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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책읽기

33. [검은 사슴]을 읽고(독후감/책리뷰)/한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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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검은 사슴]을 읽고(독후감/책리뷰)/한강 작가

검은 사슴(한강 작가)
검은 사슴(한강 작가)

 

한강작가의 첫 장편 소설인 [검은 사슴]은 훗날 [바람이 분다, 가라]나 [채식주의자]와 맥을 같이 하는 듯 보이는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에서 이미 '검은' 것에 대해 다루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데, 이는 소설 [흰]과 대비되면서도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검은 사슴]의 중후반부에 계속해서 내리는  '눈(雪)'의 이미지 때문일 터였다. 

 

[검은 사슴]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의선이라는 여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소설이다. 의선은 어디로 갔는가? 왜 사라졌는가?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사라져 가고, 소외되고, 상처받고, 버려진 것들을 목도하며 왜 살아야 하고, 왜 사랑해야 하며, 무엇 때문에 아픈가를 성찰해 가고 마침내 서로 보듬고, 기대고, 쓰다듬어 주며 이야기를 끝마친다.

 

출판사 기자 겸 사진작가로 일하고 있는 인영은 출판사 건물 3층 제약회사 사환이었던 의선과 우연찮은 사건에 휘말리며 함께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그 사건이라 함은 말없고 조용하고 얌전하기만 한 의선이 어느 날, 대로와 소로를 오가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신으로 활보한 일이다. 인영에게 의선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여자는 마치 묶인 것 같았다. 
오히려 내 인상에 강하게 남은 것은 여자의 눈물이 아니라 손이었다. 소포에 결박당해 있던, 어떤 무도한 사내가 느닷없이 젖가슴을 움켜쥔 듯 달아난다 해도 속수무책일 여자의 손이었다. 

 

양손 가득 소포를 들고 우체국을 향하고 있는 의선이 마치 수갑처럼 소포에 결박당해, 어떠한 형태의 무도한 일을 당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인영의 집 문 앞에 나타나곤 했던 '늙은 개'가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에 의선이 찾아든다. 눈의 광채를 잃은 채 정신을 놓은 모습으로. 그 '늙은 개'는 백구일까? 한강의 소설 [흰]에 나오는 하얀 개는 갖은 폭력에 함부로 짓밟히고 인간이 두려워 어떠한 손길도 구원도 거부한 채 흰 눈이 내리던 날 굶어 죽는데, 그 백구의 모습이 늙은 개와 의선의 처지에 겹쳐 떠오른다.

인영은 가끔씩 점심을 함께 먹으며 조용함과 외로움을 공유하던 의선을 선의로 자신의 자취방에 들인다. 하지만 인영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여자다. 빚과 가난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열 살 터울의 언니 민영과 인영 자매를 홀로 건사하며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언니 민영은 빛이 나고 열정이 그득한 사람이었다. 불평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돈이 되는 일을 찾아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공부밖에는 이 누추한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잠을 줄이며 공부에 매진해 마침내 대학생이 된다. 민영이 스무 살이 되던 해, 한 번도 제대로 친구들과 즐겨보지 못한 그녀를 가엽게 여긴 어머니가 민영에게 그동안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돈을 쥐어주며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도록 독려한다. 어려운 형편을 알기에 마치 못해 떠났지만 민영이 너무나도 원했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민영이 탄 낚싯배가 정원초과와 물살이 겹치며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배에 딱 하나뿐인 튜브를 쥐게 된 민영은 수영을 하지 못하는 다른 친구에게 그것을 넘겨주고 지척에 닿을 것처럼 환한 해변가 불빛을 보며 그동안 틈틈이 배운 수영실력을 발휘하며 나아간다. 하지만 겨울 바다는 너무 찼고, 가까워 보였던 불빛은 사실 아득한 거리에 있었다. 시체마저 찾지 못하고 근 한 달여를 어머니와 인영은 실종된 민영을 찾아 헤매며 제주도에서 지낸다. 그때 목말라하는 인영에게 어머니는 눈을 손으로 녹여 마시게 한다. 그것이 인영이 처음 맛본 눈의 맛이었다.

