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전쟁, 고대그리스 아테네-스파르타 간 내전
1.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승리, 아테네는 해상무역왕국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스파르타는 명예만 얻었을 뿐이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기원전 B.C. 431∼B.C. 404년 고대그리스 내에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패권을 다투기 위해 치른 전쟁입니다.
흔히 '그리스'라는 나라는 신화와 전설의 나라이며 인문학의 원천이자 고향이라고 말하며 당시 고대 그리스는 여러 개의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전쟁 전쟁 이전에 그리스-페르시아 간에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 후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먼저 '아테네'는 원래 농업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가 해군을 육성시키며 해양국가로 성장하게 되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후에 해상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해상무역왕국'으로 번영하게 됩니다.
스파르타 또한 원래 농업국가였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겼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땅이 아닌 해상권만 획득한 것이라 스파르타에게는 크게 이득 없는, 지킨 건 '명예' 뿐인 전쟁 승리였던 것입니다.
2. 그리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양분되다
그리스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점차 아테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재침략에 대비하는 명분의 '델로스동맹'파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친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렇게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맞상대할 수 있는 동맹국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동안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에는 가려져 있던 그리스의 2인자 도시국가들이 변수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1인자 국가들이 앞으로 나가면 1인자 맹주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2인자 국가들이 생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해상전에서는 아테네에 늘 밀리는 '코린토스', 육상 전에서는 스파르타에 늘 밀리는 '아르고스'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르고스는 스파르타 바로 앞에 있어서 평생 원수지간의 나라였고, 아르고스는 스파르타에 여러 번 항명했으나 족족 패배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패권 다툼에서 소외됐던 그리스 북쪽을 지배하는 '테베'까지 이 세 나라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신들의사생활2-3
3. 동지였던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 펠레폰네소스전쟁의 '적'으로 만나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누구도 그리스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최강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그리스는 해상 1인자 아테네와 지상 1인자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그리스 문명을 공유하는 도시국가들이 뭉쳐서 페르시아에 이긴 것으로, 그리스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을 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에 대항해 싸운 그리스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후 펠레폰네소스전쟁으로 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어차피 그리스의 도시국가로서 같은 문명을 공유하고 최강 페르시아를 물리쳤으니, 아테나와 스파르타가 힘을 합쳐 똘똘 뭉쳐 더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페르시아와의 전쟁승리 후 왜 아테나와 스파르타는 뭉치지 못하고 서로 칼을 겨눈 것일까요?
고대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독립적인 개별국가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이전까지의 트로이전쟁이나, 살라미스해전, 페르시아전쟁 같은 경우에는 외침에 대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합이었다고 한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경우에는 그리스인들 간의 내전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전만큼 잔혹하고 추악한 전쟁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면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대립정도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프로메테우스
3. 펠레폰네소스전쟁의 서막, 아테네 델로스동맹기금으로 아테네를 요새화하며 제국화를 꿈꾸다
페르시아에 지배받는 그리스인의 독립과 재침략에 대비한다는 명분아래 아테네를 맹주로 델로스 동맹을 결성한 뒤 델로스동맹 금고를 아테네로 옮긴 후 아테네는 기금을 무단 전횡하고 동맹국가에 대한 법적, 정치적 간섭에 나서게 됩니다.
아테네는 앞으로 전쟁을 하게 되면 해군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야하기 때문에 델로스동맹기금으로 아테네의 신전에서부터 피레우스 항구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는 성벽을 건설하며, 아테네를 요새화합니다.
아테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파르타는 경계하며 아테네에 성벽 건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게 되고 이에 아테네 사절단이 스파르타에 파견됩니다.
이때 아테네 사절단이 스파르타 시민들의 뒤통수를 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 결과 제국을 현재 상태보다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자가 강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아테네가 제국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일종의 제국주의를 선언한 것입니다.
델로스동맹에 속해있던 많은 아테네 동맹국들이 원하여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아테네는 제국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해전 당시 겨우 15척의 배만 보낸 스파르타 해군의 낮은 기여도를 언급하며 스파르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게 됩니다.
4.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 경제력이 차이가 나자, 스파르타 견제하기 시작하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아테네는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주변국들과 활발한 무역을 하는 무역국가이지만, 스파르타는 어느 나라와도 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스파르타는 자급자족하는 농업국가로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도 하지 않아 돈도 쓸 필요가 없는 나라였고, 무역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아테네 입장에서는 델로스동맹 금고가 스파르타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스파르타로 하여금 아테네는 델로스동맹과 그 기금을 바탕으로 장사를 할 테니 스파르타는 하던 대로 농사나 짓고 있으라고 했던 것이며, 정체된 스파르타와는 달리 아테네는 나날이 세력이 더욱 강해집니다.
