩니다.
그래서 1928년까지 미국 전역에는 1,250여 명의 콜라병 제조, 판매업자(보틀러)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만든 병으로 만든 완제품 콜라는 60만 군데 이상의 소매점으로 팔려나가 미국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이 즈음에 미국 내 전국적인 콜라 유통망이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략 1903년경에 유리병 자동화로 인해 콜라병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이렇게 공장에서의 자동화는 콜라가 미국 전역으로 퍼지는 또 하나의계기가 됩니다.
9. 콜라, 매약의 이미지를 탈피하다
이 무렵 콜라는 대중적인 음료로서 이미지를 변신을 시작합니다.
때로는 탄산음료로 때로는 매약으로 미국인을 사로잡으며 퍼져나갔던 콜라는 당시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콜라가 만들어질 당시와는 달리 코카인이 더 이상 신비의 묘약이 아닌 일종의 마약으로 보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decocanize(디코캐나이즈)라고 하면서 1903년에 코카인 성분을 화학적으로 완전히 제거시킵니다.
그러나 1906년에 미국 의회가 순정식의약품법이라는 법령을 만들어 발표했는데 제품 라벨링에 관한 규정 조항에서는 구매자가 자신이 구매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포장 용기에 성분을 명시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이전까지 약의 효능을 과장하거나 허위로 광고하는 매약들에 대해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게 되면서 매약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콜라가 매약의 이미지를 멋으려면 또 다른 홍보가 필요했고, 매약과 거리를 두며 콜라의 광고는 새롭게 탈바꿈하게 됩니다.
매약의 약효 선전은 버리고 맛있고 상쾌한 맛을 강조하면서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광고를 합니다.
그 결과 콜라 매출이 1910년이 되면 118배까지 상승하게 됩니다.
이제 본격적인 미국의 탄산음료로 이미지를 바꾼 코카콜라의 시대가 열립니다.
10. 코카콜라, 전 세계를 중독시킨 전략
그렇다면 미국 전역에 퍼진 코카콜라가 어떻게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를 사로잡는 음료로 자리잡을 수 있었을까요?
10. 1 콜라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라
콜라의 생존 전략은 콜라만의 정체성(아이덴티티)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전역으로 퍼진 콜라의 인기가 점차 높아지자 한 가지 걸림돌이 발생하는데 바로 '따라하는 현상'입니다.
콜라 고유의 맛이 인기를 끌면서 콜라를 따라 하는 유사 제품 내지는 모조품들이 판을 치게 됩니다.
당시 콜라병은 만드는 지역과 공장에 따라 병모양이 통일이 되어 있지 않아 모조품이 출시되어도 구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조품들이 정품 콜라병 모양부터 광고까지 따라하게 됩니다.
모조품 콜라는 정품 콜라병과 비슷한 모양의 병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병에 새긴 곡선 모양의 글자와 로고까지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되자 코카콜라는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콜라병 디자인을 통일하는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500달러를 걸고 콜라병 디자인을 공모하였고, 공모전의 기준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1. 어두운 곳에서만졌을 때도 '코카콜라'병인 것을 알 수 있을 것
2. 깨진 병 조각만 봐도 '코카콜라'인 것을 알 수 있을 것
그 결과 1916년 한 유리병 제조업체에서 디자인한 콜라병 모양이 채택됩니다.
이떄부터 현재까지 우리가 마시는 코카콜라의 병 디자인이 통일되면서 코카콜라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구축하게 됩니다.
코카콜라 병 디자인에 대한 비아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병 디자이너들은 콜라에 대해 찾다가 코코아 열매에서 독특한 디자인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코카콜라는 또 하나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전략으로 신비주의 전략을 채택합니다.
'코카콜라 제조법은 비밀이다. 제조법을 아는 사람이 전 세계에 두 명이다. 제조법을 아는 두 사람은 같은 비행기도 안 탄다' 는 등의 소문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코카콜라 제조법은 비밀유지가 철저하게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이 소문이 허황된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처럼 캔들러는 콜라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콜라 원액의 원료마다 물품 번호를 붙여 분류해놓았습니다.
예를들어 성탕은 1번, 캐러멜은 2번, 카페인은 3번 과 같이 코카콜라의 고유한 맛이 나게 하는 원료에 7X라는 이름을 붙여 콜라의 성분이 무엇인지 절대 밝히지 않겠다는 방침에 따라 미지수X를 활용해 표기하고 있습니다.
콜라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도 이 7X의 정체는 한 번도 공개된 것이 없습니다.
10. 2 일상을 파고드는 마케팅 전략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경제 규모가 영국의 약 2배였고, 게다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전쟁 피해가 거의 없었습니다.
