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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읽기

5. [파친코]를 읽고(독후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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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파친코]를 읽고(독후감, 리뷰)

파친코1, 2권
파친코1, 2권

 

OTT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리에 방영 중인 동명 드라마 ' 파친코'의 원작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1910년 이야기가 시작되고 1989년 마침표를 찍습니다. 무려 70여 년의 굴곡진 재일한국인들의 이야기 속에 서서는 수십 명의 그 시대를 살아낸 인물들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다른 무엇도 아닌 '이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고, 이민진 작가가 소설 안팎에 불러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 그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느꼈습니다. 작가는 책의 한 꼭지도 안 되는 잠시잠깐 나오는 사람들에게도 살뜰히 이름을 부여해 주었고, 누군가에게 불리게 합니다. 아픈 역사 속 하잘것없는 인간군상들에 불과했을 그들을 이렇게 애도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는 저에게 그 이름들 중 덕희, 복희 자매의 여운이 그 등장하는 시간과 장면에 비해 길게 남았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선자'의 어릴 적 동무이자, 언니이자,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자이기도 했던 10대의 그녀들은 소리소문 없이 역사에 묻힙니다. 아마도 그녀들은 위안부가 되었거나 전쟁 물자 공급을 위한 강제징용의 희생자였을지도 모릅니다. 덕희, 복희로 상징되는 그 시대 어린 여성들을 잠시 눈을 감고 기려봅니다. 기억됨으로, 잊히지 않음으로 영원한 불사의 삶을 어딘가에서는 살 수 있기를. 무고했던 수많은 이들이 꼭 그러하길.

 

소설은 13살의 선자와 선자 아버지 훈이 그리고 어머니 양진의 가족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선자를 사랑하고 그녀 또한 사랑했던 두 남자 고한수와 백이삭과의 또 다른 이야기, 백이삭과의 혼인으로 맺어진 또 다른 가족 요셉과 경희, 창수와의 이야기, 선자와 그들 사이에서 잉태된 노아와 모자수의 이야기,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의 이야기, 일본에서 만난 수많은 재일교포들과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그 시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삶과 고통, 슬픔, 기쁨, 노여움, 기다림, 사랑, 그리움, 동정심, 희망까지 다채로운 감정을 녹여내며 책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작가는 70여 년의 시간을 담기 위해 과감한 생략기법을 활용하며 독자들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킵니다. 생략기법의 활용은 노아가 사라지고 다시 선자와 한수 앞에 나타난 11년의 시간과 노아의 죽음에서 충격적인 방법으로 활용됩니다. 선자와 한수의 부적절한 관계로 태어난 노아가 한국인이며 야쿠자이기까지 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일본인으로 살고자 했던 이 시간을 고스란히 독자는 상상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일본에 있는 모든 한국인들을 대변하는 냥 그는 철저히 욕구와 화를 억누르고 누구보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노아가 살아냈을 그 시간을 어찌 가늠해 볼 수 있을까요? 그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던 백이삭이 아닌 야쿠자 고한수의 아들임을 알았을 때 온몸과 마음을 가렸던 서글픔, 고통, 혼란스러움, 불안함, 분노, 억울함, 수치스러움이라는 장막이 걷히며 제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했을 때 그 참담함. 그것은 일본학교를 다니며 일본인 학생들에게 온갖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던 재일 한국인인 자살한 학생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그래서 한편 노아의 자살은 보통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방법이 꼭 자살이어야만 했는지, 다른 방법은 찾을 수 없었는지. 똑똑하고 현명했기에 그 충격은 사실 굉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래야만 했고, 그런 그는 인정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의 또 다른 일본인으로 알고 살아가는 네 명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선자에게 고향은 천국으로 기억됩니다. 노아, 모자수, 솔로몬에게 고향은 일본입니다. 그들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들은 간코쿠와 조센진으로 나뉘어 불려져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일본에서 태어납니다. 한국말에 서툴고 한국문화도 생소합니다. 그들은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고 일본 문화에 익숙하며 일본을 욕하는 한국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의 편을 들곤 합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일본인이고 일본인이길 원하지만 일본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벽을 통해 그들이 일본인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소토야마 하루키, 다무라 레이코, 빙고, 에쓰코, 하나와 같이 착하고 성실하고 재일한국인들에게 친절한 일본인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별적인 그들과는 달리 문화와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일본인은 또 다릅니다. 그들은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효율적이고 이상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일본의 근대화 이후 정치인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집단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조용하고 단정하고 수긍하며 반기를 드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합니다. 이러한 집단으로서의 일본과 일본인의 숨 막힘은 재일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생명도 앗아갑니다. 한번 낙인찍히면 그 가혹함은 죽어야 끝이 나는 듯 날 선 칼날을 온몸에 세웁니다. 재일한국인의 이야기에만 국한했다면 덜 와닿았을 법한 이야기를 일본인들조차도 숨죽이며 곳곳에서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으며 견디고 있는 모습을 통해 한편 그들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샘솟기도 했습니다. 

