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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벌러와 함께하는 생활의 팁

글쓰기는 부지런한 사랑이다-이슬아 작가 세바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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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부지런한 사랑이다-이슬아 작가 세바시 강연

이슬아 작가는 '일간 이슬아'발행인으로 헤엄 출판사 대표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세바시 강연에 나와서 강연한 이슬아 작가의 강연 내용입니다.

이슬아 작가 1인칭 시점으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일간 이슬아'라는 프로젝트

저는 1992년생으로 현재는 작가가 본업이 되었지만 19세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잡지사 기자, 누드모델, 웹툰작가, 글쓰기 교사등 다양한 직업을 거칩니다.

이것은 모두 월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이었습니다.

돈을 꾸준히 버는데도 돈은 또 나갈 일이 꾸준히 생깁니다.

대학시절에는 생활비를 벌고 월세를 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등록금을 따로 내지 못하고 졸업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2500만 원의 학자금대출이 남아 있었습니다.

빚이 너무 많아서 막막했고 이를 갚기 위해 다른 부업 하나를 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투잡, 스리잡이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부업을 더 해볼까 생각을 하다가 '일간 이슬아'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됩니다.

 

'일간 이슬아'는 말 그대로 매일 한 편씩 이슬아의 글을 이메일로 발송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구독료는 월 만원으로 정해놓고 월~ 금요일까지 평일에만 글을 쓰고 주말에는 쉬기로 결정했습니다.

작가지만 회사원처럼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하고 포스터를 만들어 올리고 SNS로 구독자를 모집했는데 이런 시도가 아마도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생각보다 너무 많은 화제가 됐습니다.

얼굴을 모르는 수많은 분들이 선불로 구독료를 내주시고 글을 기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만원씩 구독료를 받아서 태산 같은 학자금을 티끌모다 갚자는 것이 계획이었는데 처음에는 한 달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지만 2018년에 시작하여 한 달을 성공하고 난 뒤 현재까지 몇 년에 걸쳐서 연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간 유통망을 생략하고 과감하게 직거래하는 시도가 여러 독자분들께 꽤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글쓰기란 무심히 지나치는 것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다시 보는 것

컴퓨터 화면에 빈 문서 앞에서 막막해 본 경험이 있으시죠?

글쓰기란 막막하고 어렵고 귀찮은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작가로 일하고 있는 저도 매번 빈화면을 볼 때 매우 막막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를 계속 꾸준히 하고 싶은 것은  글쓰기에는 마음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게으른 마음이 들 때 무언가를 대충 보고 누군가에 대해서 빠르게 판단하고 혹은 무언가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꾸준히 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부지런하게 쓰게 됩니다.

글쓰기는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유심히 다시 보게 하며 이는 눈을 씻고 세상을 다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언가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다시 알아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쉬움'으로 써내려 간 글쓰기의 시작

조금 어렸을 때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1998년 무렵 유치원 때 쑥스러움도 많고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어린아이였습니다.

저와 같은 나잇대 분들은 잘 알겠지만 쑥스러움이 많은 아이는 특징이 있는데 바로 할 말을 제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루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후회를 하게 돼있습니다.

이런 후회를 안고 일기를 꽤 많이 썼습니다.

후회와 반성이 가득 담긴 유치원 때 일기였습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서 오늘의 장면과 대화들을 복기해 보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일기를 쓰는 동력은 필요한 말을 제때 못 했다는 혹은 좋은 생각이 이제야 났다는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인가 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각종 '아쉬움'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리는 삶에서 뭔가를 잠시라도 붙들어보고 또 가능하면 복구해 보려는 시도가 글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좋은 의미의 아쉬움도 있었는데 찰나의 아름다운 순간 같은 것들이 살면서 무수히 지나가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너무 아름다운 일을 겪거나 너무 감사한 사람을 만나고 나면 그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쉽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냥 잊고 싶지 않다는 마음, 나 혼자서만 알기에는 아깝다는 마음이 듭니다.

