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일요일 스키야키식당]을 읽고(책리뷰, 독후감)/배수아 작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부암동 스키야키 식당을 둘러싼 인간군상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엮은 단편소설집에 가까운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총 17개의 각 이야기는 단편으로 읽어도 충분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독자를 사로잡을 만큼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다. 치밀하고 유기적인 구성과 비교되는 투박하고 거친 날것의 문장들은 처음에는 당혹스럽기까지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에너지를 더해가며 마침내 독자들을 절정으로 이끈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주인공 하나가 극을 이끌어가는 구조가 아닌 등장인물 모두가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치열하게 투쟁하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고뇌하고 절망하며, 살아가기 위해 적응하거나 죽어 존재감을 잃는다.
한국전쟁이전부터 대지주인 집안에 손자로 태어나 국립대학교교수까지 역임했던 남자 마(馬)는 집안이나 학벌, 외모 모두 평범하고 보통의 어쩌면 조금은 평균 이하인 박혜전과 결혼을 하여 슬하에 1남 1녀(막과 말리)를 두고 있는 가부장적인 가장이다. 마가 벌어오는 돈이 집안의 유일한 경제원이며 박혜전은 가정주부로 집안일과 육아에 관련한 모든 대소사를 혼자 책임지고 있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 마는 일요일마다 집 근처 스키야키 식당에 가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박혜전이 소양이 들어간 만두를 사 오며 집안의 사달이 시작된다. 다른 날과는 달리 입맛에 맞아서였던지 허겁지겁 만두를 먹어치운 마가 복통을 호소하며 먹었던 만두를 모두 게워내었고, 그렇잖아도 앙상한 그의 몸이 더욱더 말라간다. 그러던 중 마가 트럭에 치여 내장까지 짓밟히는 사고를 당하는데 이때 놀랍게도 소양이 덩어리째 식도를 타고 그의 몸 밖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에서 마는 박혜전과 이혼을 하고 식당허드렛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여자 돈경숙과 재혼을 한다. 재혼 후 마는 어떤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고, 오로지 먹고 자고 싸는 본능에 충실한 삶을 하며 돈경숙에 빌붙어 살게 된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게 된 박혜전은 경제적 활동을 해야 했고 마의 대학동기이자 친구인 백두연의 도움을 받아 가구점을 경영하게 된다. 백두연은 대구에 섬유공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아들로 남부럽지 않은 부유한 유년기를 거치지만 집안이 몰락과 생존능력이라고는 없는 허례허식에 사로잡혀 입벌구로 허울 좋은 말로 임기응변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결국 이혼을 당하게 된다. 풍채가 좋고 단단한 데다 말주변이 좋은 백두연은 전당포를 악착같이 운영하여 돈을 모은 처자식이 없는 집안의 의붓 삼촌에게 박혜전이하는 가구점에 투자를 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거부당한다.
한편 마와 돈경숙이 살고 있는 건물 1층에서 수선을 주로 하는 양장점을 운영하는 표현정은 오로지 돈을 모으기 위한 집념으로 하나뿐인 딸 부혜린에게 한 푼도 지급하지 않고 재봉질을 시키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비정한 어머니이다. 표현정에게 돈은 그 자체로 권력이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아야만 하는 존재의 의미이다. 표현정은 딸 부혜린에게는 그녀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느라 가진 것이 쥐뿔도 없다며 가스라이팅하며 노동력 착취를 하고 연애며 결혼, 출산은 언감생심 꿈에도 꾸지 못하게 하며, 밤마다 달콤한 초콜릿을 먹이며 토실토실 살을 찌워간다. 돈경숙의 하나뿐인 잘생긴 아들 세원은 살집이 제법 올랐지만 미모를 채 가리지 못한 부혜린을 사랑하게 되는데, 세원은 부혜린에게 어머니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하지만 부혜린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아간다.
세원은 돈벌이를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마와 백두연의 대학동창인 음명애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음명애는 그녀의 어리고 무능력하고 그녀의 돈만 축내는 영화감독지망생 애인 우균과 이별을 고한 후 우균의 짐을 세원에게 전달하라는 알바자리를 제공하고 수고비를 준다. 이후 세원은 날이면 날마다 찾던 부혜린 앞에 어쩐 일인지 나타나지 않는다.