스파르타가 가만 지켜보니 이런 식으로 가면 아테네는 계속 힘이 세질 것이 자명해, 스파르타 입장에서 서서히 아테네에 대한 견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테나와 스파르타의 재력차이는 엄청 나서 군복만 봐도 아테네군은 깃발도 꽂고 투구의 장식도 화려한데, 스파르타군은 소박한 스타일이었고 스파르타 군대 식량은 딱딱한 빵과 돼지 피로 만든 검은 죽 한 사발이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아테나와 스파르타 간에 서로 견제가 심해지던 차에, 아테네 동맹국인 '케르키라'와 바다의 2인자 '코린토스' 사이에 도화선역할을 하는 전쟁이 납니다.
이때 아테네가 동맹국 '케르키라'를 지원하자 '코린토스'가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을 하며 아테나와 스파르타 간에 대리전 양상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5.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쓰인 무기
고대그리스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으로 보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라는 큰 틀에서 보면 내전에 해당하니다.
닮은 듯 다른 듯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사용된 무기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부터 소수지만 기병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투창, 활 등 원거리 투사 무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숙련된 투창병 '펠타스트'는 고대 그리스 '팔랑크스'를 돕는 보조 병과였습니다.
펠타스트는 중장보병들의 방진, 사각형 밀집대형인 '팔랑크스'의 후방과 측면을 엄호하거나 전후방을 자유롭게 오가며 치명적인 투창으로 적을 공격하여 지속적인 출혈을 감행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고대그리스 궁병의 모습입니다.
특이하게 다음에 쏠 화살을 활을 접은 후에 미리 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측이 모두 '팔랑크스' 전술을 사용해, 결국 난전에 휘발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주무장이었던 '창'보다는 부부장이었던 '검'이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양날 검인 '사이포스'와 '라코니아'그리고 외날 검인 '코피스'가 주고 쓰였습니다.
기존의 40cm 길이의 '파라조니움'보다 길어진 약 60cm의 길이의 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30kg이 넘었던 중장보병 장비의 경량화가 이루어집니다.
약 18kg 무게의 청동 흉갑(윗몸에 두르는 갑옷) 토락스에서 아마포 즉 섬유재질의 가벼운 흉갑으로 교체됩니다.
그리고 무게 9kg, 직경 60cm 이상의 방패 '호플론'은 대폭 경량화된 무게 약 2kg, 직경 4cm 이하의 '아스피스'로 교체됩니다.
특히 투구의 변화는 아주 극적이었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때까지는 '코린트식' 투구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무겁고 더웠으며 귀를 가려 명령 전달이 어려웠고, 또한 코가리개 때문에 시야 확보의 단점도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이후 각 도시국가별로 독자적인 형태의 투구를 사용하게 됩니다.
공히 경량화와 함께 귀부분을 노출시켜서 명령이 훨씬 더 잘 들리도록 했으며 또한 코가리개도 없애 시야 확보도 용이하게 했습니다.
6.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첫 번째 단계, 스파르타의 선제공격
마치 이란성쌍둥이와도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무기의 변화만큼이나 변화무쌍하게 진행됩니다.
아테네의 당시 지도자는 고대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 연설가이기도 했던 그 유명한 '페리클레스'로, 고대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연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명 '페리클레스 전략'을 사용하는데, 지상전에서 강했던 스파르타가 공격해 들어오면 아테네 인들은 전부 철수해서 아테네 성벽 안으로 이주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스파르타가 쳐들어와서 아테네 전역의 농작물을 태우고 돌아갑니다.
그러면 아테네는 배를 띄워서 스파르타 해상을 봉쇄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전략은 좀체 승부가 나지 않는 전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파르타가 지상으로 침략해서 아테네의 농작물을 태워도 아테네는 해상무역으로 다른 나라에서 곡물을 사다가 먹으면 되는 것이었고, 반대로 아테네가 스파르타의 해상을 봉쇄해도 자급자족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없었던 것이라 아테나와 스파르타 양국 간 승부가 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이런 방법을 지속해 어찌 됐건 장기전으로 가면 자금력이 있는 아테네가 승리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아테네에 예상치 못한 의외의 변수가 나타나게 됩니다.
아테네는 성벽 안으로 피신한 뒤 농작물을 모두 태워 스파르타군의 현지 식량 조달에 타격을 미치는 전략인인 일명 '청야전'을 치렀고, 그 결과 아테네 성벽 안의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 예상치 못하게 성벽 안에서 전염병이 돌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의 원인이 인구밀집 때문이라는 것 몰랐습니다.