 

선자는 16살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합니다. 그녀는 일본인 부인과 딸 셋을 가진 유부남인 고한수의 첩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성경 <호세아서>의 호세아가 음탕한 아내와 결혼을 선택했던 것처럼 목사인 백이삭은 미혼모가 되어 아이에게 성을 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에 휩싸인 선자와 혼인하며 그녀를 구원합니다. 선자는 호서아의 음탕한 아내와는 달리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사죄했으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남은 생을 그 맹세에 따라 부끄럼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선자는 야쿠자이고 유부남인 고한수의 아이를 가졌지만 수치스럽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뉘우치고 사과하며 반성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똑같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여생을 마칠 수 있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선자는 그렇게 살아왔기에 당당했고 삶의 의지 또한 강했던 것을 아닐까요? 하지만 노아는 달랐습니다. 애초에 죄를 짓지 않아 뉘우치고 사죄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노아에게 죄를 묻습니다. 그가 단지 일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폭력과 불법으로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는 야쿠자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파친코는 돈을 따기 위해 가는 곳입니다. 하지만 단지 돈을 따기 위함이라면 딸 확률이 모래 속에 바늘 찾기와 같은 파친코장을 굳이 찾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파친코는 판돈을 걸 수 있는 몇 푼의 돈만 있다면 혹여 있을지 모르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희망을 품게 하는 곳입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게임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게임과 나 둘만이 있는 공간. 그곳에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외로움을 떨치고 가능성이라는 꿈과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부에 뜻이 없었던 모자수와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여기며 공부를 사랑하고 배움에 탐닉했던 노아, 미국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형 투자 은행에서의 성공을 꿈꿨던 솔로몬은 끝끝내 파친코라는 업을 택합니다. 돌고 돌고 돌아 파친코라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일본이라는 폐쇄적인 사회 안에서 재일한국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 중 돈을 억수같이 벌 수 있는 곳이 파친코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운명을 거부하지만 결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바큇살과 같이 말입니다.

 

재일한국인은 일본에서도 거부되지만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들이  언어뿐 아니라 사고방식까지도 일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을 받아 처참히 찢깁니다 일본은 동양의 모든 미개한 국가들의 근대화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침략하고 수탈하며 목숨을 앗아갑니다. 하지만 독일과는 달리 반성하지 않으며 역사의 과오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정절과 생명, 재산을 앗아가는 지대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이 사실들을 일본인 누구라도 입에 올리는 것을 터부시 하고 표면에 드러내는 이들을 배신자라 낙인찍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선량한 일본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고, 전쟁은 역사를 비극으로 몰고 갑니다. 세계 1, 2차 대전뿐 아니라 같은 민족을 두 동강이 낸 6.25 전쟁의 아픔이 한국인의 유전자에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교육받지 못한 일본인들은 과거 일본제국의 영화를 위한다는 대의를 위해 희생양으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이러한 일본문화에 길들여져 자란 재일한국인들이 결코 달가울 수만은 없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소설 속 솔로몬은 한국계인 피비와 결혼을 포기합니다 곧 미국 시민권을 얻는 것도 포기한다는 말이며,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사는 삶을 선택합니다. 솔로몬은 피비라는 여인의 성격에 녹여 한국인이 슬픔, 기쁨, 분노와 같은 감정을 강렬히 표출하는데 이것을 버거워하는 듯 보입니다. 지금도 한국과 북한 그 어디로도 선뜻 거주지를 옮길 수 없으면서도 일본국적을 취득하는 것을 망설이는 제법 많은 수의 재일 한국인들이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켜켜이 쌓여온 역사와 사연들이 있기에 그 이유는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남한이냐, 북한이냐, 일본이냐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고, 그 기로는 무엇인가로 인해 희미하고 퇴색되어 어디라도 한 발 내딛기 불안하기만 합니다. 사실 그들이 꼭 선택을 해야만 하는 걸까요?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것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요?

 

 

<파친코>라는 멋진 작품을 통해 한국인들이 들춰내고 마주하기 주저하고 고통스러운 일제와 6.25 전쟁, 전후 분단국가가 되는 과정, 독재의 칼날에 피를 흘리며 걸어온 민주화의 과정까지 되새김질할 수 있었습니다. 진실은 덮는다고 진실이 아닌 것이 아니고, 거짓은 가린다고 거짓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역사 또 기록되지 않은 미지의 역사는 스토리라는 힘을 통해 기억되고 향유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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