여러분께서도 정확히 기억하고 오랫동안 보존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말로 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휘발되어 버리지만 글로 쓰면 이야기의 수명이 길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뿐 아니라 자기가 써놓은 이야기로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주 쓰다 보니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이나 대화 같은 것들을 좀 더 잘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글쓰기는 지나가는 순간들을 잘 기억하게 하여 전체적인 삶에 대한 기억력의 해상도가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중요한 이야기인지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연습 같은 것을 계속해왔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날에는 어쩐지 하루에 인생이 두 번씩 재생되는 느낌이 들어 인생을 두 번 사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겪으면서 한 번, 해석하면서 또 한 번 이렇게 인생이 두 배로 풍부해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런 연습을 꾸준히 했더니 어느새 작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글쓰기 교사

작가로 일하지 않는 동안은 글쓰기 교사로 일을 하는데 쑥스러움이 유독 많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서 어린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교사로 산다고 하지만 제일 많이 배우는 시간입니다.

아이들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의 글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라는 순간이 많습니다.

아이들의 문장은 때때로 어른의 문장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탁월하고 놀라울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쓴 글을 몇 편 읽어볼 텐데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글에는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이렇게 오감이 살아있는 글입니다.

이런 감각을 잘 묘사할수록 글에는 좋은 생명력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자기 몸이 어떤 느낌을 겪는지 잘 기억하고 옮겨 적는 것은 나를 새롭게 아끼는 일이기도 하며 나 자신을 부지런히 사랑하는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다음은 14살 이형원이라는 학생이 쓴 '여름의 냄새'라는 글이고 후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글입니다. 

 

우리는 함께 뒤섞여 놀다가 서로의 여름 냄새에 대해 다 알게 되었다.

우리의 두피에서는 찌든 걸레 냄새가 났다.

우리의 옷에선 남자 중학생 옆을 지나가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났다.

우리의 발에서는 가죽에 물을 묻히고 한동안 방치해 둔 냄새가 났다.

웃음이 나는 우리의 여름 냄새들이었다.

 

무슨 냄새인지 딱 알 수 있을 만큼 묘사의 힘을 잘 살려준 글입니다.

이런 글을 마주하다 보면 원고지만 마주했는데도 어딘가에서 구린내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꾸준한 글쓰기는 결코 나에 대한 사랑에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나르시시즘에 갇힌 글쓰기는 몹시 답답하고 좁은 세계이며 이는 주어가 나뿐인 세계입니다.

계속 글을 쓰다 보면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쓰기가 언젠가는 바닥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새 나에게서 남으로 주어를 이동하고 확장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지런한 사랑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됩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나는', '내가'와 같은 '나'로 시작하는 글쓰기를 많이 합니다.

15살의 김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김찬영이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김찬영이다.

김찬영은 나랑 세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인데 게임과 노래를 좋아한다. 

게임과 노래를 좋아한다. 

 

평범해 보이는 한 문단입니다. 

나에서 김찬영으로 아주 슬쩍 주어가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김찬영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시겠죠. 

김찬영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처음엔 이렇게 쓰다가 아이가 글쓰기 수업을 한몇 달 정도 듣다 보면 어느새 조금 다른 글을 씁니다. 

이것은 오늘날 같은 김서현이 써 온 '이사'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다음 주면 이사를 간다는 걸 알았을 때 엄마는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안방에 있는 침대를 가져갈까, 두고 갈까? 가져가기엔 이사 갈 집이 너무 작으니까 두고 가야겠다. 

애들 침대만 가져가야겠어. 

찬영이 인형은 짐 되니까 그냥 버릴까? 

아니야. 자기 돈으로 열심히 모은 건데 챙겨가자. 

냄새나는 저 햄스터들은 누구한테 줘 버릴까? 에이, 그냥 데려가자. 

이삿날이 오자 나랑 동생은 아침부터 새집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았다. 

짜장면도 먹었다. 물건들은 빠진 것 없이 무사히 옮겨졌다. 

 

이사를 앞둔 김서현의 엄마는 글 속에서 아주 분주하게 움직이며 혼잣말을 합니다. 

엄마의 몸과 마음이 몹시 어수선한 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반면 아이들은 이사의 고단한 부분에는 전혀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다. 

짜장면이나 먹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놀기만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김서현이라는 아이가 엄마의 혼잣말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엄마의 모습까지도, 살림살이까지도 말입니다. 