당시 전염병으로 아테네군인들의 약 1/4가 죽었고 그 보다 더 많은 민간인 사망자들이 속출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전염병으로 군인의 1/4가 줄었을 뿐 아니라 아테네를 끌고 오던 지도자 페리클레스와 그의 두 아들까지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 사망 후 아테네는 급격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아테네에서 처음 '청야전'을 한다고 했을 때, 아테네 시민들은 '내 밭을 어떻게 보상할 것이냐, 계속 방어만 할 것이냐' 등 온갖 말 많고 다양한 의견들로 혼란을 겪습니다.
이 많은 의견들과 반대 세력까지 아우를 수 있는 통솔력을 가진 인물은 당시 페리클레스가 유일했기에, 그 리더의 부재는 아테네를 쇠락의 길로 이끌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페리클레스 사후에 아테네는 통합의 리더십과 신뢰가 실종됩니다.
고대아테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페리클레스'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페리클레스는 명망과 판단력을 겸비한 청렴결백한 지도자이다. 그는 항상 대중을 이끌었고 대중이 너무 의지하면 불안케 만들고 대중이 낙담하면 자신감을 회복시켜 줬다'
밀당의 대가였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완벽한 신뢰를 얻었습니다.
또한 페리클레스는 민심을 사로잡는 연설의 대가였고 결정적인 연설 2개를 남깁니다.
전쟁을 시작하려 했을 때 수많은 아테네 시민들이 불안해 떨며 반대했고, 페리클레스는 단 한 번의 연설로 반대 의견을 설득하여 반전을 이룹니다.
'우리가 스파르타에게 한번 양보하면 저들은 또 다른 양보를 원할 것이다. 여기서 단호하게 대처한다면 그들의 생각은 바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페르시아를 물리칠 때 운보다 지혜를, 힘보다는 용기로 대항했다'
모든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하면 독재자가 되지만, 위대한 정치인은 모든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려 하기보다 반대하는 세력도 결정적인 순간에 따르도록 설득하는 능력이 있어야 했는데 페리클레스는 이러한 능력이 탁월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양측에서 사상자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불안감이 커졌고 그때 페리클레스가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추도하는 국장에서 유명한 추도사를 합니다.
'행복은 자유에 있고 자유는 용기에 있음을 명심하여 전쟁을 두려워 마십시오. 자긍심을 갖고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보다 비겁하게 살아남아 굴욕 당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영화 <300>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 당시 페르시아에 샛길을 알려준 배신자를 향한 일침이 그것입니다.
'너는 비겁하게 너 자신의 안위를 위해 긍지를 버리고 한 행동으로 평생을 고통스러워하며 살 것이다'
2400여 년 전의 고대그리스 연설문은 오늘날까지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의 정치가나 연설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연설문을 외우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중 특히 페리클레스의 연설문은 정치가들의 연설 교본과도 같은 것입니다.
페리클레스는 장례식에 가서도 죽은 이들을 추도하지 말고, 이들은 죽음으로서 아테네를 세상사람들이 모두 따르는 위대한 제국으로 만드는 데 헌신한 것이니 추도 대신 축하를 하라고 외칩니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고무되어 형의 장례식에 참석한 동생이 군대에 입대하게 하여 자신도 역시 아테네 제국의 번영을 위해 전쟁에 나가겠다고 발 벗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7. 아테네, 탁월한 정치가 페리클레스 사후 스파르타와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예상외의 승리를 거두다
군대의 1/4가 죽고 위대한 리더 페리클레스가 죽자 이제는 통합의 리더십이 없어지고, 오로지 자기편을 위한 진영논리가 정치를 지배합니다.
페리클레스 사후 혼란기에 어느 선동가가 등장해서 이제는 아테네도 수비만 하지 말고 공격을 하자고 외칩니다.
반대파들의 염려에도 자신만만했던 선동가에게 '니키아스'라는 총사령관이 덜컥 군대를 줬고, 체면 때문에 어부지리로 그렇게 아테네가 공격에 나서, 스팍테리아 전투가 발발하게 됩니다.
스파르타 공격을 주장한 강경파 선동가는 바로 '클레온'이라는 장군으로, 말이 행동보다 앞서는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외로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패배하고, 아테네가 대승을 거두었고 이때 스파르타는 최초의 패배로 약 200명의 전사자와 약 200명의 포로가 발생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합니다.
당시 스파르타의 '완전시민'(상류층, 지배계급) 출신이 약 3,5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포로로 잡인 약 200명의 중장보병의 수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였으며 스파르타 최상층의 기강에까지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숫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스팍테리아전투를 실전 지휘한 사람은 선동가 '클레온'이 아닌 '데모스테네스'장군이었고, 그는 아테네 장군 중에서는 앞서가는 명장이었습니다.
