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책리뷰/독후감)/헤르만 헤세
1907년에 출간된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소년시절의 모습을 투영한 작품입니다. 선교사 집안출신이었던 헤세는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와 같이 어떤 의심도 없이 신학교에 입학해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순순히 따릅니다. 소도시 슈바르트 발트 지방에서 유일하게 그 해에 신학교 주시험에 응시를 하게 된 한스는 시험을 치르는 과목들을 묵묵히, 꾸준히, 때로는 지나치게 자신을 다그치며, 때로는 기계적으로 공부합니다. 한스는 학교와 마을사람 전체,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부담감을 이겨낼 만큼의 잘 해내야 한다는 공명심과 마을의 누구보다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독일은-당시 다른 나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다루어집니다. 국가와 사회의 번영과 발전, 안정을 위해 개인의 사상과 의견, 행위들이 제약되었고 그 결과 자아실현을 위한 자유 또한 제한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기만 하면, 죽는 날까지 국가로부터 생계를 보장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선물이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소년들에게 부모들과 이별을 나누어야 하는 순간이 훨씬 더 진지하고 애절하게 여겨졌다.
국가에서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몸가짐만 바르게 하면 죽을 때까지 생계는 보장받지만 한창 뛰어놀아야 할, 사랑해야 할, 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가기 위해 수많은 경험과 좌절을 해야만 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해야 할 그 시기에 감옥과 다를 바 없는 기숙사에 갇혀 국가의 일꾼으로서의 종교인이 될 것을 강요당합니다. 허용되는 범위의 틀에서 벗어나면 소년들끼리도 서로 질시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에 동조하지 않으면 은밀히 때로는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거나 비난을 받게 됩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고 인류에 봉사를 하는 선교사들이 우리 안에 새나 토끼처럼 키워지는 것입니다.
한스는 주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해 온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어 찬사를 받고 그들이 베푸는 친절을 받게 됩니다. 이에 한스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공명심이 극에 달하지만 신학교 입학을 앞두고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없게끔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요와 압박을 받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마을과 학교의 명예를 드높일 한스를 위해 입학 전에 신학교에 필요한 과목들을 마을의 학교교장, 목사와 같은 선배들이 가르침을 주었고, 한스도 이를 받아들여 배우고 공부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자유와 평온함을 침범당한 것에 대한 불안과 우울이 커져만 갑니다.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때 학교 교장이 한스에게 이러한 말을 합니다. 책의 제목이 왜 [수레바퀴 아래서]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소설 속 한스처럼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인격, 가치관, 자아실현, 행복, 즐거움이 수레바퀴 아래에 짓밟히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소름 끼치게 합니다.
학교와 아버지, 그리고 몇몇 선생들의 야비스러운 명예심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이처럼 무참하게 짓밟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왜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버리고, 라틴어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왜 낚시하러 가거나 시내를 거닐어보는 것조차 금지했는가?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망나니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헤세의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더 사랑받는 이유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설 속 주인공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기인한다고 보입니다. 여전히 굳건하고 강력하고 폭압적인 국가, 사회, 가정의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 부모와 선생님을 포함한 소위 어른이라는 사람들의 자신도 괴롭고 부담스러웠을 그 규칙과 명예, 자존심을 위해 아이들의 꿈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야망을 위한 야만에 가까운 강요들, 그들의 꿈과 목표가 곧 아이들의 그것이 되어 허황된 명예를 드높여 주기를 바라는 이기심, 직업에 귀천을 만들고 귀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라고 규정짓는 모순된 합의들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휘젓고 있기에 헤세의 소설이 주는 아픔과 슬픔, 괴로움, 절망감, 공허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입학 후에서 한스는 공부에 충실하려 하지만 헤르만 하일러라는 반항심 가득한 문학소년을 만나며 풍파를 맞게 됩니다. 하일러는 사회 반항적이고 내면의 분노와 불안을 가감 없이 자신의 시나 소설에 투영하여 쓰고, 이를 한스와 공유합니다. 두 소년은 어느 날 지하에서 금기의 입맞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같은 방의 조용한 소년 하나가 추운 겨울 호수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죽은 시체를 한스를 포함한 신학교 소년들이 보았고 충격에 휩싸이지만 이내 조용히 잊히는 것을 보며 한스는 혼란스럽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마음의 경종이 울린 것이며, 이렇게 치열하게 자신이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는 공부를 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하일러는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다 신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어 이제 학교에서 한스가 의지하고 마음을 나눌 사람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한스는 신경쇠약을 일으켜 수시로 정신을 놓고 공부를 등한시하며 수업에 빠지고 방황합니다. 그 결과 한스 또한 신학교에서 쫓겨나는 처지가 됩니다. 다시 돌아온 마을에서 한스는 마을과 학교, 부모에게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주변의 시선과 평가는 한스 내면에 서서히 흠집을 내고 금 가게 하고, 마침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그 금이 길고 깊어져 마음의 둑이 무너지면 아프고 병든 마음이 몸까지 잠식해나가게 됩니다.