또 미국은 전쟁 후 최대 채권 국가로 급부상하면서 독일은 말할 것도 없고 승전국인 프랑스나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이 미국에 엄청난 빚을 지게 되면서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으로 올라서게 됩니다.
이때 미국은 대중 소비 사회로 세계 최초로 진입하게 되었고, 포디즘(Fordism)이라고 불리는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 등으로 노동 생산성을 증대시켰던 미국신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경제 구조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고 이런것들 통해서 미국인들의 소비 욕구가 대대적으로 높아지게 됩니다.
생산보다는 소비에 관심이 많은 소비지향적인 사람들과 여가와 쾌락활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넘쳐 났고, 이때 콜라는 미국인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며 지갑을 열 방법을 찾게 됩니다.
이때부터 광고업자, 심리학자, 홍보 전문가 등의 철저한 분석을 통해 필요에 따라 광고를 시행헸습니다.
풍요로운 소비속에서 여가생활도 즐기는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을 파고 들었고 스포츠를 여가활동으로 즐긴 후에 콜라로 갈증을 해소하라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입니다.
10. 3 제2차 세계대전
미국인들의 국민음료로 자리잡은 콜라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가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인 세계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그 중에서도 코카콜라에 기회를 안겨 준 것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보낸 한 통의 전보였습니다.
지금 전장으로 콜라를 보내줄 수 있나?(전장에서 보낸 전보)
가능하다. 제복을 입은 모든 병사들에게 5센트에 콜라 한 병씩을 제공하겠다. (코카콜라쪽 대답)
그럼 300만 명씩 한 달에 두번, 600만 병을 보내 달라.
(전장에서 보낸 전보)
이 전보는 전쟁터에 나가있던 미국군의 한 장군이 엄청난 양의 코카콜라를 요청한 것으로, 그는 바로 당시 유럽지역 사령부 총책임자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입니다.
이런 요청에는 다양한 추측이 있는데 전쟁 중 콜라를 향한 군인들의 갈망이 꽤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 지배적인 시각입니다.
전쟁에 참여한 한 군인은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무엇을위해 싸우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중 절반은 코카콜라를 다시 살 수 있는 권리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당시 전장에서의 코카콜라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미군의 필수 보급품으로 든든한 열량을 제공하는 허쉬사의 초콜릿과 긴장을 완화해 주는 위글리사의 껌 그리고 코카콜라까지 제공되었습니다.
코카콜라는 미국인들이 가는 곳이면 심지어 군대에서도 5센트의 값싼 가격으로 납품하면서 미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하지만 필수 보급품에 포함된 코카콜라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전쟁터로 배달하기에는 병이 깨질 염려도 있고 무게와 부피때문에 시간 또한 오래걸렸습니다.
이에 코카콜라 측에서는 전쟁에 나간 미군에게 손쉽게 콜라를 제공하기 위해 전쟁터 현지에 콜라 기술 고문 163명을 파견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콜라병 생산 공장을 건설해서 실시간으로 제공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미군은 전쟁 내내 톡쏘는 콜라를 안정적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군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전쟁터에서 콜라를 통해 잠깐의 여유를 느끼며 고향을 그리워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있었던 34개월 동안 미군이 마신 콜라병만 무려 30억 병정도라고 합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콜라병 수출이 막힌 독일에서 콜라 대신 탄생한 탄산음료가 있었으니, 우리에게도 아직까지 익숙한 바로 '환타'입니다.
전쟁 중 콜라 수입이 막혀 새로운 판로를 찾던 독일의 콜라병 판매업자가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는 새로운 탄산음료인 환타를 개발한 것입니다.
전쟁 후에 코카콜라는 1930년대부터 해외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코카콜라 수출 회사를 설립해 28개국에서 영업을 시작하지만 진쟁을 통해서 더 많은 생산공장을 해외에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외판로를 뚫은 코카콜라는 전 세계에 64개의 병 공장을 건설했고 각 나라의 판매업자들과 계약을 체결해나가면서 해외에서도 코카콜라를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코카콜라는 전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 그 자체가 됩니다.
1950년대 코카콜라의 영향력에 대한 기사가 타임지에 실립니다.
지구 뒷편에서 전 세계에 콜라를 공급해주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전세계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젊음과 반항의 상징인 청바지를 즐겨입고 로큰롤을 듣고 톡 쏘는 콜라를 마시는 '미국적 소비문화'를 동경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콜라는 전 세계에 진출해 자본주의 국가 어디서든 누구라도 마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미국적 생활 방식'을 따라하기 쉬운 상품 중 하나였습니다.
<출처: 벌거벗은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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