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책 읽기, 독서), '감히'의 세계를 결핍이라는 도구로 균열시키는 '힙'한 수단
우리는 '감히'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한글은 한자문화권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우리나라가 글과 말이 달라 만들게 된 것이라고 이를 창제하신 세종대왕께서 반포 이유를 밝힌 바 있다. 태고부터 우리나라는 소리 내어 말해지는 것과 이를 표기하는 글자가 달랐다. 사회, 경제, 권력면에서 부족했던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은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양반과 지도층은 어려운 한자를 쓰고 읽는 것에 대해서 특권의식을 느꼈고, 읽기도 쓰기도 쉬운 한글반포는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었을 것이다. 이 특권의식은 아직 까도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감히'라는 부사가 있다. 말이나 행동이 주제넘게 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감히'라는 단어에 실로 엄청난 역사가 담겨있다. 함부로, 만만한 존재 따위가 주제넘게 어떠한 말과 행동을 하려 할 때 이 모든 뉘앙스와 의미를 담은 '감히'라는 하나의 단어만으로 상대방의 처지를 표현할 수 있다.
'감히 니 따위가, 감히 어디 안전이라고, 감히 기어올라? 감히 쳐다봐?'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나라는 자유 민주주의체제를 지향하고 있다. 그 체제는 자유와 평등을 제1의 가치로 삼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자유민주주의체계가 다른 무엇보다도 불평등과 차별, '감히' 문화를 지향하며 이를 조장한다.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그리고 흙수저, 똥수저까지. 의식주 중 우리의 생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식'의 도구인 수저의 종류를 통해 극명한 차별과 불평등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은 무슨 '수저'인 것 같은가? 적어도 금수저가 아닌 것만은 분명한가? 그렇다면 불평등하다고 느끼는가? 그 불평등과 차별에 대항할 힘이 있는가? 혹은 가진 도구로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만족하는가? 굶지 않기 위해 먹는 본능에 가까운 행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한다. 그래야만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먹는 행위와 별개로 사람마다 가지는 수저라는 도구의 종류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는 그 출발부터 각기 다르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이다. 자유롭게 부를 창출할 수 있고 대물림할 수 있다.
결핍의 힘
나는 흙수저이다. 나라는 존재를 만든 99%는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유하고 풍성했다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가 과연 있었을까? 결단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결핍과 궁핍, 오기, 깡다구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나는 돈이 좋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부모는 나에게 풍족한 용돈을 줄 수 없는 분들이었고, 나는 사춘기가 되기 전부터 이를 인지하고 수긍했다. 때로는 피아노를 사달라고 떼를 써보기도 했고, 영어학원에 수강을 요청해보기도 했다. 나의 부모는 큰 딸이 요구에 주머니를 털어 피아노를 사주었고, 영어 학원에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 욕구는 이를 통해 만족되지 않았다. 피아노는 뚜껑을 열지 않은 채 먼지가 쌓여 갔고, 영어는 지금까지도 나의 아킬레스 건이다. 나는 돈을 벌고 싶었다. 언제든 이혼해 나를 떠날 것만 같았던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길은 '돈'뿐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로 올라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서울은 젊음과 체력과 돈에 대한 열망으로 똘똘 뭉친 나에게 무궁무진한 일자리를 주었다. 텔레마케터, 상담사, 학원강사, 학습지 교사, PC방 알바, 뷔페나 식당 알바, 방청객과 공연 단기 STAFF, 전단지 돌리기 등 할 수 있는 알바는 모조리 지원했고, 뽑히면 어떤 일이 있어도 해냈다. 성인이 된 이후에 한 번도 한 가지 직업만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투잡, 쓰리잡, 포잡. 주말알바까지 시간단위로 할 수 있는 알바는 모조리 했다. 일을 하느라 정말 돈을 쓸 시간이 없었고, 서울 생활 2년 만에 나는 5000만 원 이상의 현금을 모을 수 있었다. 어떠한 기술도 없이, 그저 체력과 젊음이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20대에 나는 이틀에 3시간을 자도, 새벽에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걷고 달려도 좀체 지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돈이 통장에 차곡차곡 쌓여나갔기 때문이었다. CMA 계좌에 넣어서 매일 잔고에 더해지는 이자를 확인했다. 