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흰]을 읽고(책리뷰/독후감)/한강 작가
소설 [흰]은 매우 독특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보기에 따라 시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굉장히 짧고 간결한 시적 언어로 간 단락을 나누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자면 몇 시간이면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이지만, 생각보다 책장을 쉽게 넘길 수 없다. 글자수도 많지 않고 책의 제목과 같이 흰 여백이 많지만,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영면에 든 언니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은 사진들을 통해 성근 눈송이처럼 끊임없이 생각에 생각을 꼬리 물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표면은 흰색보다는 잿빛에 가깝다. 이것이 선과 악, 빛과 어둠, 정의와 부조리의 경계 혹은 그 바탕이 되는 흰색의 중의적 면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이지만 실제 소설 속에서 그 지명은 정식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몹시 어둡고 아픈 도시라는 사실만은 소설 곳곳의 묘사와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다.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대전당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에 의해 처절하게 부서지고 무너졌다. 한강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바르샤바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수천 미터 상공에서 바라본 그곳은 하얀 눈밭 같았다고. 그 눈송이가 수천수만의 폭격에 의해서 참혹하게 부서져 가루가 된 벽돌들이었음을 알게 된 후 작가는 그 폭력성에 몸서리를 치며 다시 한번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이토록 잔인한가? 이토록 잔인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던졌다고 한다. 21세기 전 세계가 거의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 시대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포함해 수많은 외전, 내전이 진행 중이다. 소름 끼치게도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내전이 종결되지 않고 진행 중이다. 이 현장의 중심에 있는 나 또한 인간은 왜 이토록 잔인할까? 왜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는가? 왜 폭력으로 제압하려 하는가?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모두 흰 여백투성이이다. 하얀색은 솜사탕같이 달달한데 비해 흰색은 하얀색과는 달리 생과 사에서 모두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반드시 '흰'이어야 했다고. 흰색은 그 자체로 순수함, 순결, 무결함, 깨끗함, 청렴함, 고요, 무상의 이미지가 있다. 어떤 색이든 이 흰색의 바탕 위에서 그 색을 발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의 근본,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흰색 위에 어떤 색이 덮혀지냐에 따라서 그것은 죽음, 고통, 불안, 무지, 순진, 티끌, 폭력, 잔인함이 될 수 있다.
소설은 시의 형식이기도 하고 에세이 형식이기도 하다. 한강 작가의 어머니가 실제 겪은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강작가는 많은 인터뷰나 글을 통해 앞서 태어난 언니가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고, 만약 그녀가 살아있다면 자신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먼저 떠난 언니의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빌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고 느끼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 고통과 폭력, 절망만이 가득한 인간세계를 미련 없이 버리고자 했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끈이 자신을 끌어당겨 구해내곤 했다고 말이다. 작가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들의 기억에 준재하는 한 언니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혼자서 아이를 낳아야만 했던 23살의 어린 어머니는 죽어가는 딸에게 '죽지 마라, 죽지 마라' 속삭이지만, 자궁에서 세상의 빛을 본 아직은 미지의 존재인 딸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그 말은 흰 강보 안에 쌓인 벌건 핏덩이와 같은 아이에게 전달은 되었을까? 무엇인가 울림은 주었을까? 우주의 어딘가 티끌과 같은 점은 찍혔을까? 바탕이 희면 흴수록 티끌은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므로 순수 그 자체인 그 아이는 '점'을 찍었을 것이리라.
소설 중 가장 나의 마음을 울렸던 것은 바로 '흰 개'와 '소금'에 관한 이야기였다.
괜찮다. 괜찮다니까. 낮은 소리로 달래며 어머니는 무연히 그녀(흰 개)를 앞질러 걸어갔다. 끌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모진일을 오래 당했던가 보다.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그 수수께끼의 싱거운 답은 안개다. 그래서 그 개의 이름은 안개가 되었다. 하얗고, 커다란, 짖지 않는 개. 먼 기억 속 어렴풋한 백구를 닮은 개.
화자인 그녀가 어린 시절 보았던 백구를 닮은 흰 털이 여기저기 빠져 붉은 살을 드러내고 사람의 손길을 완강하게 거부했던 그 흰 개는 어느 추운 날 소리 없이 죽어 있었다고 한다. 너무 오랜 기간 무언가 모진일을 당해 소리조차 잃고 인간의 손길마저 공포로 여겼을 그 흰 개는 지금도 인간 세상 곳곳에 그 모습을 달리 한 채 추위와 공포, 절망에 떨고 있을 것이다.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 힘이 그 물질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흰 소금으로 덧나고 짓무른 상처를 소독하고 낫게 할 수 있구나, 그것으로 덮어 놓으면 썩지 않을 수 있구나 하고 마음의 위안을 삼아 본다.
넋이 존재한다면, 그 보이지 않는 움직임은 바로 그 나비를 닮았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해 왔다. 부서져 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결벽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며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이 소설은 [소년이 온다]와 연결된다. 개인인 나의 언니에 대한 죽음마저도 온전히 들여다보고 슬퍼할 수 없었던, 즉 충분한 애도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아가 폭력적인 국가가 죽은 무고한 국민들이 있었음을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 밖으로 소리 내지 않았다는 사실, 그 모든 거짓말을 그만두고 똑바로 눈을 뜨고 가리어진 장막을 걷어내 기억해야 할 모든 죽음과 그 넋을 기리기 위해 환한 초를 밝힐 것을 다짐한다. 이것이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도망가고 피하며 두려움에 떨었던 흰 개의 모습을 한 넋들이 썩어서 기억에서조차 남지 않게 하는 것을 막아주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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