당시 전투가 중장보병끼리의 싸움이었고,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중장보병은 대형을 갖추고 움직임 없이 대열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는데, 중장보병들은 당시 철갑옷으로 완전무장한 상태로 땡볕에 3시간만 서있으면 화상으로 쓰러져 나갔던 것입니다.
고대그리스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중장보병으로 참전한 시민에게만 선거권과 참정권을 부여하는 방식을 취했고, 때문에 상대적으로 계급이 낮은 경보병이나 궁병들이 실전에서 중장보병을 때려잡을 경우 자신들도 중장보병만큼의 가치를 가졌다며 똑같이 선거권과 참정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동안 모두 중장보병끼리의 전투를 치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관계 때문에 경보병, 궁병 등은 주요 임무에서 열외 되었는데, 아테네가 궁지에 몰리자 데모스테네스는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움직이며 창을 던지고 도망가는 경보병을 활용한 전술을 써서 기동성에 약한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단점을 공략해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8. 아테네와 스파르타, 스팍테리아 전투 이후 두 나라 모두 큰 피해를 입고 니키아스 평화조약을 맺어 6년간 휴전하다
스팍테리아전투 이후로 스파르타군의 장비가 혁신적으로 변모합니다.
그동안 스파르타 사전에는 항복은 없었지만, 최상류 층 '완전시민'인 중장보병 약 200명을 구하기 위해서 스파르타 역사상 최초의 포로 교환을 실시합니다.
이로서 '항복하느니 죽음을 선택한다'는 죽음으로 맞서온 스파르타의 전설은 이것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스파르타는 스팍테리아전투 패배 후 완전시민 중장보병 200명의 포로를 데려오고 난 후 절치부심, 와신상담하며 이를 갈며 최고 리더와 전염병이 돌고 있어 위기에 처한 아테네와 맞설 것 같지만, 일단 스팍테리아전투 이후 서로 그동안 너무 큰 피해를 봤던 터라 휴전에 돌입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맞붙으면 피해가 어마어마함을 깨닫고 당시 아테네 총지휘관 '니키아스'의 이름을 딴 '니키아스 평화조약'을 맺어 각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어 6년간 두 나라 간의 평화가 지속합니다.
고대그리스 지상전 최강자였던 스파르타였지만 그 전술과 훈련법을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모방하여 훈련을 한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최강 스파르타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스파르타는 '우리는 승리하면 승리할수록 패배한다'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9. 펠로폰네소스 전쟁 2단계 배경, 아테네의 스파르타 우방국 멜로스 파괴
사실상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는 애매한 가운데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은 잠시 휴전을 맞게 됩니다.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무역국가였던 아테네의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함대를 재건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와 해상력을 재건하기 해서 민주주주의 발생지라고 자처하던 아테네가 약소국들에게 수수료, 관세, 상납금등을 마구 올리며 약탈과 침탈을 자행하면서 순식간에 아테네 금고가 꽉 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스파르타와 우방관계였던 '멜로스'는 의리로 계속해서 스파르타 편을 들겠다고 했고, 이런 멜로스에게 아테네 사절단은 아테네에 항복과 굴종을 요구합니다.
이에 멜로스는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에 지도자를 되려 한다면 덕을 쌓고 명예를 드높여야 할 텐데 약탈과 침탈을 일삼으면 그런 아테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며 부당함을 호소하지만 아테네 사절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우리 문제니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야. 그리고 중요한 것은 역사의 법칙상 약자가 강자에게 종속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
이어서 아테네의 포위와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멜로스가 항복하자, 아테네군은 멜로스의 성인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리는 멜로스 파괴가 자행됩니다.
10. 펠로폰네소스 전쟁 2단계 시작: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2라운드가 시작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것이 바로 아테네의 시칠리아 원정입니다.
당시 그리스 일대에는 농사를 지을 만한 평탄한 땅이 없어 아테네는 곡물(밀)을 시칠리아, 이집트, 이오니아 등지에서 수입을 합니다.
시칠리아 서부에는 '세게스타'와 '셀리누스'라는 2개의 결정적인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세게스타'는 아테네 이민자들이었고, '셀리누스'는 스파르타 이민자들이었습니다.
시칠리아 내에서 세게스타와 셀리누스 세력들 간에 동네 싸움 수준정도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셀리누스가 시칠리아 동부 세력 '시라쿠사'를 끌어들이자 세게스타가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아테네가 도와줄 생각이 없었는데 세게스타 사절단이 아타네 시민들에게 우리에게는 엄청난 보물이 있다며 도와주면 함께 나누겠다고 유혹합니다.