장애자들을 위한 특수시설 시간제 교사인 진주는 결혼을 앞두고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와 박혜전의 자녀인 막과 말리의 출장탁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어느 날 말리는 친구인 세탁소집 딸과 노는 중, 말리가 떨어뜨린 동전 2개를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며 손에 든 연필을 말리를 향해 찌르려다가 벽에 부딪쳐 연필이 산산조각 나는 일이 벌어지고 세탁소 주인은 자신의 딸을 향해 주먹을 날려 코뼈를 부러뜨리는 것을 말리를 찾으러 간 진주가 목격한다.
진주의 대학시절 친구인 10년 차 부부 배유은과 김요환은 진주가 이기적인 성도와의 결혼을 하는 것을 반대한다. 배유은과 김요환은 딩크족으로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나 어느 날 배유은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며, 임신과 출산, 가정에 관한 난상토론을 하게 된다.
진주와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 성도는 '슬픈 빈곤의 사회'라는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몰래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그중 한 명이 프리랜서 언더헤어 모델 김지선이었고 그녀의 소개로 전애인 노용과 인터뷰를 하게 된다. 노용은 최소한의 일을 하며, 남들이 남기거나 버려지는 음식들을 얻어다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이다. 노용의 동생 준희는 부동산 회사에 다니며 노용을 가끔씩 찾아 용돈도 주고, 먹을 것을 챙겨준다.
이것이 대략적인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줄거리이다.
부혜린을 키운 것은 8할이 죄의식이었고 나머지 2할이 초콜릿과자였다.
죄는 부모자식됨에서 근원 되는 것이죠. 남자가 여자의 자궁을 피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욕망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세속의 사람들이 이상을 구현할 수 없는 이유도 그런 욕망이 아닙니까.
작가는 인간 심연의 죄의식이 한편에서는 이를 이용한 교활함으로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에 의해 이용당하는 나약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표현정, 부혜린 부녀의 관계를 통해 신랄하게 묘사합니다. 이 죄의식은 부모자식 간과 같이 혈연집단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유전적, 사회적 영향으로 그들에 의해 일정 부분 지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 만약 이 부모와 자식 간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치우쳤을 때 그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 될 수밖에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얼치기 예술가와 디오게네스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호함이 사랑받고 불분명함과 회의주의가 마치 지성의 유일한 덕목인양 칭송받고 있는 이때에도 세상은 빛과 어둠처럼 선명한 경계가 있으니 타고난 고귀함과 그리고 어릿광대들의 세상이 같은 옷을 입고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대중들과 허영심에 눈먼 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톨스토이가 옳았다. 도덕이란 옷처럼 입고 벗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인간이 받아들이는 무거움이다. 진지함이고 열정이다. 세간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느냐 마느냐는 식이 무지하게 단순한 차원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훈련되는 것이고 의지를 필요로 한다. 숭고함을 향해 나가는 의지 그 자체인 것이다. 그에 상반되는 추함이나 악덕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원시적인 자연상태의 본능에 아무 방어구 없이 노출된 인간, 바로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혜와 성실함으로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세속의 온갖 고뇌와 번민이 지혜를 가로막고 욕망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의 장점은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욕망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돈을 아주 세속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반대라는 것을 음명애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정상적인 독립성을 지키는 것이다.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이다.
음명애는 현재 사랑받고 있는 다수의 예술작품들이 여기저기에서 짜깁기하여 얽기 설기 재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빛과 어둠과 같이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들이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호한 회의주의적이고 편협한 시각으로 이를 들여다볼 뿐 일고 비판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훌륭하다고 하는 것, 평판이 좋은 것, 칭송받는 것, 고가의 상표가 박힌 것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며, 반대편에 있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건 도덕적이건 숭고한 것이건 배척되고 무시당하며 심하게는 폭력적으로 파괴되기도 한다. 도덕은 숭고함을 향해 나가는 의지 그 자체이며 그것은 훈련되는 것이고 의지가 필요하며, 이와 상반되는 추함이나 악덕은 자연상태의 본능에 아무 방어구 없이 노출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극 중 '마'이다. 그는 어떠한 것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 이불속에 쳐 박혀 오로지 먹고자 함만을 탐하는, 국립대학 교수까지 했던 그이지만 결국 도덕에의 의지를 스스로 놓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숭고함을 잃게 된다는 것, 때문에 그로 인한 수치도 느낄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음명애는 세속에 온갖 고뇌와 번민이 도덕과 악덕을 구별해 내는 지혜와 성실함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돈이라고 생각한다. 돈은 타협할 필요가 없기에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삶을 지향하는 독립적인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돈이 있기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을 수 있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만큼의 돈이면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로 남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얼마만큼의 돈을 만족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은? 그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성은?