그 어느 날 글쓰기 수업에 온 서현이는 저의 글감을 듣고 문득 떠올렸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사했는데 그때 우리 엄마가 어땠더라? 엄마가 혼잣말을 계속했는데 뭐라고 했더라? 

그날의 엄마를 힘껏 되살렸겠지요? 

틀리게 옮기지 않으려고 굉장히 과거를 유심히 뒤돌아봤을 것입니다. 

저는 아이의 원고지를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고 무얼까?'이건 사랑의 과정 중 하나잖아요. 

우린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무심히 지나쳤던 무심히 내뱉었던 혼잣말도 굉장히 기억하게 되고 나 아닌 사람의 고민도 곱씹게 됩니다. 

이렇듯 글을 한 편만 쓰면 몰라도 여러 편을 꾸준히 쓰다 보면 참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만 쓰다가 '엄마는', '동생은', '그들은',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는'이렇게 주어를 옮겨 가고 추가하고 확장하게 됩니다. 

일인칭에서 이인칭과 삼인칭의 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게으른 내 마음에만 안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삶에 부지런히 접속하는 과정입니다. 

주어를 타인으로 늘려나가면서 내 삶은 조금씩 확장되고 아이들의 마음이 굉장히 바빠지고 부지런해집니다. 

저는 이 과정을 '시선의 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내 눈뿐 아니라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이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만 갇히지 않고 가끔씩 엄마의 마음도 되었다가 동생의 마음도 되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되었다가 혹은 안쓰러워하는 동물의 마음도 되어봅니다. 

입체적인 관찰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상대의 여러 가지 면을 포착하고 헤아리려는 의지 또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선의 이동과 입체적인 관찰 모두 저는 부지런한 사랑의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글을 보여드릴 텐데 어느 날 수업에서 저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러한 글감을 내줬습니다. 

그러자 아홉 살의 '이제하'라는 학생이 이런 글을 써왔습니다.

 

우리 아빠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

일단 맛있는 국수를 만들어줄 때는 좋다.

그런데 내가 잘못하면 버럭 화를 낸다. 그럴 때는 나쁘다.

어쩔 땐 자기가 사실 이순신이라면서 장난을 친다. 그럴 땐 이상하다.

 

세 명의 사람을 글쓰기에 데려올 줄 알고 이 글감을 내준 것인데 제하는 한 명의 사람만을 묘사하고 이 사람 안에 있는 좋은, 나쁜, 이상한 점을 모두 캐치했습니다.

제하는 아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하거나 이상하기만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요.

제하의 글 속에서 아빠라는 사람은 굉장히 앞면, 옆면, 뒷면이 있게 입체적을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입체적인 타인들을 묘사하는 방법 중에 하나일 텐데요.

우리는 누군가를 알면 알수록 그 사람이 사실 얼마나 단순하지 않은지 얼마나 복잡하고 풍부한지 갈수록 알게 됩니다.

그들을 잘 설명하기 위해 풍부한 표현을 준비하고 정확한 묘사가 또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도 역시 글쓰기에서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 하는 일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가는 과정 이것이 꾸준한 글쓰기의 아름다운 작업 중 하나일 텐데 '가시나무'라는 노래 가사를 아시겠지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고 말하며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저는 글쓰기란 어쩌면 정확히 이 가사의 반대로 가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 속에 당신의 쉴 곳 있다'라고 말하는 것 내 속을 나로만 채우지 않는 것 이것이 부지런한 글쓰기의 세계입니다.

늘어나는 주어 속에서는 굉장히 다양한 사람이 내 글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내 안에 초대해서 그들이 주어인 연습을 갈고닦는 것 이것이 제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 중 하나이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일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바르트는 말했습니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 하는 일'이라고요.

우리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무대에 서 있는 이 순간 역시 굉장히 무참하게 1초, 2초 흘러가고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우리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겪을 때 혹은 너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한 때를 보낼 때 그것을 보존하려는 마음, 거기에서 시작되는 글쓰기에 대해서 종종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쓸모 있는 글쓰기라는 과정이 여러분의 삶에도 깃들기를 소망하겠습니다. 

 

<출처: 세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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