아테네는 이오니아지방에서 충분한 곡물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굳이 시칠리아로 갈 생각이 없었는데, 세게스타가 가진 보물에 탐이 난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때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을 두고 전쟁을 하자는 '주전파'와 전쟁을 하지 말자는 '평화파'로 나뉘게 됩니다.
주전파의 대표는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페리클레스의 조카 '알키비아데스'였고, 평화파의 대표는 당시 총사령관이었던 '니키아스' 장군이었습니다.
페리클레스 사후에 아테네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니키아스'에게서 그 주도권을 빼앗아 오려는 욕심이 있었던 '알키비아데스'는 전쟁을 주장하게 됩니다.
당시 아테네는 거듭된 식민지 약탈로 속된 말로 '돈 맛'을 알아버린 상태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털어도 나올 것이 없었고, 아테네는 그런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위해서 동맹국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과정에서 제대로 '돈' 모으는 재미를 알아버린 것입니다.
아테네의 민심은 돈 없는 스파르타 대신에 돈 되는 시칠리아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아테네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스파르타에서도 중재하기 위해서 아테네로 사절단을 보내는데, 회의가 있기 전날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 사절단을 몰래 만나 '우리도 전쟁하기 싫으니 스파르타가 전쟁을 반대하면 나도 지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순진한 스파르타 사절단은 알키비아데스의 말을 믿고, 다음날 회의석상에서 전쟁을 반대합니다.
그러자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는 전쟁을 원하지만 전쟁을 반대한다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도발하고 나섭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는 미남자에 달변가로 유명했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테네는 가만있으면 저절로 질이 떨어지고 그 기술도 낡아 버리는데 전쟁을 계속하다 보면 그 경험이 축적되어 자신을 지키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에 고무된 아테네 시민들은 시칠리아 원정에 나서기로 결정합니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인 시칠리아는 지리적으로 지중해 상업, 무역의 거점인 탓에 역사적으로 외세 침략이 잦았습니다.
고대그리스 무역로로는 동쪽으로는 소아시아에서 현재 틔르키예 이스탄불 일대(비잔틴)와 서쪽으로는 시칠리아에서 현재 북아프리카 튀니지 일대(카르타고)가 있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야망은 시칠리아에서 현재 북아프리카 튀니지 일대(카르타고)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함락하여 지중해에 걸친 아테네 제국을 건설해 아테네를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알키비아데스는 돈 맛에 빠진 아테네 시민들에게 필요했던 명분을 쥐어 준 것이었습니다.
사실 시칠리아에서 돈을 벌고자 했던 아테네 시민들이 '돈 벌러 가자'라고 나서기에 명분이 없었는데,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와 싸우자, 시칠리아를 구원하자'는 기치를 내세워 명분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당시 아테네는 투표로 사령관을 뽑았는데 일종의 시민총회인 민회(民會)를 통해서 시칠리아 원정대 사령관 3인 선출했습니다.
민회를 통해 알키비아데스와 숙명의 라이벌 행정전문가 '니키아스'를 뽑혔고, 또 한 명으로는 '라마코스'라는 머리에 든 것은 없고 좋은 몸만 가진 삼국지의 장비 같은 인물이 3명의 사령관으로 뽑힙니다.
11. 알키비아데스, 시칠리아 원정대 사령관으로 선출되나 앙숙 니키아스의 음모로 사형에 처해지게 될 위기에서 스파르타로 망명하다
펠로포네소스 전쟁의 흐름을 바꾼 야심가이자 중심축이 된 '알키비아데스'를 현대의 역사가들은 흔히들 '존 F. 케네디'와 '조지 패튼'을 섞어놓은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소위 제 잘난 맛에 사는 인물로 '재수'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능력자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애제자였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3대 거장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에서도 소크라테스 바로 옆자리에 알키비아데스가 위치하고 있으며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조카로, 소크라테스는 '그가 금수저 환경이라 타락하기 쉬우니 타락을 막고자' 알키비아데스를 자진해서 찾아가 스승을 자청했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후 알키비아데스는 오직 소크라테스만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시칠리아 원정에 나선 3인 3색 사령관의 조화는 어땠을까요?
알키비아데스가 보는 니키아스는 말이 통하지 않은 옹고집이었고, 니키아스가 보는 알키비아데스는 새파란 재수 없는 놈으로 둘 사이는 그야말로 앙숙이었는데 한 팀을 이루어 전투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알키비아데스가 지휘하며 아테네 군이 잘 나갔습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에게 불행이 찾아옵니다.