회사에서 돌아왔을 때 남편(김요환)은 소파에 앉아 잡지에 실린 에릭사티의 여노를 보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1925년 성요셉 병원에서 독창적이고 금욕적이고 고독했던 삶의 마감. 아내도 아이도 남기지 않음'
자신의 아이란, 낳지 않으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니 말이야.
아, 짜증 나. 왜 사람들은 결혼한다고 야단들이지. 게다가 열등한 유전인자로 순수한 세상을 오염시키다니.
소설 속에서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빈곤한 자들은 아이 낳는 것을 거부한다. 아마도 빈곤과 가난이 고스란히 그 자식들에게도 유전병과 같이 대물림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시간, 희생이 필요하다. 어쩌면 이기적일 수 있다고 판단될 수 있지만, 애견동물을 분양받아 키우는 것과 또 다른 문제이기에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스스로 금욕과 고독을 선택한 거부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어야 하며 금전적, 환경적, 사회적 요인으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합리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함께 고민하고 의견을 모아야 한다.
이와 비교되는 인물은 노용이다.
보통의 개개인들에게 그런 생각까지는 필요 없는 걱정일터인데 왜 사람들은 엄청난 양의 고기국물을 하수도에 흘려버리면서도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먹을 것을 위해서 이마에 땀이 번질거리도록 일하고 또 일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먹을 것을 단지 배가 부르다는 이유만으로 버리고 있다. 이 두 가지 세계가 원활히 연결된다면 좋을 텐데. 이건 마치 사회를 하나의 전체로 본다면, 상당한 부분, 버리기 위해 미친 듯이 돈을 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하지 않고 얻어먹으려고 하는 노용을 증오하기도 한다. 왜 그러는 거지? 나는 너희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그는 노동을 거부했으며(wht not?), 그 사실을 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게으르고 무용지물인(wht not?) 자신을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감수성 있고 도덕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편이다.
마는 사고 때문에 뇌를 다치게 되며 스스로 판단하는데 애를 먹지만, 노용은 스스로 노동을 거부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버려지거나 남긴 음식들을 얻어먹으며 사는 삶을 선택한다. 이러한 선택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게으름과 무익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노용은 자신의 삶을 결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나아가 감수성 있고 도덕적이라고까지 자평한다. 이는 노용이 부분별 하게 생산되고 소비되고 가차 없이 버려지는 자본주의의 민낯에 반기를 드는 의미 있는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식당에서 무전취식을 함으로써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버려질 것들 피하는 것들 사람들에게 쓰레기라며 더럽고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노용을 증오한다. 적정한 소비를 넘어선 생산으로 인한, 필요에 의해 취사선택되고 무익한 것으로 취급되어 버려지는 것들을 버리지 말고 자신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 왜 그토록 증오를 받아야 하는 일인 것인가? 이런 것을 얻기 위해 그가 한 행위도 노동이 아니란 말인가? 노동의 신성함이란 누가 규정짓는 것인가? 그리고 무익함에 대한 판단은 절대적인 것인가?
준희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하나로 이미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체에 대한 자각은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사고의 중심이 사물이나 세계로부터 개인에게 옮겨오기 시작하면, 개인은 우주가 되려는 욕구에 불타게 된다. 개인이란 객관적으로는 대부분 빈약하므로 자기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는 특별하다는) 감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이후 세상은 침몰의 수도원에서 갑자기 약장수들로 넘쳐나는 시장터로 바뀌었다.
노용의 생각으로는 지금 너무 많은 '나'로 인해서 모든 것이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일인칭의 공해다.