 

어린 인영은 늘 어머니와 언니를 기다렸다. 환한 빛이 사라져 어둠이 찾아와야 만날 수 있었던 두 사람 때문이었는지, 어둠은 인영에게 더 익숙하고 편안하다.

 

어둠은 평등했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똑같은 암흑 속에 묻어버리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자랐고, 바로 그 어둠으로 인하여 나는 조금씩 강해졌다. 그 신령한 푸른빛에 익숙해지면서 어린 나는 투정하거나 심심함을 호소하는 대신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애타게 기다릴 때는 결코 돌아오지 않던 어머니와 언니는, 언제나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어두운 방 가운데 길게 다리를 뻗고 누워 백일몽에 잠겨있을 무렵에야 비로소 나타나곤 했었다.
순간, 그 어둠의 입자들소에서 아슴하게 스쳐가는 흰 물체를 나는 보았다 의선의 복사뼈였다. 

 

언제나 광합성을 하듯 햇빛을 탐닉하고 바라보고 있는 의선은 [채식주의자]의 영혜와 닮아있다. 의선은 영혜처럼 고기를 즐기지도 않는다. 의선의 이름 속 선은 착할 선(善) 자가 아니라 신선 선(仙) 자라는 일종의 복선과 같은 이름 해설이 초반에 나온다. 이것은 의선이 광산 아래를 신령한 뿔을 달고 해를 보기 위해 광부들 앞에 나타나곤 한다는 '검은 사슴'이 환생한 것은 아닐지 추론해보게 한다. 해를 볼 수 있는 길을 알려달라는 검은 사슴을 광부들은 말로 꿰어 뿔과 이빨을 뽑아낸 후 그것을 뿌리치고 달아난다. 검은 사슴은 뿔과 이빨을 뽑히고 검은 피를 뚝뚝 흘리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죽어가거나, 일부 해를 보게 된다 해도 들쥐 같은 크기로 줄어 눈부터 빨갛게 수액처럼 흘러내려 웅덩이를 이루고 훗날 그 자리에 붉은 애기풀이 자라난다고 전해진다. 의선도 사금파리처럼 날카로운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착취, 굴욕으로 날카롭게 온몸을 베고 누르는 듯한 옷과 신발을 하나씩 벗어던진다. 전설 속 검은 사슴과 같이 너무나 밝고 찬란하고 따갑고 노골적인 햇빛에 액체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다고 인영은 의선의 모습을 상상한다. 

퇴근 후 돌아온 인영은 욕실에서 자신이 그동안 찍었던 바다사진을 모두 불태우고 있는 의선을 발견한다. 인영은 의선을 때리는 대신 벽을 내리치고, 의선을 책망하는 대신 허공에 소리 지른다. 그리고 목욕탕 영업시간이 이미 끝난 시간임을 알았지만, 의선의 손에 목욕비를 쥐어주며 목욕을 하고 오라며 그녀를 집에서 나가게 한다. 인영은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인영은 의선이 떠나 주기를,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왔다. 의선이 떠나고 홀가분하다. 의선이 밤바다 악몽을 꾸며 소리 지르고 허공에 손을 내젓는 것을 듣고 보지 않아도 된다. 소름 끼치게 인영의 자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머리와 몸을 쓰다듬는 일도 이제는 없다고 안도한다.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는 혼자 남았으며, 혼자 남은 사람으로서 강하게 생활해 왔다. 튜브를 누군가에게 던져주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결코 하지 않았으므로 서른을 넘기도록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결정적으로 믿지 않았으며,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 삶에 뛰어 들어왔듯이 갑자기 떠나 주기를 그래서 나를 더 이상 분열시키지 않기를, 불가해한 죄의식과 연민에 사로잡히게 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녀의 알 수 없는 간절함을, 마치 그 간절함으로 온 마음을 기울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가냘픈 얼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그런 식으로 내 삶을 그늘지게 하는 사람은 어머니 한 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나는 징그럽게 차가운 인간이었다.