이렇듯 고통과 고독에 내맡겨진 병든 소년 한스에게 위로자의 가면을 쓴 또 다른 유령이 다가왔다. 그리고 점차 그와 친숙하게 되어 급기야는 자신과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다시는 어린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저녁 무렵 피혁공장의 뜰에서 리제 곁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두 번 다시 피혁공장이나 <매의 거리>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그는 가을의 들판을 돌아다니며 계절의 힘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저물어가는 가을, 고요히 떨어지는 낙엽, 갈색으로 물든 초원, 새벽의 짙은 안개, 그리고 너무 익은 나머지 이제는 지쳐버린 식물들의 말라가는 모습, 이런 것들이 한스를 여느 병자처럼 절망에 싸인 무거운 기분으로 몰아갔다. 그는 이것들과 함께 소멸하고, 잠들고, 또한 죽음에 이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젊음이 이러한 바람에 반기를 들고 은근히 생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차라리 죽는 것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평안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스는 자살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자살을 생각한 순간 어린 시절 병약한 절름발이 헤르만 레이텐하일의 갑작스러운 죽음, 신학교 친구의 죽음, 하일러와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죽음과 부재후 오래지 않아 다시 찾아오는 일상,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 아가씨(엠마)는 지나치게 활발한 수다쟁이였다. 더욱이 그녀는 이 아가씨가 옆에 있거나, 그가 수줍어한다고 해도 전혀 개의치 않을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스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당황한 나머지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촉수를 움츠리고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의 쾌락은 참신한 사랑의 힘,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생명에 대한 최초의 예감을 의미했다. 그의 고통은 아침의 평화가 깨어지고, 자신의 영혼이 두 번 다시 찾지 못할 어린 시절의 세계를 이미 떠나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던 중 한스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납니다.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의 조카딸 엠마는 한스의 심장을 요동치고 그녀를 다시 보고픈 마음에 플라이크의 집에까지 찾아가 그녀와 손을 잡고 키스까지 합니다. 이런 게 사랑인가! 하고 설레고 잠 못 이루며 죽음에 대한 생각마저 멀어지게 만드는 생의 환희를 느낍니다. 하지만 엠마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떠나버립니다. 엠마에게 한스는 한순간 쾌락을 위한 도구였고, 잠시동안 가지고 놀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엠마의 부재와 버림받은 이에게 찾아오는 절망과 공허함이 잠시 죽음을 잊게 했던 젊음의 바람과 생기, 부여잡고 있었던 삶에 대한 집착의 끈을 끝내 놓치게 된 것일까요? 수레바퀴에 치인 달팽이처럼 한스는 살고자 하는 의지와 집념, 생기를 잃고 상처받고 당황하여 다시금 자신만의 단단한 껍질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립니다.
한스는 무기력한 생활을 하다 어린 시절 친구인 기계공 아우구스트를 따라 대장장이가 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하지만 일생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만 썼던 마르고 쇠약한 한스는 그 일을 견뎌낼 수 있을지 스스로 자문합니다. 더불어 마을 사람들도 주시험 2등 한 대장장이라며 비웃음 섞인 조롱을 서슴없이 던집니다. 그래도 아무 생각하지 않고 쇠를 제련하고 실톱으로 틀을 잡아가는 과정에 쏠쏠한 즐거움과 재미를 느낍니다. 그러던 중 숙련공에서 벗어난 아우구스트가 자신이 받은 첫 주급으로 한 턱 거하게 쏘기로 합니다. 부어라 마셔라 술과 여자, 향락에 함께 취한 한스는 걷고 또 걷습니다. 그리고 숲에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한스가 자살을 한 것인지, 사고를 당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소설 속 한스의 죽음은 너무나 급작스럽기에 독자로 하여금 당황스러움과 황망함을 안겨줍니다. 책 속의 한 구절처럼 심신을 지치게만 하는 한낱 명예를 위한 한스의 삶이 이토록 부질없는 죽음으로 끝맺을 수 있다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묘사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고 자각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문학, 소설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기 걸어가는 신사양반(학교선생들)들 말입니다. 저 사람들은 한스를 이 지경에 빠지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우리 모두 저 아이에게 소홀했던 점이 적지 않은 거예요.
기벤라트씨는 이 한 때의 고요와 이상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숱한 상념에서 벗어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익숙한 삶의 터전을 행하여 당혹스러운 심정으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스를 죽음으로 내 몬 사람들은 잠시 슬퍼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한스의 죽음이 과연 그들 이후의 삶에 자그마한 변화라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라며, 수레바퀴 아래 달팽이처럼 더디고 느리더라도 조금씩 그것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점에 당도할 때까지 나아가고 또 나아가는 것이 인류가 가진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스와 같은 소년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없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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