신성국가였던 아테네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 神)으로 상업의 신이자 나그네, 목동, 도둑의 수호신' 헤르메스의 신상이 있었습니다.
출정 전날 헤르메스 신상의 주요 부위가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신상 훼손의 유력한 용의자로 알키비아데스가 지목됩니다.
여러 가지 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이 알키비아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정적 니키아스 측의 계획된 공작이라는 것이고, 알키비아데스의 생각도 이와 같았습니다.
니키아스는 일부로 알키비아데스의 재판을 미루는데, 이는 알키비아데스가 전쟁터로 나가 자리를 비운 공석 상태에서 더 확실한 죄목을 엮어 기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알키비아데스가 출항한 이후에 그의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선고가 내려져 소환명령이 떨어졌고, 알키비아데스는 정적들이 속셈을 간파하고 아테네로 돌아가면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그대로 스파르타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12.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로 망명해 아테네를 무너뜨릴 전략을 전수하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스파르타에 끼친 피해보다 더 많은 혜택을 주겠다'
알키비아데스의 명성을 이미 알고 있었던 스파르타 시민들은 쌍수를 들고 그를 환영합니다.
영리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 도착해서 그동안 아테네에서의 화려한 생활은 다 버리고 스파르타인들보다 더 스파르타식의 생활을 철처자게 지키며 살아갑니다.
알키비아데스는 매일 스파르타 왕을 만나 전략전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고 매일 전투 연습과 훈련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스파르타 시민들은 아테네 사람들이 가진 통찰력과 호방함을 알키비아데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호감이 급상승하게 됩니다.
어느 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의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스파르타인들이여! 청하건대 여러분의 위험한 일이나 힘든 일에는 나를 이용하십시오.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에 미치던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이 스파르타로 망명해 힘을 보태준다는 것은 스파르타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된 것이었습니다.
기대에 부응하 듯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 가서 아테네가 꼼짝 못 하는 전술 세 가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첫 번째, 아테네 원정대가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저항에 고전할 것을 간파하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가 시칠리아전투에 파병하도록 설득합니다.
'코린토스'까지 연합한 스파르타군의 가세로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며, 아테네 해군은 이 전투에서 거의 전멸을 하고 맙니다.
사령관 니키아스와 지원에 나선 데스모테네스등 아테네의 지휘관까지 전멸합니다.
이로서 시칠리아를 스파르타가 지배할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 알키비아데스는 그동안 스파르타식 공격이었던 아테네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후퇴하는 전법은 절대 통할 수 없다고 말하며, 아테네 북쪽에 23km 되는 지점에 있던 작은 도시 '데켈레이아'가 있는데 그 도시와 아테네가 사이가 좋지 않으니 거기를 점령하여 스파르타의 거점으로 삼은 후에 언제든지 수시로 아테네를 압박할 수 있다고 전략을 가르쳐주며 아테네에게는 그야말로 치명타를 날립니다.
수시로 쳐들어오는 스파르타군에 의해 결국 아테네는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되었고 식량을 전량 수입해서 먹을 수밖에 없었고 경제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어집니다.
세 번째,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게 아테네의 자금줄이었던 소아시아 식민도시들의 배신과 반란을 부추겨 돈을 뜯어 내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13.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 왕비와 불륜을 저지르고 임신시켜 사형에 처했고 이번에는 페르시아로 망명하다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에 있었던 2년 동안, 함대 전멸에 경제 봉쇄로 위기에 내몰린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굴복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 왕비와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고, 왕비가 덜컥 임신까지 해버리며 스파르타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알키비아데스는 주저 없이 페르시아로 도망칩니다.
페르시아의 총독인 '티사페르노스'에게 가서 그의 참모를 자처합니다.
페르시아 또한 알키비아데스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두 손 들어 환영합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 분열을 위해서 스파르타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돈이 없던 스파르타 대신에 군인들의 월급을 페르시아가 대신 지불해주고 있었습니다.
알키비아데스는 페르시아의 스파르타 원조를 중단시키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 싸우다 지쳐야 페르시아에 이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오니아 세력이 다시 아테네를 지원하도록 함으로써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 힘의 균형을 맞추게 합니다.
이렇게 알키비아데스의 끝없는 계책을 발휘하며 최강 브레인임을 증명했습니다.
14. 펠레폰네소스전쟁 마지막 3단계 제1막,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 스파르타의 대승으로 끝이 나다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으로 펠레폰네소스전쟁의 2라운드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고, 아테네는 거의 패망직전까지 몰립니다.