 

 

이 사건 이후 지하상가에서 떠돌며 살고 있던 의선을 명윤이 발견한다. 명윤은 의선을 자신의 자취방에 데려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의선에게 마음이 쓰인다. 아마도 명윤은 유흥가 어디쯤 떠돌고 있는 막냇동생 명아의 모습을 의선에게 소 본 것은 아닐까? 혹은 명아는 놓쳤지만 의선은 잡고 싶은 마음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의선을 찾아 헤매는 도중 우연찮게도 명아를 찾게 되진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느 날, 자취도 없이 떠나버린 의선이 남긴 몇 마디의 말들을 단서로 명윤은 인영에게 함께 탄광촌인 강원도 황곡으로 함께 의선을 찾으러 가자고 청한다. 인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부하지만, 마음 한편 의선의 존재가 걸린다. 황곡에서 탄광과 광부들의 사진을 찍어 사진집을 낸 사진작가 장종욱을 취재한다는 핑계를 출판사에 대고 인영은 명윤과 함께 황곡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한때는 부흥했던 황곡은 지금은 단 2개의 탄광을 제외하고 모두 폐광되어 적막화고 쇠퇴한 후락한 말 그대로 암흑의 도시가 되어있다. 탄광사진을 찍던 장도 더 이상 그 작업을 멈춘 상태이다.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잇던 아내도 몇 해 전 떠났고 작업실 겸 자택으로 지냈던 고사택도 화재로 불타 스러져버렸고 그때 얼굴과 화상을 입고 후배 안의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이나 찍으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인영의 취재에 거부감을 보였던 장이 어느새 다시 탄광의 갱도 앞에 다다랐을 때 다시금 알 수 없는 열망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의 아내 미희와 만났던 날을 떠올린다.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로 3일을 갇혔다 구조된 광부들 사이에 미희의 아버지가 있었다. 질끈 묶은 꽁지머리를 하고 비켜라고 외치며 아버지를 부축하며 나오는 그녀에게 남모를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장은 그 길로 작은 짐을 꾸려 황곡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그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미희가 노래를 부르는 업소에 찾아간다. 그렇게 장은 미희와 작은 실반지를 나눠 끼고 결혼을 했고 미희은 임신과 사산을 경험했고 병실에 누워 있던 아버지를 여읜다. 1년 중 반 이상을 사진에 매달려 가정을 등한시했던 장과는 달리 미희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사는 게 좋았던' 여자이다. 미희는 떠났고 몇 년 후 그녀가 죽었다느 소식을 그녀의 후배를 통해 듣게 된다. 아무에게도 그녀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전갈과 함께.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꿈꿨으나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잃고 생계를 잇기 위해 밤무대에 서서 노래를 해야 했던 미희는 자신의 죽음으로 다른 이의 마음이 다치거나 쓰이기조차 원하지 않는 여자이다. 자신이 췌장암에 걸린 것을 알고 장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떠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 일게다. 장은 후배 안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고 신용카드를 빼앗아 그녀의 장례식에 입고 갈 옷과 신발을 산다. 소중한 이를 지키지 못한 이에게 두려움 따위는 사치라는 듯이. 

장은 탄광사진을 찍으며 알게 된 광부 '임'을 기억한다. 광부가 아닌 사람이 탄광을 드나들어야 했기에 광부들과 친분을 두텁게 쌓고 사무직원들에게 밉보이면 안 되었던 장은 임의 묵묵한 협조덕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임과 함께 탄광에 갇히게 된다. 임과 장을 제외한 세명은 물이 차 익사하고 말지만, 임의 차분하고 묵묵한 리드를 받고 장은 끝끝내 죽음을 물리치고 살아남는다. 

견디는 법을 나한테 가르쳐준 사람이오.

장은 임을 이렇게 기억한다. 