사고의 중심이 세계나 사물에서 개인으로 옮겨오며 사상적, 철학적, 육체적인 면에서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그 자신만의 특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더 나아가 '나만을'위한 행동과 생각을 하게 되며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노용은 생각한다. 그것을 심지어 일인칭 공해라고까지 표현한다. 개인의 특별함, 존귀함은 부정되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철학을 가지지 못하고 도덕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의 욕망을 위해 온 우주의 힘이 존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 나 이외의 또 다른 개인이 다치고 피 흘리게 되는 것이면 그것은 인류 생존과 유지에 크나큰 문제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발생 중이며, 사회는 병들어가고 있다. 내가 속한 집단, 내가 하는 생각과 사상만이 옳은 것이고 그 반대편은 무조건 배척하고 공격하는 이분법의 세상이 나의 부족함, 나약함, 미미함을 인정하고 사람 인(인) 자가 보여주듯 서로 기대고 손을 맞잡아야 하는 상호협력적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선택이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풍족하고 안락하고 차고 넘치고 나만이 내가 속하는 집단이 중요하다고 외칠 때, 노용은 급기야 가난을 누릴 권리, 그것만을 바란다고 항변한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고, 자신은 가난한 삶을 누리는 것에 대한 자유가 있음을 선언한다. 외부적 요인이나 자신의 선택이 배제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가난이 아닌, 청빈하고 낭비되는 것을 찾아 소비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까지도 느껴지는 대목이며, 이런 선택에 대한 차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을 거두어 줄 것을 요구한다. 외적으로 볼 때 한심하고 무익하고 불필요하다고 취급되는 노용은 스스로는 세상 누구보다도 독립적이고 사상적으로 충만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인터뷰 작업을 통해서 내가 알아낸 것은 이 '빈곤'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내가 과연 이 원고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원래 처음 내 생각은 사람들의 초상화, 인간의 백서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터뷰를 계속하게 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결국 빈곤에 의한 존재의 확인이었다.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면서부터 빈곤이라는 문제는 늘 뒤따라오는 어쩌면 숙명과도 같은 인간 존재의 한 측면이었다고 한다면, 그 빈곤으로 인한 사회 문제 역시 인간이 그 운명을 다 하는 때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빈곤이란 그릇된 욕망으로 인한 착취의 산물일 수도 있으나, 대부분은 보다 안락하고 풍족하고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에 기인한 부의 재분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비롯되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운이 좋았다고? 무엇이 한국의 역사고 유산이란 말인가? 그들은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은 한시도 같은 '역사'안에 머물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아와 고아 아닌 자, 사생아와 사생아 아닌 자, 일그러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그는 죽는 날까지 최후의 있는 힘을 다해서 냉소할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한국인도 뭣도 아니었다. 오직 무참히 짓밟힌 인간, 그것일 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 다면 부모가 없는 고아, 사생아나 세상의 잣대에서 평균 이하라 평가받는 일그러진 자들은 역사에 기억되지 않는, 하찮은 존재일 것이다. 어쩌면 존재라는 사실자체를 인정받지 못한 인간들이 수두룩 할 것이다.
신체나 정신의 장애가 있다던가 혹은 가족의 건강이나 돌봄 문제로 가족 중 일부가 어쩔 수 없는 희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한, 빈곤은 악착같이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한 개인의 역사에의 투쟁으로 벗아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시작부터 빈곤을 타고나거나 그 가족, 크게는 사회에서 빈곤을 강요당한 한 개인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오직 무참히 짓밟힌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소설 속 타고나면서부터 부유하고 가진 자들은 대체적으로 룸펜(Lumpen) 기질을 보인다. 그들은 타고난 가진 것을 게으름과 판단실패, 자만심으로 잃고 현재는 사회의 최하계층이 되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노동을 거부하고 악착같이 부를 모은 이들에게 빌붙거나 그들을 꾀어내어 기생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부조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다른 빈곤하고 가난한 자들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이러한 작가의 시각은 놀랍게도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을 소위 뼈를 때리며 조롱하는 듯하다. 아프고 또 아프다. 작가는 미미하게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지혜와 소신, 도덕성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가진 회복력, 그 선함, 부조리를 이겨내는 지혜의 힘이 아직은 더 많은 이들에게 작지만 소중하게 내재되어 있음을 믿고 싶고 그렇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내재된 힘을 막는 온갖 부조리와 해악들이 힘을 잃고, 차고 넘치는 낭비를 거부하는 빈곤한 삶이 손가락질받지 않는 사회를 기원해 본다.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한 편의 철학책, 인문학책을 읽는 듯하여 배수아 작가의 필력에 감탄해 마지않은 시간이었고, 또 다른 소설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의지가 용솟음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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