아테네는 간신히 추스르고 전력을 모아 아테네함대를 구축했고, 페르시아의 지원 아래 성장한 스파르타 연합함대와 몇 차례 해전을 펼칩니다.
이때 갑자기 알키비아데스는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사설함대를 이끌고 펠레폰네소스전쟁터에 홀연히 나타납니다.
그리고 간 큰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게 전략을 제안했고, 아테네 장군들이 이를 수락합니다.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의 전략이 맞아떨어지며 스파르타 연합함대와 지상군까지 물리치게 되고, 아테네를 구한 영웅이 되어 아테네로 금의환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노티움 해전에 출정한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의 함정에 빠진 부관의 실수로 패하면서 결국 아테네에서 영구추방됩니다.
당시 희극작가 겸 시사평론가였던 '아리스토파네'는 이런 말을 합니다.
'다들 알키비아데스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면서도 그리워한다'
알키비아데스는 상대로 하여금 재수 없어하면서도 막상 우리 편이 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없으면 그리워하는 존재였던 것이며, 그런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를 떠나자 아테네는 또다시 패전을 하게 됩니다.
펠레폰네소스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 또다시 알키비아데스가 나타납니다.
아테네는 노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에 가까스로 해군을 재건하여 마지막 일격을 가합니다.
그동안 철저한 계급 국가였던 스파르타 역시 사회 개혁을 이뤄내어 계급을 어느 정도 타파해 줍니다.
소수의 1계급 '완전시민'만으로는 병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계급, 3계급 심지어 노예에 해당하는 최하층 계급인 '헤일로타이' 시민들에게까지도 어느 정도 지휘권과 권한을 부여하는 신분제 개혁을 단행해, 그들까지 전쟁에 참여하도록 합니다.
스파르타는 그동안 억압받아왔던 최하계급인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잠재우는 변화를 단행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스파르타의 해군 사령관으로 취임한 '리산드로스'가 페르시아에 와서 뛰어난 언변으로 페르시아 황태자인 키오스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페르시아가 전격적으로 스파르타 해군을 지원해 주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전투인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 당시 아테네 함대와 스파르타 연합함대의 함선과 해군력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 군대 지휘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테네 군대 지휘부가 항상 전쟁에 나갔다 하면 추방당하고 죽게 되니, 패전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6명의 지휘관이 하루씩 번갈아가며 지휘를 하게 됩니다.
이때 스파르타의 리산드로스와 대치상황에서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유인하기 위해 함대에서 약 30척을 분리해서 내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리산드로스가 아테네 해군의 분견대(본래의 소속부대로부터 파견되어 나온 부대)를 각개격파한 뒤 접근전을 통해서 아테네해군을 격파합니다.
아테네해군은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하고 당황한 나머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고, 육지로 도망간 아테네군은 지상전의 일인자인 스파르타에게 완전히 패배하게 됩니다.
사실 마지막 전투 전 절체절명이 위기에 처한 아테네 앞에 알키비아데스가 또다시 나타납니다.
아테네해군 6인의 지휘관보다 스파르타 해군 제독 리산드로스가 노련하여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리산드로스는 아테네군이 어떤 전술을 쓸지 다 알고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몇 수 위에서 이 모든 것을 간파하고 있던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만 아테네해군은 이를 거절하고 자체적으로 전투를 하다가 스파르타에게 결국 대패를 하고 만 것입니다.
15. 알키비아데스, 도망간 프리기아의 자신의 집 앞에서 암살단의 칼과 활을 맞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을 그야말로 좌지우지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 전역을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그렇다면 알키비아데스의 최후는 과연 어땠을까요?
알키비아데스는 수많은 영광을 누린 만큼 수많은 정적들이 생겼고 그들을 피해서 소아시아 연안의 '프리기아'로 도망쳐 숨어 지냅니다.
특히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이를 갈며 알키비아데스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프리기아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여인을 한 명 만나 재기를 도모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암살단이 들이닥칩니다.
이 암살단도 알키비아데스의 명성을 익히 들어 그가 무서워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집에 불을 질러서 알키비아데스가 집밖으로 나오도록 유도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옷을 대충 둘러 입고 칼과 방패만 가지고 집밖으로 나와서는 암살단에게 '다 덤비라'라고 말하자, 암살단은 두려워 덤비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활과 창만 알키비아데스를 향해 쏩니다.
알키비아데스는 끝내 칼과 창을 맞고 그 자리에서 비참하고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알키비아데스에게 암살단을 보낸 배후에 대한 설이 3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왕비를 임신시켜 버린 스파르타와 애증의 모국 아테네 마지막으로는 프리기아 마을 내에서 어떤 여인과 사건사고를 쳐서 그녀의 형제들이 분노해서 죽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14. 펠레폰네소스전쟁 마지막 3단계 제2막,
새로운 국면으로 치달은 펠레폰네소스전쟁 3라운드 제2막이 새롭게 열립니다.