 

한편 인영과 명윤은 의선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따라 그녀의 자취를 찾는다. 하지만 번번이 맥이 끊긴다. 포기하고 서울행 기차를 타려던 그때 역의 매점에서 두 여인의 대화를 듣던 중 의선이 말했던 '어둔리'가 진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어두운 골짜기 마을이라 해서 어둔리라 불리었던 그 마을이 실제 존재했던 것이다. 눈이 하염없이 뿌려지던 날, 아픈 명윤과 산길에 익숙지 않은 인영은 어둔리를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서 의선의 아버지와 지체장애를 가졌던 오빠의 묘지와 통나무를 엮어 눈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선이 살던 집을 발견한다. 의선의 어머니는 임신 중 남편이 탄광사고로 죽은 것을 알고 반미치광이가 되었고 그때 낳은 아들 역시 그 후유증으로 지체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탄광노동자들의 비루먹은 개와 같은 인생이 낳은 아이들은 다시금 사회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버려지고 상처받는다. 몸과 마음에 실금이 간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가던 의선이 한순간 당겨진 끈이 끊어져서 자신을 옥죄고 베는 옷들을 벗어던지고 길거리를 뛰어다닌다. 제복을 입은 검은 경관들이 그녀를 사방에서 에워싼다. 약하고 가려진 흰 복사뼈를 드러낸 채 어딘지 모를 그곳을 향해 뛰고 또 뛴다. 의선은 그렇게 뛰어 어둔리 깊은 산골, 그녀가 살던 그 집에   다녀갔던 것일까? 누군가 집에 다녀간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결코 튜브를 내어 주지 않는, 곁을 내어주지 않는 차가운 인영이 못내 서운했던 명윤의 곁을 필사적으로 인영은 지킨다. 그가 죽어서는 안 된다. 그를 지켜야 한다. 자신을 놔두고 떠나라고 다그치는 명윤을 끝끝내 눈밭에서 구조하고, 기차 탈선 사고로 생사를 오가던 중에도 가장 먼저 인영은 명윤을 생각한다. 의선과 함께 했던 날들을 생각한다. 

나 역시 머리를  뒤틀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던 것일까. 이따금 새벽녘이면 의선이 진지한 손길로 내 얼굴을 쓸어내렸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 명윤처럼, 어머니처럼, 아니, 의선과 함께 그 무덤 같은 방에 나란히 누워, 짐승 우는 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치곤 했던 것일까. 그것을 몰랐던 것은 나쁜 이었을까. 

 

인영은 어두운 방에서 웅크리며 안정을 취했으면서 어두운 것, 늙고, 상처받고 가난했던 날들에 대해 돌아보고 직시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저 잊고 눈감고 생각하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기제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간다. 명윤과 의선의 검은 부분을 들여다보고 감싸 안으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어둠과 공유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폐탄광촌의 적요하다 못해 삭막한 현실 앞에서, 고사택에서의 찌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갈 곳 없는 의선에게 자꾸만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 것을 통해, 달아나고만 싶은 가난과 무기력에 무너져 내리는 명윤이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며 사라진 의선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함께 하며, 아프고 악몽에 시달리는 그들의 모습을 회피하려 했던 자신도 악몽으로 신음하고 몸부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영은 조금씩 환한 빛이 자신을 베는 날카로운 면도날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살과 뼈를 매만지며 추려내는 의선의 투명한 손마디를 나는 마치 생시인 것처럼 느꼈다.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시종일관 검은 것, 암흑, 어둡고 침울하고 갑갑하고 무섭고 공포스러운 길을 걷는 듯 소설은 무엇인지 모를 그 무엇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암흑 끝 검은 사슴의 몸을 녹였던 빛이 아니라 어쩌면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긴 터널을 지나며, 언젠가 그 끝에 보이게 될 빛이 너무 뜨겁고, 날카롭고, 사납지 않은 실낱같은 빛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둡지만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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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를 읽고(책 리뷰, 독후감)/한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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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채식주의자]를 읽고(책 리뷰, 독후감)/한강한강 작가의 책을 읽노라면 문득 저렇게 친절할 것만 같은 작가가 이토록 불친절하고 가혹하게 독자를 다룰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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