그렇게 나는 돈이 모이는 것을 탐하고 즐기는 자가 되었고, 소비는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습관이 되어 지금도 소비는 나를 힘들게 한다. 나에게 소비는 미래의 쓰레기를 내 돈 주고 사는 일에 불과하게 까지 느껴졌다. 직장 생활을 하며 받은 월급은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부수적으로 얻은 알바 수입으로 생활비를 했는데, 그마저도 거의 들어갈 일이 없었다. 알바를 하는 곳에서 식사 제공이 되거나 간식이 제공되거나 혹은 손님들이 남긴 깨끗한 음식을 먹거나 하며 먹는 것에조차도 나는 돈을 쓰지 않았다. 모아 놓은 목돈으로 지방의 빌라를 전세로 살아 집세도 나가지 않았고, 옷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염가로 구입하거나 사이즈등 문제로 입지 못하는 옷들을 지인들로부터 물려받기도 했다. 세탁을 자주 하면 옷이 해져서 세탁을 최소한으로 자제했고, 다이어트 겸 사이즈를 유지하면서 이십 대에 입었던 옷을 지금까지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독하다고 말할 것이고, 무슨 재미로 사냐고 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궁상을 떨다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냐며 악담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풍요로움을 넘어 사치와 향락의 세계로 나아가는 사회에서 소비로 행복해지지 않는 몇 안 되는 특수인종인 나는 보란 듯 행복하다. 나의 행복은 결핍이라는 뿌리가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어 쉽사리 꺾이거나 힘을 잃지 않는다. 어떤 이는 결핍이 피해의식으로 발현되어 자기만족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소비로 변질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SNS로 호화 호캉스, 해외여행, 고가의 식도락, 명품백과 의상들을 누리는 어떤 이들의 모습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나만 빼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만 같아서 씁쓸하고, 나의 궁핍과 가난함을 원망한다. 이것을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했던가? 풍요와 사치, 향락, 편리함, 빠름의 시대에 다른 이들과의 비교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고 생존의 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결핍은 '절대적 만족감'이다. 만족의 기준이 낮아서 작은 수확에도 폴짝폴짝 뛸 만큼 기쁘고 행복하다. 기준이 상상 그 이상으로 낮다고들 한다. 기준이 낮아서 조금만 충족되어도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뭐 이런 것으로 감동해? 당연한 거 아냐?'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고, 결핍은 만족의 기준을 낮추어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을 매일 느끼게 한다.
고전 문학,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결핍을 채우는 '힙'한 수단
최근 2030을 중심으로 해서 고전문학을 포함한 책 읽기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소싯적에 1년에 100여 권의 책을 읽었던 적도 있는 나에게 최근 이러한 현상이 낯설지 않다. 잘 몰랐고 느끼지 못했을 뿐 나의 결핍은 독서를 통해 채워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책을 살 돈도 아까웠던 시절, 나에게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어 준 곳이 도서관이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짬짬이 장르구애받지 않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 댔고, 좋은 구절을 메모했다. 읽은 책 목록이 쌓이고 내 마음속에 구절들이 노트에 빼곡히 채워지면 나는 가진 것 없이도 충만했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뉜 우리니라 사회에서 책 한 권은 소위 '힙'함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이자 수단이 되고 있다. 읽기 어려울수록, 고전일수록, 많이 읽지 않을수록 더 힙한 사람들만 해낼 수 있는 문화가 되어 간다. 남에게 보여주는 수단이건 남과는 다른 힙함을 표현하는 수단이건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수천, 수 만, 수백만 년의 시간 동안 글자와 종이라는 형태를 유지하면서 '책'이 존재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임을. 책 읽기는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룩한 '감히'라는 세계에 결핍이라는 도구로 균열을 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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