펠레폰네소스전쟁 3라운드 1막에서 스파르타가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전쟁은 누구나 큰 출혈이 있을 수 밖에는 없었고 스파르타는 승리하자마자 세력이 급격히 쇠락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아테네에게 승리를 거둔 후 스파르타는 강해진 해군력으로 '돈 맛'에 눈을 뜨고 사치를 하기 시작합니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돈을 써서 자신의 아들을 병역에서 면제시켰고 이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스파르타의 완전시민이 4천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군대에 면제를 해주는 등 각종 금품 청탁으로 인해서 군인수가 1/4 정도로 줄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다른 도시국가들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고대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스파르타가 강한 것은 남들이 안 할 때 훈련에 전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전이 발발하니 다른 도시국가들도 열심히 훈련을 해 군사력이 성장했고, 실전 전투를 통해 스파르타가 취약했던 해군이 세지듯 다른 도시국가들도 육군이 세지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새로운 전술로 무장한 신흥강국 '테베'의 등장입니다.
테베가 스파르타의 전략과 전술을 열심히 베껴 습득했고, 이에 더해 스파르타를 이기기 위해 자신들만의 새로운 전술까지 다듬기 시작합니다.
테베에는 스파르타에 필적하는 테베의 정예 결사대 '신성대'가 존재했습니다.
신성대 조직의 목적은 스파르타 군보다 훨씬 더 강력한 부대가 되는 것이었으며, 일설에 의하면 이들이 전부 동성연애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가설들까지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동료인 연인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의 힘으로 훨씬 더 용감하게 싸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추측이 나온 이유는 테베 지역의 유해들을 발굴하다 보니 신성대의 유해 중 손잡고 전사한 유해가 17열로 쭉 놓였던 유적지 등이 발견되며 가능했습니다.
15. 스파르타, 신흥강자 테베의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하다
스파르타와 테베의 레욱트라 전투에 걸출한 영웅이 등장합니다.
바로 테베의 병법가이자 정치가인 '에파미논다스'이며, 그는 '사선대형'이라는 것을 이용합니다.
이전에는 양측에 군대가 배치되어 있는데 항상 가장 강력한 부대는 팔랑크스 룰에 따라서 우측에 배치됐습니다.
그런데 에파미논다스는 우익이 아닌 좌익에 가장 강력한 부대를 배치해 스파르타군의 최강부대와 맞대결을 붙이는 구조로 바꾸고 대신 스파르타군은 강력한 부대가 12줄이었다면 테베군은 50줄로 배열하고 나머지 약한 부대를 사선을 놓아 가장 나중에 붙도록 합니다.
때문에 테베군의 막강한 군대가 스파르타군의 최정예부대를 박살 내는 동안 테베의 신성대가 스파르타의 약한 측면을 침투했고 접근전으로 난전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사선대형을 펼친 테베군에게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완전히 무너집니다.
테베군은 한쪽에 힘을 몰아버리면 한쪽은 힘이 약해지게 되므로, 강한 쪽이 적을 부수는 동안 약한 쪽은 지연작전을 벌이는 사선대형의 효과를 활용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스파르타 정예병은 약 1,000명 정도였고, 이외에는 병역면제자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수의 동맹군들로 이뤄져 있어 테베군은 그 빈틈을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욱트라 전투는 테베의 뛰어난 전술과 더불어 스파르타의 자멸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 펠레폰네소스전쟁의 메시지는?
아테네에 이어서 결국 스파르타까지 펠레폰네소스전쟁에 패전하며 막을 내리게 됩니다.
펠레폰네소스전쟁의 메시지는
'내전은 몰락의 시작'
이라는 것입니다.
펠레폰네소스전쟁이 길어지면서 아테네군과 스파르타군 모두 점차 잔혹해져 약탈과 학살이 자행됩니다.
마지막 전투에서는 같은 그리스인의 피가 흐르는 스파르타가 아테네 포로들을 전부 다 죽여버리기까지 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 처해집니다.
전쟁은 결국 인간을 잔혹하게 만들고 같이 멸망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렇게 본다면 30년 남짓한 펠레폰네소스전쟁은 승자 없는 싸움일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내전은 안 해야 하고 하나의 나라, 하나의 민족은 뭉쳐야 산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펠레폰네소스전쟁사 였습니다.
https://donbuller.tistory.com/entry/아테나
<출처: 국방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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